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1세
영어: Richard I (리처드 1세)
중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차르드 1세)
프랑스어: Richard I (리샤르 1세)
라틴어: Ricardus I (리카르두스 1세)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국 공작, 아키텐 공작[2] ,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앙주 백작, 멘 백작, 낭트 백작, 아일랜드의 영주.'''He was a bad son, a bad husband, a bad king, but a gallant and splendid soldier.'''
'''"나쁜 아들이었고, 나쁜 남편이었으며, 나쁜 왕이었으나, 용감하고 빛나는 군인이었다.'''"[원문]
스티븐 런처먼 경(Sir Steven Runciman), <A History of the Crusades> 3권 75p.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용장. 또한 리처드는 예나 지금이나 용맹함으로 유명하지만, 군사 전략가로서의 능력도 매우 뛰어나서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슬람의 영웅이었던 살라딘의 유일한 맞수로 맹활약했다. 십자군 전쟁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토머스 F. 매든 세인트루이스 대학 중세학 교수는 그를 '''중세 유럽 최고의 전략가'''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사자심왕(The Lionheart)'''이라는 별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번 나섰다 하면 불리하던 전투도 뒤집혀버리는 초인적인 무용담을 자랑하는 인물이었다. 무용담으로만 따진다면 항우와 비견될 정도인데, 그 때문에 "사자심왕 리처드"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인물. 사자심왕을 줄여서 사심왕(獅心王)으로 적기도 하고 사자마음왕으로 풀어 적기도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사자왕 리처드'라고 알려져 있다. 아마도 사자심왕이나 사심왕이라는 말이 익숙치 않아서 그런 듯하다. 사실 의미를 따져보면 결국 사자왕이나 라이온하트나 똑같이 사자와 같은 용맹을 지녔다는 뜻이라 오역까지는 아니고 적당한 의역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3]
2. 프랑스인에 가까웠던 정체성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후 8살까지 그곳에서 살긴했으나 왕이 된 후 10년의 재위 동안 실제 잉글랜드에 있었던 건 6개월 정도라고 한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오늘날의 프랑스 지역에서 보냈으며, 그 가운데 몇 년간은 제3차 십자군 원정 당시에 종군했던 중동 지역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의 지배계층인 앵글로-노르만 귀족들이 그랬듯이 영어[4] 가 아닌 프랑스어를 모어로 구사했다.[5]
현재 가장 권위있는 리처드 평전을 펴낸 존 길링엄이나 권위 있는 십자군사가인 토마스 오스브릿지에서 중세 영문학을 전공하고 몬티 파이선과 성배를 감독한 테리 존스, 영국 왕실 전문 대중역사가 앨리슨 위어에 이르기까지 현대 영국 역사가들은 리처드를 '본질적으로 남프랑스인', '태생에서나 자란 환경에서나 확실히 잉글랜드인은 아니'라고 하며, 리처드의 정체성 형성은 서남부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는 데 동의하는 편이다.[6] 리처드는 자신을 부계인 '앙주 가문의 사람'으로 여겼으며 자신의 절대로 원한을 잊지 않고 복수하는 성질, 집착적인 성격을 '검은 공작' 풀크와 같은 앙주가 조상들에게 온 것이라고 자주 말했고 동시대인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문화적으로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유년기 대부분 시절을 아키텐에서 보냈고 북부 프랑스어도 썼지만 아키텐 공국에서 쓰이는 남부 프랑스어가 리처드의 모어였으며 잉글랜드의 왕자이기 이전 아키텐의 공작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아버지에 대한 반란도 헨리가 리처드의 삶과 정치적 기반이었던 아키텐을 리처드에게 분리하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리처드의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후원하며 형성된 음유시인과 궁정식 연애 문화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아서 왕 전설이 기사도적인 연애 낭만담으로 재창조되는 배경이 되었는데 리처드 역시 봉신의 아내와 궁정식 사랑의 모범을 따른 연애를 했고[7] 베르트랑 드 보른 등 남프랑스의 음유시인들을 후원했으며 자신도 남부 프랑스어로 시를 쓰고 노래를 지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리처드가 영어를 알았다거나 사용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에, 리처드가 등장하는 영미권 사극에서는 리처드가 강한 프랑스식 억양을 쓰는 연출로 타협하는 추세이다. 동시대인인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가 '적당한 값만 쳐준다면 런던도 팔 수 있다'는 말을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다고 기록했는데 잉글랜드에 대한 리처드의 다소 냉담한 태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다만 명목상으로 앙주와 아키텐은 프랑스 왕의 봉토인데 비해 잉글랜드는 리처드를 프랑스 왕과 대등한 국왕으로 만들어주는 땅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과는 별개로 의전에서는 잉글랜드를 상당히 신경썼다. 먼 후손인 조지 1세가 단순히 잉글랜드에 대해 심리적 거리감이 있는 걸 넘어 잉글랜드에 대해 신경쓰는 것 자체를 사실상 포기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3. 생애
1157년 9월 8일생. 영국 플랜태저넷 왕가 헨리 2세의 3남이자 후대 왕인 존 왕의 형이다.
첫째 형으로 기욤 9세가 있었는데 2살 때 열병으로 죽어서 둘째 형 청년왕 헨리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런데 리처드는 아버지와 둘째 형과의 관계가 막장이다.(…)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프랑스의 필리프 2세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협박해 왕위를 얻었는데[8][9] 나중에 가서는 이슬람 털러 나가 있는 동안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돌아와야 했다.
8살에 잉글랜드로부터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아키텐에 건너와 11살이 되던 해인 1168년에 영지를 물려받아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며 1172년에는 푸아티에 백작이 되었다. 1174년, 둘째 형 청년왕 헨리, 동생 제프리와 함께 아버지 헨리 2세를 상대로 대반란을 모의할 때, 어머니 엘레오노르 전 남편 루이 7세에게서 기사 서임을 받았다. 1183년, 리처드가 통치하던 가스코뉴의 주민들이 그의 가혹한 통치 방식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사이가 좋지 않던 리처드의 형 헨리와 동생 제프리가 반란군에 가세했다. 그러나 6월 11일 헨리가 급사한 후 반란군이 와해되었고 리처드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란군을 격파, 확실한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모습에도 헨리 2세는 "내가 왕위를 물려줄 테니 대신 네가 통치하는 아키텐을 네 동생 존에게 물려줘라"라고 명령했는데 이 의견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아키텐은 원래 어머니 엘레오노르의 영지였기에 헨리 2세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아버지 헨리 2세와 표면적으로 화해하긴 했지만 1188년,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와의 싸움에 필리프 편에 가세하며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1년 후인 1189년에 헨리 2세가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었다.
3.1. 십자군 전쟁
1189년 국왕에 오른 리처드 1세는 난데없이 헨리 2세에 맞서 자신의 편을 든 사람들을 비열한 아첨꾼에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라고 모조리 처벌함으로써 토사구팽해버리는 등 대대적인 숙청을 가하고 잉글랜드 왕국의 보물을 모두 차지했다. 대관식 날에 리처드에게 선물을 바쳐 혹여 발생할 화근을 피하려던 유대인들을 붙잡고 내쫓아 옷을 벗기고 후드려 팬다. 이후 그의 대관식 날에 왕이 유대인을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헛소문이 퍼져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다. 대량 살육이 벌어졌건만 리처드는 폭도들 중에 오로지 3명만 처형했는데 그나마도 살인죄가 아니라 기독교도 집에 불을 지른 방화죄였다. 이후 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게 되는데, 전쟁 비용으로 무거운 세율을 매기고 재정적으로 나라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국가를 아주 말아먹을 생각까지 없었고, 동생인 존 왕의 문제도 있었기에 나름대로 조치를 취해놓았다. 이는 하단 참고.
어쨌거나 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대활약하였고, 용맹 무쌍하기로 유명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살라딘을 전투에서 이긴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보급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내정을 말아먹으면서까지 상당한 자금과 물자를 준비해두고 출정했고, 출정 후에도 예루살렘으로 직행하기보다는 보급로를 단단히 다지면서 예루살렘으로 접근해 가는 등 신중한 면도 보였다.
그런데 살라딘을 수차례나 무찌르는 눈부신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정치적 이해 관계 때문에 이탈이 속출한 데다 초반에 "10만 대군"이라 자칭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대군[10] 이 황제의 익사로 와해되어 버리는 악재도 있었다. 결국 최종 목표인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한다. 그래도 살라흐 앗 딘의 공격으로부터 일부 지방은 지켜내고 해안의 여러 도시를 수복하는 전과를 올릴 수는 있었다.
이런 군사적인 성과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군이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급사로 이탈하지 않고 프랑스 왕 필리프 2세가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 그러나 살라딘도 지친 군세를 정비하고 시리아를 비롯한 각지에서 원군이 도착하고 있던 상황이고 게다가 십자군에 대한 아랍의 적개심도 대단했으며 전투에서 아크레 공성전을 비추어 보면 아랍인들이 독을 품고 필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서 속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리처드 지휘하의 십자군은 이슬람 군대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교환비를 보일 뿐만 아니라 2차 십자군을 괴멸시킨 주 전법인 유인 전술이나 기만 전술이 거의 통하지 않아 살라딘의 고민이 컸고,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진군해오는 리처드를 막기에는 병력이 집결하는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그의 십자군이 매우 위협적이고 강력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결국 리처드 역시 프랑스군의 영국령 침공이나 존의 반란을 알면서도 무리하게 예루살렘으로 진격 중이었고, 그러다가 영국의 상황이 점점 위험해지니 더이상 전쟁을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협상으로 마무리하는 게 양측으로서는 윈윈이었던 셈이다.
3.2. 존 왕의 배신
프랑스의 존엄왕 필리프 2세와는 프랑스에 있었을 때 친했기에 한때 동맹을 맺기도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정치적 문제로 인해 대립한 적이 더 많다. 3차 십자군 전쟁 중엔 필리프 2세가 동생인 존을 사주해 형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만드는 통에 살라흐 앗 딘과 결국 결판을 내지 못하고 귀환하게 된다. 그러나 귀환하던 도중에 배가 두 번이나 난파되고, 템플 기사단원으로 위장해 영국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 전에 자신이 모욕했던 레오폴트 5세 공작에게 붙잡혀 포로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법정에 기소되었지만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법정을 감동시키며 '''"나는 신 바로 아래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11] 게다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리처드의 죄목으로 내걸은 것이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12] '을 이끌던 '산의 노인'에게 의뢰해 몬페라토 후작 코라도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는데, 이에 산의 노인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아니라는 서신을 보냈고 리처드의 명성은 이미 기독교 세계에 퍼져 있었다. 참고로 이 산의 노인은 실질적인 어쌔신의 시조라 불리는 라시드 앗 딘 시난이다.[13]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은 리처드에게 국왕에 걸맞은 예우를 할 것이며 몸값을 내면 석방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이에 리처드 1세의 모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존과 필리프 2세보다 먼저 잉글랜드에서 모금된 10만 마르크를 하인리히 6세 황제에 전달해 리처드는 석방되었다. 리처드 1세가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존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의 주요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편지를 받은 존은 자신이 머물던 에브뢰 요새의 프랑스 수비병을 죽이고 형에게 에브뢰 요새를 바치면서 용서를 빈다.[14] 어머니인 엘레오노르까지 달래자 리처드 1세는 "괜찮아. 넌 아직 애니까" 말하고 공개적으로 용서한다.'''"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악마가 풀려났소."'''(Look to yourself: the devil is loose.)
3.3. 필리프 2세와의 대결
프레티발에서 필리프 2세의 프랑스 군을 일각에 격파, 필리프 2세가 이끌던 남프랑스 봉신들의 대반란을 압도적으로 제압했다.
후에 런던에서 윌리엄 피츠오스버트의 폭동이 일어나고, 리처드 1세가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가 그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전쟁 중반, 두 왕이 일진일퇴를 반복, 리처드는 결정적인 순간에 발군의 군사적 능력을 증명하여 승기를 휘어잡았다.
여기서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의 주요 동맹국이자 대륙의 세력 균형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 플랑드르, 툴루즈를 연이어 이탈시키고 신성로마제국 황위 계승에도 관여한 리처드 1세의 정치적 행보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반대로 상당히 우수한 정치적 식견과 기민한 외교술을 내보인다
게다가 전대왕 헨리 2세가 일생을 바쳐 일구어 낸 개혁과 축적한 국력이 원동력이 되었고,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비운 사이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의 내정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리처드 1세의 뛰어난 군재가 결정적이었다. 잉글랜드보다 몇 배의 병력을 동원했던 살라흐 앗 딘도 경악한 리처드 1세의 개인 용력과 별도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고 이점은 필리프 2세와의 전쟁에서 여과없이 드러난다.
실제로 전쟁 후반,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지 대부분을 수복하고 선조 바이킹 롤로가 그랬듯, '''필리프 2세의 본거지인 파리 외곽까지 침투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압도적 우위를 점하였고 북프랑스, 플랑드르, 신성 로마 제국, 남프랑스,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등에 걸쳐 거대한 연합을 건설했다. 궁지에 몰린 필리프 2세가 음모를 총동원해 리처드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휩쓸기 시작했다.
'''리처드 1세가 패권 다툼에서 정점을 찍은 순간''', 리모주 자작 아데마 5세(Adémar V de Limoges)가 필리프 2세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3.4. 죽음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령과 프랑스 간의 중요한 국경지대로 리처드의 형인 청년왕 헨리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라, 리처드 1세는 직접 출군했다.
또한 리모주의 영지에서 로마 제국 시절의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리모주 자작이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해 리처드가 공격했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물을 언급한 출처는 호버든의 연대기, 코제샬의 랄프의 연대기, 마르간의 연대기, 프랑스 궁정의 연대기들이 있고 특히 마르간의 연대기를 제외한 것들은 12세기 후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다. 다음은 코제샬의 랄프가 라틴어로 쓴 잉글랜드 연대기인데, 보물이 나왔다는 말을 기록한다. 연대기에는 하단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리모주는 로마 제국 시절에도 별로 큰 도시도, 중요한 도시도 아니여서 왕이 군대를 끌고 갈 만큼 막대한 보물이 나왔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있다. 또한 막대한 보물의 존재를 액면 그대로 듣지 않고 리모주 수도사 베흐나의 기록 "잉글랜드 왕의 목적은 리모주 백작의 성과 마을의 파괴였다."에서 보물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리모주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목적과 필리프가 개입한 권위 문제가 얽힌 전투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리모주 자작은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는데, 리처드는 사순절 기간 필리프와 평화 조약을 맺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리모주 자작의 땅에서 발견되어, 이 보물을 넘기라고 했는데 자작이 거절해 더욱 화가났다는 말도 있다. 마치 사순절 기간에는 무기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양 리처드는 자작의 땅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다.
존 길링엄(런던 정치 경제 대학 역사학 명예 교수), ''Richard I'', 323
지도를 참고하면 당시 리모주 자작령은 중요한 곳이다.[15] 당시 프랑스는 크게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현재 크뢰즈 주)이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차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나 화살촉은 이미 그의 어깨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다. 군의사는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내었다. 그렇지만 상처가 심하게 곪아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16]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 1세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짐이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짐을 죽이려 하였느냐?"라고 하자 이에 구르동이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그것도 실컷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도 죽을 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구르동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겠다. 몸 성히 가거라."라고 말한 뒤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를 일기로 모친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17] 영웅의 죽음치고는 개미에게 당한 사자로 비견될 정도로 허무한 죽음이었다.
퐁트브로 수도원 조각상
루앙 대성당의 조각상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18]'''"짐은 야심을 성전 기사단에게,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기노라."'''
리처드 1세의 유언.
4. 제3차 십자군 전쟁: 초인적인 무용담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장기적인 전략의 측면에서 본다면야 살라딘이 리처드보다 결과적으로는 나은 평을 받았지만, 사실 리처드도 당대에서 손꼽을 만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전술적으로도 탁월해서, 적 전술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그리고 과감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다. 리처드는 용력뿐만 아니라 맹수와 같은 전술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승부의 갈림길에서 본능적으로 전세를 뒤집는 결단을 내리곤 했다. 워낙 인상적인 무용 때문에 리처드를 닥돌 용장 정도로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리처드의 무력이 확실히 '저게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뛰어나긴 했지만 한 개인의 무력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기기는 어렵다. 개인 무력이 워낙 탁월해 전략과 전술이 저평가받는 불운한 경우.'''A skilled warrior, gifted leader, and superb tactician.'''
'''숙련된 전사이자 타고난 리더, 그리고 뛰어난 전술가.'''
토머스 F. 매든 교수. 십자군 전쟁의 진짜 역사(The Real History of the Crusades)
전사 이미지가 압도적이지만, 의외로 직접 닥돌해 싸운 건 이슬람과의 전투뿐이고[19] 프랑스와 전쟁할 당시에는 직접 나가 싸우지 않고 지휘관으로서 적군을 박살낸 걸 볼 때 결코 닥돌만 가능한 인간은 아니었다. 리처드는 전술가로서 공격적이지만 차분했으며, 전략적인 판단을 내릴 때도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보급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기에 진격할 때 반드시 이를 고려해서 속도가 느릴지언정 매우 안정적으로 나아갔고,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한 십자군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 협상과 무력 시위,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 공격 계획을 세웠다. 이는 리처드의 쿨가이적 성향이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후세에 리처드의 이미지는 전략가나 전술가라기보다 무적의 전사로 남았는데, 교만하고 현지처를 넘어 남색썰에 탐욕스럽다 등 모범적인 성격이 아닌 무식한 이미지가 있는 성격[20] 에다 그의 용력이 워낙 상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진정 초인에 가까웠다. 오직 왕 개인의 무력만으로 적 전체를 쓸어버리는, 중국의 항우에 필적하는 무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런 신화적 용력이 발휘될 때마다 적과 아군 전체를 압도시키는 거대한 카리스마가 내뿜어졌다. 중국 역사에도 초인적인 영웅담을 자랑하는 초인적인 전투가 많이 전해 내려오지만 실제론 중국 특유의 과장이 많이 섞인 영웅담에 가깝고 정사와 연의를 구분하지 못한 일반인들의 착각이 많은데 리처드는 유럽측의 기록과 중동 측의 기록이 '''교차검증이 되는, 상대하는 적군도 인정한 진짜 괴물 같은 전투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리처드는 항상 전선에 나서서 자신의 부하들보다 맹렬하게 검이나 도끼를 휘둘렀는데[21] , 살라딘의 병사들이 튼튼하게 만들어 놓은 전열이 리처드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너졌다. 그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살라딘이 전열이 마구 무너지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서 '''"저 자가 바로 샤이탄 아니냐?"'''는 슬픈 농담을 던졌고, 한 아미르[22] 가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요."라고 말하자 이에 동의했다는 기록이 아래와 같이 남아있다.[23]
이런 생각은 리처드 1세의 적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일 수도 있다. 동생 존의 반란을 지원하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풀려났다는 말을 듣고 존에게 "악마가 돌아왔으니, 네 목숨은 네가 챙기기 바람."이란 편지를 보내놓고 재빠르게 존을 버리고 자기 살 궁리만 하기 시작했다. 적의 입장에서는 그만한 악마도 없던 모양.(야파 전투 때 혼자의 힘으로[24]
6만 2천의 살라딘 군을 박살내버린 리처드를 회상하며)"세계가 창조된 이래로 우리는 그렇게 용감하고 그렇게 무기를 잘 다루는 기사를 결코 본 적이 없습니다."
한 아미르가 말했다.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 그를 능가하는 자는 없으며, 그는 언제나 가장 먼저 진군하고 가장 늦게 퇴각합니다. 우리는 그를 사로잡으려고 최선을 다했으나 그의 검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모두 헛된 일이었습니다. '''그의 공격은 무시무시하고 그와 싸우는 것은 죽음을 부르는 일과 매한가지 입니다. 그는 인간이 아닌듯 행동합니다.'''"
놀랍게도 살라딘은 이런 두려움을 순순히 인정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야파 전투 당시 리처드가 말을 타고 전투를 치르다 말이 죽어버리자, 그냥 칼 한 자루 쥐고 우랴! 하면서 병사들을 때려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게 된 살라딘은 '''"리처드 같이 위대한 왕이 병사들과 어깨를 맞대고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25] 부하를 시켜 그에게 가장 좋은 말을 가져다 주라고 했다. 리처드는 그 말을 받고 감사를 표하고는, 말을 탄 뒤 방금 전 감사를 표한 살라딘의 병사들을 썰기 시작했다.
둘은 실제로 얼굴을 마주대고 만난 적은 없고 사신이나 편지로 교류했다. 둘은 서로를 상대방 진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 리처드가 돌아올 땐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하자 살라딘은 "기왕 뺏길 거면 당신 같은 훌륭한 사람에게 뺏기는 게 낫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리처드는 프랑스로 돌아가는 와중에 살라딘의 죽음을 전해 듣자 "우리가 있었다면 그도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4.1. 아크레 해전
1191년 6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아크레를 포위하고 리처드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키프로스에서 군을 정비한 후 아크레로 향하던 리처드 1세는 도중에 갤리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왕은 피터 데 바레스라라는 선원을 불러 저 배의 정체를 알아오라 일렀고, 잠시 후 자신들이 프랑스 왕의 배라고 밝혀왔다.
유유히 지나던 그 배는 리처드가 탄 함선 옆을 지나다가 갑자기 활과 다트를 쏴대며 공격을 해왔다. 리처드 왕은 반격을 지시했고 양측은 바다 위에서 활을 주고받는 교전을 펼쳤다. 그러던 중 왕은 대뜸 휴식을 취하겠다며 양손의 무기를 내려놓고 앉아버렸다(...). 지휘관들이 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 리처드 1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치열하게 싸웠다. 프랑크군이 갤리선에 도선, 갤리선에 탄 병력들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으나 아군의 피해도 막심해지자 그제서야 리처드 1세는 직접 일어나 칼을 들고 충각 전술을 지시했다. 결국 이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리처드 1세의 십자군 원정 첫 번째 승리를 거뒀다.그래! 제군은 이 배를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고 고이 보내주겠다는 건가! 부끄러운 줄 알라! 그토록 많은 승리를 거두고 이제와서 게으름뱅이가 되어 겁쟁이처럼 무너지겠다는 건가! 적이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 한 휴식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대 제군은 똑똑히 들어라! 이 적들을 그냥 도망치게 하면 모두 교수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Itinerary of King Richard)》
하단은 아랍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
1191년 6월 8일, 잉글랜드 왕이 아크레에 당도했다. 그는 오는 길에서 빼앗은 키프로스 섬을 차지했다. ... 이 사건이 그의 영지를 넓히고, 프랑크인에게 힘이 되었다. 그들이 무슬림에게 입힌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잉글랜드 왕은 용기, 교활함, 끈기, 그리고 인내심이 그 시대에서 걸출한 남자였다. '''이 남자 때문에 무슬림이 전대미문의 재앙으로 시험받았다.'''
잉글랜드 왕이 오고 있다는 전갈이 도착했을 때, 살라흐 앗 딘이 군사, 무기, 보급품을 가득 실은 대형 선박을 의장하라 명령했다. 잉글랜드 왕이 우연히 이들과 마주치자 교전을 시작했다. 무슬림은 끈질기게 싸웠으나 필사적으로 후퇴할 때, 선장이자 이븐 샥틴의 부하인 야쿱 알 할라비가 프랑크인들이 배의 전리품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 아래로 내려가 선체에 거대한 구멍을 뚫었다. 모든 것이 가라앉았다. 이러한 이유로 아크레 도시는 병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알리 이븐 알 아시르의 연대기》
4.2. 아크레 공성전
이후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토착 열병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다. 한동안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결국 7월 14일 십자군이 치열한 접전 끝에 아크레 성을 점령하는 것을 지켜본 후 병이 나았다.... 1191년 '''6월 8일, 저주받을 잉글랜드 왕이 아크레에 당도했다.''' ... 그의 도착은 위용당당했다. 프랑크인들이 엄청난 기쁨과 환희로 그를 맞이했다. 참으로, 기쁨의 밤에 그들이 막사에서 거대한 불꽃을 피웠다. 그 불꽃들이 아주 인상적으로 거대하고, 상당한 크기의 힘을 나타냈다. 일전에 적군의 귀족들이 우리에게 잉글랜드 왕의 도착이 임박함을 위협적으로 알렸고, 탈영병들은 그들이 왕이 도착할 때까지 도시에 대항하여 가하길 원하는 엄청난 압력을 미루고 있다 말했다. 잉글랜드 왕은 현명하고 전투의 베테랑이며, '''그의 도착이 무슬림인의 심장에 공포와 섬뜩함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술탄은 전능자를 향한 믿음, 미래의 보상에 대한 자신감과 확고함으로 이 상황을 직면하는 중이었다. '신을 믿는 누구나 만족할 것이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
여담으로 공성전에서 열병[26] 으로 쓰러져 부대의 사기가 떨어지자 누워 있던 침대채로 전선으로 이동해서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쇠뇌를 쏴 성 위의 적병을 죽여 사기를 올리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
4.3. 아크레 포로 학살 사건
한편 아크레를 점령함으로 리처드는 무슬림 병사 2,700명을 포로로 잡게 되는데 이 포로의 처우에 대해 살라딘과 협상을 시작했다. 원래는 성십자가와 포로의 몸값과 그리스도교 포로 1,500명을 교환하기로 합의했고 기한은 한 달로 정했다.
그런데 살라딘은 몸값 조달에 어려움을 겪어 기한이 지나도록 저 협의를 지키지 못했다.[27] 대신 살라딘은 일단 포로들의 몸값의 일부분만 지불하겠고 나중에 마저 지불하겠다고 재협상을 했는데, 리처드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기독교 포로들을 풀어준다는 확약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중요한 기독교 포로들의 명단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살라딘이 이 요청을 거절하면서 다시 재협상에 들어가자 살라딘이 일부러 시간을 끈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결국 포로들을 학살한다.(1191년 8월 20일)
이 학살은 아크레에서 몇 km 떨어진 언덕에서 일부러 살라딘의 군대가 볼 수 있는 곳에서 진행했다고 한다. 이 참상을 지켜보던 이슬람 군대는 이곳으로 돌격해왔으나 십자군은 이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빼도박도 못하는 포로 학살 맞지만, 이유없는 학살조차 일상다반사로 일어나던 중세의 전쟁에서 합의가 지켜지지 않아 처형했다는 것은 당시 전쟁 양상으로 보았을 때 특별히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기는 무리가 있다. 때문에 이 사건을 두고 살라딘도 리처드를 비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이슬람 측도 포로 학살을 흔하게 했으니까.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실제로 살라딘이 시간을 끌지 않을까 염려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도 봉건주의였으므로, 술탄인 살라딘의 명령에 의해 지방 영주들이 병력을 몰고 와서 참전하는 식이라 시간이 지날수록 살라딘의 군대는 모여들었으므로 이를 염려한 것이다. 게다가 리처드는 추가 증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몇 배나 달하는 이슬람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29] 에서 3,000여 명이나 되는 포로를 남겨두고 진군한다는 것은 위험성이 너무 컸다. 참고로 살라딘이 데리고 있던 기독교인 포로 1,500명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풀려났다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에서 미루어 역시 처형당했거나 노예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살라딘이 당대로서는 유례없을 만큼 자비로운 군주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런 그조차도 이 사건 말고도 여러 번 포로를 처형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 당시 전쟁 상황이었다.이세환: 어떤 역사학자들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보기도 해요. (리처드와 십자군이) 2,7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을 먹여 살려야 했잖아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급이 조금 개선되었다고 하지만, 몇 천 명의 포로를 먹여 살린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거든요?
허준: 그렇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리처드 왕께서 밥 나눠주기 아쉬워서...
임용한: 포로를 안 죽여야 한다는 거는, 20세기 전쟁 때에 간신히 말로 나왔어요. 말로. 우리가 독소전쟁도 다루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말했지만, 2차 대전 때도 기사도가 지켜진 전쟁이 몇개 없어요.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전쟁 포로를 죽이면 범죄야.", "도시를 폭격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면 범죄야."라고 말한 지 불과 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고 있는 거에요.'''
이세환: 지금 (인권이라는) 이런 개념이 나온 지가 50여 년밖에 안 됐어요.
임용한: 아니, 중세라서가 아니고, 지금도 그렇다니까요. 지금도 쿠르드족에게 가스 뿌리고, 아프가니스탄에 독가스 뿌리고, 지금도 그런 짓을 해요. (제네바 협약 준수를) 하는 나라가 적어요. 지금도.[28]
참고로 하틴 전투가 끝난 이후 포로로 잡힌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의 기사 230명이 살라딘의 명령으로 학살당했다.[30] 보병의 수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는지 기록이 없는데 병력 구성상 말탄 기사가 230명이나 포로로 잡혔으면 말 없는 보병은 그 10배 이상 잡혔다고 봐야 한다. 이들 중 기독교로 개종한 투르크 용병은 모두 죽였고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으니 리처드가 학살한 3000명과 별 차이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 측에서조차 이를 두고 조금도 비난하지 않은 이유는 이교도 포로를 학살하는 것은 당시 관점에서 전혀 잔인한 행동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4.4. 카이사레아 전투
1191년 8월 30일, 리처드가 이끄는 프랑크군과 살라딘의 정찰대가 맞붙었다. 살라딘이 곳곳에 매복시켜 놓은 병력들이 끈질기게 포위해 공격했지만 리처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썰면서 나아갔다. 그런데 카이사레아 근처에서 당시 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의 프랑스군이 살라딘의 투르크군의 매복에 당했다.
후위에서 아군이 공격당하는 걸 보자 리처드 1세는 혈혈 단신으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투르크군의 머리통을 직접 따버렸으며 좌우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투르크군들을 죽여댔고, 투르크군들은 이 모습에 질려버려 모두 혼비백산해버렸다.'''후위에 있던 부르고뉴 공작과 그의 프랑스군의 진군 속도는 무척이나 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느림보 행군 때문에 끔찍한 재앙을 당할 뻔하기도 했다. (중략) 군대가 좁은 길목에 다다랐고 그 길목을 따라 군수품 마차가 지나가야 했다. 그런데 길의 비좁음 때문에 약간의 혼란이 일어났다. 그것을 눈치 챈 투르크군은 대번에 짐마차를 덮쳐 부주의한 병사와 군마들을 쓰러뜨리고 짐의 대부분을 약탈한 다음, 저항하는 병사들이 있으면 사정없이 쳐죽이며 물가로 내몰았다. 양측은 그렇게 목숨까지 던지며 씩씩하게 싸웠다. 이런 와중에 한 투르크군 병사가 에버라드라고 하는 사람-솔즈베리 주교의 부하 중 한 사람의 팔을 베자,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부여잡고는 투르크군과 격투를 벌여 그 모든 적군으로부터 용감하게 자신을 방어했다.
그의 초인적인 패기로 거둔 이날의 승리로 십자군은 살라딘의 본군이 머물고 있는 지역까지 진격할 수 있게 되었다.'''그것을 본 리처드는 당장 구조에 나섰다.''' 그러고는 벼락 같은 고함을 치며 투르크군에게로 달려들어 좌우에서 그들을 칼로 찔러 죽였다. 투르크군은 우물쭈물할 틈도 없이 옛날 필리스티아 사람들[31]
이 마카베오[32] 의 얼굴을 보고 사방천지로 도망친 것처럼 리처드 왕의 얼굴을 보자 혼비백산, 머리 없는 투르크군의 시체 몇 구를 우리 손에 남겨놓고 산꼭대기까지 줄행랑쳤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4.5. 아르수프 전투
카이사레아 전투 직후인 9월 5일, 리처드 1세는 살라딘에게 조약을 맺자고 사신을 보낸다. 하지만 조약 내용이 살라딘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살라딘이 이끄는 사라센 군의 전면 철수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프랑크족에게 반환"이었기 때문이다.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양측은 전투를 준비하게 되는데 장소는 인근의 아르수프 근처의 숲이었다. 하지만 제안을 한 리처드도 살라딘이 들어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리처드 1세는 2만 명의 십자군을 동원했고 그중 12개의 기병대를 뽑았고 보병을 5개로 재편성시켰다. 그 후 전위와 후위에 기병대를 배치하고 보병들은 밀집 대형으로 해변가를 따라 움직였다. 또한 상대적으로 통제하기 쉬운 성전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을 십자군 사이 중간중간 배치하며 갑작스런 기습에 의한 붕괴를 막으려 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술이었다.
오후 3시에 3만여 명의 투르크군이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살라딘의 기병들은 원거리에서 지속적인 공격을 가했으나 리처드 1세의 십자군은 꿈쩍하지 않는데 일부 병사는 10발이 넘는 화살을 맞았음에도 진형에서 탈출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리처드 왕은 오로지 밀집 대형만 유지한 채로 전진하도록 했고 이후 전투 양상은 공격하는 투르크군과 수비하며 조금씩 전진하는 프랑크군의 전투로 전개되었다.
전투가 벌어진 후 한참이 지난 상황에서 구호 기사단이 붕괴되어버릴 지경에 이르자 지휘관들이 리처드 왕에게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리처드 왕은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밀집 대형을 유지한 채 수비만 하도록 지시했다.보통 때 같으면 화살을 쏘면 튀어 나오거든요. 튀어 나와야 하는데 십자군들이 몸을 거의 맞대고 인간 방벽을 치면서 가는 거에요. 가다가다, 안 되니까 살라딘도 위기감을 느껴서 두 번째 공격을 시도해요. 직접 공격해라. 그런데 집적 공격이라는 게 죽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단단한 십자군 진형에) 구멍을 내는 거잖아요. 곤봉(클럽) 같은 걸 들고 왔데요. (이전까진) 근접전을 안했었는데 이제부턴 후드려 패기 시작한 거에요. 이렇게 되면 십자군도 진형을 포기하고 뛰쳐 나가야 하는데 대형을 유지하는 거죠. (중략)
그리고 이게 전술적으로 굉장히 중요한데 멀리서 화살을 쏘잖아요. 이거를 십자군이 쫒아가면 절대 못쫒아가요. 결국 도망가는 애들 추격하다 보면 도망가는 애들을 따라 군대가 분산되게 되어있어요. 군대는 분산되면 끝이거든. 그러면 말려드는 거에요.
구호 기사단이 거의 붕괴되어 갈 때쯤, 2명의 기사가 참지 못하고 "성 조지(제오르지오)를 위하여!"를 외치며 달려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다른 기사들이 따라 나갔는데 리처드 왕도 그 타이밍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를 본 살라딘의 기록관, 바하 앗 딘(Baha ad-Din ibn Shaddad)은 이렇게 기록했다.
리처드의 지휘아래 십자군은 좌, 중, 우 3갈래로 완벽하게 나뉘며 살라딘 진형을 향해 돌격해 나아갔다. 또한 이 타이밍에 리처드 왕은 일부 지원 병력을 구호 기사단으로 보내고, 본인은 홀로 칼을 뽑고 나아가 살라딘의 병력들을 썰기 시작한다. 이때 본격적인 무쌍난무를 펼쳤는데 그의 활약은 기록으로 보아도 인간이 아닌 느낌을 들게 만든다.나는 이들 기사들이 보병 부대 중간으로 모여드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그들이 창을 부여잡고 마치 한 사람이 소리치는 것처럼 전쟁 구호를 복창하자 보병 부대가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들은 그 사이를 뚫듯이 질주해나와 단번에 사방으로 돌진해가며, 일부는 우익으로 일부는 좌익으로 또 일부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 우리군을 초토화시켰다. 나는 중앙군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서 좌익으로 대피하려 했으나 그쪽은 이미 중앙보다 먼저 무너진 뒤였고, 심지어 우익의 상황은 그것보다 더 심각했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The Rare and Excellent History of Saladin)[33]
아군이 혼란에 빠진 것을 알자 리처드 왕은 말에 박차를 가해 속도 한 번 늦추지 않고 날듯이 구호 기사단까지 도착해 원조 부대로 데리고 간 부하들을 그곳에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투르크군을 밀치고 나아가 담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치명적인 일격을 가해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앞에서 적들은 양옆으로 픽픽 쓰러져갔다. 그렇게 그는 홀로 맹렬하게 투르크군을 밀어붙이며 적을 쓰러트렸고 그의 칼 끝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 쪽을 공격하든 그는 자신을 위한 공간을 널찍이 확보한 가운데 사방으로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그가 마치 낫으로 곡식을 베듯 적병의 머리를 계속 내려치며 가증스런 종족을 분쇄해나가자, 자기 동료들의 죽어가는 모습에 놀란 적병들은 전보다 더 넓은 공간을 그에게 만들어주었다.'''
(중략)
위풍당당한 키프로스 말 위에 앉아 있던 리처드 왕은 자신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언덕으로 올라가 투르크 군을 만나는 족족 요절을 냈다. 적군들이 그의 앞에서 쓰러지면 투구들도 함께 쨍그랑거렸고, 한 번씩 내려칠 때마다 그의 칼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이날 그의 공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투르크 군은 곧 불가항력적인 그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군에게 무조건 길을 내주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이후 3번의 전투가 더 치러졌고 살라딘이 적극적으로 지휘하면서 군을 이끌었으나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았다. 십자군이 700여 명의 병력 피해를 입은 반면 투르크군은 최대 7천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게 된 것이다. 편력기에는 참패 이후 살라딘이 총공세를 한 번 더 펼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리처드는 단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적들을 향해 달려가 적을 그들의 본거지로 밀어 붙였다'''고 한다.사납고 비범한 왕은 사방에서 아랍인의 머리를 베었다. 아무도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돌아서서 칼을 휘두를 때마다 널따란 길이 났다. '''그는 연신 검을 휘두르면서 아랍인들을 베어 나갔는데, 그 모습은 마치 낫을 든 농부가 곡식을 베는 것과 같았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여기에서 리처드 1세의 전투 기록 중 일기토가 드문 이유를 알 수 있다. 아미르는 유럽으로 따지면 영주 정도 되는 사람들인데, 그러니까 '''리처드 1세는 일기토 상대로도 나쁘지 않았을 영주들을 그냥 학살하고 지나간 것이다.(...)''' 이쯤되면 일기토를 신청한 사람의 용감함을 칭찬할 게 아니라 어리석음을 비웃어야 할 판.(프랑크군이) 막사 준비에 전념이 없던 틈을 타 투르크 대군이 우리 군의 후위를 덮쳐왔다. '''왕은 격투 소리를 듣고 병사들에게 전투 명령을 내리며 그대로 말에 올라 15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하느님과 성모께서 우리를 보우하사"를 큰 소리로 외치며 투르크 군에게도 돌진해 갔다.''' 그는 이 구호를 두세 번 연달아 외쳤고 나머지 병사들도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급히 그의 뒤를 따라 적에게로 돌진해 사라센 군을 그들의 본거지인 아르수프 숲까지 밀어붙였다. 그후 왕은 막사로 돌아왔고, 격렬한 전투에 지친 병사들은 밤새 휴식을 취했다. '''다음 날 병사들과 그곳에 가보니 32명의 아미르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4.6.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이후 승리의 기세를 몰아 아크레 남쪽 60km지점, 현재의 팔레스타인이 위치한 지역까지 내려온 기독교 연합군[34] 은 이해 11월 말까지 리처드 왕의 지시 아래 야파의 진지 구축 작업과 일부 요새를 복구하는 것에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윌리엄 드 프레오라는 기사와 단둘이 매 사냥을 떠났다가 사라센 군의 기습에 포로로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35]
아르수프 전투의 승리와 야파의 점령으로 십자군의 눈앞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렸다. 이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곧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기뻐했지만 리처드의 생각은 좀 달랐다.
지도만 봐도 알겠지만 예루살렘은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도시였다. 그나마 해안가 도시들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해상을 통한 물자의 보급과 병력의 보충이 가능해서 버텨낼 수 있었지만 내륙 도시인 예루살렘을 이런 방법으로 지켜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의 총 병력은 대략 20만 정도로 추산된다. 때문에 총 병력이 35,000명 정도였던 1차 십자군이 성공한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슬람 세력이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말이다.
문제는 1차 십자군 때의 이슬람 세력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셀주크 투르크나 파티마 왕조나 아바스 왕조나 맛이 가서 술탄이고 칼리프고 그저 이름뿐이었고 동네 마을 하나까지 영주를 자처하며 서로 자기네끼리 땅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게 어느 정도로 심각했냐면 이슬람 영주가 십자군과 동맹 맺고 옆 동네 이슬람 영주를 공격하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었고, 한번은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이 다른 이슬람 영주와 동맹 맺은 십자군과 싸운 일조차 있었다.[36]
때문에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할 때도 예루살렘을 점령할 때도, 트리폴리를 점령할 때도 다른 이슬람 영주는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할 뿐이라 하나하나 십자군에게 각개격파당했다. 만약 전 이슬람이 일치단결해서 공격했다면 십자군 국가의 수립은커녕 기껏해야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영토 일부를 수복하는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막상 안티오키아 공방전만 해도 가장 가까운 알레포의 대영주인 리드완은 안티오크가 공격받은 것을 보며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있었고 먼 모술의 대영주인 카르부카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게임이 끝나가는 상황이었다. 그걸 본 카르부카는 안티오크를 먹어치우려다가 가뜩이나 분열된 에미르들을 더욱 분열시켜 박살이 나고 모술까지 잃어버린다. 각설하고 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건국된 예루살렘 왕국도 이같은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때로는 이슬람 영주들과 동맹 맺고, 때로는 싸우면서 90년의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런데 3차 십자군 당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살라딘이라는 위대한 왕의 등장으로 이슬람 세력은 하나로 통합되었다.'''[37] 이제 100년 전처럼 이슬람 세력의 분열을 이용해 줄타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1차 십자군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체스판 너머에 상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설사 리처드가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해도 뒤에 어찌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리처드와 십자군 병사들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면 물밀듯이 몰려온 이슬람군에 예루살렘을 도로 내주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몇 개월쯤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리처드는 생각한 듯 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마찬가지로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공성전 때는 어느 영주도 십자군의 뒤를 치지 않았지만, 3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성전을 벌인다면 살라딘이 후방을 공격해 올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대신 살라딘과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면 살라딘이 조약을 어기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후술할 리처드의 여동생과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과의 혼담도 이때 나온 일이었다. 허나 살라딘 역시 호락호락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1191년 11월 마침 살라딘은 당시 영주들의 반발로 일시적으로 휘하 병력을 해산한 상태였다.[38] 이 기회를 틈타 리처드는 일단 예루살렘으로 진격했으나 예루살렘까지 하루 거리를 남겨두고 군대를 되돌린다. 아마도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위력 시위였던 듯하다.
한편, 1192년 봄까지 협상을 했지만 쉽게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내줄 생각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리처드는 전략을 바꾼다. 먼저 아스칼론, 가자, 다룸을 점령해 살라딘의 영지인 이집트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후방을 정리한 다음 1192년 6월 예루살렘으로 재진격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리처드는 군사력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할 생각은 없었던 듯하다. 예루살렘으로 전진하는 와중에도 살라딘과 끊임없이 회담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군사력으로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 리처드는 아예 이집트를 공격하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이슬람 영주들은 살라딘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건 수백 년간의 충성의 결과가 아니라, 살라딘의 그동안 쌓은 군사적 업적과 부유한 이집트의 영주란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만약 리처드가 이집트를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면 살라딘은 실각할 수밖에 없고 다시 한번 이슬람 세력은 분열할 수 있다. 설사 이렇게 일이 잘 풀리지는 않더라도 이집트를 공격하면 최소한 살라딘을 압박해 협정을 유리하게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그러데 당시 성지 예루살렘의 공략에만 몰두해 있었던 부르군디의 공작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또한 이때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 소식도 듣게 된다. 결국 리처드는 다시 한 번 군대를 추스릴 겸 해안으로 군대를 되돌린다. 그때 수세에 몰려 있던 살라딘의 군대가 야파를 공격한다.
4.7. 야파 전투
1192년 7월 27일, 살라딘과 6만 2천여 명의 이슬람 군은 야파 요새를 침공한다. 십자군은 이 전투에서 맹렬하게 저항하는데, 그 맹렬한 저항은 무슬림의 역사가들마저 감동시킬 정도였다. 하지만 맞서 싸우는 투르크 병사들의 어그로는 올라갈 데까지 올라가, 마침내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십자군들이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이 그리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투항할 수 없겠냐고 하자 살라딘은 그들의 항복을 접수하면서도 그들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한다.[39]
잠시 후 무슬림 군대가 야파 시내로 몰려와 닥치는 대로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수비대 생존자들은 모두 성채에 틀어박혔다. 살라딘은 부대를 수습하여 야파 방위를 위해 성채를 비롯한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려 했지만 전리품에 취한 무슬림 군대는 살라딘의 통제를 무시하고 날뛰었다. 결국 살라딘의 우려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요새로 퇴각하고 도시를 포기하라. 지금 무슬림 군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편 막 팔레스타인을 떠나려던 리처드는 야파가 함락당했단 소식을 알려오며 '슬픔에 겨워 자신의 옷까지 쥐어뜯는' 전령들의 통곡에 크게 분노, '''"하느님이 살아 계심에 그분의 도움으로 내 할 일을 하고야 말리라."'''라고 외치며 군대를 소집하여 야파로 달려갔다.
살라딘의 병사들은 토요일 아침, 리처드의 갤리선에서 울려퍼지는 나팔 소리에 놀라서 잠에서 깨어났다. 살라딘은 리처드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에 군대를 배치하는 한편, 항복한 십자군 수비대에게 성채를 넘겨받아 야파 방어에 쓰려고 했다. 리처드가 도착한 줄 모르던 수비대는 순순히 성채를 넘기려 했다. 그때 살라딘의 부하들 중에서도 인정이 넘치기로 유명한 늙은 영주인 주르디크가 십자군을 지금 보내줬다가 분노한 무슬림 군대가 십자군들을 도륙할 것이니 십자군들을 위해 안전한 퇴로를 마련해주자고 주장함으로 성채를 넘겨받는 일이 늦어졌다.
하지만 무슬림 병사들은 십자군을 위한 퇴로를 마련해주는 일에 매우 불만스러워하며 일을 대충했고 이 때문에 49명의 수비대원과 49명의 수비대원의 아내, 49필의 말만이 성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수비대원들은 해안가로 접근한 리처드의 범선 35척과 갤리선 15척을 발견했다.'''
마음이 바뀐 수비대원들은 다시 성벽에 짱박혔고 바하 앗 딘에게 자신들의 항복을 철회한다는 매우 정중한 문구를 보낸 다음에 무슬림 병사들을 급습해 도시 밖으로 몰아냈다. 열이 뻗칠대로 뻗친 투르크군과 살라딘은 야파 시내로 몰려가서 수비대를 다시 성채로 몰아넣고 성벽을 맹폭하기 시작했고 성내에 진입까지 성공한다. 성 내는 약탈을 시작한 무슬림 병사들과 성내에 위치한 공성탑에 모여서 죽음을 기다리는 소수의 병사들 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다.
헌데 간신히 나타났던 리처드의 범선은 이상하게 접근을 안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무슬림의 함성 소리와 휘날리는 살라딘의 깃발 때문에 구조 요청을 듣지 못해, 무슬림군만 가득한 야파 요새의 공략 중요성을 토의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 기다리던 자들 입장에서는 속터지겠지만, 이는 리처드가 매우 신중하고 냉정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40] 절체절명의 순간, 수비대가 다시 항복을 구걸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사제 한 명이 바다에 뛰어들어 리처드의 범선까지 헤엄쳐 갔다. 잉글랜드군이 그를 구조하여 갑판에 올리자 그는 리처드에게 부르짖었다.
이에 리처드가 노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숭고한 왕이시여. 우리 병사들은 지금 전하의 구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 도살자들의 칼날에 쓰려져가고 있나이다. 마치 도살을 기다리는 양들[41]
처럼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습니다. 수비대는 전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이 없는 한 그 자리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그때까지 굳이 공격해야 할 필요가 있나 하고 고민하던 리처드는 구조 요청을 듣자마자 전속력으로 야파 요새로 돌진한다. 리처드는 배가 정박하기도 전에 바다로 뛰어들더니 갑옷을 벗고 석궁과 함께 자신의 유명한 덴마크제 도끼를 휘둘러 닥치는 대로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던 무슬림 병사들을 베어내었고 함락이 거의 확실시 되어 방심을 하고 있던 무슬림 병사들은 난데없는 기습공격에 혼비백산하여 순식간에 와해되어 야파 해안을 잉글랜드군에게 내주었다. '''리처드 1세는 개인의 용력을 이용해 80명의 병사들만으로 야파 요새 안에 들어왔던 수많은 살라딘의 병사들을 모조리 몰아낸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1세는 수많은 무슬림 군 사이를 뚫고 지나가 소수의 수비대가 위치한 성전 기사단 건물 내부로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뒤이어 도착한 십자군이 성벽 사수에도 성공하며 “지원군이 도착했다.”는 신호인 영국 깃발을 꽂게 된다..'''"당치도 않다!"'''
이 장면을 보고 살라딘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왕은 성전 기사단 건물의 계단 위쪽으로 혼자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성벽 위에는 수비대 구조를 알리는 영국 기가 펄럭였다.
'''스탠리 레인 풀, `살라딘`'''
살라딘이 질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마냥 맨몸으로 나가 싸운 사람 하나와 80여 명의 병사가 야파 요새를 가득 메운 7만여 명의 병사들이 뒤엉킨 전장을 쓸어버린 것이다. 무슨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현실에서 실제로 벌어진 걸 두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니 리처드 1세를 보고 사탄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올 법도 했던 것. 야파에서의 첫 번째 교전이 끝난 후, 살라딘이 보낸 의전관 아부 바크르에게 리처드는 웃으며 물었다."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살라딘은 헐떡거렸다.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도대체 그들이 어떤 작전을 세웠길래! 우리의 보병과 기병이 훨씬 우세하지 않은가!"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과 신의 전사들》 p418
실제로 이때 리처드군은 단 '''3필'''의 말만을 가지고 공격을 감행했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건 기독교 쪽 역사가도 이슬람 쪽 역사가도 똑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니... 오죽하면 이 당시 살라딘 왕 옆에서 야파 요새가 단 1명의 무력으로 허무하게 빼앗기는 걸 지켜보았던 어느 역사가는 리처드를 두고 '''"저건 인간이 아님"'''이라 단정지었다.[43] 결국 살라딘은 6만 2천이라는 병사들을 데리고 와서 요새를 점령할 뻔 했지만 시간만 끌다가 리처드라는 희대의 괴물 때문에 야파 요새를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강화를 제의했지만 아스칼론의 소유권 문제 때문에 결렬되었다."당신들의 그 전능하신 술탄은 어째서 내 모습만 보고도 도망치신 거요? 맙소사. 나는 갑옷은 고사하고 싸울 준비도 없이 선박용 신발[42]
만 신고 있었는데 말이오? 대체 살라딘은 왜 도망을 갔던 것이오?"
야파에서 제대로 한 방 먹은 살라딘은 8월 5일 새벽, 리처드가 점령한 야파를 향해 7천의 병력을 동원,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이때 리처드 왕의 병력은 기사 54명, 기마 기사 15명, 보병 2천 명에 불과했으며 무너진 성벽을 마저 보수하지 못해, 그곳에 목책을 치고 진을 치며 방어를 할 정도로 열세였다. 그러나 리처드 1세의 지휘 아래 십자군은 투르크군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웠으며 리처드 왕의 무쌍난무로 인해 또다시 불리한 전황도 뒤집어 엎었다.
투르크군이 결국 퇴각을 결정하고 후퇴하자 리처드 1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5명의 기마 기사와 함께 추격, 적을 썰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리처드 1세가 탄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리처드는 낙마를 하며 위기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때 위에서 언급했던 살라딘이 그에게 말 2필을 보내준다.마침내 리처드는 쇠뇌병들을 앞쪽으로 내보내 사라센 기병대를 향해 일제히 화살을 퍼붓도록 했다. 그러자 창병들은 쇠뇌병들이 지나갈수 있도록 자신들이 앉아 있는 사이로 길을 내주었고, 이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한 결과 마침내 전투는 적의 궤멸로 막을 내렸다. 퇴각의 순간 '''리처드는 15명의 말 탄 기사와 함께 돌격해 그 비할 데 없는 용맹함으로 사라센군을 덮치며 좌우로 칼을 휘둘러 그들의 머리를 쪼개고 사지를 절단냈다.'''
말을 선물받은 리처드는 그 답례로 투르크군을 공격하고, 이런 정신없는 난전 중에 살라딘의 투르크군은 후미로 침투해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리처드가 말머리를 돌려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를 뒤따르던 15명의 기사와 함께 적들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모습인데, 이 내용은 편력기뿐 아니라 살라딘의 서기관이었던 바하 앗 딘도 동일하게 기술했다.[44]그렇게 한창 치열하게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 아마 리처드의 말이 쓰러져 죽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투르크 군 한 명이 말 2필을 이끌고 그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것은 왕이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살라딘이 "그토록 용감한 용사가 땅바닥에서 싸워서는 안 될 일"이라며, 날쌘 아랍말 2필을 보내준 것이었다. 리처드도 똑같은 기백으로 그 말들을 받아들여 싸움을 계속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결국 살라딘은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전투로 십자군 측은 단 두 명만이 사망[45] 했던 반면에, 살라딘군은 7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500 마리의 말을 잃었다.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리처드 1세가 아무리 사탄 같은 자라고 하더라도 성을 혼자서 점령할 수는 없다. 유튜브 같은 매체에서 간략하게 소개를 하다 보니 "단신으로 성을 점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고 또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소개되었듯이 전투가 일어나는 중이었고, 80+@명의 사람이면 적들은 저게 80명인지 8만 명인지 구분할 껀덕지가 전혀 없다. 리처드 1세가 앞에서 다 썰며 밀고 들어오면 무슬림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가게 되고, 공포는 전염되기 마련이다. 높은 곳에서야 판단할 수 있겠다만은 전화도 없는데 어떡할 것인가. 방어가 굳건한 성을 리처드 1세 혼자서 돌격해서 점령한 게 결코 아니다[46][47] . 물론 80명 가지고 6만 2천 명을 성에서 몰아내버린 전공의 빛이 바래는 것은 아니지만.
4.8. 평화 협정
살라딘은 야파 전투의 패배로 리처드와 십자군을 쉽게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리처드 입장에서는 필리프 2세의 잉글랜드령 침공으로 인해 한시라도 빨리 유럽에 돌아가고 싶었다. 리처드는 이벨린의 발리앙을 살라딘에게 보내서 '예루살렘을 포기하겠다. 그럼에도 만약 강화 협상에 응하지 않으면 나와 십자군은 여기에 영원히 머무르는 수밖에 없다.'는 통첩을 보냈다.
살라딘도 계속 십자군이 이곳에 머무는 것이 대단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비록 이슬람 세력을 통합했지만 수백 년간 군웅할거나 다름없던 이슬람 세력은 아직 단단히 통합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고, 이미 54세인 자신이 죽은 뒤 후계자들이 영주들의 병력을 계속 동원해 십자군과 싸우는 것이 새롭게 일으킨 왕조에 크게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은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살라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48]
이로써 리처드는 살라딘과의 강화 회담을 진행하고 1192년 9월 2일 3년 8개월간의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49] 십자군은 아스칼론을 되돌려주고 이슬람 세력의 예루살렘 지배를 인정했다. 대신 살라딘 역시 해안가 기독교 도시들을 침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으며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도들의 안전을 약속했다. 또한 살라딘은 유럽에서 온 십자군들의 성지 순례를 쾌히 인정했으며, 성묘 교회에서 마지막 미사를 보는 것도 흔쾌히 승낙했고, 양쪽 다 무사히 포로들을 반환했다.
리처드는 언젠가 자기 손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 싶었던 모양인지 다른 십자군 병사들이 성지 순례를 하는 도중에도 끝내 성지에 들어가지 않았다. 리처드는 혹시 발생할 수 있는 이슬람과의 충돌에 대비해 순례자들을 4무리로 나누고 그 지휘자들에게 어떤 도발 행위에도 대응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 살라딘 또한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도발 행위를 엄금했으며,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과 그의 부하들이 감시의 눈을 번득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서로 윈윈이라서 조약을 맺었는데 재전을 치른다면 기껏 조약을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충돌 없이 순례는 끝났다.
이 조약은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26년간이나 지켜지게 된다. 리처드는 10월 9일 아크레에서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리처드가 떠나고 5개월 뒤에 살라딘은 병으로 숨을 거둔다.
5. 정치적인 면
리처드 1세는 상당 기간동안 경이로운 군사적인 재능에 비하여 정치력은 부족한 암군에 가까운 인물로 평가되어 왔다.[50]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는 그가 단순히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능력 뿐만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능력, 대전략안, 용인술''' 역시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능한 기사로 알려진 윌리엄 마셜을 기용하거나 캔터베리 대주교 휴버트 월터를 대법원장을 기용하고 잉글랜드의 재정을 알아서도 돌아가게 할 정도로 인사 배치는 무질서한 매관매직이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메시나를 점령하고 나아가 헨리 2세를 본받아 정략 결혼을 통해 영지를 넓히고,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필리프 2세와의 반목을 악화시켰다.리처드의 위대함을 나타내는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는 잉글랜드에서 관리를 선택하는 능력, 특히 휴버트 월터(Hubert Walter)의 선택이었다. 재판관으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로서 그리고 교황의 사절로서, 휴버트 월터는 왕과 교회 사이의 균형을 유지시킨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앙주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잉글랜드에서도 리처드의 오랜 부재 기간 중 윌터의 감독하에 중앙 정부의 효율적인 통치 기구가 발달하였다. 신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더 많은 세금을 의미하였지만, 전쟁의 재정적 부담 때문에 앙주 제국이 경제적으로 붕괴 직전에 놓여 있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
『옥스퍼드 영국사(The Oxford History of Britain)』 中
신성 로마 제국에서의 포로 시절,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인맥을 다지기도 한다. 수녀원까지 손을 뻗쳐 엘레오노르가 긁어모은 16만 마르크를 존과 필리프가 모은 6만 마르크보다 먼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하인리히 6세에게 전달한 결정적인 요인 덕에 포로에서 풀려난다. 바로 잉글랜드에 가지 않고 외교 관계를 탄탄히 다진 후 잉글랜드에 입성해 왕위를 되찾고 대관식을 다시 치르고 필리프와의 전쟁을 치르기 위한 보급과 재정 상태 안정화에 열중한다. 또한 리처드 1세가 조직한 잉글랜드 정부는 리처드가 런던 입성 후 몇 개월 뒤 프랑스와의 전쟁 선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간 세간에 알려졌던 영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기에 그가 십자군 전쟁을 나가 있는 동안 그의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아키텐의 군주이자 잉글랜드 왕의 대리인으로서 내정 부분을 상당수 처리해줬다는 것과 휴버트 월터라는 걸출한 신하가 존재했다.
한편 리처드 1세는 막대한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세금을 물렸으며[51] , 심지어는 십자군에서 귀환하던 도중 오스트리아에 포로로 잡히는[52] 등의 일로 인하여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 대한 변명의 여지는 존재힌다.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에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부과한 것은 사실이나, 여기에는 당시 유럽 기독교 사회의 가장 거대한 이벤트였던 십자군 전쟁이라는 큰 명분이 존재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 뿐 아니라 아키텐을 비롯한 프랑스 지역의 부유한 노른자위 땅까지 차지하고 있었기에 전쟁을 위해 잠시 큰 세금을 거두었다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정부의 통치력이 갑자기 무너진다거나 민생이 도탄에 빠질 수준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를 모욕했다가 그에게 원한을 산 것 또한 그 뒷사정을 알고나면 복잡한 면이 있다. 아크레 공방전에서 십자군에게 승리를 안겨다 주는 데 가장 크게 공헌했던 사람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는데, 레오폴트 5세가 왕이 아닌 공작의 신분으로 이들과 나란히 자신의 깃발을 거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어놓는 얌체스런 행위로 보일 수 있었다. 리처드 1세와 그 부하들이 분노한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깃발 모독사건은 리처드 1세뿐 아니라 필리프 2세 또한 함께 저지른 일이기에 모든 책임을 리처드 1세에게만 돌리는 일은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6. 살라딘과 무슬림에 대한 태도
리처드는 애초에 이슬람 교도에 대해 증오심을 갖던 인물은 아니었다. 심지어 리처드는 여동생인 조안나[53] 를 화평 사절로 온 살라딘의 동생인 알 아딜[54] 과 결혼시켜 예루살렘의 공동 통치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분쟁이 사라지리라고 여겼던 것이다.
허나 이 계획은 당연하게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반대와 더불어 "날 이슬람 교도에게 시집 보낼 생각이냐?"고 열받은 조안나의 반대에 직면하게 되자 리처드는 알 아딜에게 상황이 이러니 당신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당연히 살라딘의 동생도 개종할 리는 없으니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확실히 전략과 전술의 천재답지 않게 정치적 감각은 다소 떨어지며 즉흥적인 면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리처드는 평화 협상에 따라온 알 아딜의 아들인 알 카밀[55] 을 기사로 임명하기도 했다.[56][57] 여동생을 이슬람 교도에 시집보내려던 계획이나, 적의 조카를 기사로 임명하는 등 이러한 행동들은 리처드가 이슬람 교도에 대해 맹목적인 증오심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에서 귀향길에 살라딘이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에 리처드의 부하들이 조금만 더 성지에 머물렀다면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거라고 아쉬워하자, 리처드는 "만약 우리가 계속 남아 있었다면 살라딘은 결코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고 멋지게 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리처드는 살라딘을 위대한 왕이라고 평했으며, 의심할 바 없는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라고 말한 적도 있다.
7. 평가
적어도 당대에 전쟁에 관해서는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었다. 흔히 그의 라이벌이자 호적수로 손꼽히는 살라딘 또한 이슬람 세력을 통합하고 하틴 전투에서 기독교군을 궤멸시켜 예루살렘 왕국을 멸망시키는 등 매우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그런 살라딘도 전략적으로 월등히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리처드를 상대로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비단 십자군 전쟁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에서의 권력 투쟁, 메시나 전투, 키프로스 전투 등은 물론이고, 나중에 프랑스의 왕 필리프와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58]
리처드 1세의 무용담을 보면 단순한 야전 지휘관으로서만이 아니라 전략적인 측면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도 알 수 있다. 당시 누구보다도 '''보급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59] 덕분에 그의 군대는 언제나 충분한 보급을 받을 수 있었으며 부상병은 회향시켜 전비를 아끼고자 했다. 아르수프 전투와 그 전후의 진격 당시에도 리처드 1세는 온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모한 내륙 진격을 시도하지 않고 한쪽 측면은 십자군에 참여한 도시 국가들의 해군으로 보호받게끔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였으며, 해군의 함선에 보급품을 싣고 측면 엄호를 받아가면서 움직였다. 이처럼 리처드는 일신의 무예와 용맹도 대단했지만, 그뿐 아니라 전략·전술적인 안목에 있어서도 당대에는 따를 이가 없었던 천재적인 군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학자 토머스 매든은 리처드 1세를 중세 유럽의 군주들 중에서도 최고의 전략가로 평하였다.
특히, 당대 인물들이 흔히 성지라는 명성에 눈이 어두워 예루살렘 공략에만 집중했으나 리처드는 사실상 항구가 없는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이 지배한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았고, 그 때문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먼저 살라딘의 본거지인 이집트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의 반대[60] 및 프랑스 왕의 영국령 침범으로 인해 이집트 공략은 시행할 수 없었으나, 리처드의 계획이 전략적으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것은 후세의 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기도 하다. 리처드는 이집트 공략이 무산되자 과감하게도 예루살렘 점령을 포기하고 살라딘과 협정을 맺는 등의 결단력을 보여주었다.
십자군 원정 후, 귀국한 뒤에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 잃어버린 영지들을 수복하면서 샤토 가야르라는 성을 쌓았는데 워낙에 위치가 절묘해서 [61][62] 공성전의 대가인 그 필리프 2세도 리처드 1세 사후 6천의 병력으로 6개월간의 공성전으로 이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는 노르망디 지역에 손을 뻗을 수 없었다.[63]
당시에도 리처드와 3차 십자군의 무용담은 유럽에 널리 퍼졌고, 특히 잉글랜드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높았다. 나중에 독일의 하인리히 6세에 사로잡힌 리처드의 몸값을 지불하기 위해서 엄청난 세금이 거두어졌음에도 오히려 잉글랜드에서는 영웅적인 왕으로서 평가가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이 인기는 1198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새로운 세금을 거두자, 크게 낮아지게 된다.
영국에서는 여러 가지 무훈담의 주인공으로 등장, 대단히 인기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로빈 후드 민담에서는 로빈 후드의 든든한 조력자로 항상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외모에서부터 '왕의 모습에 어울리는 준엄한 용모'라고 묘사되기 때문. 기록에 따르면 '키가 크고 몸의 균형이 좋다. 그의 머리색은 붉은색과 금색의 중간이었다. 그의 팔다리는 유연하고 곧다. 팔이 꽤 길어 검술에 특히 걸맞았고 그의 긴 다리는 체격과 어울렸다'고 한다. 이런 후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리처드의 매력에 매료되어 그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나라의 국정을 잘 돌보지 않았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까지 이렇게 사랑받는 인물도 사실 그다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리처드의 무용담은 아직도 자국민들의 자랑거리라고 한다.'''리처드 왕은 노새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며 로빈에게 말했다.''' '''"정말, 그대는 주위에 훌륭한 젊은이들을 많이 두었군, 로빈. 내 생각에는 리처드 왕조차도 이런 근위대는 몹시 마음에 들어할 것이네." 그러자 로빈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내 부하들 전부는 아니오. 지금 50여 명 정도는 내 오른팔 리틀 존과 함께 다른 볼일을 보러 나가 있고. 하지만, 리처드 왕에 대해서는, 내 말해 두는데, 그분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피를 마치 물처럼 하나도 아깝지 않게 쏟아 붓지 않을 사람이 우리 중에는 단 한 사람도 없소. 당신들 성직자들은 우리의 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소. 하지만 우리 용사들은 우리의 행동과 꼭 닮은 그분의 용감한 위업 때문에 그분을 충심으로 좋아한다오."'''
『로빈 후드의 모험』
8. 그 외
- 리처드 1세의 외모에 대한 당대인들의 기록을 참고하면 거구의 고도비만이었을 듯하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평균보다 키가 크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는 '키가 크고 몸의 균형이 좋다. 그의 머리색은 붉은색과 금색의 중간이었다. 그의 팔다리는 유연하고 곧다. 팔이 꽤 길어 검술에 특히 걸맞았고 그의 긴 다리는 체격과 어울렸다'고 적었다. 하지만 리처드 왕의 편력기는 리처드가 죽은 후 18년이 지나서 쓰였고 뉴버그의 윌리엄은 '얼굴은 야위었는데 너무 뚱뚱하다', 코제샬의랄프는 '의사가 하는 일을 애먹였을 정도로 지나치게 뚱뚱하다(too much fat)'고 적었다.[64]
- 동성애의 의혹을 받고 있는 왕이기도 하다. 필리프 2세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고, 약혼자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와의 결합에 대비해서 "정조를 지키고 소돔을 기억해서 불법적인 성교를 삼가라"라는 경계를 들었다는 점 등이 그 증거로 제시되곤 한다.[65] 첫 약혼자 프랑스 공주 아델(Adèle de France)[66] 은 리처드의 아빠의 불륜 상대였고 그로 인해 결국 파혼하고 베렝겔라와 결혼하여 필리프 2세의 원한을 샀다. 과거 존 길링엄을 필두로 정말로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동성연인 관계였는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 들어서 존 길링엄을 통틀어 그가 속한 런던정치경제대학이 이런 식의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관점을 취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 필리프 2세의 목표는 프랑스 내에 잉글랜드가 차지한 영지를 점거하는 것이었고, 카페 왕가가 이전부터 헨리 2세에게 농락당해 왔기 때문에 필리프는 잉글랜드의 플랜테저넷 왕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었던 입장이었다. 실제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아버지 헨리 2세 플랜테저넷에게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지원하면서 방대했던 잉글랜드령(잉글랜드, 아키텐, 앙주, 노르망디 등 프랑스 왕령의 수배에 달했음)의 분열을 꾀했으나, 헨리 2세가 급사하고 형 둘이 전사한 리처드가 왕위를 이으면서 실패하여 원한이 쌓였다. 더군다나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도 자주 충돌하면서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 음악을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남프랑스에서 트루바두르로서 명성을 누렸으며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성가대를 직접 지휘하고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 젊은 시절 색정광 명성으로 견줄 이가 없었다고 한다. "단 하루도 여자 없이 못 살았다. 그는 임종 전에도 매춘부 네 명과 있었다." 기록 등으로 학자들은 리처드가 헤도니스트, 변덕스러운 색골, 성충동 괴물이라 말한다.
- 배 멀미가 심한 편이었다. 잉글랜드군이 성지로 향하는 도중 과도할 정도로 자주 정박하곤 해서 지중해 항해가 예상보다 늦어졌는데 이게 리처드의 배멀미 때문이라는 것. 귀국길도 군대와 함께 함대로 오지 않고 육로를 택한 것도 배멀미가 원인이었다는 말도 있다. 배멀미를 심하게 안 했으면 오스트리아에서 포로가 되는 일도 없었을지도...
- 잉글랜드의, 아니 영국과 더 나아가 유럽 최고의 기사, 기사도의 꽃으로도 불린 윌리엄 마셜에 의해 패배한 적이 있다는 자료가 국내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제로 알려져 있는 자료를 자의적으로 호도한 감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윌리엄 마셜 항목을 참조. 10살의 차이가 나는 둘이지만 각각 유럽 최고의 무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왕, 기사이기에 둘이 충돌했다는 썰 자체가 흥미있었을법하다. 반쯤 농이지만 안그래도 잉글랜드가 이런 인물들을 동세대에 보유했으니 당시 프랑스 입장에선 앙주 제국을 견제 안할수가 없었을듯하다.
- 모자가 둘 다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는데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고,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
9. 대중문화에서의 사자심왕 리처드
이 시대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리처드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기사의 로망을 그대로 구현한 인물이라서인지 '간사한 국왕 필리프 2세[67] 에 맞서는 고결한 기사 리처드 1세'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물론 국왕으로서의 역량으로 둘을 비교하면 명군이라 할 수 있는 필리프에 비해 리처드는 막장이지만. 뭔가 현대물에서 각색된 삼총사에서의 리슐리외와 버킹엄 공작과 비슷한 구도라고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프랑스와 영국 인물의 관계라는점도 비슷하다.
- 락 오브 에이지 2에서 튜토리얼 대전 상대로 등장한다.
- 로빈 후드와 자주 엮이며, 로빈 후드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거의 반드시라고 할 만큼 등장한다. 열에 아홉이면 찌질이(...) 동생 존 왕과는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일단 로빈 후드부터 존 왕보다는 리처드 1세를 더 존경하기도 했고. 전설에 의하면 사제로 위장했다가 로빈에게 잡혀갔는데, 로빈 무리가 마침 활쏘기 내기를 해서 실패하면 벌로 쳐맞는(...)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따라 명궁 로빈이 실수를 해서 최초로 맞을 위기에 처했는데, 이에 로빈이 나는 두목이니 니들에게 맞을 수는 없고 저 포로들 중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에게 맞겠다고 주장하여 리처드 1세가 로빈을 때리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때 로빈은 '나를 원펀치로 쓰러뜨리면 돈 돌려주고 풀어주겠지만 시원찮았다간 알거지로 만들어놓겠다'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리고 리처드는 태연하게 '콜'을 부르고 원펀치로 로빈을 날려버렸다고 한다(...). 로빈이 리처드 왕을 따라 십자군 전쟁에 나서는 전설은 이때의 인연에서 시작한다고.
- 디즈니 애니메이션 로빈 후드에서는 이름으로만 언급되다 결말 부문에서 등장. 로빈 후드의 결혼식을 축하해준다. 해당 작품은 등장 인물이 전부 동물을 의인화한 모습으로 나오기 때문에 이 양반 역시 사자 수인인데, 동생인 존은 갈기도 제대로 안 난 찌질한 성격의 사자로 나온 반면 리차드는 풍성한 갈기를 가진 모습으로 그의 이명인 사자심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판 성우는 박상일.
- 월터 스콧의 중세 로맨스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신분을 숨기고 홀로 모험을 찾아 돌아다니며 활약하는 모습을 보인다. 작품의 중요한 주제가 약 1세기 전 침략을 당해 피지배층이 된 색슨족과 바이킹의 후예로서 침략 전쟁으로 잉글랜드를 차지한 노르만족 사이의 갈등인데, 리처드는 기득권층인 노르만 혈통의 왕이면서도 색슨과 노르만 사이의 화합을 위해 동분서주한다. 노르만 귀족이 색슨족에 대해 불의를 저지르자 로빈 후드와 힘을 합쳐 그 귀족의 요새에 공성전을 벌여 함락시킨다든가.
- 코에이의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시리즈에선 전통의 플레이 가능 캐릭터였다.《원조비사》와《징기스칸 4》때 와서도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하지만 정치는(…).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이 E라서 체력이 무려 칭기스 칸과 동일한 15임에도 내정에 필요한 행동력을 너무 먹어 한 턴에 실행할 수 있는 명령 횟수가 적어서 내정에 애를 먹는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전투만 무려 98이다. 칭기즈 칸이나 라이벌 살라흐 앗 딘보다 더 높은 수치. 전투 중 공격하면 전용 대사가 뜨기도 한다.[68] 여러 가지로 우대한 느낌. 또한 정치가 낮긴 하지만 부하 중에 그걸 커버할 '월터'[69] 라는 재상이 있어서 내정은 월터에게 맡기고 폭주하듯이 친정하고 다녀도 상관없다. 하지만 게임 시스템의 한계상 중동으로 원정가기 전에 프랑스를 밟고 가야 한다. 지중해로 돌아가려고 해도 스페인과 이탈리아가 걸리적거린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런 나라들은 외국 군대가 자기 영토에 들어오면 공격해버리니까. 일본의 징기스칸 시리즈 관련 웹에서는 로빈 후드를 얻자마자 프랑스를 쳐서 필리프 2세를 잡고, 신성 로마 제국이나 스페인을 무시하고 바로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쳐들어가 십자군 원정을 재현했다는 플레이 경험담도 있었다.[70]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1시나리오 시작 후 10년 뒤에 사망했지만 자연사가 아니기 때문인지 게임상 수명은 실제 역사보다 비교적 긴 편이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에이지 오브 킹에서 바바로사 캠페인 6번째에 동맹군으로 등장한다. 체력 220의 패러딘으로 등장하는데 마지막 미션에서 사라센 공격 시작 후 바바로사는 이미 죽었고 지원군은 한 줌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성벽 + 공성 무기에 닥돌하다가 죽어버린다(…). 닥돌해서 죽는 리처드를 살리는 방법이 있는데 동맹을 풀고 수도사로 개종을 시도하여 자기 유닛으로 만들어보자.[71] 관련 캠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캠페인 내내 바바로사의 뒤통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헨리(하인리히)의 별명이 '사자왕'이라서 제대로 스토리를 안 본 게이머들은 그를 리처드로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게다가 하인리히는 왕이 아니고 공작이었기 때문에 원래 별명은 사자공이며 '사자왕'이라 한 것은 오역이다.[72] 이후 결정판에서 하인리히 사자공으로 제대로 번역되어서 나왔다.
- 위와 같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DS 에이지 오브 킹스에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리처드 1세의 미션이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에선 초반에 아크레의 포교자들이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의 포교자들 사이에서 이름을 들을 수 있고 후반에 가서야 제대로 등장한다.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인간 흉기답게 권왕님이 되셨다.# 그리고 지상 최강의 생물이 된 아버지와 세기의 대결을 펼친다. 이후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앞에서는 애교를 부리는 모습과 그에 걸맞는 마마보이 버전(단행본 2권의 모습)도 등장한다. 여담으로 큰형인 헨리는 토키, 제프리는 켄시로, 동생인 존은 쟈기.
>헨리 2세 : 네놈이나 실컷 다녀오라오라오라오라
필리프와의 동성애설을 채택했는지, 그와 필리프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그야말로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방불케 한다. 결국 리처드 1세가 살라딘에게 과도한 집착을 보이기 시작하고,[74]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략 직후에 그 충격으로 몸져 눕다가 복수를 다짐하며 유럽행 뱃길에 오른다.
- 어쩨 리들리 스콧의 작품에서는 대우가 영 좋지 못한데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마지막에 주인공인 발리앙에게 자신의 군세에 합세하라는 권유를 던졌지만[75] 이미 전쟁의 참상을 보면서 열정을 잃은 그에게 자신은 그저 대장장이일 뿐이라며 거절당한다.[76]
참고로 킹덤 오브 헤븐 DVD에 수록된 감독 코멘터리에 따르면 킹덤 오브 헤븐의 후속작으로 리처드 1세 이야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도 후속작 떡밥을 염두해 둔 등장이었다고.
- 인기 있는 왕답게 Fate 시리즈에도 출연하였다. 세이버(Fate/strange Fake) 문서 참조.
-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크루세이더 캠페인에서도 당연히 등장. 예루살렘 왕국에 3차 십자군으로 파견 온다. 특수 기능으로 '사자의 심장'을 쓸 수 있는데 광범위 사기(morale) 회복 기술이라 전투 중에는 매우 쓸만하다. 패주하겠다 싶은 부대도 이 버프를 받으면 거의 전멸할 때까지 싸운다. 보두앵이랑 같이 붙어 다니면 군대가 패주를 안하는 괴랄한 포스를 선보일 수 있다. 이웃집 웬수 필리프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지원하는 걸로 나온다. 즉 여기서도 적(...)이 될수 있다.[77]
- Warhammer(구판)에서는 기사도의 나라인 브레토니아를 이끄는 전설적인 군주인 루앙 레옹쿠르의 모티브가 되었다.
- 크루세이더 킹즈 2에도 등장하는데, 외교 7 무력 19 관리 8 음모 9 지식 2(...)라는 지휘관으로써는 매우 뛰어난 능력에 좋은 트레잇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라이벌 필리프 2세(14 / 19 / 25 / 12 / 13)에게는 한참 밀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여 영토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보다 우월하므로 무지왕 존에게 왕위가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프랑스를 밀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