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준생
安俊生
1907년 ~ 1951년
일제의 지시에 따라 안중근 의거 30주년인 1939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유족에게 사죄를 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 영웅인 안중근의 차남[1] 이다.
1907년생으로 아버지인 안중근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 4세 때 부친을 잃고 불령선인으로 찍혀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다. 형 안문생[2] 는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어머니는 안준생을 이끌고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다,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상해에 정착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 때문에 급히 상해를 떠났으며 안준생 일가는 남겨진다. 이후 일본군이 이들 가족을 찾아냈고, 그의 가족들은 일본의 감시하에 살아야만 했다. 안준생이 서른이 돼서도 일본의 탄압때문에 회사에서 일 할 수조차 없었고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미나미 지로 총독이 그에게 다가왔다....'''
미나미 총독은 그를 찾아와 서울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후로는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는 일제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으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도 대서특필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반겼던 조선인들으로부터 '''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더러운 개'''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바로 죽여야할 대상이라 말하며 중국 측에 처벌을 요청했으나 중국 측이 이를 면제하게 되었다.[3]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를 갈던 중국에서도 안준생을 별로 반기지 않았고, 결국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에 안경근과 안춘생, 그리고 몇몇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병으로 죽었다.
안중근의 친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는 달리 '''매국노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중앙일보나 조선일보는 형 안문생이 독살된 것처럼 자신도 늘 위협에 시달렸다는 걸 들먹이며 옹호 기사를 썼다.
안준생을 다룬 소설로 前 국사 편찬 위원장 이태진[4] 이 쓴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가 있으며,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사실은 사죄하는 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일부 독립운동가도 친일을 옹호하는 글이 있지만, 대부분 독립운동가 본인이 쓴게 아닌 '''일제가 독립운동가의 명의를 도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재기되는 주장. (캡쳐본,유튜브)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MBC가 취재한 인물들의 주장이라 많은 검토가 필요한 상황.
독립운동에 투신한 안중근 일가가 안준생과의 연을 끊지 않았던 점을 거론하며 근거가 있다고 주장도 있는데 일제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독립운동한다고 서로 사이 좋은것도 아니고, 오늘날 반민족행위자라고 분류된 소위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도 무척 흔하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가족을 지원해 준게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일본 육군 중장 홍사익이었다. 그들의 동기이자 일본 육군 대좌 이응준은 장인 이갑이 독립운동가였고, 이들의 육사 1년 후배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종혁은 수감을 마치고 산송장이 되었을때 동기 김석원 육군 대좌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자칫하면 서로 총부리 겨누게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이랬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후 일제때 금광부자가 된 친일성향의 최창학이 마련해준 경교장에서 지냈고 그의 저작 백범일지를 윤문해준 사람은 그 이광수였다.
그리고 안준생의 그 당시 처했던 상황도 고려해봐야하는 것이 당시 일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아직 한반도에서 살고 있으면 앞서 말했듯 취직제한에 계속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했고 임시정부가 그들을 데리고 보호했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피난을 가버리고 일본군이 찾아내어서 그들을 탄압했으니 안준생은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고 가난 앞에서는 본인도 힘들어서 일제가 반강제적으로 그를 회유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안준생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그의 친일행적에 관한 논란은 역사학자들이 조사를 통해 평가해야지 섣불리 친일의혹이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안준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안웅호 1933년 ~ 2013년)이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다. 아들이 미국에 건너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안준생이 숨진 후의 일이고, 작은 딸은 어린 나이에 아예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 아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할아버지 안중근의 독립 운동을 추모하며 살았다. (미주한국일보)
정진석 추기경의 5촌 고모가 안준생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 아들과 추기경은 6촌간인데다 정진석의 작은 할아버지도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해서 정진석과 아들 안웅호와는 어릴 때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서울 대교구 보도 자료)
1907년 ~ 1951년
1. 개요
일제의 지시에 따라 안중근 의거 30주년인 1939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유족에게 사죄를 했다는 의혹을 받는 인물이다. 한국의 독립 운동가 영웅인 안중근의 차남[1] 이다.
1907년생으로 아버지인 안중근이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 4세 때 부친을 잃고 불령선인으로 찍혀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다. 형 안문생[2] 는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어머니는 안준생을 이끌고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다, 상해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상해에 정착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 때문에 급히 상해를 떠났으며 안준생 일가는 남겨진다. 이후 일본군이 이들 가족을 찾아냈고, 그의 가족들은 일본의 감시하에 살아야만 했다. 안준생이 서른이 돼서도 일본의 탄압때문에 회사에서 일 할 수조차 없었고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미나미 지로 총독이 그에게 다가왔다....'''
2. 친일 의혹
미나미 총독은 그를 찾아와 서울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히로쿠니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후로는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는 일제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으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도 대서특필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반겼던 조선인들으로부터 '''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더러운 개'''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바로 죽여야할 대상이라 말하며 중국 측에 처벌을 요청했으나 중국 측이 이를 면제하게 되었다.[3]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를 갈던 중국에서도 안준생을 별로 반기지 않았고, 결국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에 안경근과 안춘생, 그리고 몇몇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병으로 죽었다.
안중근의 친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는 달리 '''매국노에 친일파'''로 변절했다. 중앙일보나 조선일보는 형 안문생이 독살된 것처럼 자신도 늘 위협에 시달렸다는 걸 들먹이며 옹호 기사를 썼다.
안준생을 다룬 소설로 前 국사 편찬 위원장 이태진[4] 이 쓴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가 있으며,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3. 반론
사실은 사죄하는 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되었다는 말이 나왔다. 일부 독립운동가도 친일을 옹호하는 글이 있지만, 대부분 독립운동가 본인이 쓴게 아닌 '''일제가 독립운동가의 명의를 도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재기되는 주장. (캡쳐본,유튜브)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MBC가 취재한 인물들의 주장이라 많은 검토가 필요한 상황.
독립운동에 투신한 안중근 일가가 안준생과의 연을 끊지 않았던 점을 거론하며 근거가 있다고 주장도 있는데 일제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독립운동한다고 서로 사이 좋은것도 아니고, 오늘날 반민족행위자라고 분류된 소위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도 무척 흔하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가족을 지원해 준게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일본 육군 중장 홍사익이었다. 그들의 동기이자 일본 육군 대좌 이응준은 장인 이갑이 독립운동가였고, 이들의 육사 1년 후배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종혁은 수감을 마치고 산송장이 되었을때 동기 김석원 육군 대좌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자칫하면 서로 총부리 겨누게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이랬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후 일제때 금광부자가 된 친일성향의 최창학이 마련해준 경교장에서 지냈고 그의 저작 백범일지를 윤문해준 사람은 그 이광수였다.
그리고 안준생의 그 당시 처했던 상황도 고려해봐야하는 것이 당시 일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아직 한반도에서 살고 있으면 앞서 말했듯 취직제한에 계속 감시를 받으며 살아야했고 임시정부가 그들을 데리고 보호했으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피난을 가버리고 일본군이 찾아내어서 그들을 탄압했으니 안준생은 굉장히 힘든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크고 가난 앞에서는 본인도 힘들어서 일제가 반강제적으로 그를 회유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안준생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보기에는 어려우며 그의 친일행적에 관한 논란은 역사학자들이 조사를 통해 평가해야지 섣불리 친일의혹이 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4. 가족관계
안준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안웅호 1933년 ~ 2013년)이 미국에서 의사가 되었다. 아들이 미국에 건너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안준생이 숨진 후의 일이고, 작은 딸은 어린 나이에 아예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그 아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할아버지 안중근의 독립 운동을 추모하며 살았다. (미주한국일보)
정진석 추기경의 5촌 고모가 안준생과 결혼했다. 그래서 그 아들과 추기경은 6촌간인데다 정진석의 작은 할아버지도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해서 정진석과 아들 안웅호와는 어릴 때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서울 대교구 보도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