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

 


<color=#670000> 고려 마지막 군주
恭讓王 / 杆城王
공양왕 / 간성왕

<colcolor=#670000> 묘호
없음[1]
시호
공양왕(恭讓王)[2]
군호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공양군(恭讓君)[3]
별칭
간성왕(杆城王)[4]
성씨
왕(王)

요(瑤)
왕비
순비(順妃)
왕세자
왕석(王奭)
왕녀
숙녕궁주, 정신궁주, 경화궁주
부공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 仁孝大公) 왕균(王鈞)
모비
국대비(國大妃) 왕씨(王氏)
능호
고릉(高陵)
생몰년도
음력
1345년 2월 5일 ~ 1394년 4월 17일
양력
1345년 3월 9일 ~ 1394년 5월 17일 (49세 총 17967일)
재위 기간
음력
1389년 11월 15일 ~ 1392년 7월 12일
양력
1389년 ~ 1392년 8월 (4년)
1. 개요
2. 생애
2.1. 반강제적인 즉위
2.2. 사대조 공작 추존
2.3. 고려 국왕
2.3.1. 이성계 견제
2.3.2. 신하에게 동맹을 청하다
2.4. 고려의 멸망
2.5. 강등과 유배
2.5.1. 마지막 저항
2.6. 최후
3. 왕릉
4. 사후 추증
5. 평가
6. 이모저모
7. 사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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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34대 임금이자 마지막 임금. 묘호는 없고 시호는 조선 태종이 올린 공양왕(恭讓王). 휘는 요(瑤).
창왕이 폐위되자 이성계 일파에 의해 옹립됐다. 바보짓도 하고 정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지만 이성계 일파는 그를 무혈 선위의 도구로 사용했다. 본색을 드러내고 정몽주와 마지막으로 반전을 노렸지만 무위로 그쳤고 용도가 다한 그는 유배 후 사형된다.
간성으로 유배돼 간성왕으로 부르기도 한다.

2. 생애



2.1. 반강제적인 즉위


역대 정주(定州)의 가신
1대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왕균(王鈞)
2대
정창부원군(定昌府院君)
왕요(王瑤)
3대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
왕우(王瑀)
힘이 지나치게 커진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이인임과 고려 신하들이 별 수를 다 썼지만 패했다.[5]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이면서도 섭정 이인임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왕을 폐하고 8살짜리 세자 창왕을 대신 옹립했지만, 혁명을 저지하려는 고려의 세력들이 창왕을 중심으로 결집할 낌새가 보이자 부자를 강릉에서 처형했다. 그럼에도 조선 건국 세력은 평화적인 왕조 교체를 원했다.
마침 이성계와 사돈 집안이기도 한 정창부원군 왕요가 꼽혔다. 왕요의 동생 정양군이 이성계의 7남 이방번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6] 게다가 정창부원군 부인 노씨는 이성계의 17촌 먼 친척이기도 했다.
왕요는 신종 정효대왕의 7대손으로 신종의 차남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의 직계다.
부계로는 충선왕의 제3비 정비의 아버지 서원후 왕영(王瑛)의 고손자로 신종 → 양양공 → 시안공(始安公)[7] → 서원후(西原侯) → 익양후(益陽侯)[8] → 순화후(淳化侯)[9] →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10] 순이다.

2.2. 사대조 공작 추존


어머니는 연덕부원대군 왕훈의 딸이다. 그리하여 충렬왕정화궁주의 현손[11]이 된다. 덧붙여서 서원후 왕영과 정화궁주는 남매다.
뭐가 됐든 공양왕은 왕족 직계와는 많이 멀어서 조선 건국 세력들에게 더 매력적이었다. 왕요의 선대 왕균이 공민왕에게 백작위를 받는 등 고려 개혁을 했던 집안인 것도 있다. 종친은 커녕 왕족이라 하기도 뭐한 먼 방계라 야심없이 편히 살던 평범한 귀족이었으나,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목숨마저 뺏기게 되었다.
방계 출신의 왕들이 늘 그렇듯 공양왕은 유교적 예법에 맞춰 사대조를 추존하고자 했다. 왕이 아니었던 조상들을 추존왕으로 올리는 절차다. 하지만 공양왕의 왕실은 그의 조상을 왕(王), 왕비(王妃)가 아닌 공(公), 공비(公妃)로 추존했는데 이는 전례로 삼은 한나라 광무제송나라 영종의 방침을 빙자해 이성계에게 굽히고 살아 남으려는 것이었다. 조선 건국 세력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공양왕은 어찌되었든 전례에 따라 사친(四親)을 추존했다. 원을 구성해 적경원(積慶園)이라 하였고 성균관 오른쪽에 설치하였다. 제도는 고려의 경령전[12]과 같게 하여 당시 살아있던 공양왕의 친모를 제외한 7명이 모셔졌다.[13]
적경원 신위
대수
부계
모계
4대
변한국 영헌공(卞韓國 英憲公)
변한국 순안비(卞韓國 順安妃)
3대
진한국 인숙공(辰韓國 仁肅公)
진한국 장경비(辰韓國 莊敬妃)
2대
마한국 인혜공(馬韓國 仁惠公)
마한국 명예비(馬韓國 明睿妃)
1대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 仁孝大公)
모친 생존 중
살아있던 공양왕의 어머니는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로 봉해져 국대비가 됐다. 4대조 중 아버진 특별히 대공(大公)으로 추존되어 왕균은 사실상 동아시아 유일한 대공 작위를 가지게 되었다.

2.3. 고려 국왕


난(余) 평생(平生)동안 의식(衣食)과 사령(使令)이 모두 충분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부하(負荷)가 이리 막중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 중. 왕위에 오른 뒤 잠을 설쳐가며 불안해 했다.


2.3.1. 이성계 견제


당시 정국은 이성계 일파가 잡고 있어서 실권은 없었지만 왕은 이성계 일파에 대한 대항마로 이색정몽주 같은 반 이성계파 인사들에게 주목했고 그들을 이용해 이성계 일파를 견제하여 고려 왕조를 지키고자 했다. 치부에 힘쓴 배경 탓인지 우왕과 창왕 시절 토지 개혁을 추진했던 조준정도전을 즉위 전부터 미워했던 탓도 있다.
망국의 군주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그저 멍 때리고 있다가 이성계에게 왕 자리를 뺏기고 나라를 말아먹었다는 인상이 있지만 기록을 보면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이성계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고는 했다. 대표적인 예가 우왕과 창왕의 처리 건으로 기록에 따르면 당초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의 처형에 대해 조금 미루자는 입장이었으나 공양왕은 이들의 즉결 처분을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공양왕 즉위 1달여만에 우왕과 창왕은 빠르게 처형되었다.
사실 이성계의 입장에서도 주위의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우왕과 창왕의 빠른 처리는 그렇게 좋은 일은 되지 못했지만 아무튼 왕위에 오른 공양왕의 입장에서는 우왕과 창왕이 살아있어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결정은 내가 내리지만 전왕을 시해했다는 은 이성계가 다 먹겠지?"라는 계산에서 이런 결단을 내린 것이었고 실제로도 백성들의 여론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14]
특히 반 이성계파의 정점으로 유능한 관료이자 유력한 정치인이기도 했고 공양왕에게 있어서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정몽주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지지를 바탕으로 이성계 일파를 계속 공격했고 1392년 이성계가 아들을 마중나가면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했을 때에는 이성계의 부재를 틈타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일파의 핵심 인사들을 모두 탄핵하여 귀양보내면서 이성계의 수족을 잘라 버렸다.
정몽주는 왕에게 치명타를 날릴 것을 계속 주문했지만 왕은 어물쩡거려 결정타를 날리지 않았다. 이러다보니 이성계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한 편도 아니었고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의 빠른 행동력으로 인해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와 버렸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공양왕이 이성계 일파에 대해 결정적인 마무리를 하지 않은 것에는 여러 추측이 있다. 우선 공양왕 자신이 바로 이성계에게 옹립된 왕인데다가 방계 왕족이라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다. 이성계 일파를 완전히 몰아낸 다음에도 사대부들이 공양왕을 확고하게 지지해준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세력을 꺾었으니 이쯤에서 숨을 고르면서 세력 균형을 잡아야겠다는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 명종무신정변으로 무신들에게 옹립되었는데 무신정변을 주도한 1세대 무신 집권자들이 이의민의 죽음을 끝으로 모두 사라지자 최충헌에게 폐위되어 버렸다.
당시 이성계 일파는 정치적으로 고려 조정에서 추방당했지만 위화도 회군 이후 고려의 군사권은 이미 이성계 일파가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이성계가 공양왕을 옹립하고 표면적으로 신하로서 있었던 이유는 이성계가 평화적인 왕위 양위를 원해서 그런 것뿐이지, 만약 공양왕이 계속 밀어붙이다가 이성계가 마음을 바꾸거나 혹은 공양왕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냥 군사력을 동원해서 왕조를 바꿔버릴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더라도 무신정권 시절이나 우왕과 창왕처럼 그냥 폐위시켜 버리고 다른 왕씨를 옹립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공양왕은 숨을 고르고 이성계와 타협하는 방향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쉽게 말해 공양왕이 어느 한쪽을 완전히 궤멸시키지 않고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이유는 과거 최씨 무신 정권이 있었듯 이성계를 필두로 한 이씨 무신 정권을 용인하고 왕조는 보존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신 정권기와 달리 공양왕 시대의 고려는 역성 혁명이 아니고서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병폐가 쌓여 있었다는 점이다.

2.3.2. 신하에게 동맹을 청하다


공양왕 때 고려의 멸망이 시작된 것은 윤이, 이초 사건이었는데 본시 명나라를 끌어들여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던 계획이었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급진 사대부가 권력을 잡게 된다. 공양왕은 본시 정몽주의 말을 묵살하며 사건을 오히려 조사하려고 했다. 이 결과 공양왕과 정몽주가 각기 고립되었고 이어진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이 결정타가 되었다. 명망 있는 대신이자 반 이성계파로서 왕의 든든한 지원 세력이었던 정몽주조차 무참히 살해되고 이에 대해서 왕이 이성계 일파에 아무 책임도 물을 수 없는 상황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로써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 무너지자 왕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조회가 끝나면 대신들이 왕이 아직 자리에 있는데도 그냥 일어나서 나가버리거나 연회 때 공양왕 면전에서 술주정을 하는 대신도 있을 지경이었다.

왕이 명령을 내려 우리 태종과 신하 조용을 소환했다.

(왕이) 이르길: "난(予) 곧 이(李) 시중(侍中)과 동맹(同盟)을 맺고자 한다. 경등(卿等)이 내(予) 말(言)을 시중(侍中)에게 전해 시중의 말을 듣고 맹서(盟書)의 초고를 써 와라."

그리고 또 이르길: "반드시 이런 고사(故事)가 있을 것이다."

조용이 대답하길: "맹(盟)이란 것은 귀한 것이 아니니, 성인(聖人)이 싫어하던 것입니다. 열국동맹(列國同盟)이라면 옛날에도 있었으나 군신동맹(君臣同盟)은 경적(經籍)에 없는 고사(故事)입니다."

왕이 이르길: "그저 초고를 쓰라."

조용과 우리 태종이 태조(太祖)에게 가 왕교(王敎)를 전했다.

태조가 말하길: "내(予)가 무슨 말이 있겠는가? 네(汝)가 마땅히 상교(上敎)하여 초고를 올려라."

조용이 초고를 퇴고했다.

(글에) 쓰길: '경(卿)이 없으면 내가 여기에 어떻게 있겠는가? 경의 공과 덕은 내가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황천후토(皇天后土)가 (우리의) 위에 있고 옆에 있으니 서로 세세토록 자손에게 해를 입히지 말자. 내가 경에게 부담을 준다면 이 맹이 있도다.'

조용과 태종이 초고를 왕에게 바쳤다.

왕이 이르길: "가(可)하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 중.

급기야 신하인 이성계에게 동맹을 맺자는 제안을 할 정도로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 동맹 제의를 했던 시점이 폐위 일주일 전의 일이다. 사실 동맹이라는 것은 나라와 나라 또는 세력과 세력 간에 맺는 것이지, 군주와 신하가 맺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고려의 역사에는 무신 정권이라는 전례가 있었으니 그를 모범으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실제로 과거에 최씨 무신 정권이 장기 집권한 사례도 있으니 무신 정권 시대의 전례를 따라 이를 반복하여 이성계의 실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고 고려 왕조는 그저 허울만 남는 한이 있어도 왕씨 왕조는 지키겠다는 처절한 시도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성계는 단순한 권신이 아니라 동북면(함경남도) 지역을 통째로 사실상 독립 왕국으로 경영하면서 만주 지역에까지 자신을 섬기는 부족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린 고려 역사상 최강의 권신이요 군벌이었다.## 이미 일개 신하로 볼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동북면에서 이성계의 입지는 왕이나 다름없었고 우왕이 즉위하던 시점에는 이성계를 건드릴 사람이 없었으며 위화도 회군을 하기 전에 사병 군사력이 고려 전체를 뛰어넘었다. 게다가 고려 시대의 다른 권신들[15]과 달리 이성계는 혼자서도 고려 전체를 제압할 수 있었다.

2.4. 고려의 멸망


'금왕(今王)은 멍청하고 어두워 군도(君道)는 사라졌고 인심(人心)은 떠나갔습니다. 더 이상 사직 및 생령의 주(社稷生靈主)가 될 수 없으니, 부디 폐(廢)하여 주십시오.'

- 고려사 공양왕 세가 中. 왕대비 안씨에게 올린 배극렴의 상서.

그러나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 1392년, 왕대비 안씨의 이름으로 공양왕은 폐위되었다.
북천동궁(北泉洞宮)에 있던 공양왕은 엎드려 왕대비의 교지를 들었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余) 본래 군(君)이 되고 싶지 않았다. 군신(群臣)이 날 강제로 세운 것이다. 내 성격이 민첩하지 못해 사기(事機)를 알지 못했으니, 어찌 신하(臣下)의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겠는가."

- 조선왕조 태조실록 중, 1392년 7월 12일. 공양왕의 반응.

공양왕의 옥새는 왕대비가 가져갔고 국정은 왕대비의 명의로 처리되었다. 문하시중 이성계는 감록국사(監錄國事) 이성계가 되었다. 7월 16일 대비로부터 옥새가 전해지고 7월 17일 이성계는 개경 수창궁에서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16] 이로써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만에 멸망했다. 정몽주가 죽은지 4개월만이었다.[17]
이성계가 왕위를 단순 찬탈하고자 했으면 위화도 회군 때 이미 힘이 있었기에 그 시점에서 왕위에 올랐겠지만, 최대한 보기 좋게 왕위를 이어받고 싶기에 세운 것이 공양왕이었다. 그래서 선양이라는 이상적인 역성 혁명을 꿈꾸던 이유로 공양왕과 정몽주는 끝까지 이성계를 견제할 수 있었지만 결국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삼국지조조-조비 부자나 사마의-사마사/사마소-사마염 3대가 '보기 좋은 선양'을 위해 허수아비 앉혀놓고 공들인 수십 년의 시간에 비하면 고작 쿠데타 4년만에 다 죽이고 왕이 된 이성계는 상당히 빨리 판을 뒤집은 편이다.
백관들이 왕대비 안씨의 옥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집을 찾았을 때 이성계는 사양의 뜻으로 문을 열어주지 않았으며 백관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몇 번의 사양 끝에 옥새를 받들었으며, 즉위식에서 또한 자신의 몸이 성하지 못해 도망가지 못했다며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2.5. 강등과 유배


한달 뒤인 8월 7일, 공양왕은 쓸쓸하게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고, 간성군(杆城郡)[18]에 유배되었다.[19] 이 때 유배지를 따와서 간성왕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간성군에서 총 2년 간 있었는데, 지속적으로 나라를 뺏긴 왕씨들에 대한 소문, 루머, 반역 의혹까지 나오자 결국 조선왕조는 1394년 3월 14일에 공양왕과 그 아들 2명을 삼척으로 유배시킨다.

2.5.1. 마지막 저항


이성계가 바랐던 대로 가만히 도장이나 찍어주다 순순히 선양했다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꼭두각시가 될지언정 목숨은 보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씨 사직을 위해 저항했고 이것이 이성계의 즉위를 선양도, 반정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로 만들었다. 동시에 그의 명운도 바람앞의 촛불신세가 되었다.
유배된 전 고려국왕 왕요는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고려 왕실을 그리워하는 여론이 끊이질 않고 왕씨 왕족들이 역모를 일으킨다는 말도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1394년 1월 조선도 건국되고 수도도 옮기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동래 현령 김가행과 염장관 박중질이 맹인 점쟁이에게 왕씨 왕족들 중 누가 귀한 사주인가를 물었다는 게 발각(?)됐다. 결국 대마도 정벌로 유명한 박위가 시킨 일로 점점 불이 커지더니 점쟁이가 말한 왕씨들도 옥에 갇히게 됐다. 태조는 적당히 벌을 주고 무마를 하려 했지만 결국 왕화, 왕거, 김가행, 박중질 등 모두가 참수형에 처해졌고 결국 삼척에 유배된 공양왕 부자의 목숨도 바람앞의 등불이었다.[20]

2.6. 최후


'신민(臣民)들이 밀어붙여 날(予) 군(君)으로 만드니, 참으로 천수(天數)였다.

영(令)하여 군(君)을 관동(關東)에 머물게 하고 다른 동성(同姓)들은 알아서 편한 곳으로 가 생업(生業)을 하게 했다.

지금 동래 현령(東萊 縣令) 김가행(金可行)과 염장관(鹽場官) 박중질(朴仲質) 등(等)이 불순한 짓을 도모하여 군과 친속(親屬)의 운명을 맹인(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치게 했다.

일이 발각되어 죄를 물었다. 군은 비록 모르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대간법관(臺諫法官)들이 계속 장(章)을 올려 주청함이 12번을 넘기니, 매일마다 다투었다.

대소신료들까지 또 상서하여 다투니 난(予) 어쩔 수 없이 청을 물릴 수가 없어 따라야 한다. 군은 이를 알라!'

- 태조실록 3년 4월 17일 기록. 공양군을 교살하다.

공양왕은 결국 폐위된지 2년 후인 음력 1394년 4월 17일, 삼척 고돌산의 살해치[21]에서 중추원부사 정남진(鄭南晋)에 의해 왕세자 왕석과 함께 교살되었다. 향년 50세.[22]

3. 왕릉


공양왕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삼척시에 2개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공양왕의 유족과 조선 왕조 측에서 인정하고 예우해준 것은 고양에 있는 무덤으로, 시체를 확인한 후 삼척에서 이장한 것이다. 때문에 공양왕릉으로 가는 공양왕길도 삼척과 고양 2곳에 존재한다.
하지만 2군데 존재하는 능에는 여러모로 심상치 않은 전승들이 내려오고, 이에 대한 기록들도 모순되어 공양왕의 죽음에는 상당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실록에는 삼척에서 교형에 처해졌다고 하는데, 고양시의 공양왕릉 주변 지역에는 공양왕이 탈출해서 이 근처까지 왔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으며[23] 실제로 조선 왕조에서도 고양시의 능을 공인된 것으로 다뤘다. 왕씨 세력 학살과 엮어 보면 공양왕이 유배지 삼척에서 탈출을 감행해 모종의 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처형된 뒤 그 일체가 조선 왕조에 의해 은폐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도 있다.
반면에 사서 기록에 따르면 공양왕의 처형은 왕씨 제거와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실록의 기록을 신뢰하면 공양왕이 무언가 큰 사건을 일으키려고 탈출한 게 아니라 단순히 처형을 피하기 위해 탈출했다가 잡혀 죽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성계에게 견제와 방해를 시도했고, 최후에도 저런 수상쩍은 사건이 있어서인지 능에 대한 예우는 그야말로 안습. 본래 왕릉보다 높은 곳에는 무덤을 못 쓰게 되어 있고 근처의 숲에서는 나무도 함부로 자를 수 없을 만큼 예우받아야 하는데, 공양왕릉은 아무리 능 근처 지역이 명당 자리로 꼽혀 왔다지만 왕릉을 대놓고 굽어보는 자리에 조선 시대 민간인, 사대부들의 묘가 수두룩해서 전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망국의 슬픔이 절절하게 와닿는 모양새.

4. 사후 추증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재위 3년 만인 1394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원래 폐위 직후에 공양군(恭讓君)[24]이라 불리었으나, 1416년에 조선 태종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5. 평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앞에 언급한 것처럼 그저 무능한 군주는 아니었고 나름대로 없는 힘이라도 쥐어짜서 고려왕조를 지키고자 했던 왕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서 망설인 것이 결국 자신의 나라와 목숨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적어도 이성계가 내린 군호이자 나중에 시호가 된 '공양(恭讓 : 공손할 공에 양보할 양)'이라는 이름에 꼭 걸맞는 왕은 아니었던 셈.[25]
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그냥 부유하게 살다가 갔을지도 모르는 인물. 애초에 이성계가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유도 알고 있었을 테니 그냥 이성계가 하자는 대로 해서 끝까지 목숨을 보전하자는 생각도 했겠지만, 어떤 길을 택하든 이성계가 자신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나름의 저항을 시도했던 듯하다.[26] 어쨌든 모든 망국의 왕들이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숙청을 당한 안습의 군주.
한편으론 시대를 너무 잘못 타고난 왕으로 권력욕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 대신 신하들의 상소에 도장을 찍고, 무과를 받아들일 만큼 덕망도 있고 우왕과 창왕을 치는 데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고, 공양왕은 문종, 예종과 같이 성군이 되기론 꽤 충분했으나 앞의 왕들이 너무나도 무능하여 비극을 당한 왕이기도 했다. 즉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수습이 불가했다. 참고로 공양왕 같은 왕들은 전 왕들이 잘해야 성군이 되는 왕 중 하나이다. 대세와 운, 현실이 너무나도 안 따라줬던 셈.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 세가를 보면 상소들이 숱하게 올라오고 그 내용도 매우 긴데, 대체적으로 공양왕 개인의 실정보단 전왕의 실정이 주류를 이루어 공양왕은 이러지 말라는 것을 아예 엄청난 장문으로 적은 상소들이었다. 왕이 이런 상소들을 다 보고 다 찍는 것도 어지간한 성군조차도 하기가 힘들고, 도장을 다 찍기란 상소의 오류도 시정해야하고, 또 상소들이 줄기차게 올라왔다는 것은 상소문들이 생각보다 엄청났다는 것인데 우스갯소리로 소위 상소가 산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을 비롯해 심지어 당대의 학자이자 문하시중인 정몽주조차도 이걸 다 하기 어려울 실정이다. 실제로 고려사 공양왕 세가의 상소는 어지간한 사학자들조차도 다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앞의 왕인 공민왕은 자신이 마음에 안 들거나 문제를 지적한다거나 귀찮다 싶은 상소들은 아예 본보기로 불을 태우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존오의 상소가 그러했다. 심지어는 빌미잡아 숙청까지 했기에 상소문들이 공양왕보다 더 적었다. 그래서인지 공민왕 시절에 신하들의 상소 기록이 공양왕 때보다 훨씬 적다.
그래서 공양왕은 한국 역사의 다른 마지막 임금의 최후에 비교해 보더라도 훨씬 비참한 편이다. 고조선 준왕은 그래도 목숨과 어느 정도 세력을 부지한 채 달아나 재기할 수 있었고, 금관가야구형왕은 그래도 신라의 지배 계층인 진골로 편입되었고[27], 경순왕자견왕신라, 탐라 멸망 이후 고려 왕조의 지배층이 되어 높은 대우를 받으며 살았다.[28] 보장왕의자왕, 풍왕[29], 대인선이 패망한 후 당나라, 요나라로 끌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고[30], 순종황제의 경우에는 일제가 내린 '창덕궁 이왕'직을 순순히 받고 당구나 치면서 놀면서 살다가 편안히 갔고 일족도 일제가 망할 때까지는 일본 귀족 대우를 받았다. 반면 공양왕은 폐위 후 본인도 유배ᆞ사사당하는 것은 물론 왕씨 일족들까지 대부분 조선 조정에 의해 일족 청소를 당했으니...
태봉궁예[31]후백제신검[32][33], 흥료국의 대연림[34], 장안국김헌창[35], 최씨낙랑국최리[36]처럼 공양왕과 비슷한 결과를 맞은 이들도 많지만, 이들은 모두 길어야 수십년만에 망해버린[37] (동아시아 기준으론) 단명국가. 몇백년간 누대에 걸쳐 안정적으로 존속해 온 고려와는 얘기가 다르다.
이성계는 주성왕제신의 이복형 미자계를 송에 봉해 상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한 것을 본받아 공양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사돈인 정양군 왕우를 귀의군으로 봉해 고려 임금의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왕우는 이성계의 사돈이었기 때문에 그와 두 아들 왕관, 왕조는 왕씨 숙청 때도 무사할 수 있었으나, 왕우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자 왕관과 왕조가 비명에 가 귀의군의 직계가 단절되었다.

6. 이모저모



  • 정창부원군 왕요를 국왕으로 만든 9명은 다음과 같다. 이 9명이 훗날 조선국(朝鮮國)을 세우게 될 이른바 '구공신(九功臣)'이다. 이들은 유럽의 선제후 마냥 흥국사에 모여 장시간의 토론을 거친 뒤[38], 군대와 백관, 왕실 일원을 모두 데리고 수창궁에 가 왕대비 안씨를 통해 왕요에게 국인(國印)을 넘겨주었다.
  • 고려사 공양왕 세가엔 공양왕이 옹립된 뒤엔 잠도 못자면서 불안해했다고 한다.
  • 고려사 공양왕 총서엔 사람은 착한데 너무 우유부단했다며 은근히 디스한다.
  • 공양왕 재위 3년째인 1391년 7월, 섬라곡국(暹羅斛國)이란 곳에서 특산물을 들고 사신을 보내왔다. 이 섬라곡국은 지금의 태국인데 사신들이 공양왕에게 국서를 바쳤다. 그러나 국서에 서명도 없고 포장지도 없고 단지 동그란 인장만 하나 박혀있었기에 고려는 당연히 짭이라고 의심했다. 그렇다고 고려가 좋다면서 온 외국인들을 문전박대하기도 그러니 왕은 국서는 거부하고 대신 직접 만나보기만 했다. 그들은 통역을 세 차례나 거쳐야 대화가 가능했으며 일본에 1년 정도 거주했다고 한다. 지위가 낮은 자는 맨발이거나 윗옷을 벗고 있었고 지위가 높은 자는 흰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 한번은 이성계가 공양왕을 위해 수창궁에서 연회를 연 적이 있다. 즐겁게 놀고 왕은 보답으로 이성계에게 비싼 갓끈, 말, 옷을 선물했고 이성계는 받는 즉시 옷을 입어 보였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궁문을 닫자 이방원은 혹시라도 자신들을 죽이려는지 의심했고, 아버지를 데리고 몰래 궁을 나가버렸다... 신하가 왕에게 하직 인사조차 하지 않고 냅다 가버린 것이다. 다음날 빡친 공양왕이 궁문을 열어준 신하를 가두어버리자 이성계는 내가 너무 취해서 문 열라 시켰다며 옹호해 왕은 별 수 없이 풀어줘야 했다.
  • 공양왕 재위 3년째인 1391년 10월, 왜구의 문제로 일본의 큐슈 절도사(九州 節都士)에게 보빙사를 보냈다. 큐슈는 이에 승려 50여 명을 보내 답했는데 국서 양식을 표문(表文)[39]으로 하고 공양왕을 '고려국왕 전하(高麗國王 殿下)', 자신들을 '신(臣)'이라고 칭했다. 고려를 '대국(大國)'이라 하고 일본 큐슈를 '일하이지(日下夷地)'[40]라 불렀다. 또한 자신들은 중국이 칭신하랬을 때도 안했지만 고려에겐 자발적으로 칭신했다며 '천추만세만만세(千秋萬歲萬萬歲)'를 외치며 고려를 극도로 찬양했다. 이는 일본 큐슈가 굳이 고려와 불화가 생기는 걸 원하지 않았을 뿐더러 왜구 문제에 있어 최대한 책임을 피해가려 했기 때문이다.
  • 이성계가 사냥 도중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적이 있다. 공양왕은 강연 중 이 소식을 들었는데 한 신하가 '이 시중은 나라의 장성(長城)과 같은 존재이니 그가 다친 것은 큰 손실입니다.'라고 하자 왕은 읽던 책을 덮어 버리고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알 수 있는 대목.
  • 조선의 여진족 회유는 고려 공양왕 대부터 시작했다. 이성계가 주도로 북방에 방문을 붙여 고려로 귀화하는 여진족은 큰 상을 주겠다며 선전했고, 이에 많은 여진족들이 호응했는데 이 중 두 부족의 수장들인 알도리와 올량합이 고려로 왔다. 이 둘은 서로가 더 높은 자리에 앉기 위해 신경전을 벌였는데 알도리가 "시중 윤관이 우리 땅을 평(平)하고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쓰인 비석을 세우니 경내(境內)의 우린 제군사(諸軍事)를 모화하여 왔다, 굳이 이런 곳에서 싸워도 의미가 없다."라 하니 왕은 먼저 귀화한 부족장이 높은 자리에 앉게해 알도리가 윗자리에 앉게 되었다.
  • 자신이 우왕, 창왕을 대신해 등극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태조 진전을 참배했다. 당시 사용한 축문이 공양왕 세가에 남아있는데 여기서 신라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당시 조선은 한국 왕조의 별칭이었으니 단순히 신라를 달리 부른 것이지만 영 미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공양왕 재위 2년째인 1390년 8월, 유구국(琉球國)의 중산왕(中山王) 찰도(察度)가 자신의 신하 옥지(玉之)를 사신으로 보내 칭신(稱臣)하고 표문(表文)을 올린 뒤, 특산물을 바쳤다.
  • 공양왕과 신하의 강연 도중 늙은이와 과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공양왕은 장수하는 사람은 분명히 불교에 대한 믿음이 깊기에 오래 산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꿈에서 부처를 만난 뒤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에 신하는 맞장구를 쳐주는 동시에 유가(儒家)가 불가(佛家)를 싫어하지 않지만 굳이 배척하는 이유는 인군(人君)이 불교를 믿다가 정치를 소홀히 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라며 은근슬쩍 유교에 대한 강조로 넘어갔다.
  • 공민왕 때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봉지로 하사받은 곳은 정원(定原), 자신은 정창(定昌), 자신이 왕이 된 뒤 동생에게 봉해 준 정양(定陽)은 모두 현 평안도 정주(定州)를 가리킨다.[41] 고구려계 패서지역 호족이 만든 나라가 고구려계 패서지역에 봉해진 자에서 끝난 셈이다.

7. 사극에서


공양왕이 나오는 드라마로는 KBS 개국, MBC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궁동 마마, KBS 용의 눈물, SBS 대풍수, KBS 정도전, SBS 육룡이 나르샤 등이 있다. 옛날 사극에서는 전통적인 역사관대로 공양왕을 무기력하고 무능한 허수아비 왕으로 그리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최근에는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으로 그리고 있다.
《개국》에서는 김진해가 공양왕을 연기했다.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에서는 김웅철이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서는 중견배우 김영선[42]이 연기했다. 어보를 갖고 온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자신은 왕 하기 싫다[43]고 말하는 장면이나, 이성계에 대한 암살을 주저하는 장면에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공양왕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을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역사대로 폐위되었다가 결국 아들과 함께 처형당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자신의 혈족들이 떼로 죽었으니, 우리만 어찌 살아남길 바라겠냐며 사약을 거부하고, 의연하게 죽고 싶다며 단검으로 배를 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장면에서 마지막 유언은 "왕씨의 혼령들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오늘을 잊지 말지어다!"[44] 이성계가 죽기 직전 꾼 꿈에서는 '오기를 기다렸다. 이 고려를 죽인 원수!'라고 원한이 사무친 외침을 날린다.
대풍수》에서는 김병춘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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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에서는 남성진이 연기. 공양왕 문서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이도엽이 분하였으며, 줄거리상 즉위 이전 정창군 왕요였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1] 망국의 왕인데다가 고려충렬왕 이후엔 몽골의 침입으로 원나라의 속국 취급을 받아 묘호를 받지 않았고 원의 치하를 벗어난 군주였던 공민왕 역시 묘호를 받지 않았다. 이는 조선 초기 묘호에 대한 논의에도 영향을 주어 묘호를 받지 못했던 공정왕(정종)이라던지 선대 왕의 묘호를 폐지하자고 주장한 성종의 주장까지 이어진다.[2] 이 왕이 이성계에게 양위를 하면서 조선이 건국된지라 후대 (고려)왕들이 없어 시호를 받지 못했었다. 간혹 양위를 받아 새 나라를 세운 군주가 시호를 올리기도 하나 고려 왕족의 경우 전부 몰살을 당했고 그때 다른 왕씨와 마찬가지로 살해 당하는 바람에 시호를 받지 못했다. 이 후, 왕씨 몰살이 사그라든 조선 태종 16년에 겨우 시호를 공양왕으로 받았다.[3] 조선 태조가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했었다.[4] 간성에 유배된 적이 있어 간성왕(杆城王)이라고 불리기도 한다.[5] 다만 이인임은 고려말 최악의 권신 중 하나라서 이성계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훗날 이성계와 대립각 세우는 최영이 직접 주도적으로 나서서 이성계를 끌어들여 이인임의 수족을 잘랐을 정도.[6] 고려 왕조 때 정양군(定陽君) → 정양부원군(定陽府院君)이 됐다가 조선 왕조 때 마전군 귀의군(麻田郡 歸義君)이 됐다. 사후 시호는 경희공(景禧公).[7] 양양공의 3남으로 이름은 왕인(王絪).[8] 서원후의 장남으로 이름은 왕분(王玢).[9] 익양후의 장남으로 이름은 왕유(王瑈).[10] 순화후의 장남으로 이름은 왕균(王鈞). 작위가 정원군(定原君) → 정원백(定原伯) → 정원부원군 → 삼한국 인효대공(三韓國 仁孝大公) 순으로 바뀌었다.[11] 정화궁주의 아들 강양공의 3남 연덕부원대군의 외손자.[12] 景靈殿. 현종 원문왕이 만든 신전으로 태조 내외와 재위 중인 국왕의 사대조, 총 10명의 초상화를 모셨다.[13] 적경원은 1392년 12월 16일에 헐렸다.[14] 이러한 공양왕의 모습에 대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1979년의 최 모씨와는 다르다며 은근히 까는 표현을 사용했다. 만화에서 등장하는 공양왕의 모습이 최 모씨와 판박이임까지 반영해 보면 확인사살급.[15] 무신정권 무인들의 군사력은 사병이 수백명 수준으로 무장 수준, 규모, 실적 등에서 이성계와는 비교가 안 된다.[16] 대외적으로는 명의 책봉 전이므로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이용했다.[17] 고려라는 국호 자체는 2년 정도 지속됐다. 이미 내부에서는 국호를 조선으로 정했지만 명의 책봉을 못받아 새 국호를 대외적으로 쓰지 못했다.[18]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19] 조선왕조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7일 병진 3번째기사.[20] 박위는 이성계가 감싸 살아남고 관직도 계속 올라간다. 그러나 4년 후 무인정사이방원에게 죽는다.[21] 지금의 삼척시 원덕읍 동막리와 근덕면 궁촌리로 가는 고개. 공양왕이 살해된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공양왕릉과 지척간이다. 궁촌 1리 마을회관 근처.[22] 참고로 사위인 우성범(禹成範)과 강회계(姜淮季)는 공양왕이 폐위되는 1392년 7월에 참수당했다.[23] '식사동'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공양왕을 알아본 동네의 승려들이 먹을 것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골'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한자로 변해 '식사동'이 되었다고 한다. 전승에서는 공양왕이 '승려들이 정신을 차려 보니 곱게 죽어 있었다'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이곳에서 조선 측의 추격자들에게 피살된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24] 살아 있을 당시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니 시호라기보다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호처럼 존호(尊號)로서 부여된 것이다. 물론 사망 후에는 '공양왕'으로 추봉되기 전까지 그게 그대로 시호에 준하는 것으로 간주됐을 것이다. 어차피 존호도 시법에 따라 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법상 군주의 자리에서 물러나 남에게 그 자리를 넘긴 사람에게 주는 글자들로 구성된 '공양'군도 여기에 해당된다.[25] 여담이지만 시호가 비슷한 공민왕도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여서 일을 망친 적이 있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고.[26] 뒷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살아남을 확률은 고분고분하게 선양하고 넘기는게 훨씬 높았다. 사실 대대적인 왕씨 숙청이 벌어진 근본원인이 이성계의 즉위가 선양도, 반정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였기 때문인데, 조위 마지막 황제 조환과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처럼 순순히 선양했다면 명분이 확실해서 다른 왕씨는 죽어도 공양왕 본인은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입장에서도 민심도 잃지 않을겸 명분과 정통성을 위해서 공양왕은 살려두되 모략을 꾸미지 못 하도록 수족은 다 잘라버리는 형식이 일석이조인 셈.[27] 김유신과 신라 태종 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는 구형왕의 증손이다. 즉, 문무왕은 구형왕의 4대손.[28] 경순왕은 탐라 자견왕보다 한술 더 나아가서 이후 왕건의 장녀인 낙랑 공주와 혼인했으며, 그의 백부의 딸은 왕건과 혼인했다. 그녀의 손자가 고려 현종인데, 이후 고려의 왕은 공양왕까지 모두 이 사람의 후손이다. 거기다 경주 김씨는 김부식 대에 이르러 고려의 주요 귀족 가문으로 부상하며, 조선 시대에도 왕비까지 배출한 주요 양반 가문 중 하나였다.[29] 백제의 경우 마지막 임금이 풍왕이냐 의자왕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 시대의 사학자 순암 안정복은 그의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풍왕의자왕에 이은 백제의 왕으로 인정, 기록했으며, 아울러 나당 연합군의 사비성 함락 이후 3년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사를 백제 역사로 포함시켰다.[30] 하지만 사직 멸망 후 당나라로 끌려간 뒤 사망한 기록과 연도가 상세하게 적혀 있는 고구려 보장왕, 백제 의자왕과 달리 풍왕과 대인선은 백제와 발해가 망한 이후 당나라, 요나라로 압송되어 끌려갔지만 이후 어떻게,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혀 없다.[31] 왕건에게 쫓기던 중 농민들에게 맞아 죽고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 시기 내내 일방적으로 격하된다.[32] 왕위에 오르자마자 1년도 안돼 나라가 고려에게 멸망, 흡수당한 후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조차 없다.[33] 참고로 후백제의 신검 같은 경우는 왕건이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는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끝까지 왕건에게 저항했던 신검이 좋은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실제로 이 설을 채택해서 왕건이 신검에게 벼슬을 내렸다가 마음을 바꾸어 신검 형제에 대한 처형을 명령하는 내용으로 그렸다.[34] 발해가 요나라의 침공으로 멸망당한 후 망한 발해 대씨 왕족 후손이란 명분을 앞세워 발해 유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아 옛 발해 땅에서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요가 지배하던 옛 발해 땅 일부 지역을 점령, 장악하는 데 성공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왕위에 올라 요나라에게 대항했다가 요나라 대군의 공세와 내부 배신으로 1년도 채 못가고 요나라에게 멸망당한다.[35] 자신의 아버지가 신라 왕이 되지 못했다는 것에 분노가 폭발하여 신라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결국 자결한다.[36] 적국 고구려의 호동왕자와의 사랑에 눈이 멀어 적국으로 배신을 하려던 낙랑공주를 죽여가며 사직을 지키려다 고구려한테 나라가 망해버린다.[37] 역사가 불분명한 최씨낙랑국 제외.[38] 이성계는 공양왕을 선택했으나 조준과 성석린은 그가 왕도를 모른다며 반대했다.[39]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는 표(表)이고 제후에게 올리는 문서는 전(箋)이다.[40] 해 아래에 있는 오랑캐의 땅.[41] 일종의 세습이다. 왜 정원(定原)을 쭉 봉하지 않았냐면 고려는 원칙적으로 세습을 금지했기 때문. 그래서 지명을 조금씩 바꾸어 편법으로 봉지를 이어갔다. 유일하게 같은 지명으로 세습 된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로, 추존의 의미로 같은 지명을 봉한 것이다.[42] 성우 김영선과는 동명이인이다. 성우 김영선은 <용의 눈물> 방송 당시 MBC 전속 신인성우였다. 다만 MBC 특기인 원로성우 정승현이 이 드라마에서 정몽주 역할로 나오기는 했다.[43] 결국엔 이성계에게 자신의 목숨만이라도 보전해달라는 조건 하에 왕이 되겠다고 제안하지만, 이마저도 상큼하게 씹힌다.[44] 고우영의 만화 오백년에서는 이것보다 더 비참하게 연출되었다. 자신을 죽이러 온 사자들에게 "내가 스스로 죽겠다. 칼을 다오"라고 외치는 것을 군사들이 씹고 강제로 달려들어 목을 졸라 죽였다. 고우영은 이를 두고 "죽음마저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던 공양왕. 그가 평생 왕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나?"라고 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