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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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文寺 / はくぶんじ
1. 개요
2. 건립 과정
3. 역사 및 전소
4. 같이보기


1. 개요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서울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었던 사찰이다. 일제 강점기1932년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세웠다.

2. 건립 과정


박문사 자리에는 대한제국 시기 전몰 장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장충단이 있었다. 장충단에는 을미사변 때 사망한 홍계훈, 이경직 등이 모셔졌으며 정기적으로 제향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의 저격으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회가 그해 11월에 열린 것을 기점으로 장충단의 성격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후 장충단 부지에서는 군사 훈련, 불교의 천도 의식, 백일장 등이 열렸다.
박문사 건립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 사망 20주기인 1929년부터였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었던 고다마 히데오(兒玉秀雄)[1]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이 사업은 이토 히로부미 기념회가 만들어지자 구체화되었다. 건립 목적은 이른바 '''내선융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념회는 사찰 건립과 운영을 위해 일본, 조선, 만주 등지에서 기부금을 걷어 거금 40만원을 마련했다. 장소를 남산 기슭의 장충단공원으로 확정한 것은 남산의 조선신궁 등과 함께 남산 일대를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기념물로 만들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 이름은 춘무산박문사(春畝山博文寺)[2]로 정했다. 완공 6개월 전인 1932년 4월 열린 상량식에는 조선 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했다. 낙성식은 이토 히로부미의 기일에 맞춰 그해 10월 26일에 열렸다. 조선의 왕실 건축물을 가져다 쓴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경희궁흥화문을 가져다가 이름을 '경춘문'(慶春門)으로 바꾸고 정문으로 사용했다. 경복궁 선원전도 이곳으로 옮겨와 승려의 거주 공간으로 썼다. 원구단 석고전은 박문사의 종루가 되었다. 박문사 본당은 조선과 일본은 하나라는 내선 융화의 목적으로 일본 선종 양식과 조선 양식이 뒤섞여 있었다. 박문사 본당은 철근 콘크리트로 된 2층 건물이다.

3. 역사 및 전소


박문사에서는 매년 이토 히로부미 기일인 10월 26일에 법회가 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30주기인 1939년에는 조선합병 공로자 합동위령제를 지냈다. 이때의 위령 명단은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가쓰라 다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김옥균 등이었다. 중일전쟁 등으로 사망한 군인들에 대한 추도 행사도 꾸준히 열렸다. 1938년 이완용의 형 이윤용, 1939년 박영효의 장례식도 여기에서 거행되었다. 종교 행사보다는 유력 인사 또는 군인의 추도식 장소로 주로 이용된 셈이다. 또한 일제는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잘못(?)을 참회시키고 애국을 맹세시켰다고 한다.
박문사 완공 후 조선인은 물론 조선 내 거주 일본인들도 별로 관심이 없자 총독부는 조선을 방문하는 일본 고위 인사들이나 일본 학생의 조선 수학여행 코스에 박문사를 포함시켜 관광을 활성화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박문사는 전소되어 사라진다.
이승만 정권은 박문사 자리에 영빈관을 신축하려 하였으나 4.195.16으로 공사 중단을 겪는다. 우여곡절 끝에 1967년 영빈관이 완공되었지만 해당 부지는 1973년 삼성그룹에 넘어가 현재의 서울신라호텔이 된다.
박문사 컬러 사진은 여기로.

4. 같이보기



[1] 4대 대만 총독인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의 장남. 타이베이에 고다마 겐타로의 명복을 비는 임제호국선사(臨済護国禅寺)가 있는 데서 박문사를 세울 발상을 얻었다고 스스로 밝혔다.[2] 춘무는 이토 히로부미의 아호이고 박문은 그의 이름. '○○山 ○○寺'라는 이름은 우리나라나 일본의 사찰 명칭에서 흔히 보이는 관계로 이를 따라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