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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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錫源 1893-1978
1. 개요
2. 해방 이전
3. 해방 이후
4. 퍼포먼스
5. 능력
6. 이야깃거리
7. 백범과의 일화
8. 대중매체에서
9.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 생도,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의 군인, 대한민국군인, 교육인, 국회의원.
창씨개명 때 쓰던 이름은 가네야마 사쿠겐(金山錫源)으로 석원을 그대로 읽은 것이다. 가네야마(金山)는 김씨들이 일본에서 통명으로 가네다(金田)와 더불어 많이 썼던 이름이다.
성남고등학교의 설립자로서 2003년까지 학교에 동상이 남아있었으나, 일본제국 육군 고급장교전력이 문제가 되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민족문제연구소, 시민단체들의 반발로 교내의 과거 관사로 쓰였던 곳에 옮겨놓았다(학교측에서 잠가놓고 비공개 중). 마찬가지 이유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회고록에 쓴 대로 가장 큰 불명예로 남은 셈.
그의 차남 김영수도 일본육사를 졸업해 44년에 임관, 육군 중위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1945년에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전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어떤 경우는 무지했던 탓으로 또 어떤 경우는 올바른 인생관과 올바른 세계관을 못 가졌던 탓으로 그동안 내가 저지른 잘못은 많다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이유야 어쨌든 일제식민지시대에 오래토록 일본군인 노릇을 했다는 것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큰 불명예'''라 생각되는 것이다. -자서전 중


2. 해방 이전


1893년 9월 29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909년에 대한제국군 유년학교를 졸업하고 무관학교가 폐지되어 유년생도를 일본 육사로 유학을 보냄에 따라 1915년에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로 졸업하였다. 보병으로 근무했으며 만주사변중일전쟁 등에 참전하였다. 중일전쟁 초창기 산시성 일대에서 2개 중대로 중국 국부군 '''1개 사단'''을 쫓아버리는 전공[1][2]을 올려 한중일 삼국에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당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기사. 이종찬과 더불어 금치훈장(공 3급: 공로가 있는 영관, 위관의 최상위 공급)을 수여받은 단 두 명의 조선인 중 한 명이다.
일본 패망 당시에 계급이 대좌로 당시 생존한 조선인 일본군으로는 영친왕(중장), 홍사익(중장)에 이어 다음이었다. 이응준도 대좌였는데 이응준이 일본육사 26기로 한 기수 선임이었다. 홍사익이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되었고 영친왕이 귀국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일본군 출신 군경력자 가운데 이응준과 더불어 최고 계급자이며 중국군이나 광복군 출신까지 포함해도 이 정도 경력자는 드물었다.[3]
교육에 관심이 컸는지 1938년 기업인 원윤수와 함께 원석학원이라는 학교법인[4]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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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약! 군문에 진입하라. 홍대무변(鴻大無邊)한 황은에 보답하는 길은 성스런 싸움터에 나가 죽을 각오로 영, 미 귀축의 적을 때려잡는 데 있다"

'이런 취지의 강도 높은 열변이 히틀러식으로 한두 마디 웅장하게 발성될 때마다 박수가 연발 터져 나왔다. 진짜 순도 높은 황군의 최선두답다. 반 시간 남짓의 열변이 토해지는 동안 청중들의 박수가 10여 차례나 장내를 진동시켰다.'

- 부민관 학병권유 강연회에 관한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기사.

태평양 전쟁 때는 이응준과 함께 학병참전 권유 강연회를 다녔다고 한다. 그가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일본제국주의의 화신'이란 비난을 받은 이유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자사전 <망향>을 보면 일제시대 학도병징집에 불응하다가 마지못해 지원하니 ""내 구두 심문관은 한국인 출신 金山錫源 중좌 였다. 심문중 내가 입대를 피하려다 나중에야 지원했다는 것을 나무랐던 것을 후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다."라고 되어 있다.

나는 이종혁과의 오랜 해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회를 맛보았다. 우선 이종혁을 바로 쳐다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김석원은 일본군에 투신한 조선군인들에게서 엿보이는 복잡한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잘 보여준 인물이다. 일본군을 떠나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 기수 선배 '''김경천지청천의 가족'''[5]을 보살펴주었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반송장이 되어 돌아온 육사동기 이종혁을 보고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숨기지 않으며 그를 도왔다'''. 1944년 평양에서 강제 징집된 학생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투쟁을 벌이려다 체포된 평양 학병의거 재판 때는 맨 마지막까지 재판정에 남아 지켜보다 형이 확정되자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6] 훗날 회고록에서 일본군 복무 경험을 "무엇이 옳은지 분간 못하고 철없던 시절의 불명예로 여긴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친일경력 및 의혹에 대해 자기합리화나 일언반구 없이 일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인 셈.
일제 당시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전의회(全宜會)의 등사판 인쇄회보 기관지인 전의회보(全宜會報) 발행인은 1917년까지는 홍사익, 18년이 이응준, 20년에 다시 홍사익으로 돌아가 22년까지 계속되고 다음이 김석원으로 되어있는데 항일운동 중인 지청천, 김광서의 가족에 대한 지원 부분와 두 사람에 대한 간접 응원이 서술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본인에 대해서는 '''"김석원은 여러분이 이미 다 아시다시피 다만 빵을 구하기 위해, 살아가기 위해 무의미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상태"'''라 기술하여 당시 그의 복잡한 심정을 보여준다.

3. 해방 이후


광복 후에는 이응준이 이끈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여하였으나 정부수립이 되어 국방경비대가 국군으로 변화하던 무렵까지 본인의 일제 부역을 자숙하며 군외에 남아있었다.[7] 하지만 이승만이 국내외[8]의 추천을 받은 후, "그 김석원이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아직도 군에 복귀를 안했단 말인가?"라며 복귀를 지시, 다시 대령으로 특별임관해 보병 1사단장으로 보임하였다.
1949년에 제1보병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중 남북간 밀무역에 문제가 있다 판단한 김석원이 북한에서 토성으로 넘어오던 명태를 트럭째 죄다 압수해서 임의로 처분한 다음 병사들에게 부식, 과일, 과자, 음료수를 지급한 일이 있는데 일명 '명태사건'이라 한다. 이 밀무역에는 한국 군/관 고위층이 다수 얽혀있었고, 김석원은 이승만 앞에서 채병덕 당시 육군총참모장을 거론했다가 둘 다 예편됐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시영 부통령을 찾아가 의용군이라도 모집해서 공산군을 막겠다고 했고 이 부통령은 찬성하며 중앙청까지 동행하여 재무장관을 만났으나 재무장관은 대통령 각하의 지시가 없으면 안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수원, 대전을 거쳐 피난을 가서 대전에서 신성모의 위촉으로 수도사단사단장(준장)으로 복귀했다.
직후 벌어진 진천 전투에서 사단 CP를 격전지 중 하나인 문안산으로 옮겨 일본도를 들고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져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9] 하여간 이 위험을 무릅쓴 덕분인지 북한군 2사단의 남진을 7일간 저지해 냈으며, 이는 서부전선 사단급 부대에서의 첫 승리(목적 달성)이기도 했다.
또한 이후 그가 지휘한 포항 철수작전도 군관민이 합동으로 단 1명의 잔류자 없이 철수한 사례로 유명하다.[10] 하지만 이 과정에서 모두 진이 빠져버렸고, 그의 회고록에서도 작전 종료 후 참모장 공국진 대령, 통신부장 동홍욱 대위 등이 모두 병상에 누웠고, 그 또한 지병인 위경련으로 병상 위에서 링겔 주사를 맞아야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부군단장 김백일 준장이 나타나 이 모습을 보더니 노장군 안위가 염려스럽다며 얘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군단장은 김백일로 변경되고 사단장은 백인엽으로 교체되었는데, 이 인사조치는 6.25 전쟁 발발 이전부터 그를 곱게 보지 않았던 미군 지휘부와의 마찰이 주 원인이이라는 견해도 있다.

8월31일. 상오10시부터 정오까지 국무회의가 열렸다. 징병법이 확정 발표됐다. 신성모국방장관이 대구에서 왔다. 그는 대통령에게 김석원·김홍일 두 지휘관을 갈 것을 권했다. 이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므로 교체해야 한다고 「콜터」장군이 고집한다는 얘기였다. -정일권 회고록

이후 1950년 9월부터 1951년 9월까지 '''전시특명검열단장'''으로 부관 및 휘하장병 일부를 운용하며 전후방 부대를 검열하였으나 1951년 9월부 육군본부 로 명령받으면서 1956년 소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할 때 까지 부관1명, 운전병1명만 배치된 무보직 장군으로 있었다. 당시 수 차례 예편원을 제출하였으나 그가 예편하면 국회의원으로 출마할까 하여 이승만 정권에서 막았다는 설이 있다.
1956년 '''64세'''로 예편하였고 성남고등학교 교장, 제5대 국회의원(무소속.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으로 활동하고 1978년 85세로 사망.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1977)이 있다. 옛날 책이라 어지간한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려우니 국립중앙도서관을 이용하자. 또 그가 세운 학교인 성남고등학교의 도서관에는 이 책이 여러 권 비치되어 있다.

4. 퍼포먼스


  • 6.25 전쟁기에도 트레이드 마크인 카이젤 콧수염을 기르고 일본도를 차고 다니며 최전선까지 나가 진두지휘하는 것으로 유명했다.[11] 이는 진천 전투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수도사단장에 막 취임해 진천을 방어하려고 충남 조치원을 지나가던 무렵 피난민 대열에 섞인 국군과 경찰 장병들을 만났다. 이에 그는 군도를 뽑아들고 "군경들아! 나는 수도사단장이 될 김석원이다. 그대들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거늘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대들의 후퇴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늙으신 부모님들이 얼마나 고통을 겪을 것인가! 돌아서라! 김석원이 앞장설 테니 북으로 가자!"라고 연설해 장병들을 규합시켰다.
  • 수도사단장 취임 후 잣고개 일대의 고지쟁탈전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김석원은 18연대가 지키던 문안산으로 사단 지휘소를 옮긴 뒤 일본도를 들고 "사단장이 여기 있는데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져버릴 텐가?" 라며 18연대 장병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반면 미군 군사고문관은 위험하다며 2km 후방으로 물러날 것을 종용했는데, "(저들은) 나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소."라며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12][13]
  • 채명신의 회고록에 소개된 일화로, 개성 송악산 전투 당시 1사단장 김석원 대령이 전선시찰을 나왔는데 당시 중대장인 채명신 대위가 무전기로 통화하는 것을 호기심있게 쳐다보더니 '전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일본도를 빼들고 대대포는 토치카를 쳐라 라고 일본어로 외쳤다는 일화가 있으며 총탄이 빗발쳐서 중대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지에 앞장서서 올라가면서 나를 죽일 총탄을 적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라고 말하는 등의 일화 등이 남아있다. 채명신은 그러한 김석원의 쇼맨십이 장병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뢰감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자신도 뒷날 지휘력에 있어 많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수도 18연대장이었던 장춘권 장군도 김 사단장의 진두지휘와 독전이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주어 진천 전투를 승리할 수 있었다고 역시 말하고 있다.
  • 4.19 혁명 당시 성남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당시 시국 때문에 경찰에게 학생들 관리 똑바로 하라는 말을 듣자 오히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며 따지기도 했다. 교장으로 있던 당시에 예비역 소장으로 진급되었는데 훈시 시간에 운동장에서 학생들에게 "이 별은 부패하고 정신이 썩어빠진 놈들이 주는 것이라 받을 수 없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받은 별을 분질러 내던졌다고 한다.

5. 능력


일본군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무조건 공격, 아니면 무조건 사수를 고집했다고 평가하는 오류[14]가 있다. 49년 미 군사고문단 보고서에 의하면, 작전을 짤 때 예비대를 두지 않았고 경계순찰도 없으며 제대로 된 저항선조차 구축하지 않아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공격하면 사단이 붕괴할 위험이 크다고 강도높게 비판하며 초급장교만도 못한 수준이라고 비판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예비대도 하나도 없고 경계 순찰도 없으며 김석원의 후임으로 온 유승렬, 백선엽은 반대로 예비대를 확보해놨다고 적혀 있다. 부패, 공금횡령 등으로 제거 1순위라는 평가는 덤.
물론 이는 김석원과 미군의 사이가 썩 원만하지는 않았음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당시는 한국군 사단장이 위관급 미군 고문관을 상석에 모시고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일본군 군사고문을 겪어봐서 미군 군사고문의 지도에 익숙한 만주군 출신 젊은 장교들과 달리 김석원은 연배와 계급이 높아 미 고문단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그저 고문관으로 대했으며, 잘못되었다 싶으면 거리낌없이 불호령을 내리던 사람이라 미군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았다. 부패나 공금횡령은 명태사건 뒷처리 방식만 봐도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당시 황해도부터 동해까지 260km가 넘는 거리를 겨우 4개 사단이 담당했고, 이를 보조할 경찰도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김석원의 1사단이 1948년 11월부터 책임진 구역은 황해남도 청단~경기도 고랑포까지, 전체 전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94km에 달했다. 게다가 개성 인근이었기 때문에 송악산 전투 등 더 많은 교전을 치러야 했다. 미군들이 지적한 예비대 배치 미비건은 사실 예비대를 만들 여건이 안 되었던 것이며, 당장 38선의 소규모 교전들에 대응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후임자들이 예비대와 방어선을 갖춘 것도 사단 방어정면을 다시 1/3로 줄였기에 가능했다.[15]
김석원의 능력을 낮게 보는 국내 증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가 몸 담았던 일본군 자체가 전간기식 군대였던 데다,[16] 식민지인으로서 대좌까지 진급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만큼 소신이 매우 강했고 나이가 많아 미군이 요구하는 입체적 현대 전술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 등 일본군 출신 노장의 단점과 한계가 없진 않았다. 특히 대륙전선 일본군은 연대급 제대별로 각종 기만과 응급대책, 기동을 통해 중국군을 제압 후 지역을 장악하는 식의 전술을 구사하며 심지어 화공과 허허실실과 공성지계 등 현대 군사작전이라기보단 근대 이전 삼국지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김석원을 논할 때 꼭 나오는 "중국군을 허세로 물리쳤다"던가, "패잔병들을 수습해 돌아서게 했다"던가, "포항 철수작전에서 빈 트럭을 왕복시켜 적을 기만했다" 같은 이야기가 딱 이 스타일이다. 정일권의 회고록에도 김석원에 대해 일본군 출신의 고루한 전술을 사용한다는 고문관의 의견과 이승만 대통령의 염려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진천 전투, 포항 철수작전 등에서 보여지듯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재주가 탁월했고 작전계획도 세심하게 짰다고 한다. 창군기부터 3사단 고문관을 역임한 애미리크 중령이 1951년 김 장군을 찾아와 '''3사단 수석고문관 재직 2년 몇개월간 모신 13명의 사단장 중 김 장군만큼 애국심 강하고 멋있는 작전계획에 따라 훌륭한 지휘 통솔을 하는 사단장도 드물었다''' 며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김 장군은 이것으로 미군과의 불화설도 조금은 해명되지 않겠느냐며 회고록에서 자평했다. 실제 그의 포항철수작전은 미군 지휘부의 극찬과 함께 한국군에 대한 신뢰를 얻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진천 전투는 당시 수도 18연대장 장춘권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대규모 부대가 북한군과 제대로 교전하여 승리한 전투인데 김석원 장군의 진두지휘와 적절한 작전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군 보고서가 아닌 국내 자료들, 즉 채명신 장군 회고록 <사선을 넘고 넘어> (p.71-74)와 이재전 장군의 국방일보 기고문 등 당시의 여러 초급 장교들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김석원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솔선수범, 과감한 지휘로 지연전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으며 젊은 장병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백선엽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김석원이 수도사단장으로 복귀했다고 하니 자기 아래에서 그에게로 가는 부하들이 많았다고 적었다. 본인은 전시에 자신이 믿는 상관 밑에서 싸우겠다는데 말릴 수도 없어서 그냥 가게 했다고.
김석원의 명성은 장교만이 아니라 당시 병사들의 참전수기 등에서도 공통으로 증언되는 이야기이다. 일례로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한 71명 학도병들은 원래 김석원 휘하 수도사단에 배치되었는데, 김석원이 3사단장으로 임명되어 떠나게 되자 그는 '''"학도병들이 무장해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고 집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하지만 이들 71명은 자신들을 받아준 김석원 밑에서 계속 싸우기 위해 포항까지 찾아갔다. 김석원은 이들을 반기며 후방 사령부가 있는 포항여중으로 보냈다. [17]

'''김석원 장군이 제3사단장으로 전임되자 우리 학도병들은 그분을 따르기로 작정을 하고''' 8월 8일에 포항에 도착했습니다. 포항여중에 있는 3사단 사령부로 찾아갔는데, 거기에는 김대의 대위가 연락장교로 사병 몇 명을 데리고 와있었고, 그밖에 20여명의 군악대원 밖에 없었어요. 이날로 M1을 지급받고 이튿날 대원을 데리고 시내를 구보로 달리다가 안강전방 CP로 가는 김석원 사단장을 만났어요. 반가와하시면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합디다. - 한국전쟁사 CD(2003/육군 본부, 육군교육사령부)에 수록된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 학도병의 증언.

요약하자면, 김석원은 작전계획능력은 전간기에 머물렀으나, 작전시행능력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리 계획을 정밀하게 짠다고 해도, 그 계획을 시행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김석원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지속된 38선 인근 분쟁으로 소모되고 훈련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병사들의 능력을 120% 이상 끌어내 무훈을 세웠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교리에 머물러있던 일본군의 풍모를 간직한 구시대의 노장이라는 한계도 분명했다. 다행히도 그 구시대적인 교리가 아직 유용하던 시점에 조국에 공헌할 수 있었고 시대와 더 어긋나기 전에 일선에서 물러났다.

6. 이야깃거리


한국전 개전 당시 예비역이었던 김석원 준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의 김홍일 소장에게 도와줄 일 없냐며 찾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 그가 수도사단장 (준장)으로 복귀하자 1사단 시절 그의 예하에 있던 수많은 장교들이 김 장군 밑으로 가겠다고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백선엽의 회고록에 나온다. 그러나 이후 김석원과 김홍일의 관계는 썩 원만하지 않았다 한다. 지연전을 지휘하는 김홍일 장군과 공격을 선호하는 김석원 장군 간의 지휘방식 차이가 컸고 진천 전투에서도 사단장이 전선에 나가 연락이 되지 않아 군단장(김홍일 장군)이 직접 수차례 방문을 해야했다고 한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 형성기에 신성모 장관이 김석원 장군과 얘기를 나누며 일본군이라도 데려와야겠다 해서 김석원 장군이 동의를 하니 김홍일 장군이 밖에서 듣고 화를 내며 텐트로 들어가 해방된지 얼마인데 또 다시 일본군이냐고 버럭 화를 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김석원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 김홍일 장군 1군단장 해임 조치 관련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등 김홍일 개인에 대한 큰 악감정은 없었던 듯 하다.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의하면, 말년에 일본 육군 장교 출신들의 친목회에 초청받자 전사한 아들을 두고 "전장에서 죽는 것은 군인의 숙원이므로 아들은 만족했을 것이다"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회고록 "노병의 한"에서는 아들의 인간 됨됨이가 너무 안타깝다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가 국군에 입대하여 한국전쟁에 임했다면 일제에 부역한 과오를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을 거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않았다.
북한에서는 김석원의 국지전 경력을 '''남한의 북침''' 사례로 악용하곤 했으며, 간혹 일제시절 '''김일성'''이 함흥에서 김석원을 패퇴시켰고, 그가 적전 도주까지 했다고 선전한 적이 있지만 일단 김석원은 그 시기 함흥에 없었다. 그럼에도 김일성이 일제 앞잡이인 그를 물리쳤다는 주장을 계속하는 이유는, 1. 김석원이 당시 전공으로 제일 유명한 일본 육사 출신 한국인이었으며, 2. 친일이라는 악명으로 '''약점을 공격-선전하기에 매우 유리'''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즉, (과거 행적에) '''약점이 있는 유명 적장'''을 물리친 전적을 선전하려는 의도이나, 실제로 적전도주했던 사람은 9사단장 최석이며,[18] 김일성 부대와의 교전 기록은 '''북한측 주장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에는 해당 자료가 없다'''.
유원식의 저서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서 '김석원 적전 도주설'을 줄기차게 인용하는 사람들(ex: 친일파 99인 - 민족문제연구소)도 있는데, 이 또한 모함이다. 원 저서의 신뢰성 자체가 의심된다는게 정설. 김석원에 대한 아래 사례들을 보면 의심할 수 밖에 없다.
1.이후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승만의 초청으로 장개석이 방한한 일이 있었는데, 이승만이 장개석에게 "국군에 인물이 없어 걱정이오"라 하자 장개석이 "왜 없소 그 김아무개가 있지 않소"라해서 이승만이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2. 6.25 전쟁 개전 당시 예편한 민간인이었으나 피난하지 않고,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을 찾아간 후 현역으로 복귀하여 수도사단장에 임명되었다.
3. 육군본부는 한미 연합군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북한군 제2사단을 3일간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고, 김석원과 부하 장병들은 진천을 7일간 사수해 시간을 필요 이상 벌었다. 그러나 국군 제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하면서, 수도사단도 전선 균형 유지를 위해 철수 명령을 받아 청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4. 진천 전투 이후 북한군 2사단장 최현[19]은 '''"또 그 놈과 만나 이 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며 불평하였다고 한다.[20]
6. 이런 일화도 있다. 전선에서 후퇴하는 병사들을 보고는 불러 모아 모두 무릎꿇게 하였다. 헌병들은 계속 후퇴하는 병사들을 잡아 왔는데 "명령없이 후퇴한 너희 놈들도 이리와서 무릎을 꿇어!"하고 외치며 몽땅 꿇게 하였다. 이때 연대장 최석용 중령(만주군 출신)이 "연대장인 제가 후퇴명령을 했습니다. 책임은 저에게 있으며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라며 연대장이 말하자 그제야 "연대장이 철수명령을 내렸다면 좋소"라며 용서하였다. 당시에 김석원은 군법에 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기는 했지만 실제로 군법에 처하거나 엄단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즉흥 연설이나 부상병 하나하나 손 잡고 위문하며 병사들 사기 단박에 끌어올린 증언만 한 다스다.

7. 백범과의 일화


해방 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백범이 귀국하자 그는 일본육사 26기 동기들과 경교장으로 찾아갔다 한다.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군정청의 급한 일이 생겨서 집을 막 나서던 백범과 마주쳐서 한 사람씩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김석원이 자기를 소개하자 백범이 '''"김석원? 아 그렇지. 내 김 동지 얘기는 많이 들었소. 반갑소. 이제 광복이 되었으니 우리 힘을 합쳐서 한번 잘해봐야지. 하하하."''' 그러면서 손을 굳게 잡고 흔들었다 한다. 회고록에서 김석원은 백범과는 초면이었는데 내 이름을 아는지 고마웠고 그때 같이 갔던 동기들이 매우 의아해 했다고 한다.[21]
그는 이승만보다는 배포가 큰 것 같은 백범에게 심리적으로 더 쏠려있는 형편이었고 백범과 가까이 지냈다 한다.
백범이 이후 남북협상을 위해 북으로 떠나기 전 찾아가서 '''"선생님, 이번 남북협상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며 만류했으나, 다행히 아무 일 없었고, 그 뒤 김석원을 불러 얘기하기를, '''"평양의 을밀대에서 그들의 군사훈련하는 광경을 봤는데 문득 김 동지 생각이 생각이 나더군. 내가 군대에 대해 뭘 알아야지. 아마 김 동지하고 같이 가서 봤더라면 우리에게 많은 참고가 되었을거야."'''라고 했다 한다.
자서전 "노병의 한"에서 '''백범이 정권을 잡았더라면 나라 일이 좀 더 잘 되었을 거란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고 술회하며 이 박사 집권 후 백범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백범 생전에는 위로를 겸해서 가끔씩 찾아가는 것과 백범 사후 한식과 추석에 성남중고교 학생들을 대동하고 묘소를 청소하고 참배한다는 사실 뿐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8. 대중매체에서


  • 1985년작 KBS1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윤덕용이 연기했다.

9. 관련 문서



[1] 일부러 무전을 크게 틀어놓고, 지원이 곧 온다는 가짜 정보를 흘린채 부하들과 왁자지껄하게 먹고 마시는 기만전술을 펼쳤다. 여기에 넘어간 국부군은 진짠가 보다 싶어서 후퇴했다.[2] 물론 국부군의 사단 대부분이 알보병만 갖춘 3~5천명 선의 부대도 대거 있었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사단과 동일시해선 안 되지만 그럼에도 몇십배의 차이다.[3] 당시 중국군의 김홍일 소장, 박시창 대령, 최용덕 공군상교 (육군 중장 대우), 일본군의 영친왕 (중장), 홍사익 중장이 육군대학을 졸업한 군사경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야전으로는 중일전쟁에서 사단급제대를 지휘하여 대규모 회전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김홍일 소장과 반대 진영(일본제국 육군)에서 1개 대대(2개 중대)로 사단병력을 물리쳐 용명(?)을 떨친 김석원이 전투 경력으로는 제일이었다.[4] 성남고등학교의 전신이다.[5] '''이건 칭송받아 마땅한 행동이다.''' 김경천과 지청천이 누구인지는 문서를 참조해 볼 것. 만약 김석원이 마음을 바꿨으면 일제로부터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음과 동시에 뼛속까지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을 것이다.[6] 이 사건을 주도해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전상엽 씨의 증언이다. 함께 재판받은 태권도 원로 최홍희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7] 이건 이종찬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꽤 많은 일본 육사 출신 장교들이 자숙의 의미로 정부수립 직후에는 군문과 떨어져있었다.[8] 중일전쟁 당시 김석원을 알게 된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이 '한국에는 김석원이라는 용맹한 장수가 있다'며, 인재 부족을 토로하는 그에게 그를 천거했다고 한다.[9] 하지만 미 고문단은 최고 지휘관이 사망하면 어쩔 거냐며 반대했다고 한다.[10] 그 전의 안동 철수 작전은 미8군과 국군 1군단의 무리한 명령 때문에 실패했다. 미8군이 명령 내리고 군단에서 4시간 회의하다 보니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이었대나.[11] 여러모로 열악한 창군초기라 장교들에게 따로 권총이 지급되지 않았다. 때문에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교들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일본군도를 패용하거나 망토를 착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허나 미군 고문관들은 일본군을 연상시키는 이런 행동을 질색했다.[12] 물론 최고 지휘관이 옆에서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일대 병사들은 큰 힘을 받으나, 문제는 죽는 순간 이를 대신 통솔할 부사단장조차 없으면 해당 사단은 통제 불능의 오합지졸로 전락하기 쉽다.[13] 재미있는 것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의 행보와 유사함에도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린다는 점이다.[14] 심지어 전선에서 병사들이 피흘리는 동안 혼자서 후방에서 맥주 마시며 노가리 깠다 카더라는 소설까지 나돌기도 했다.[15] 이게 정상적인 부대 배치 상황이다. 이렇게 1사단 배치 상태를 바꾸지 않고 전쟁을 맞았으면, 개성-문산 방어선은 당일에 뚫렸을 확률이 매우 높다.[16] 김석원의 청장년기가 러일전쟁을 막 마치고 1차대전 당시 청도에서 독일군과의 전쟁을 치뤘던 시기이긴 하다.[17] 그러나 이들은 기존 인민군 5사단에 12사단과 766유격부대의 공세로 동해안 전선 40km나 후퇴하고 3사단이 포위섬멸 위기에 처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18] 이 적전도주 행적은 최석의 직속상관인 유재흥이 독박을 써, 2010년대까지도 유재흥을 적전도주한 사람이라 비난하는 기사들이 올라왔다.[19] 1907~1982.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인물. 최룡해의 아버지이다.[20] 이 둘은 6.25 전쟁 발발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각자 사단장으로 맞붙은 적이 있었다. 자세한 건 육탄10용사 참조.[21] 지청천이 백범 김구에게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범 김구 입장에서는 일본군 장교출신을 환대할리 없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 말대로 정말 광복 후라 이제는 힘을 합쳐야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독립군 출신의 김홍일 장군의 시선에서도 드러나기도 하고 김구도 결국엔 친일파 출신들의 협력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