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므리 드 뤼지냥
1. 개요
애므리 드 뤼지냥(Aimery de Lusignan) (1145년 ~ 1205년 4월 1일). 프랑스 기사 출신. 키프로스 왕(1195년 ~ 1205년)이자 예루살렘 왕 (1197년 ~ 1205년). 동생 기 드 뤼지냥의 뒤를 이어 키프로스의 왕이되고, 이어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 부왕을 겸했다.
뤼지냥 가문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은 링크 참고
2. 생애
애므리의 동생 기가 예루살렘 여왕 시빌라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위에 있었지만, 1190년 시빌라의 죽음으로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 이사벨이 왕위 계승자가되는 난리통에 국왕의 지위가 위태롭게 되었다. 결국 1192년에 예루살렘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에 영국의 왕 리처드 1세로부터 키프로스를 할양을 받았다. 기는 1194년 자손없이 사망하여 키프로스 왕국을 형 아모리가 상속받았다. 1197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에 의해 파견 된 사절단에게 왕관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남편 앙리 1세(Henri I)와 사별한지 얼마 안된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의 부왕직을 얻었다. 이듬해 1198년 트리폴리 백작 레몽 3세의 의붓 자식 티베리아스 라울이 왕의 암살을 계획했다고 영지 몰수를 선고했는데, 라울이 왕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고 법원의 심판을 요구하며 반항했지만 다른 귀족들 동조하며, 왕에게 반항했기 때문에 애므리는 라울을 추방했다. 이 무렵부터 예루살렘 왕국은 법으로 귀족이 왕에게 반항하면 추방이라는 도식이 완성되었다. 왕으로써 애므리는 법률에 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평가되고 또한 키프로스 왕국의 실질적인 건설자였다. 또한 아이유브 술탄 알 아딜 사이와 휴전 협정을 지속시켰다.
1205년 4월 1일 애므리는 사망했다. 흰색 숭어를 폭식한 뒤에 걸린 이질이 원인이었다. 키프로스 왕위는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위그가 위그 1세로 계승했다.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도 아모리 2세의 죽음에서 4일 후에 사망하여 예루살렘 왕위는 이사벨 1세와 콘라드 1세 사이의 딸 마리아에게 상속되어 키프로스 왕위와 예루살렘 왕위는 다시 개별적으로 상속되게 되었다.
3. 가족
첫째 부인, 발리앙 디블랭의 손녀이자 보두앵 디벨린의 딸 에쉬바 디벨린(Echive d'Ibelin).
부르곤디아 드 뤼지냥(Burgundia de Lusignan) (1178년경 ~ 1210년경)
- 키프로스 왕국의 섭정 고티에 1세 드 몽벨리아르(Gautier de Montbéliard)와 결혼.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 (? ~ 1205 년) - 요절장 드 뤼지냥(John de Lusignan) (? ~ 1205 년) - 요절
알릭스 드 뤼지냥(Alix de Lusignan) (? ~ ?) - 요절
헬비스 드 뤼지냥(Helvis de Lusignan) (1190년경 ~ 1217년경)
- 프랑스 기사 외드 드 당피에르(Eudes de Dampierre)와 이혼 후, 두 번째로 레몽-루팬 당티오크(Raymond-Roupen d'Antioche)와 결혼.
위그 1세 드 뤼지냥(Hugh de Lusignan) (1194년 ~ 1218년)- 키프로스 3대 국왕. 알릭스 드 샹파뉴 예루살렘(Alix de Champagne-Jérusalem)과 결혼.
둘째 부인,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1세(Isabelle d'Anjou).시빌라 드 뤼지냥(Sibylle de Lusignan) (1198년 ~ 1252년)
- 아르메니아 왕 레본 1세와 결혼.
멜리장드 드 뤼지냥(Mélisande de Lusignan) (1200년경 ~ 1249년 이후) -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4 세와 결혼.
아모리 드 뤼지냥(Amaury de Lusignan) (1201년 ~ 1205년) - 요절.[1] 무릎꿇은 오른쪽 이사벨 1세 왼쪽 코라도 델 몬페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