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레

 


'''유네스코''' '''세계유산'''
[image]
'''이름'''
티레
Tyre
'''국가·위치'''
레바논 남 레바논 도, 수르 (티레) 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iii)[1], (iv)[2]
1. 개요
2. 역사
2.1. 고대
2.2. 이스라엘 왕국의 교류
2.3. 헬레니즘-로마 시대
2.4. 중세 시대
2.4.1. 십자군 시대 (1124 ~ 1291년)
2.5. 근대 이후
3. 성경 속 티레
4. 관련 문서


1. 개요


아랍어: صور‎ 수르
페니키아어: 𐤑𐤓 (Ṣūr‎) 수르[3]
히브리어: צוֹר (Tzór‎)
고대 그리스어: Τύρος (Týros) 튀로스[4]
라틴어: Tyrus 튀루스
영어: Tyre 티레
오늘날 레바논 남부주의 서쪽, 지중해 바닷가 에 들어선 도시.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고대 도시들 중 지중해 여러 식민지의 종주국으로서 초기 제국주의의 모습을 띤 도시국가이기도 했다. 한국어 번역 성경에선 티로,[5] 띠로,[6] 두로[7] 등으로 나온다. 그리스 신화에서도 '튀로스'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아테네에 버금가는 부를 자랑하던 티레는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점령된 후 파괴되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이후 로마, 이슬람 제국 시대와 십자군기를 거치면서도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며 현대에 이른다.
현대에는 레바논 남부주의 치소로 인구는 12만 명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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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는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뉘는데, 신도시는 티레섬이라는 육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섬에 요새처럼 쌓은 도시를 말한다. 신도시는 바다가 해자처럼 도시를 둘러싸고 있어 아슈르바니팔의 아시리아 제국은 물론 느부갓네살바빌론 군대마저 이곳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후 알렉산드로스가 간척을 하면서까지 겨우 점령을 하였기에 고대 세계의 철옹성이라고 불렸다.

2.1. 고대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도 불리는 레반트 지역에서도 특히 지중해를 끼고있는 레바논은 땅이 굉장히 비옥하여 고대시대부터 잉여생산물을 생산하던 지역이라 이른 시기부터 문명이 일어섰다. 레바논 지역에서 최초로 발생한 문명은 기원전 5000년 무렵 비블로스인데, 비블로스인들이 점차 내려오면서 시돈과 티레, 하솔을 건설하여 페니키아를 이루었다. 티레는 대략 기원전 2750년쯤 건설되었다고 추측한다. 기원전 1400년 무렵, 즉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 성전을 벌일 때 가나안 지방의 여러 왕국들은 죄다 페니키아계 도시국가들이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정복한 왕들의 숫자만 72명에 달할 정도로 도시국가적 성격이 아주 강했던 것이 특징이다.
이스라엘은 당시 가나안 지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하솔까지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위대한 시돈'은 끝내 점령하지 못했고, 가나안 지방과 레바논 지방을 나누게 된다. 이후 가나안은 이스라엘 혹은 팔레스타인, 북방의 레바논은 페니키아라 불렸다. 페니키아 지방의 '''비블로스''', '''티레''', '''시돈''', '''하솔''' 중 으뜸가는 도시는 티레였다. 티레는 타이리안 퍼플(Tyrian Purple)이라 불리는 고급 자주빛 옷감을 생산하여 막대한 이득을 취했는데, 로마 시대까지 황제가 입는 최고급 옷감으로 인식되었다. 훗날 티레가 멸망하면서 자주색 염료 기술까지 실전된 탓에[8] 붉은색으로 대체되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티레는 지중해에 여러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훗날 티레보다 강성해지는 카르타고조차 로마와 전쟁을 벌이며 국운을 건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까지 티레에게 꾸준히 조공을 바칠 정도로, 페니키아에게 티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구약성경에는 티레의 심판이 여러 경전에 걸쳐 여러 번 기록될 정도로 많이 언급된다. 같은 페니키아계 도시국가인 시돈이나 비블로스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 이는 티레가 북이스라엘 왕국을 괴뢰화하고, 몰렉을 숭배하여 인신공양을 바쳤으며[9] 이스라엘과 무역에서 경쟁하던 국가였기 때문이다.

2.2. 이스라엘 왕국의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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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세기에 티레는 최전성기를 누렸는데, 특히 기원전 950년 전후 히람 1세 때가 정점이었다. 히람 1세가 구약성경에서 솔로몬 왕과 동맹을 맺었다고 나온 히람 왕이다.[10] 히람 1세는 다윗 왕 때부터 이스라엘과 친해 백향목과 함께 목수, 석공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짓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솔로몬 시대가 되면 식량을 공급받는 대가로 페니키아 건축가들을 보내 솔로몬 왕의 사역을 돕게 하였는데, 다윗이 세웠던 시온 성 북쪽의 증축된 솔로몬 성은 페니키아 기술자들이 설계한 페니키아식 도시였다. 솔로몬 성 외에 유명한 솔로몬 성전도 페니키아 건축가들이 건축했다. 그 외 레바논 백향목 나무기둥 36개를 써서 열주식으로 세운 상아궁과 솔로몬 왕좌도 죄다 페니키아 사람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당시 백향목으로 뗏목을 만들어 야파로 육로를 통해 예루살렘으로 운반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동맹관계를 맺고 함께 해외시장을 개척했다. 티레는 솔로몬 왕과 조약을 맺어 홍해와 인도양으로 통하는 히브리의 항구를 이스라엘과 공동으로 사용하고 그 지역의 광산개발과 조선소도 공동으로 운영했다. 솔로몬 왕의 상선대는 하람 1세의 도움으로 수르의 식민지에 진출해 히브리인들이 지중해 여기저기에 상권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때 페니키아의 도시 하디스에 히브리인들이 정착했다.[11] 열왕기 상권 10장에는 아랍 반도 아덴 왕국의 시바 여왕이 솔로몬을 만났다는 내용을 서술하며 솔로몬 시대에 세운 페니키아식 건축물이 얼마나 장엄한지 간접적으로 묘사했다.[12]
이사야서와 에제키엘서에서 두로의 파멸을 길게도 예언하는 등 이들간의 관계를 싫어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 같지만, 훗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갈라진 뒤에도 여전히 경제적 벨트를 유지했다. 특히 북왕국 이스라엘과의 우호관계가 돈독하였다. 이웃 시돈의 공주 이제벨이 이스라엘 왕 아합과 결혼하여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의 동맹은 후일 예후가 아합 왕가를 멸문시키고 페니키아와의 우호관계를 파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반면 유다의 선지자 이사야, 에제키엘 등은 티레 왕을 사탄에 비유하며 강하게 저주했다.[13] 비록 아시리아에 의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도 티레는 살아남았으나 바빌로니아에게 유다 왕국이 멸망할 때 같이 사이좋게 멸망했다. 다만 육지의 티레 말고 섬 티레는 살아남아 알렉산드로스 대왕 때 멸망했다. 때문에 폐허가 된 페니키아 본토의 유적에서보다 이스라엘에서 페니키아의 건축얼개를 찾아보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기존 페니키아 지역의 유적은 죄다 헬레니즘화되어 페니키아 양식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와 막역한 관계였던 이스라엘 영토에는 남았던 것이다.

2.3. 헬레니즘-로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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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난공불락의 티레를 공략하기 위해 간척을 한 뒤, 육상전함 헬레폴리스까지 건조하여 공성전을 펼쳤다. 어찌나 티레 공략이 힘들었는지 티레를 점령한 후 알렉산드로스는 티레 성주를 잡아서 산 채로 전차에 매달고 자갈밭을 전속력으로 달려 죽이는 방식으로 보복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죽음으로 붕괴된 헬레니즘 제국에서 발생한 디아도코이 전쟁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수도로 삼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간의 2강 전쟁으로 치달았는데 이에 따라 주 전장이 시리아와 이집트의 사이의 페니키아가 되면서 티레의 전술적 가치는 매우 커졌다.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일어나면서 기원전 314년에 마케도니아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고노스와 대립했다가 안티고노스가 그리스 전역의 폴리스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선언했다. 해당 선언을 선포하였던 도시 티레의 이름을 따서 '티레 선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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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의 로마 유적
로마 제국의 암군 엘라가발루스는 미적감각이 있던 황제로 평가되는데, 그는 카르타고 멸망 후에도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된 티레의 페니키아 문명에 굉장히 심취하여 로마 황제로는 처음으로 동방적인 티레의 자주옷을 입었고 페니키아의 주신 바알을 숭배하였다.

2.4. 중세 시대


638년 티레는 이슬람 제국(라쉬둔 왕조)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아랍인들이 정착하였고 원주민들도 점차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 동안 별탈없이 지내던 티레는 975년 이집트에서 북진한 파티마 왕조에게 점령되었다. 996년, 티레는 알라카라는 선원의 주동으로 시아파인 파티마 조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파티마 조는 아부 압둘라 알 후세인 휘하의 진압군을 파견하였고 도시는 수륙 양면으로 포위되었다. 이듬해 파티마 조의 적수인 동로마 제국이 해군을 파견하여 티레를 도우려 했으나 도시를 봉쇄하고 있던 파티마 해군에게 대패하였다. 마침내 998년 5월, 2년간 저항하던 도시는 함락되었다. 저항한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이집트에 포로가 되어 끌려갔고, 알라카는 화형에 처해진 후 십자가에 매달렸다. 주모자들과 동로마 포로 2백 명 역시 처형되며 티레의 반란은 가혹히 진압되었다.
이후 파티마 조의 강력한 요새로 남은 티레는 1차 십자군의 남하에 맞서야 했다. 1099년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 십자군은 레반트의 여러 항구도시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하이파와 카이사레아에 이어 3년 이상 버티던 아크레가 1104년 항복하자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북쪽의 안티오크 공국과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 사이에 포위된 격이 되었다. 1107년,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1세가 티레에 첫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거대한 성벽을 보곤 곧 회군하였다. 그리고 1109년 7월, 무려 7년 넘게 항전하던 트리폴리가 함락되었고[14] 그에 이어 1110년 5월 베이루트, 그리고 같은해 12월 시돈이 함락되자 많은 난민들이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티레로 몰려들었다. 한편 1111년 여름 아슈켈론 공략에 실패한 보두앵 1세는 그해 12월 재차 티레를 공격하였다. 십자군은 엄청난 크기의 파성추를 지닌 공성탑을 세워 성벽을 공격하였다.
벽의 일부가 무너지며 함락의 위기에 처한 찰나, 트피폴리 출신의 난민 뱃사공이 해답을 제시하였다. 그는 쇠갈고리를 만들어 파성추에 걸었고 수비대가 이를 잡아당기자 공성탑이 기울었다. 이에 탑이 무너질까 염려한 포위군은 파성추를 스스로 파괴하였다. 그들이 재정비하는 동안 주민들은 성벽을 보수할 수 있었다. 이후 십자군은 10 kg짜리 철을 덧씌운 30 m 길이 파성추를 제작하여 재차 공격에 나섰는데, 이에 수비측은 나무 받침대 위에 오물을 가득 담은 솥을 올려 놓은 후 그들에게 끼얹었다. 그러자 프랑크인들은 당황하였고 그 틈에 수비대는 기름과 역청을 넣은 항아리에 불이 붙은 건초를 묶어 공성탑에 던졌다. 그 효과는 엄청났고 십자군은 물은 물론이고 포도주까지 꺼내와 소화를 시도했지만 그대로 보고만 있지 않았던 수비측이 끓인 기름을 끼얹자 불길은 멈출 수 없게 되었다. 1112년 4월 10일, 결국 공성탑은 전소되었고 공격군은 물러났다.
4월 12일, 십자군이 자신들의 선박까지 불태우고 퇴각하자 티레의 수비군은 성문을 나와 그들을 추격하였고 무기를 포함한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티레의 시민들이 133일간의 포위를 견뎌낸 것은 1111년 샤이자르 전투와 함께 십자군에게 많은 패배를 경험하던 이슬람권의 사기를 회복시켜 주었다. 한편 1123년 아르투크 왕조의 아미르 발라크는 에데사 백작 조슬랭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예루살렘 국왕 보두앵 2세가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나섰는데, 1123년 6월 방심한 채로 매사냥에 나섰다가 그 역시 발라크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 120척이 팔레스타인 앞바다에 나타나 파티마 해군을 격파하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총대주교는 보두앵 2세의 구출 대신 베네치아와 함께 티레 공격에 나서기로 하였다. 1124년 2월, 도시의 1/3을 차지한다는 조약 하에 베네치아 함대는 티레를 봉쇄하기 시작하였다.

2.4.1. 십자군 시대 (1124 ~ 12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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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십자군[15]과 티레 공방전
티레는 완전히 고립되어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였다. 십자군이 공성탑을 세우자 수비군도 투석기를 설치해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일부 잠수병들이 베네치아 선박을 파괴하는 쾌거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천혜의 요새였지만 성 내부에 우물이 없는 티레는 외부의 보급 없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티레의 구원에 나설 것을 약속한 발라크가 1124년 5월 6일, 반란을 일으킨 만비지 요새를 포위하던 중 어이없이 전사하였다. 티레의 명목상 주인인 다마스쿠스의 아타베그인 톡테긴이 포위망에 접근하긴 했으나 트리폴리 백작 퐁스와 대면하자 싸움도 안 해보고 후퇴해버렸다. 그는 대신 6월부터 협상을 중재하였다. 한 달간의 논의 끝에, 주민 중 떠나길 원하는 사람은 가족과 재산을 대동할 수 있고 남길 원하는 사람은 사유재산을 보호받다는 조건 하의 항복이 결정되었다. 수비대는 그해 7월 7일에 항복하였다. 남기를 택한 기독교도 주민들과 달리 상당수의 무슬림 주민들은 후사인의 머리 등의 유물과 함께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 티레에 입성한 십자군은 고작 5포대의 밀만을 발견하였다.
협정에서 명시된 대로 베네치아는 티레에서의 무역 특권과 세금의 1/3을 차지하였으며 항구 인근에 16개 가옥으로 구성된 상인 지구를 형성하였다. 1124년 말 발라크의 후계자인 티무르타슈에 의해 2만 디나르의 배상금을 내고 풀려난 보두앵 2세는 베네치아 인들에게 예루살렘 왕국의 국방에 협조하도록 요구하였고, 기사 최소 5명을 제공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그들을 경계하기 위해 피사 공화국에게도 티레에 특권을 하사하였다. 1120년대 말 피사 인들에게 티레 항구 인근의 가옥 5개가 주어졌고 1168년엔 예루살렘 국왕 아모리로부터 카라반사라이 건물을 구매하였다. 한편 1130년대 들어 베네치아 인들은 티레 육지 성벽에서 거둔 관세의 할당량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이로써 그들의 기사 제공은 3명으로 줄어들었다. 3차 십자군 당시 익사한 프리드리히 1세가 시내 성당에 안장되었다. 1242년 내분 끝에 티레는 이벨린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1246년 티레는 발리앙 드 이벨린의 외손자인 필립 드 몽포르에게 넘어갔다. 1258년에는 제노바 공화국이 베네치아인들을 축출하고 티레 항구를 차지하였다. 1268년 몽포르 가문은 대가 끊기면 도시를 금화 1만 5천 닢에 왕에게 넘기는 대가로 아크레의 예루살렘 왕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치를 얻었다. 영주 장 드 이벨린은 자체적으로 동전을 주조하였고 1271년 아크레에 앞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와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1283년 장이 자손 없이 사망하였다. 다만 아크레의 위그 3세는 보상금이 부족하였고 돈이 마련될 때까지 장의 동생 음프헤(험프리)가 도시를 맡았다. 그러나 납부 기한으로 설정되었던 이듬해 5월 전에 두 당사자가 모두 사망하였다. 1289년 아크레의 앙리 2세는 티레를 동생 아모리에게 주었다. 하지만 2년 후인 1291년, 도시는 맘루크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고 티레의 십자군 지배기는 막을 내렸다.

2.5. 근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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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척 전 티레 해안
현재는 레바논 내전 조정을 위해 창설된 유엔 평화유지군 동명부대가 2007년 이래 티레에 파견되었다. 2015년 12월에는 티레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3. 성경 속 티레


에제키엘(에스겔)서에서는 티루스의 무시무시한 무역 규모를 기록하면서 상아로 배를 건조하고 은으로 도로를 포장하며 금으로 높은 누대를 쌓는다고 말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너 사람의 아들아, 티로를 위하여 애가를 불러라. 바다 어귀에 자리 잡은 성읍, 수많은 섬으로 다니며 여러 민족과 장사하는 상인 티로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티로야, ′나는 더없이 아름다워.′ 하고 너는 말하였다. 너의 경계선들은 바다 한가운데에 있고 조선공들은 너를 더없이 아름답게 지었다. 너의 바깥 판들은 모두 스니르의 방백나무로 짜고 레바논의 향백나무를 가져다가 네 위에 올린 돛대를 만들었다. 바산의 참나무로 노를 만들고 키팀 섬에서 젓나무를 가져다가 상아를 박으며 갑판을 깔았다. 너의 돛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수놓은 아마포로 그것이 너의 깃발이 되기도 하였고 차일은 엘리사아 섬에서 온 자주와 자홍 색 천으로 만들어졌다.

시돈과 아르왓 주민들이 너의 노를 저었고 티로야, 너에게는 기술자들이 있어 그들이 너의 키잡이였으며 또 네 안에 머무르는 그발의 원로들과 기술자들이 너의 틈을 메우는 수선공들이었다. 바다의 모든 배와 선원들이 너에게 와서 물품들을 거래하였다. 페르시아와 루드와 풋 사람들이, 전사들이 너의 군대에 들어왔다. 그들이 너에게 걸어 놓은 방패와 투구가 너를 광채로 빛나게 하였다. 아르왓인들과 너의 군대가 너의 사방 벽 위에 배치되고 감맛인들이 네 탑들에 배치되었는데 그들이 사방 벽에 걸어 놓은 방패들이 너를 더없이 아름답게 하였다.

너에게는 온갖 재물이 많아 타르시스가 너와 무역을 하였다. 그들은 은과 쇠와 주석과 납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야완, 투발, 메섹도 너와 장사를 하여, 노예와 구리 연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고, 벳 토가르마에서는 말과 군마와 노새를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다. 드단 사람들도 너와 장사를 하였고, 또한 많은 섬이 너의 중개상으로 일하면서, 그 대가로 너에게 상아와 흑단을 지불하였다.

너에게는 온갖 제품이 많아서 아람도 너와 무역을 하여, 석류석, 자홍 천, 수놓은 천, 아마포, 산호, 홍옥을 주고 네 상품들을 가져갔으며, 유다와 이스라엘 땅도 너와 장사를 하여, 민닛 밀, 기장, 꿀, 기름, 유향을 주고 네 물품들을 가져갔다. 너에게는 제품도 많고 온갖 재물이 많아, 다마스쿠스도 헬본 포도주와 차하르의 양털을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고, 단과 야완 머우잘도 너와 상품을 교환하였는데, 그들이 네 물품 값으로 가져온 것은 망치로 두드린 쇠, 계피, 향초였다.

드단은 말을 탈 때 안장에 까는 천을 가져와 너와 장사를 하고, 아라비아와 케다르의 제후들도 너의 중개상으로서, 새끼 양과 숫양과 숫염소를 가져와 너와 무역을 하였으며, 스바와 라마 상인들도 너와 장사를 하여, 온갖 최고급 향료와 보석과 금을 주고 너의 상품을 가져갔다. 하란과 칸네와 에덴, 그리고 스바의 상인들과 아시리아와 킬맛도 너와 장사를 하였는데, 그들은 화려한 의복, 수놓은 자주색 옷, 여러 색으로 짠 융단, 단단히 꼰 밧줄을 너의 시장으로 가져와서 너와 장사를 하였다. 그리고 타르시스의 배들이 너의 물품들을 싣고 항해하였다.'"

(에제 27, 1-25 티로를 위한 애가 中)

에제키엘서에서 다른 이방 민족들과 달리 수르는 심판에 대한 길이가 길고 왕에 대한 심판과 애가까지 따로 있다.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과연 너는 다니엘[16]

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너는 지혜와 슬기로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너는 그 큰 지혜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에제 28, 1-5, 티로 임금에게 내리는 심판 中)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사람의 아들아, 티로 임금을 두고 애가를 불러라. 그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완전함의 본보기로서 지혜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동산 에덴에서 살았다. 너는 홍옥수와 황옥, 백수정과 녹주석과 마노, 벽옥과 청옥과 홍옥과 취옥, 온갖 보석으로 뒤덮였고 너의 귀걸이와 네가 걸친 장식은 금으로 만들어졌는데 네가 창조되던 날 그것들이 모두 준비되었다. 나는 우람한 커룹을 너에게 보호자로 붙여주었다. 너는 하느님의 거룩한 산에 살면서 불타는 돌들 사이를 거닐었다. 너는 창조된 날부터 흠없이 걸어왔다.

그러나 마침내 너에게서 불의가 드러났다. 너의 그 장사 때문에 너는 폭행을 일삼으며 죄를 지었다. 그래서 나는 너를 더럽게 여겨 하느님의 산에서 쫓아냈다. 보호자 커룹이 너를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너의 아름다움으로 네 마음이 교만해지고 너의 영화 때문에 너는 네 지혜를 타락시키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땅바닥에 내던지고 임금들의 구경거리로 내놓았다. 너의 그 많은 죄와 부정한 장사로 너는 네 성소들을 더럽혔다. 그래서 내가 네 한가운데에서 불이 나와 너를 살라버리게 하였고 구경하는 모든 이의 눈앞에서 너를 땅바닥의 재로 만들어버렸다.'"

(에제 28, 11-18, 티로 임금을 위한 애가 中)

솔로몬 왕을 연상시키는 대단한 부유함이 나오는데 이 내용을 보아 평소 이스라엘은 수르와 장사 문제로 인한 시비가 꽤 많았던 것 같다.
페니키아와 이스라엘은 서로 말이 통하였는데[17]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나안 지방에서 살면서 페니키아어를 입말로 썼기 때문이다. 이후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갔을 때도 따로 고센이란 지역에서 이집트인과 동화되지 않고 살았기에 페니키아어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히브리어와 페니키아어의 차이는 히브리 문자와 페니키아 알파벳의 차이일 뿐 입말은 서로 같았기에 통일 이스라엘은 물론 북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 왕국 역시 페니키아와 인적교류가 활발하였다. 히브리 문자도 페니키아 알파벳을 차용했다고 한다.
티레는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몰렉 외에도 전 페니키아 지역에서 숭배받던 아슈타르테 여신도 섬겼는데, 이 아슈타르테가 그리스의 다신교적 특성에 따라 아프로디테로 바뀌었다는 근거있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을 따른다면 아프로디테가 크로노스의 정액과 바다가 만나서 태어났다는 신화는 티레의 강력한 해양문화를 뜻하는 의미가 될 수 있다.

4. 관련 문서



[1]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2]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3] '바위'라는 뜻이다.[4] 그리스 신화에서 으레 튀로스산 세마포를 가리키면 매우 값비싼 세마포를 뜻하는데 그 튀로스가 바로 티레다.[5] 가톨릭 성경[6] 공동번역 성경[7] 개역성경번역판[8] 사업상 비밀로 보안이 매우 철저했다고.[9] 티레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다. 몰렉은 본디 암몬인의 신이고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게헤나 산에서 몰렉에게 인신공양을 바쳤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에 있다. 그 때문에 게헤나는 유대교에서는 지옥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다만 카르트 하다쉬트의 이야기에서 보면 알다시피 몰렉의 인신공양으로 가장 유명한 동네가 수르였던 것도 사실.[10] 1열왕 5, 15-32[11] 하디스는 이베리아 반도에 있는 도시로 현재의 카디스이다. 페니키아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타르테소스(성경의 타르시스)와 교역하기 위해 세웠다. 근대까지 스페인에서 제일가는 항구였고 콜럼버스 탐험의 시작점이기도 하다.[12] 시바 여왕은 시온 성에서 솔로몬 성으로 이어지는 대리석 층계와 층계 양 옆으로 장엄하게 비춰지는 황금 궁전과 상아 궁전, 그리고 대회랑을 따라 있는 솔로몬 성전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도 믿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니 오히려 소문이 실제만 못하다고 찬사를 보내고, 솔로몬에게 이러한 영광을 누리게 한 신을 찬미하며 가져왔던 보물을 솔로몬에게 주었다. 솔로몬은 이것을 가지고 류트를 연주하는 자들을 위한 누각을 지었다고 한다.[13] 이사야서 23장, 에제키엘서 27, 28장은 티레에 대한 저주로 채워진 장이다.[14] 트리폴리 주민들이 주군을 배신해가며 바라던 이집트 해군은 함락 후 일주일 뒤에야 트리폴리 남쪽의 티레에 닻을 내렸다[15] 1122년 말엽 동로마의 코르푸 섬을 점령한 후 출항하였다. 일명 베네치아 십자군은 출발부터 기독교 국가와 싸운 것이다. 이는 82년 후 더 크게 재현되었다.[16] 성경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아니라, 우가리트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페니키아 전통의 유명한 의인이다. 에제키엘 14장 14절에 "비록 그곳에 노아와 다니엘과 , 이 세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의로움으로 제 목숨만 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에 나오는 다니엘이 이 사람이다. 노아는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그 사람이고 욥은 욥기에 나오는 아브라함 시대 의로운 아랍인 부자로 알려졌다. 에제키엘서에서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보아 욥의 일화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 알려진 이야기였던 듯하다.[17] (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가 아슈토레트로 불리는 등) 미세한 차이는 있었지만 사투리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