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둘 사타르 에디

 

[image]
1. 개요
2. 일생
3. 자선 활동
4. 죽음
5. 기타


1. 개요


압둘 사타르 에디(Abdul Sattar Edhi) / 우르두어: عبدالستار ایدھی
(1928년 2월 28일 ~ 2016년 7월 8일)는 파키스탄의 자선가이자 운동가이다. 에디 재단의 설립자.
평생을 빈민을 돕고자 노력하던 사람이며 종교에 구애하지 말고 사람을 먼저 돕자고 주장했다.

2. 일생


'''"현존하는 사람 중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인 사람"'''

2016년 3월 24일 허핑턴 포스트[1]

1928년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주에서 태어났다. 상인을 하던 집안은 그럭저럭 먹고 살만했으나, 1947년 인도 독립 당시 파키스탄이 분리할때 힌두교와 이슬람 갈등으로 이름을 봐도 무슬림이던 에디 집안은 급하게 파키스탄으로 가야했다. 그런 가운데, 병으로 앓던 어머니를 잃었다. 어렵게 살다가 파키스탄에서 취직하여 자리를 잡았으나 이 당시 그가 들어간 지원 단체가 상인같은 일부 직업계층만 지원하는 것에 회의를 느껴 탈퇴하고 유럽으로 걸어서 여행을 떠났다. 돈은 구걸로 해결했다.
에디는 2008년 4월10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와 한 인터뷰에서 그 시절의 추억을 이렇게 전했다. “이탈리아 로마 기차역에서 노숙하고 일어난 날이다. 밤새 누군가 신발을 벗겨갔다. 그냥 맨발로 다녔는데, 어느 날 한 할머니가 고무장화를 한 켤레 갖다줬다. 내 발보다 두 치수는 큰 것 같았는데, 여행을 마칠 때까지 아주 잘 신었다.”라고 회고했다. 유럽 여행 당시 무슬림이자 유색인종인 그를 외면하던 사람도 많이 보았지만 반대로 개의치 않고 돕던 친절한 사람도 많이 만났고 유럽 각지에서 빈민에 대한 복지 정책도 틈틈이 알아보면서 이 여행으로 복지에 대한 인식을 확실히 깨달으며 종교나 직업으로 차별하지 말자고 단단히 느꼈다고 한다.

3. 자선 활동


그렇게 하여 돌아온 에디는 1957년 카라치 빈민가에 자그마한 사무실 겸 진료소를 열었다. 1996년 출간된 자서전 <눈 감은 이들의 거울>을 보면, 에디의 첫 자선사업 대상은 주검이었다. 모든 죽음은 존엄하기 때문에 맡았다고 한다. 당시 파키스탄 측은 병으로 유족없이 죽은 이들을 그냥 공동무덤으로 표식도 없이 파묻었는데 에디는 손수 시체들을 하나하나 씻고 옷을 입히고 이름과 유품으로 표식을 하고 정성스럽게 묻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기들을 버리지 말아 달라며 아기용 침대를 마련해 에디센터 앞에 뒀다. 혼란한 와중에 원치 않은 임신을 하여 버려져 죽던 아기가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침대 곁에는 이런 문구를 내걸었다. “두 번 죄를 짓지 마세요. 아기는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현재 파키스탄 전역 330여 곳에 들어선 에디센터 앞에는 아기용 침대가 비치돼 있다. 지금까지 적어도 3만5천여 명의 신생아가 그곳을 거쳐갔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입양돼 새 가족을 얻었다.
그 다음은 매 맞고 쫓겨난 여성과 버려진 노인을 위한 쉼터도 차례로 문을 열었다. 약물중독자와 노숙인, 정신질환 탓에 가족이 방치한 이들을 위한 거처도 필요했다. 무상급식소와 가족계획센터도 빼놓을 수 없다. 인도와 전쟁으로 조국이 전란에 휩싸이고 카라치 주도 폭격을 당할 때에는 의료 활동까지 했다. 처음에 에디 센터의 구급차는 처음에는 성금을 모아 낡은 중고차 밴 1대를 사서 개조한 뒤 응급 현장을 누볐다. 그러던 것이 50년 가까이 지난 2010년대에는 구급차가 1500대까지 늘어났다. 이 모든 걸 그는 정부로부터 단 한푼도 지원금을 받지않고 오로지 성금만으로 해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국가 지원금을 받으려고 했으나 무슬림 위주로 도와야한다는 조건에 분노했다. 에디 센터에서는 종교를 구별하지 않았기에 기독교인도 힌두교인도 받아줬다. 종교 기재같은 건 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다.
1982년 군사독재자 무함마드 지아 울하크가 국정자문기구 ‘슈라’를 구성하고, 샤리아에 따른 강압 통치를 주창하고 나섰을 때, 강력하게 반발하던 것도 에디였다. 에디는 라왈핀디의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언젠가는 그들(샤리아를 반대하는 이들이나 비무슬림)이 들고 일어나, 자기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선 장벽을 무너뜨릴 것이다. 내 말 명심하라. 지금은 (당신들이) 맹수로 살지만, 언젠가 사냥감이 될 수도 있다.”

즉, 종교로 맹수가 되어봐야 언젠가 돌고 돌아온다. 보복당한다며 일침을 가한 것. 그는 오래전부터 비무슬림을 공격하는 극단주의 무장세력과 불법·탈세로 재산을 쌓아올린 부자, 그리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해선 가차 없이 비판해왔다. 그런 그를 두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이교도’요,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란 저주도 퍼부었으나 에디는 '''“그들이 가는 천국이라면 필요 없다. 나는 가난하고 비참한 이들의 천국에 가겠다”'''고 말하며 맞섰다. 그를 비난하던 이들은 에디가 탈세를 한다느니 사치스럽게 산다느니 온갖 음해를 하려고 했으나 도무지 증거를 찾을 수 없어 욕만 먹었다. 가끔 에디 센터에 돌이 날아오거나 관계자들이 맞는 일도 벌어졌지만 에디는 그들이 이젠 방해하다 못해 폭력으로 맞선다며 비난했다. 여론도 무슬림이고 개의치 않고 빈민을 돕는 사람을 돕지못할 망정 폭력이나 휘두른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나몰라라하던 정부에게도 비난이 가자 부랴부랴 경찰 병력을 보내서 경비를 서거나 치안을 돕기도 했다.
가정적으로는 에디 센터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빌키스를 만나 결혼했다. 에디센터 창설 초기 7명의 여성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한 뒤 포기했다가 마지막으로 청혼했다가 이뤄진 결혼이었다고 한다. 둘 사이에 두 딸과 두 아들을 낳아 키웠다. 집은 카라치 빈민가에 자리한 에디센터 본부에 딸린 방 2칸짜리다.
2013년 봄, 에디의 양쪽 콩팥이 차례로 기능을 멈췄다. 투석으로 견디면서도 그는 성금을 스스로 나서서 거리에서 구걸하면서 에디 센터를 운영했다. 그렇게 모든 돈을 에디 센터 운영에 거의 쓰고 아주 적은 돈만을 가족에게 베풀었다. 아내인 빌키스 에디는 2015년 인터뷰에서 “아이들과 가정을 꾸리기 위한 집을 따로 가져본 일이 없다”고 회고했다.

4. 죽음


2015년 6월 알리 자르다리 전 파키스탄 대통령은 에디에게 외국으로 가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며 비용 지원도 약속했다. 하지만 에디는 파키스탄 국내에서, 정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다고 고집했다. 그리고 그는 일침을 가했다.

내가 유명해지니까 나를 돌보면서 생색내지 마라, 그 돈으로 빈민들을 더 도왔으면 한다!

그는 이제 알라가 나를 부를 때가 되었다며 천천히 죽음을 기다렸다. 그리고 손수 무덤자리를 삽으로 파면서 몇 주동안 천천히 준비했다. 낡은 관도 준비했다고 한다. 유서를 통해 시체를 남김없이 사회를 위하여 기증한다고 밝혔지만 장기들은 나이가 들었고 아파서 기증하기가 어려워 세상을 떠난 다음에 각막만 기증되었다.
그리고 2016년 7월 8일 카라치의 한 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숨졌다. 1988년 8월 독재자 지아 울하크가 죽은 뒤 28년 만에 파키스탄에는 국장이 선포됐다. 7월 9일 카라치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영결식에는 수만 명의 추모객이 몰려 울면서 명복을 빌었다.
<알자지라>는 ‘바스마’란 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을 따 이렇게 보도했다.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펐던 건, 에디의 관과 추모객 사이에 경찰이 둘러친 장애물이었다. 에디와 그가 평생을 바쳐 일궈온 일을 정부는 여전히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5. 기타



5.1. 구글 두들


2017년 2월 28일에 탄생 89주년 기념으로 구글 두들에 올랐다.

[1] 정확히는 "현존하는 사람 중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인 사람은 파키스탄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