최유청
崔惟淸
(1095 ~ 1175)
1. 개요
고려의 문신. 자는 직재(直哉).
2. 생애
본관은 창원으로 최석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한다. "선비란 모름지기 옛 것을 익히고 관직에 들어가야 한다."[1] 라며 천거하려는 이가 있어도 사양하며 공부에 전념한다. 공부를 마치고는 천거를 받아 직한림원이 된다. 곧 인종이 즉위하고 이자겸이 권력을 얻으니, 이자겸 반대파가 관직을 잃고 쫓겨난다. 평장사를 지내던 한교여가 유배되는데 한교여의 외사촌인 정극영도 함께 파직되고, 정극영의 처남인 최유청도 마찬가지로 축출된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에는 내시로 소환된다. 인종 10년(1132) 예부원외랑으로 합문지후 심기와 북송에 사신으로 다녀온다. 승진을 거듭해 좌사간에 이른다. 간관으로 있을 때인 인종 11년(1133)에는 이자겸 파벌이었던 중서시랑평장사 최홍재를 탄핵시킨 전적이 있다. 상주에 수령으로 나가 덕으로 다스렸으며 임기를 마치고는 시어사, 어사중승 등을 지낸다.
인종 19년(1141) 왕에게 당시의 일에 대한 상소를 올렸는데, 이것이 왕의 심기를 거슬러 어사중승(어사대, 종4품)에서 전중소감(전중시, 종4품)으로 좌천된다. 곧 다시 간의대부가 되고 인종 20년(1142) 동지추밀원사 최관과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책명에 사례한다. 이후 호부시랑에 오르며 동북면병마부사가 돼 북방에 나가기도 한다.
의종 원년(1147) 한림학사로 서경 열명편을 강론한다. 참지정사 최재 등이 듣고 우사간 이원응과 토론한다. 같은 해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에 임명된다. 이듬해에는 지추밀원사 판삼사사, 병부상서로 관직이 바뀐다. 의종 3년(1149)에는 왕이 직접 최유청, 어사대부 문공원 등 6명을 만나 술자리를 가진다. 왕명의 출납에 성실한 공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병부사로 고속 승진한다.
그런데 의종의 동생 대령후가 관련된 내란 음모 의혹이 일자 낭패를 겪는다. 공예태후의 매형 정서, 외척 임극정 등이 대령후와 가깝게 지내니 의종의 측근인 김존중과 환관 정함 등이 이들을 무고한다. 최유청을 비롯한 재상과 간관들은 한목소리로 정서를 비난하면서 죄를 물을 것을 청한다. 그렇게 정서를 비롯해 대령후와 가깝게 지내던 이들이 장을 맞고 유배를 간다. 도중에 정서가 대령후에게 대접한다고 최유청에게 그릇을 빌린 일이 드러나는데, 대신으로서의 체통을 잃었다고 해서 남경유수사로 좌천된다.
앞의 이유도 있지만, 최유청은 고발당한 정서의 누이와 혼인한 관계였으므로 연좌된 것이다. 아마 처남에게 벌을 내리자고 청할 때 본인의 삶도 순탄치 않을 것이라 예상했을 것이다. 의종 11년(1157) 이부의 청으로 정서와 최유청, 이작승[2] 의 죄가 정부(政簿)에 적히고 최유청의 관직은 또 낮아져 충주목사가 된다. 이어서 광주목사로 보내지니 오래도록 개경에 돌아오지 못한다. 최유청이 외지에서도 처신을 잘 해 의종이 다시 최유청을 불려들어 평장사 관직을 주려고 하는데 주변에서 이를 말렸기에 평장사 관직을 되찾지는 못한다.
의종 15년(1161) 봉원전대학사에 임명되고 이어서 중서시랑평장사로 은퇴한다. 의종 23년(1170) 무신정변이 일어나 문신들이 대거 죽임을 당하는데, 최유청은 덕망이 있다고 해서 죽음을 피한다. 무신들이 최유청의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일가 친척 모두가 살아남게 된다. 명종 2년(1172) 다시 집현전대학사 판예부사에 임명됐다가 은퇴하며, 명종 4년(1174) 12월 25일(음력)[3] 죽는다.
3. 가족관계
- 부: 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