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1세(예루살렘 왕국)
1. 개요
이사벨 1세(Isabelle d'Anjou, 1172년 ~ 1205년 4월 12일)는 1190년부터 예루살렘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아모리 1세의 딸이자 보두앵 4세와 시빌라의 이복동생으로 아모리 1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동로마 제국 황족 마리아 콤니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첫 결혼은 보두앵 4세가 토롱의 옹프루아와 하게 했으나, 1190년 시빌라와 두 딸이 병사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제 혈통상으로 이사벨이 예루살렘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는데, 정작 이사벨과 옹프루아는 왕위에 관심이 없어 기 드 뤼지냥을 지지한 것이다. 이에 어머니 마리아 콤니니를 비롯한 기의 반대파가 이 둘을 억지로 파혼시켰으며 이에 대해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냈다. 이후 이사벨 1세는 코라도 델 몬페라토와 결혼했으며 그의 사후 앙리 드 샹파뉴(1192년 ~ 1197년), 아모리 드 뤼지냥(1197년 ~ 1205년)과 공동통치했다. 1205년 사망 후 딸 마리가 뒤를 이었다. 특히 코라도 델 몬페라토는 이사벨 1세의 남편이자 보두앵 5세의 삼촌이다.[2] 콘라드 1세는 공동통치를 한지 얼마 안되어 1192년 4월 28일 낮에 두 명의 아사신들에게 피살되었는데, 암살의 배후는 역사의 미제로 남았다.
2. 어린시절
이자벨은 아모리 1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 마리아 콤니니(Maria Comnena) 사이의 딸이다. 마리아는 비잔틴 제국 황제 마누엘 1세(Manuel I Komnenos)의 조카손녀였는데 결혼 동맹을 기반으로 1171년 8월 29일에 아모리 1세와 결혼했다. 이사벨은 속전속결로 1172년 9월 이전에 태어났다.
아모리 1세는 1174년 7월 11일에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2주 뒤에 그의 첫 번째 부인 아녜스 드 쿠르트네(Anes de Courtenay)가 아들, 보두앵 4세(Baudouin IV)에게 왕관을 씌웠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보두앵 4세가 나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이슬람 세계에서도 누구나 알고있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자연스럽게 병약한 임금의 승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의 누나 시빌라는 1176년 11월에 북부 이탈리아의 후작 굴리엘모 7세 델 몬페라토(Guglielmo VII del Montferrat)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시빌라에게 아이(보두앵 5세)를 임신사키고 7개월 뒤 풍토병으로 병사하게 된다. 그 시점에 보두앵 4세의 유럽의 이복사촌인 필립 1세[풀크의 첫번째 부인 에랑부르 드라플레슈의 딸인 시빌라 당주의 아들이다. 보두앵 4세는 풀크의 두번째 부인 멜리장드의 아들인 아모리 1세의 아들.]는 1177년 8월에 아크레에 도착하여 시빌라의 새 남편으로 플랜더스 백작 로버트 드 베튠(Robert de Bethune)을 제안했다. 그리고 로버트의 동생 기욤 드 베튠(Guillaume de Bethune)을 이사벨과의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고등 법원은 두 제안을 거부했다.
아모리 1세의 죽음 후 이사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니니는 1177년 가을 발리앙 디블랭(Balian d'Ibelin)과 재혼했다. 그의 형제, 보두앵 디벨린(Baudouin d'Ibelin)은 시빌라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또 다른 후보자인 기 드 뤼지냥(Guy de Lusignan)을 선호했다. 1180년 부활절에 시빌라와 기가 결혼하자 뤼지냥을 후원하는 파벌이 이사벨을 대항하여 생겨났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첫번째 파벌은 보두앵 4세와 시빌라의 어머니, '''아녜스 드 쿠르트네(Anes de Courtenay)'''와 그녀의 오빠이자 이름뿐인 에데사(Edessa) 백국의 '''조셀린 3세 드 쿠르트네(Josselin III de Courtenay)''' 및 울트레주르뎅(Oultrejordain) 공작 부군 '''르노 드 샤티용(Renaud de Châtillon)'''이 포함됐다. 그들의 상대 파벌에는 이사벨의 어머니 '''마리아 콤니니(Maria Comnena)'''와 계부 '''발리앙 디벨린(Balian d'Ibelin)''', 트리폴리 백국의 백작이자 갈릴레아 공작 '''레몽 3세 드 트리폴리(Raymond III de Tripoli)'''가 있었다. 보두앵 4세가 어렸기에 선수를 친 곳은 왕의 어머니가 진을 치고있던 기 드 뤼지냥 파벌이었다. 어리디 어린 이사벨을 르노의 의붓 아들이었던 옹프루아 4세 드 토롱(Onfroy IV de Toron)과 약혼하게 하여 1180년 10월 이사벨은 옹프루아의 어머니자 르노의 두번째 아내 에티에네트 드 밀리(Étiennette de Milly)가 영주로 있는 케락(Kerak) 성채로 교육을 받기위해 반강제로 이동당했다. 시어머니 에티에네트는 이사벨에게 나블루스(Nablus)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콤니니 그리고 계부 발리앙 디벨린을 만나는 것을 금지했다.
세월이 흘러 보두앵 4세가 친정을 펼치자 왕과 기 드 뤼지냥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왕의 매제로써 당시 기는 섭정의 지위에 있었는데 외교감각의 부재로 주변 이슬람과 불화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보두앵 4세는 섭정에서 기를 해임하는 동시에 왕국 계승권을 박탈시켰다. 대신 기의 의붓 아들이자 시빌라가 첫번째 남편에게 얻은 보두앵을 다음 후계자로 정하고 자신과 공동 통치자라고 선포했다. 1183년 11월 20일 현재 왕이 살아있지만 후대 왕의 공동 통치 대관식이 거행되었고 이 공표는 시빌라의 아들 보두앵 드 알레라미치가 왕국의 차기 상속자임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병든 보두앵 4세는 자매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계승에 대한 논쟁으로 왕국의 분란이 심화되는것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기 드 뤼지냥의 주요 후원자인 조셀린과 르노는 옹프루아와 이사벨의 결혼식에 참석했기 때문에 보두앵 5세(Baudouin V)의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3. 첫번째 결혼
보두앵 5세의 공통통치 선포식이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그때 케락에서는 이사벨과 옹프루아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잔칫날에 불청객이 들이닥쳤으니 아이유브 제국의 술탄 살라딘이 케락 성채를 포위한 것이다. 기 드 뤼지냥 파벌이 보두앵 4세의 공동 통치 조치에 반대하며 몽땅 참석한 결혼식이었는데 피의 결혼식 마냥 단체로 끔살 당할 위기에 처한것이다. 결혼식의 주최자 에티에네트 드 밀리는 그 순간 살라딘의 진영과 포위병들에게 잔치 음식을 전하며 이사벨과 옹프루아가 결혼식 밤을 보낼 탑에 공격을 중지 해줄것을 요청했다. 대인배 살라딘은 그 사실을 알고 음식을 받고 그들의 요청 사항을 수락하여 영웅적인 모습을 드러내 역사에 이렇게 기록되었고 보두앵 4세는 구호 군대를 조직하여 예루살렘에서 케락으로 행햤다. 보두앵 4세가 말을 탈수없어 성십자를 앞세워 가마를 타고 케락 성채에 도착하자 살라딘은 포위 공격을 해제하고 12월 3일 ~ 4일을 걸쳐서 전투없이 퇴각했다.
죽어가는 보두앵 4세는 1185년 4월 볼드윈 5세를 보필하게 하기위해 자신의 당숙 트리폴리 레몽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레몽은 섭정의 권한으로 예루살렘 고등 법원 오트쿠르에 한가지 제안을 했다. 보두앵 5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사망할 경우 교황,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랑스와 영국의 왕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시빌라와 이사벨 중 한명을 예루살렘 왕국의 차기 계승자로 선택할 권리를 명망있는 제 3자가 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는데 대의회 오트쿠르는 동의를 표했다. 레몽의 속마음은 아마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보두앵 5세의 알레라미치 가문이 혈연이었기에 희망을 걸었다고 볼수있다. 하지만 보두앵 4세가 1185년 3월 16일에 사망하고 약 1 년 반 후 1186년 9월 중순 이전에 보두앵 5세 역시 어린나이에 사망했다. 이 시절 어린 아이가 요절하는 일이야 흔한 일이었지만 많은 구설수가 왕국을 돌았다.
보두앵 5세가 요절하자 시발라의 삼촌 아크레의 조세린은 트리폴리의 레몽의 섭정이 왕의 죽음과 함께 봉고파직되었음을 주장하며 그의 파벌이 예루살렘을 떠날 것을 요구했다. 대신 시빌라의 지지자들이 각 지역에서 수도 예루살렘이 모일 것을 촉구했고 르노 드 샤티용이 그 무리에 끼여 함께 들어왔다. 예루살렘에 온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은 고등 법원의 1185년 판결 결정을 무시하고, 시빌라가 아들의 합법적인 상속인이라고 결론지었다. 트리폴리의 레몽과 발리앙 디벨린처럼 그들에게 반대했던 파벌들은 시빌라의 어머니인 마리아 콤니니의 영지 나블루스에 모였다. 그들은 시빌라의 합법성이 의심 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부모 아모리 1세와 친어머니 아녜스의 결혼이 대관식전에 너무 근친이라는 이유로 무효화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 파벌은 반박하기를 이사벨이 아버지의 대관식 후에 태어났다고 강조했다. 그들은 시빌라의 대관식에 항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사신을 보냈지만 레몽과 발리앙 파인 역사가이자 티레의 대주교 기욤 드 티레의 숙적이자 친 아녜스 파인 예루살렘의 라틴 총대주교인 헤라클레스 드 오베르뉴(Héraclès d'Auvergne)는 9월 중순에 그녀에게 면류관에 올렸다. 총대주교는 기 드 뤼지냥의 머리에도 면류관을 놓은 후에 그에게 도유 의식을 행하며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곧바로 레몽은 나블루스에서 모인 귀족들을 설득하여 이사벨 당주과 옹프루아 드 토롱에게 여왕과 왕의 지위를 선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옹프루아는 나블루스에서 예루살렘으로 피신하여 시빌라와 기에게 충성맹세를 표했다. 오래지 않아, 왕국을 떠나 트리폴리로 돌아간 레몽를 제외한 모든 영주들은 옹프루아를 따라 왕비와 그 남편에게 충성을 맹세할수 밖에 없었다. 기의 치세는 그의 막장 섭정 활동에서 예상가능 하듯이 왕국을 말아먹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1187년 7월 4일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의 연합 군대를 전멸에 가깝게 격퇴시켰다. 이사벨의 남편 옹프루아는 전장에서 잡혔고 머지 않아 살라딘의 군대는 예루살렘 왕국의 대부분의 마을과 요새를 점령했다. 티베리아스는 하틴 전투 직후, 7월 9일에는 아크레, 8월 6일에는 베이루트, 10월 2일에는 성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티레만이 이탈리아에서 성지로 왔던 코라도 델 몬페라토(Corrado del Monferrato)[3] 의 지휘 하에 어려운 와중에도 함락되지 않고 지켜냈다.
콘래드는 자신을 티레의 전시 통치자로 여겼다. 기 드 뤼지냥이 성채에 들어와 지휘에 혼선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했다. 국왕은 아크레에 포위 공격을 가했지만 제이콥 다벤느(Jacques Ier d'Avesnes), 루드빅 폰 튀링겐(Ludwig III von Thüringen) 및 성지에 온 제 3차 십자군 지휘관들도 그의 지도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기의 아내 시빌라와 그들의 2명의 딸은 1190년 가을 즈음에 죽었다. 기의 반대자들은 그가 결혼으로만 왕이 되었으니, 그의 아내이 이복자매인 이사벨이 왕관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는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명분이 없었다. 그 혼란 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콘래드는 이사벨과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이사벨의 계부 발리앙 디벨린은 콘래드의 계획을 지지했다. 이사벨은 저항했지만 어머니는 그녀를 설득했다. 마리아 콤니니(Maria Komnena)는 또한 보두앵 4세가 8세의 어린 이사벨에게 토롱의 옹프루아와 결혼하도록 강요했음을 교회앞에서 증언했는데, 옹프루아의 여성스러움 또한 왕국에 잘 알려져있다. 오랫동안 로마 교황청의 대법관이자 피사의 대주교 우발도 란프란키(Ubaldo Lanfranchi)와, 필리페 드 드뢰(Philippe de Dreux) 보베 주교는 이사벨과 옹프루아의 결혼을 무효화했다. 리처드 1세의 십자군에 종군한 볼드윈 포데(Baldwin of Forde) 캔터베리(Canterbury) 대주교는 리처드 1세의 기에 대한 애착을 교회의 힘으로 변화시켜 콘래드와 이사벨의 결혼을 금지했다. 결혼을하면 이사벨과 콘래드가 간통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볼드윈 대주교는 1190년 11월 19일에 사망했다.
4. 두번째 결혼
콘래드는 11월 24일 이사벨 1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보두앵 4세가 1180년에 왕국 직할령으로 삼은 토론(Toron)의 주권을 전남편 옹프루아 가문의 가주 험프리에게 돌려 보냄으로써 이혼을 마무리 지었다. 기 드 뤼지냥은 퇴위하기를 거부했고 아직까지는 대부분 그를 합법적인 군주라고 여겼다. 콘라드 1세와 이사벨 1세는 티레로 귀환했고 프랑스의 왕 필립 2세는 1191년 4월 20일에 아크레에 도착, 예루살렘에 대한 콘라드 1세의 주장을 인정했고, 토론의 험프리을 포함하여 기 드 뤼지냥과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는 리처드 1세의 지원을 모색했고,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기 드 뤼지냥은 그 해 5월부터 "예루살렘의 국왕 당선자"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십자군은 1191년 7월 11일 아크레를 탈환했다. 기는 아크레에 자리잡아 그의 삶의 마지막까지 왕의 타이틀을 유지 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다지게 되었고, 콘래드는 티레, 베이루트와 시돈을 지배 하는것에 동의했다. 기의 사망 후, 콘라드와 이사벨은 기의 땅을 상속받아 왕국은 통일 될 예정이었다. 3일 후, 프랑스의 필립은 프랑스로 떠났고 영국의 리처드는 십자군의 단독 사령관이되었다. 본토 기사들 기를 향해 적대적이었다. 리처드가 1192년 4월에 영국으로 돌아 가기로 결정한 후, 기사들은 그에게 예루살렘 왕국에 관한 이전 결정을 개정 할 것을 촉구했다.
결국 잉글랜드의 리처드는 1192년 4월 16일 회의를 개최하여 고위 성직자들과 만장일치로는 투표 회의에 참석 한 귀족 콘래드를 지명했다. 리처드는 기의 잃어버린 왕국에 대한 보상으로 키프로스를 부여하면서 그들의 결정을 수락했다. 리처드는 그의 조카인 헨리 2 세에게 사신을 보내 예루살렘 왕국의 결정에 대해 알렸다. 헨리는 대략 4일 후에 티레에 도착했다. 그는 콘라드와 이사벨이 아크레에서 왕관을 씌울 것이라는 점에서 동의되었다.
4월 28일 점심무렵 이사벨 1세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시간을 목욕을 하며 보냈다. 콘래드는 배가 고플 때가 되자 필립 드 룩스와 저녁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으나 필립의 집에 도착할 때 그는 이미 식사를 마쳤었다. 간단한 담소를 나눈 뒤 콘래드 1세는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이 매복하여 좁은 길에서 그를 찔렀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암살범이 시아파의 어쌔신 일파에서 보낸 것으로 동의한다. 죽어가는 동안 콘래드는 티레를 영국의 리처드 또는 예루살렘의 새로운 왕에게주는 것이 아니라고 명령했다. 버건디의 휴 3세 공작은, 프랑스의 성지 대위(Philip of the Holy Land)의 필립(Philip of Philip)은 티레를 그에게 보내달라고 당부했으나, 요새에서 문을 닫고 문을 열어주기를 거부했다.
5. 등극
6. 새번째 결혼
7. 네번째 결혼
8. 가족
[1] 무릎꿇은 오른쪽 이사벨 1세 왼쪽 코라도 델 몬페라토[2] 시빌라 여왕의 첫번째 남편이 콘라드 1세와 형제[3] 이탈리아식 이름이고, 독일식으로는 '콘라트 폰 몬페라트', 프랑스식으로는 '콩라드 드 몽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