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고려)

 



<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제 9대 무신 집권자'''
'''이름'''
김인준(金仁俊) → 김준(金俊)
'''생몰연도'''
? ~ 1268
'''작위'''
익양군 개국백(翼陽郡 開國伯)
해양후(海陽侯)[1]
'''아내'''
안심(安心)
'''아들'''
김용재 → 김주, 김대재, 김석재, 김애, 김기, 김정
'''형제'''
김승준(金承俊) → 김충
'''사망지'''
고려 강도 정궁 편전 정당(政堂)
1. 개요
2. 성장
3.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다
4. 몽골과의 대립
5. 처참한 말로
6. 인물 평
7. 의외의 장기 집권과 실상
8. 드라마 무신(武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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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무신. 무신정권의 집권자. 초명은 김인준(金仁俊)으로 그의 동생으로는 김승준[2]이 있다. 이의민과 함께 천민 출신으로 고려 최고 권력자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3]

2. 성장


그의 아버지인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가노였으나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에게 의탁하였다. 그가 벼슬을 받아서 김씨 성을 사용하고 김인준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뒤에 김준으로 개명하게 된다.
박송비, 송길유 등이 최우에게 칭찬하여 그의 신임을 받아 전전승지(殿前承旨) 벼슬을 받았다고 하며 그러나 최우의 첩인 안심과 간통하여 곤장 50대를 맞고 유배되었다. 수 년만에 돌아와 최우가 최항을 후계자로 삼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최항이 정권을 이어받을 때 그는 직책이 정7품 별장이었다.

3.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다



최항이 죽고 그의 서자 최의가 홀로 최양백에게 맡기고 자신을 멀리하게 되자 마음 속으로 불평하면서 그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는데 1258년 1월 자신을 천거한 대장군 송길유를 부정부패 혐의로 유배를 보내면서 자신을 꾸짖자 최의와 서로 미워하여 만나보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다.
3월에 신의군 도령 낭장 박희실, 지유 낭장 이연소가 비밀리에 김인준, 유경, 김충, 이공주, 장군 박송비, 도령 낭장 임연, 대정 박천식, 별장 동정 차송우, 낭장 김홍취, 김대재, 김용재, 김식재 등과 논의하여 4월 8일에 최의를 죽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김대재가 장인인 최양백에게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이 계획을 얘기하는 바람에 계획이 누설되었다.
하지만 김대재의 처가 최양백이 최의에게 얘기한 사실을 듣고 김대재에게 얘기하였으며 김인준이 이를 김대재에게 듣게 되면서 다시 박희실, 이연소 등에게 일이 누설되어 일을 지체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에 지난번에 모의한 자들과 별장 백영정, 대정 서정, 이제, 지유 조문주, 오수산 등을 소집하여 최의를 따르는 자를 공격하였다.
지유 서균한 등을 불러 모아서 삼별초를 사청에 모으고 사람을 시켜 영공(최의)이 죽었다고 길에서 부르짖게 하자 듣는 자들이 모두 모였고 류경, 박송비 등이 오자 대신으로 위세와 명망이 있는 자들을 추대하여 군중을 통솔하라고 얘기한다. 추밀원사 최온을 부르면서 박성재를 맞이하여 이들과 의논하였으며 최양백을 부르면서 별초병을 통해 최양백의 입을 횃불로 지지면서 이를 베었다.
또한 최의의 문졸을 시켜서 밤의 시간을 알리는 기구인 경주를 알리지 못하게 하면서 대오를 광장에서 나누었고 관솔을 태워서 낮과 같이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안개가 끼었기 때문에 최의의 가병은 한 사람도 아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야별초들이 최의의 집으로 쳐들어가 집 벽을 무너뜨렸고 거성원발의 구출을 받아 도망가려던 최의를 찾아내서 죽이면서 실권을 잡게 되었다.
4월에 최의가 백성을 구휼치 아니한다고 하여 곡식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인망으로 위로하여 고종에게 청언하자 대장군이 되어 위사공신호(衛社功臣號)를 하사받았으며 우부승선이 되었다. 최의가 죽자 불만을 품은 권시, 권수균, 문황, 문광단, 문영단, 대정 최주, 녹사 유종식, 녹사 이수지, 교위 현군수 등이 7월에 김준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그들의 설득을 받던 김인문을 통해 사실을 전해받은 지유 백영정의 밀고로 알게되자 유종식을 체포하였으나 그를 놓아주었다.
그러나 또다시 문황 등이 그를 죽이려고 일을 꾸미다가 유종식이 체포되어 국문된 사실을 알아챈 현군수가 이를 고하여 알게 되자 문황, 최주, 문광단, 문영단, 이수지를 죽이면서 권수균 부자와 유종식을 유배시켰으며 문황, 이수균의 가산을 김인문과 현군수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들에게 점을 쳐 준 맹승 백량을 바다에 던져 죽이고 집을 몰살시켰다. 아내의 삼촌이 되는 환자 김인선이 왕의 총애를 받자 그를 참직에 임명할 것을 힘써 청하여 왕이 이를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후환이 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4. 몽골과의 대립


김준이 정권을 잡은지 한 달만에 몽골군은 또다시 자랄타이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제9차 침입을 개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몽골군에 대한 항전은 이전 최씨 정권의 방법을 그대로 계승했다. 1259년 3월 고려는 여러 차례 몽골군과의 전투 끝에 몽골과 강화를 맺게 되어 몽골과의 전쟁이 끝나게 된다.
1260년 고려의 제26대 국왕으로 원종이 정식으로 즉위하자 추밀원 부사 어사대부 주국 태자빈객 익양군 개국백 식읍 1000호, 식실봉 100호를 받았다. 1261년 몽골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자 왕을 위하여 백고좌를 대관전에 열어 인왕경을 강론하니 왕이 그에게 종자의 작위를 하사하고 교정별감(국가의 정책과 국정을 아울러서 통치하는 무신정권 최고 기구인 교정도감 수장)이 되어 국가의 비위를 규찰하게 되었다.
1263년 수 태위 참지정사 판어사대사 태자소사가 되었으며 이 해에 왕이 몽골에 행차하자 이를 감국하면서 왕이 머무는 집을 호위하고 왕이 환국하자 후(侯)로 봉해지고 부(府)가 세워졌다. 1265년 시중이 되고 해양후가 되었는데 충청도 안찰사인 변보에게 활 쏘는 사람을 모집할 것을 부탁하였으나 그가 듣지 않자 왕께 아뢰어 그를 유배시키고 야별초 지유, 김혁정 등이 이를 대신하게 하였다.
4품 이상의 은을 차등있게 내게하여 국고에 채우고 부유한 백성의 금은을 사게 하면서 법이 가혹하여 백성들이 근심하고 이를 원망하였다. 불교 팔관회의 풍악을 아뢰는 날에는 잔치를 벌이기도 했는데 백성의 괴로움이 심한지라 이를 정지하였다.
자신의 가신인 고이와 별감 문성주가 의탁하면서 백성을 박탈하여 어떤 이가 익명서를 어사대에 붙여 이를 호소하였지만 그만두고 묻지 않았다. 1268년 3월에 몽골의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그와 아들, 아우에게 오게 하였으나 장군 차송우의 말을 듣고 사신을 죽이자고 원종에게 아뢰었으나 원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몽골의 명을 거절하는 등 대몽 항전의 뜻을 보였는데 1260년에는 강화도를 떠나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이런 행태에 온건적인 노선을 취하는 왕이 그를 매우 원망하였으며 김준은 몽골이 입조하지 않은 것을 책망할까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공양하였는데 11월에 용산 별감 이석이 선물을 두 배를 싣고 강에 정박하자 이를 빼앗아 야별초에게 나누어주자 원종이 이를 알게 되면서 그를 미워하였다. 12월에 국자 학유인 홍유서가 몽골의 사신으로 동반하여 입조하자 김유와 함께 자신이 몰래 하는 일에 대해 고한 것을 신백천이라는 자에게 듣자 홍유서를 죽였다.

5. 처참한 말로


자신은 가신들에게 전라도충청도를 관할하게 하여 취렴(醉斂)하였으며 여러 아들이 이를 본받아 세도를 믿고 횡포를 부리니 원성이 매우 많았다. 몽골 사신이 올 때마다 만약 힐난하면 죽일 것이라고 협박하며 말했다.
김준의 아들과 토지 문제로 싸운 것과 양아들 임연의 처가 노예를 죽인 것을 알고 유배를 보내야 한다고 말하자 그의 미움을 사게 된다. 낭장 강윤소가 왕의 총애를 얻었고 왕이 김준을 꺼려하는 것과 임연이 김준과 사이가 나쁜 것을 알고 거사한다.
김준의 살해 과정이 드라마틱한데 임연이 대정[4]을 만들어 선물로 속여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김준이 관아에 나오지 않아 거사를 미루었다. 다음날에도 등청하지 않았으나 원종이 명하자 조당에 나갔는데 편전 앞에 머무르고 있던 김준을 본 원종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를 정당 안으로 끌어들였고 매복하고 있던 김상이 임연이 만들어 놓은 몽둥이로 김준을 때리자 김준이 비명과 함께 쓰러졌고 직후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때 죽은 연도가 집권 10년차인 1268년.

6. 인물 평


'''김준은 풍골(豊骨)이 늠름했으며 천성이 관후(寬厚)하고 아랫사람에게 공손하였다. 또 궁술과 무예에 능했으며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해서 여러 사람들의 인심을 얻었고 날마다 호협(豪俠)스러운 청년 자제들과 교류하고 모여서 술을 마시었으므로 제 집에는 재산이라곤 없었다. 하루는 어떤 술수(術數)를 하는 중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뒷날에 반드시 국권(國權)을 틀어 쥘 것이다."라고 하였다.''' - 고려사 김준전


7. 의외의 장기 집권과 실상


무신정권의 실질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60년 최씨 정권이 허무하게 붕괴된 후 의외로 10년씩이나 장기 집권을 해냈다. 무신들의 집권 기간만 따지자면 1위 최우 30년, 2위 최충헌 23년, 3위 이의민 13년에 이어 4위에 해당되는 꽤 긴 기간이다.
하지만 사정을 살펴보면 김준의 권력은 선대 무신 집권자들에 비해 매우 약화되어 있었는데 이유는 그의 정권이 최의 살해 쿠데타에 동조한 소수의 공신[5] 세력에 의해 지탱되었기 때문이고 형식적으로나마 왕정 복고와 개경 환도를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그의 권력은 선대에 비해 매우 축소되어 있었는데 최의를 제거한 후 바로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에 동참한 김준 일가의 가병(家兵) 지휘관들, 신의군 출신 무관들,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출신 무관들, 응양군 상장군 박성재(朴成梓)의 양해를 얻은 후에야 간신히 무신 집권자가 될 수 있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류경이다. 문신 출신인 그는 김준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최의 살해를 주도하였고 군권(軍權)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8개월간 틀어쥐었다. 하지만 그는 문신이기 때문에 무신 정권의 집권자에 포함시키지는 않고 대체로 김준 집권기의 권력자로 포함시킨다.
류경 정권이 대몽 강화와 대몽 전쟁 지휘에 모두 실패한데다가 류경이 정방(政房)을 장악하여 인사권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휘두르고 여러 방법으로 재산을 크게 모아 거부(巨富)로서 처신하자 그제서야 김준, 김승준(金承俊), 임연(林衍) 등 김준 세력들이 류경을 탄핵하였고 이들의 탄핵안을 심사숙고하던 고종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결과 류경 정권이 1258년 11월 실각하고 비로소 김준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
이처럼 무오정변의 실질적인 주동자가 김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신 출신인 류경이 8개월 동안 집권자 노릇을 했을 정도로 김준의 권력 기반은 매우 취약한 편이었다. 또한 김준은 권력을 차지한 이후에는 이전 무신 집권자들이 그렇게 반대했던 왕의 입조 또한 함부로 막지 못했는데 김준이 대몽 항전 노선을 걸으면서도 원종의 입조를 막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얼마나 축소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김준 정권은 앞선 최씨 정권과는 달리 무오정변을 통해 60여 년의 최씨 정권을 붕괴시킨 공신들의 집단지도체제의 성향이 짙었고 김준은 집단지도체제의 얼굴마담에 가까운 형태였을 것이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권력 강화를 목표로 동생 김충을 비롯해 자신의 친인척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시작했는데 당연히 그에 따른 부정부패가 줄을 이을 수 밖에 없었으며 이는 김준 정권을 지탱하고 있던 소수의 공신들과 격렬한 충돌을 야기하여 무신정권이 공중분해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혼란상 속에 김준의 양자를 자처하고 있던 임연이 김준의 아들과 재물을 놓고 문제가 생겼는데 김준이 아들의 입장만을 옹호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임연은 마침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원종이 왕명이라며 김준을 처단하라는 구원의 손길을 내밀자 지체없이 양아버지 김준을 배신하고 통수을 쳐 처참하게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이때 동생 김충도 살해되었고 김준의 아들 김주가 저항했으나 삼별초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임연, 임유무 부자의 총 집권 기간을 합쳐봐야 채 3년(1268~1270)이 안 된다는 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라는 점과 무신 정권의 붕괴라는 시각에서 김준 정권의 역사적 의의가 있다.
2011년에 태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고려시대의 난파선 마도 3호선에서 김준에게 보내는 진상품과 이를 확인하는 죽간이 발견되어, 생전 그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알수 있다. ##

8. 드라마 무신(武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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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육 과정에서 무신 집권기를 공부할 때에도 그리 크게 다뤄지는 인물은 아니라서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은 편인 인물이지만 MBC 사극 무신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6] 최충헌부터 무신 집권기 후반기 절반을 관통하려면 일찍 죽는 최씨 집권자들(최충헌, 최우)보다는 김준을 원탑 주인공으로 삼는 편이 적당하기 때문인 듯. 배우는 故 김주혁. 성우는 탄자와 테루유키. 이환경 작가의 복귀작이다.
여기서는 아버지 김윤성이 만적의 난(노비 신분해방운동)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설정되어 최씨 가문으로부터 도망친 도망 노비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는데, 갓난아기 때 아버지 김윤성이 그를 안고 어느 절(축령사)로 피신했다가 김윤성은 얼마 안 되어 죽고 그 절의 주지승인 수법이 갓난아기였던 그를 거두어 승려로 키운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7] 그러다가 개경의 승병 반란[8]에 연관되어 끌려오면서 상국합하 최충헌의 노예 신분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그러나 최우의 딸인 최송이의 눈에 들게 되고 그녀의 기지 덕에 사형(자자형)만은 면하고 공역장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러다가 격구 대회에 참전해서 최우와 그 가신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으며 결국 격구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면서 우승하였고 고종이 하사한 어검(御劍)을 받고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최우의 말에 여종 월아를 원래 있던 흥왕사의 수법스님께로 보내달라는 소원을 말했다. 그러나 월아는 무상스님 김준과 같이 안가면 떠나지 않겠다고 울면서 거절. 격구에서 우승하여 최씨 정권의 가병(소군장)이 되면서 최우의 부하가 되어 무인의 길을 가게 되었으며 그리고 격구 대회 때 자신을 지원해 준 최양백과도 같은 계급이 되면서 동무처럼 지내게 되었다.
이후 월아가 모종의 일(최우의 서자(장남)만종의 겁탈로 월아가 정절을 잃자 비상이라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 일)로 죽게 되고 송이와의 일에 연관되면서 최우의 조치로 미움을 사 변방으로 밀려나 10년 후 몽골군과 맞서던 상황에서 월아를 연상하게 하는 안심[9]을 만나게 되고 강도로 올라오면서 최우의 총애를 받는데 송이가 자신과 관련해 김약선과 관계 악화 일로로 가게 되면서 당사자들이 불행하게 희생되자 자책하게 되고 최우의 명으로 최항을 선택해 강화도로 데리고 오지만 최우 사후 최항이 멋대로 자기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을 불러 고문하거나 누명을 씌워 죽이는 것과 아버지 최우가 거두고 정을 통했던 기녀들을 긍간하고 겁탈하는 등 사회에 곪먹는 정책을 취하자 그를 죽게 만들고 의견차가 심하게 된 최양백, 최항의 아들 최의를 척결하고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지만 원종, 대신들과의 반목을 자초해 결국 이장용에게 설득된 자신의 양아들 임연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이 끝까지 살아남고 우승해서 황제폐하로부터 받은 그 어검으로 살해당한다.

김준에 대한 미화가 너무 심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정통 사극'''을 표방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퓨전 사극'''이라는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김준이라는 인물의 왜곡 때문이었으며 최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여몽전쟁 당시 김준이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다는 건 말 그대로 작중의 창작 설정일 뿐이고[10] 강화도 천도팔만대장경 제조 같은 일에 관여되었다는 부분 또한 그 어떠한 기록도 없다. 오직 '''최우에게 총애를 받았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강화천도의 경우 이 케이스는 전적으로 최우가 선택하고 결정하여 추진한 것으로 누구의 의견을 묻거나 수렴한 것도 아니다. 극 전개 과정상 김준을 주인공으로 움직이려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하였을 것이나 너무 무리한 설정이었다는 지적이 나왔던 상황.
그리고 그가 최씨 정권의 하수인이던 시절은 상당히 길게 다루면서, 정작 최씨정권을 끝내고 직접 최고 통치자에 오른 후의 10년간의 집권 기간이 극중에서 너무 짧게 다뤄지는데 단순히 연도 수로 계산한다면 그의 집권 기간은 3위 이의민의 13년 바로 다음인 10년으로서 최항의 8년 집권보다 오히려 더 길다.
김준 다음의 임연, 임유무 부자의 집권 기간을 합쳐도 채 3년이 안된다는 걸 감안하자면 실질적인 무신 정권의 마지막 집정자이고 60년 최씨 정권이 붕괴된 후 선대의 무신 집정자들에 비해 김준 정권은 최씨 정권을 무너뜨린 소수의 공신들에 의해 운영되어 무신 정권의 힘이 서서히 빠져 나가는 10년 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꽤나 아쉬운 일이다.[11]
특히 김준의 삽질#s-1.1.2이 본격적으로 다루어 지는 것 또한 이 10년의 기간인데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김준은 단순히 몽골과의 전쟁만을 주장하다가 왕당파 및 임연에게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친인척의 부정부패와 임연의 부정부패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여져 '''옥황상제가 손짓하고 있던''' 임연에게 상황을 매의 눈으로 보고 있던 원종이 왕명으로 김준을 살해하라고 한 것에 불과하다.
같은 무신정권 시절의 초반 50년을 다뤘던 무인시대의 경우 150화를 넘어가며 극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경우가 있을지언정 무신 집정자들의 집권 기간을 잘 조명하는데 성공했으나 무신의 경우는 후반 50년임에도 불구하고 고작 56화를 끝으로 종영되어 집정자들의 회차 분배가 잘 안 된 부분이 있다.
[1] 근본이 노비였으므로 본관이 없지만, 집권 후 해양군 작위를 받았으므로 본인이 해양 김씨를 창본했다고 봐도 좋다는 의견이 있다.[2] 金承俊, 후에 김충으로 개명.[3] 최항과 최의도 얼자로 일천즉천의 신분제에 따라 계급을 따지면 천민이다. 물론 이 둘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최고 집권자로 올랐으니 경우가 다르다.[4] 大梃 : 큰 몽둥이.[5] 류경, 박송비, 송길유, 임연 등.[6] 기사에서는 그의 개명전 다른 이름인 김인준으로 나온다.[7] 이 드라마 설정대로라면 만적의 난이 1198년의 일이었으니 김준은 1198년 내지 1199년생으로 추정된다.[8]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1217년에 있었다.[9] 실제로 월아와 안심을 같은 배우(홍아름)가 맡았다.[10] 오히려 임연이 몽골군과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11] 원종의 몽고 입조 장면의 경우 바로 이것을 드러내는 장면 중 하나이다. 김준은 몽고와의 전쟁이 곧 자신들의 정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종의 원나라 입조를 막지 못했는데 선대 무신 집정자들에 미루어 보면 그의 권력이 얼마나 축소 되어있었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며 그럼에도 이 부분을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