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라드 1세
1. 개요
콘라드 1세(Conrad I, 11??년 ~ 1192년 4월 28일) 몬페라토 변경백국 출신. 예루살렘 왕 즉위 직후에 암살 교단 어쌔신의 흉기에 암살당한 제3차 십자군 측의 고위직 중 한 명. 통칭은 콘래드. 그의 영웅주의는 이슬람 측에서는 알 마루키슈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2. 동로마 제국에서 활약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변경백국 알레라미치 가문 출신. 1179년, 몬페라토 후작과 당시 동로마 제국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의 동맹에 따라 콘래드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제국의 내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차례 차례로 황제가 바뀌고 1185년에 즉위 한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특히 안습했기 때문에 제국의 내란은 끊이질 않았다.
1186년 겨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그에게 자신의 누나 테오도라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요청했는데, 이 무렵 동쪽 로마를 떠나 십자군에 참가 할 생각이 있었기에 앞날의 편이를 위해 받아들였다. 1187년 봄에 결혼식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렸고 이것으로 그는 황제의 매형이 되어 위신이 한층 높아졌다. 결혼 후 곧바로 알렉시우스 부라나스 장군의 반란을 진압하여 제국의 당당한 일원으로 활약했지만 그리스계가 아니었으므로 제국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며 소외감을 느꼈다.
3. 티레 방어
그는 동로마 제국의 반 라틴인 감정에 답답함 느끼고 있었는데 결국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1187년 7월에 자신의 목표였었던 십자군에 종군하기로 결심하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4세는 크게 기뻐하며 항구 도시 티레의 수비를 맡겼다. 하지만 곧이어 아이유브 제국의 살라딘에 의한 지중해 연안 도시들 함락과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의 대패에 의해 수도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였고 왕국은 멸망에 처해 있었다. 그는 티레에 육박한 살라딘의 군대에 맞서 시민들을 고무시켜 함께 진형을 갖추어 이탈리아 상선단의 도움을 받으며 해안 지형을 이용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격퇴했다.
예루살렘 함락 후 같은 해 11월, 티레는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난민들로 가득 했다. 살라딘은 다시 육지와 바다에서 두 갈래로 공격했다. 콘래드는 놥게도 성을 잘 지키는 건 물론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해안선에서 엄습해 오는 이집트 선박을 화계로 격퇴하고 몇 주를 버텼다. 장기전이 될 것으로 생각한 살라딘은 티레 공성전을 뚫지 못하고 왕국은 기사회생으로 멸망의 기로에서 살아났다. 이는 전적으로 콘래드의 능력이었고 티레가 지중해에서 보급이 끊이지 않는 상륙 거점으로서의 이점을 얕잡아 본 살라딘의 패배였다. 콘래드는 국왕 기 드 뤼지냥 이 포로로 잡힌 실질적 국왕 공백기에 최후의 항전으로써 왕국의 항구 영토를 지켜내어 예루살렘 왕국에 사망선고를 100년 가까이 늦추게한 영웅이었다. 그의 왕국에 대한 구심력은 당연히 대단했다.
4. 왕위를 둘러싼 싸움
1189년 국왕 기는 살라딘에게 석방되어 티레에 가서 콘래드에게 도시의 열쇠를 빼앗으려 하지만, 콘래드는 이를 거부하고 반대로 기에게 하틴 전투의 패전으로 왕국을 빈사상태로 만들었다며 그가 왕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결국 콘래드는 기와 그의 부인인 정식 왕위 계승자 시빌라의 입성을 거부했고, 기는 아크레 항구에 대한 수년간의 공성전에 나섰다.
공성전의 와중에 1190년 시빌라와 그 두 딸들이 병사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기 및 기타 귀족들과의 싸움에 콘래드도 뛰어든다. 이런 가운데 각지에서 아이유브 제국군을 격퇴하고 용명을 떨친 콘래드는 고위층의 지지를 받게되었다. 본국의 유럽 친척들도 지원을 받던 콘래드는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의 아모리 1세의 딸,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 이사벨 1세와 결혼했다. 이때 이전에 결혼한 테오도라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중혼 혐의도 걸려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를 상대로 이혼 신청이 동로마 쪽에서 있었기에 그다지 큰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다. 그는 왕이 될 자격을 손에 넣었지만, 여전히 기의 파벌은 반대하고 있었기에 왕으로 즉위 할 수 없었다.
5. 제3차 십자군 원정 종군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고 자신도 합류하여 항구를 십자군의 상륙 거점으로 제공했다. 제3차 십자군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대립하여 진군이 지지부진하는 와중에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 앞에 연전 연패 시리아에서도 티레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살라딘에 빼앗기는 등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콘래드는 약간의 병력과 함께 티레에 들어가 전군을 지휘 살라딘의 대군을 물리 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함께 함선으로 아크레 공격을 감행했고 1191년 7월에 성밖에서 공격하던 기를 도와 아크레를 함락시키고 성 예루살렘 왕국의 깃발을 세웠다.
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은 대립을 계속하고있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아니라 콘래드를 십자군의 지도자로 해야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와 예루살렘 왕국의 부활도 제후의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에 대해 리처드 1세는 기를 애초에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반대했지만 콘래드를 만나 그 능력과 성격을 알게되자 왕위 계승을 승인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6. 암살
그러나 코라도의 존재는 살라딘을 비롯한 이슬람 측에게는 위협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기 및 리처드 1세를 비롯해 성전 내부와 왕국 내부에 예루살렘 왕위를 둘러싼 적도 많았다. 이슬람 측 또는 십자군 측 또는 누구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지금도 불분명하지만, 1192년 4월 니자리 아사신은 콘래드의 암살을 계획하고 콘라드 1세는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 후 아사신 자객에게 습격당해 암살되고 말았다.
콘라드 1세와 이사벨 1세의 딸 마리아는 나중에 이사벨 1 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여왕이되고, 장 드 브리엔과 결혼했다. 동생 보니파시오 1세 델 몬페라토(Bonifacio I del Monferrato)는 제4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테살로니카 왕국을 건국하게된다.
[1] 무릎꿇은 오른쪽 이사벨 1세 왼쪽 코라도 델 몬페라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