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호령 전투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결과


1. 개요


야호령(野狐嶺) 전투
1211년 8월 금나라몽골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몽골 제국이 이후 23년간 이어지는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2. 배경


12세기 이후 동아시아의 강자로 떠오른 금나라는 몽골 고원에 있는 여러 부족들을 관리해서 변방의 안정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몽골 부족들 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싸우게 하거나 일부 부족들을 포섭해서 금나라에 적대적인 부족들을 견제하였다. 이러한 금의 대외 정책은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있어서는 성공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몽골 부족들이 금나라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가지게 만들었다.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몽골 부족 중 하나인 카마그 몽골에서 테무친이라는 인물이 나타나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평정하였고, 마침내 1206년 몽골 고원을 통일하면서 칭기즈 칸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금나라에 적대적이었던 칭기즈 칸은 먼저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우고 통합된 몽골 군대를 총동원하여 금나라를 침공하려 하였다. 한편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로 인해 몽골 고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 금나라는 다가오는 몽골군의 습격에 대비하여 국경 지대를 따라 약 300km에 걸쳐 요새와 장벽을 건설하였다.
1211년 3월 10만명 가량의 몽골 군대가 금나라 정벌에 나서는데, 단숨에 국경을 돌파한 몽골군은 여러 요충지에 분산되어 있는 금나라 군대를 각개격파하며 금나라 북부를 유린하였다. 이에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승유(完顏承裕)는 흩어져 있던 군대를 모아서 30만 이상의 대군을 편성하여 (추정치 30만~50만) 몽골군을 한번에 전멸시키기로 하였다. 완안승유는 기병 위주의 몽골군을 상대하기 위한 전장으로 산악지대에 있는 야호령을 선택하고 이곳으로 금나라 주력군을 집결시켰다. 잠시 몽골군을 휴식시키며 금나라와 외교 협상을 벌였던 칭기즈 칸 역시 적군이 야호령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자 금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하기 위해 야호령으로 몽골군을 이동시킴으로써 1211년 8월 야호령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3. 전개


야호령의 산악 지형은 기병이 활동하기에 적절하지 않아서 기병들도 말에서 내려 보병처럼 싸워야 했다. 이는 경기병 위주로 구성된 몽골군에게 심각한 페널티였지만, 반면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각 부대가 이동하거나 다른 부대와 연계 공격을 펼치는데 제약이 많아서 수적인 우세를 활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몽골군은 병력을 집중시켜 지형을 따라 흩어져 배치된 금나라 군대를 각개격파 하기로 하였다.
칭기즈 칸은 먼저 부하 장수 무칼리에게 결사대를 주어 환아취(獾兒嘴)로 보내 기습을 시켰다. 무칼리는 이때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약속하고 떠났다. 무칼리의 군대가 금나라 진영을 우회하여 배후를 공격하는 사이 몽골의 주력은 결사적으로 싸워 금나라의 정면을 돌파하고 완안승유의 중앙 군영에까지 도달했다. 험한 지형 때문에 부대간의 연락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금나라의 좌익과 우익은 제때 중앙을 구원하러 오지 못했고 무칼리에 의해 후방까지 교란당하면서 금나라 군대는 수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지휘 체계가 붕괴된 금나라 군대는 수백리나 정신없이 후퇴해야 했고, 결국 이 전투에서 절반의 병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완안승유는 금나라의 패잔병을 회하보(澮河堡)에서 수습하였다. 그러나 곧 추격해온 몽골군이 당도하여 1211년 10월 회하보 전투가 벌어졌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몽골군은 칭기즈 칸이 직접 3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돌격해올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고, 사방을 포위한 몽골군의 이러한 집요한 공격에 금나라 군대는 전멸하고 완안승유 역시 겨우 목숨만 건져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야호령과 회하보에서 몽골군이 입은 피해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회화보 전투 이후 몽골군이 전광석화같은 공세적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미루어 봤을때 몽골군의 사상자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4. 결과


금나라는 리즈 시절 동원 가능한 최대 병력 수가 약 90만~100만 가량으로 짐작되는데, 야호령 전투와 이어진 회하보 전투에서 전체 병력의 절반을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매년 침공해온 몽골군에게 목장과 목초지를 빼앗기면서 금군의 기병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비록 금나라의 인구가 몽골보다 40배나 많고 경제력의 차이는 그 이상이라, 이후 공성전에 미숙한 몽골군을 상대로 어찌저찌 20여년을 버티기는 했지만 주력군, 특히 중기병을 상실한 금군은 야전에서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위기에 빠진 금나라는 남송을 정복하여 세력을 회복하려고 하였는데, 금나라는 남송을 정벌하지 못했고 오히려 남송이 몽골에 협력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그 유명한 맹공과 겨뤄 오히려 산둥까지 뒤집어질 뻔 했다. 그나마 금나라에게는 다행히도 1219년부터 몽골군의 주력이 호라즘 왕조를 비롯한 서역의 전장으로 이동하면서, 금나라는 한동안 동아시아 전역에 남겨진 몽골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근근히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서역을 정벌하여 개발살내던 칭기즈 칸의 아들들이 몽골군의 주력을 이끌고 돌아오면서 결국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