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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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제국의 건국자이자 초대 대칸.
본명은 '''보르지긴 테무진''', 성이 보르지긴[4] 이고 이름이 테무진이다. 현대 몽골어로는 Боржигин Тэмүжин(Borjigin Temüjin), 한자로는 孛兒只斤 鐵木眞(패아지근 철목진)이라고 적는다. 몽골어로 철인(鐵人)이라는 뜻이라고 하며[5] 아버지 예수게이가 전투에서 쓰러뜨린 적 부족장의 이름을 땄다고 전해진다.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태조라는 묘호를 받았다.
여러 가지로 볼 때 현대 국가인 '''몽골의 시조'''다.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6] 이라는 사실상의 법률과 문자가 만들어졌다. 또한 세계가 놀랄 만한 군사적 업적을 통해 인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몽골인들도 자랑으로 여기는지 수도 울란바토르의 칭기즈 칸 광장[7] 과 제 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에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잔인한 정복자[8] '에서부터 '동서 문명의 교류를 촉진시킨 영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 살기 위해 벌인 숱한 전쟁에서 살아남다 보니 태초의 의도와 달리 거물이 되어버린 양반이다. 서양에서는 자존심 때문인지 칭기즈 칸의 통치에 있던 유럽 영토를 축소했지만 최근에는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듯하다. 특히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서유럽이 지금 세계의 주류가 됐다고 보는 학자들은 "칭기즈 칸과 몽골의 등장은 세계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를 내린다. 그래도 이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갈아 죽여버려도 시원치 않은 악당 취급을 받고 있다. 러시아처럼 철저히 유린당했던 나라[9] 는 싫어하는 편이고,[10] 불가리아, 베트남 등 칸국들이나 원나라와 엎치락뒤치락 싸웠던 나라들은 내심 몽골을 막은 일에 자긍심을 느끼고, 서유럽 같은 곳은 몽골인을 직접 대면하진 않았기 때문에 싫어한다기보단 군사에나 통달한 유목민 이미지가 강하다. 영국인인 리처드 도킨스는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의 대표적인 예시로 들었다. 가장 싫어하는 곳은 역시 직접 제대로 털린 서아시아다. 이쪽에서는 이름도 함부로 못 꺼낸다는 말이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 테무진 같은 몽골식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터키에서도 텡기즈(칭기즈), 아틸라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역사 관련 팟캐스트 진행자인 Dan Carlin은 몽골 제국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하면서 "나폴레옹이나 카이사르나 알렉산드로스나 대단한 업적을 남긴 위인으로 칭송받지만, 결국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학살하고 약탈을 한 인간들이며, 그들이 남긴 '업적'들은 죄다 그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며 "칭기즈 칸이라고 그들보다 더 사악하다고 볼 순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11] 실제 이렇게 칭기즈 칸이 나쁘다고 해도 그래봐야 단지 학살과 파괴를 너무 잘했을 뿐이며 다른 독재자/정복자와 본질적으로 같으며 더한 사람이라고 볼 순 없다는 역사가들도 많다.
2. 칭호
칭호 '''칭기즈 칸'''은 '위대한 왕'이라는 뜻이다.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하며,[12]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 으로 불렸다고 한다. #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앙 [ˈt͡ɕʰiŋɡɪs χaːɴ]'에 가깝다.
'칭기스(Чингис)'는 몽골어로 '위대하다'를 뜻한다.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 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하였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天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일대기
3.1. 어린 시절
칭기즈 칸은 오늘날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Хэнтий аймаг)[13] 에 흐르는 오논 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14]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호엘룬은 온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트 씨족[15] 출신으로 원래 메르키트족의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올쿠누트에서 메르키트로 떠나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서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16] 칭기즈칸이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족[17]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 하였다.(출처: 몽골비사 1권 59절)
이후 테무진이 9살 되던 해(1171)에 예수게이가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8] 그러자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져 있던 부족민들이 흩어지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쳤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에 대한 원한을 가졌다. 물론 아버지를 살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타타르족을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고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은 되려 이를 악용해서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 하고 독살한 것이다.'''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 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부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매정히 버렸다고 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에룬은 예수게이에게 시집간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나중의 주치의 사례와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 족의 아이일 수는 없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은 없는 시대라도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하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하게 된다. 따라서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지기 때문에, 임신기간이나 출생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일단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먼 변방으로 밀려나 병사했다.
예수게이 사후 부족의 행방은 기록마다 다른데,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은 이후에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주르킨, 타이치우드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부족 인원이라곤 자신과 어머니,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9명'''이 돼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인 콩코탄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더불어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을 풀었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남시베리아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9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고기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출처: 몽골비사 67절 ~ 75절)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이복 형제였던 벡테르, 벨구테이가[19] 테무진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같이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여버린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달다는 간청에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준다.[20]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에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며 욕을 들었다.(몽골비사 2권 76~78장)
테무진의 형제 살인을 두고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에룬과 결혼해[21]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다만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은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 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에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며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에룬을 따르는 사람과 따르지 않는 사람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라시드 앗 딘, 칭기즈 칸 기, 2편 2장 2절)
그리고 얼마 뒤 테무진은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테무진은 테르구네 고지의 숲에 숨어 9일 동안 숨어 지냈지만 결국 타이치우드족에게 발각되어 사로잡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를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진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하였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던 솔도스족인 소르칸 시라와 가족들[22] 의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서 탈출에 성공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재회했다. (출처: 몽골 비사 2권 76절 ~ 88절)
이때 테무진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는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23] 라고 되어 있고, 라시드 앗딘의 기록에는 자지라트족의 부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진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진의 노예[24] 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 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진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3.2. 고난의 세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에 가족들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었으며,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오기도 하였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한 옹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트 씨족 출신으로 데이 세첸의 딸이었던 보르테라는 여인와 재회하여 혼인하였다.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어 의형제[25] 를 맺은 적이 있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인 토오릴 칸[26] 을 찾아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부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로써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으나 그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출처: 몽골비사 2권 96절)
옹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었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초원에서는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부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테무진의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말이 9마리여서 메르키트 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할 만큼 미약한 세력을 가졌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도 불가능했다.[27]
테무진은 옹 칸과,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무카[28] 등의 도움을 받아 메르키트를 개박살내고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29] 그러나 아내인 보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 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했으며[30] 테무진이 구하러 왔을 때에는 이미 임신 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아야 했다. 다만 칭기스 칸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고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 했다. 그럼에도 주치의 출신 문제는 두고두고 후계 계승 문제에서 갈등을 빚었다.
아내를 되찾은 후에도 조금씩 부족 세력을 불려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약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 달리 테무진의 가문은 아버지가 독살당하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31]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3.3. 세력 확장
메르키트족의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었기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에 잠시 동안 자무카의 자다란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자로 의형제 테무진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0,000명의 군사를 불러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르킨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신이 이들을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 없는 보오르추와 노예 출신 젤메뿐이었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 출신에 상관 없이 능력과 충성에 따라 대하였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는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언했다.[32]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를 떠나는 와중에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다.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할까봐 황급히 떠났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부족이 아닌)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테무진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들에게 몽골 칸으로 추대되었다.[33] 그리고 그 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그 말 도둑[34] 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35] 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또는 달란 발주트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하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 친족으로 이루어진 11진영 중 8익을 제외한 나머지 진영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 후 기록에 10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후 금나라가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옹 칸을 도와 타타르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후에 오로오드족과 망고드족[36] 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와는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부족[37] 이 행패를 부리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벌였다.[38]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 족장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나지만 이후 앙금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냈지만 금나라 왕경 승상[39] 의 요청을 받아 옹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 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타타르 족과의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타타르족의 장수인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
이 일로 공로를 인정받아 금나라로부터 백부장('자오드 코리')의 별 볼 일 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40] 이때 말을 듣지 않아서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씨족도 '''데룬 볼닥 전투'''에서 이겨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고 주르킨 족장 사차 베키는 죽였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게 하였다.[41]
이후 테무진은 1197년 메르키트족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보내며 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42]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족을 급습하고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의 인색함은 둘 사이의 불화를 싹트게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족을 정벌, 당시 내전중이던 동나이만의 타이 부카[43] 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 형제[44] 를 동시에 공격했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했다. '케 켐치우트' 지역[45] 으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46] 을 파견했지만 테무진의 전초군대에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혔다. [47]
그 뒤 같은 해 겨울 테무진 칸과 옹 칸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라는 지역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 '쿡세우 사브락'[48] 과 대치했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이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군대를 철수했다.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 지역으로 도주했다.[49] 다음 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 했다"고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 지역으로 철수했다. 테무진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시작, 먼저 옹 칸을 뒤쫒아가던 옹 칸의 두 동생 '빌카'과 '자아 감보'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 지역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중신들, 세력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로 세력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는 중신과 부하의 차이였다.)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가축 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벌당했던 메르키트 족이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나라가 안밖으로 쑥대밭이 되고, 자기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옹 칸'은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내 자식(양아들로 삼은 테무진)에게 4마리 준마[50] 를 청하노라"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했고, '테무진'도 이에 응해 4명의 장수를 보낸다. '옹 칸'은 부하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가 전사하고, 아들인 '일카 셍굼'마저도 부상당해 몰살당할 위기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옹 칸'은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상황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 지역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라시드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바아린 부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 부족을 공격했다. 테무진 연합군은 타이치우드 군대를 '''오난 전투'''에서 격파했다. '타이치우드'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킨'과 '살지우트' 종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쿵크라트' 족을 모아 '테무진', '옹 칸'과 전쟁을 하기로 서약하고 연합군을 결성했다. '테무진'은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 전투'''에서 패퇴시켰다.
이후 1201년 '''구르 칸'''으로 추대된 자무카가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공격해오자 테무진 칸은 함께 타타르를 정벌했던 케레이트의 옹 칸과 몽골 - 케레이트 연합군을 결성하여 '''쿠이텐 전투'''[51] 에서 맞서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쿠이텐 회전 승리 이후 타이치우드[52] 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서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하나인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 칸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해주고[53]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테무진 칸은 이후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는 제베를 거두어들이게 되었다. 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이 자신이 아끼는 말의 목을 쏜 녀석이 누구냐며 포로들을 심문하는데 이때 제베가 나서서 자신이 산 위에서 쐈다고 이야기하였다. 솔직담백한 걸 좋아하는 테무진 칸은 '날(화살촉, 칼날 등을 총칭)' 이라는 뜻의 새 이름 제베를 하사하고 크게 기용했다.[54] 제베는 이후 몽골 제국의 원정에서 크게 활약하는데 유럽에서는 '화살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집사에선 내용이 약간 다른데, 그에 따르면 타이치우드족이 패배한 후 도망친 제베를 포위한 후 보오르추가 테무진에게 받은 말을 타고 제베와 일전을 겨뤘으나 제베가 말을 쏴 명중시키고 도망쳤다. 그러나 얼마 후 곤경에 빠진 제베가 투항하였고 테무진이 그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3.4. 통일 전쟁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전멸[55] 시키는 등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했다.[56]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다.[57]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알탄과 쿠차르라는 귀족과 테무진의 숙부 다이타르가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하였다.
한편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자신의 딸과 옹 칸의 손자를 결혼시키려 했으나 옹 칸의 아들 셍굼이 이 제안을 거부하게 되면서 옹 칸과 테무진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이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 결국 옹 칸과 테무진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고 몽골족을 급습하였다.[58] 옹 칸 연합은 '''카라 칼지드 전투'''에서 테무진의 군대를 격파하였고[59] 테무진 칸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쿠일다르와 주르체데이의 분전과 셍굼의 부상 덕에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후 '''발주나 호수에서 19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킨다.
이후 테무진 칸은 발주나에서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을 이간질시키고 약화시키려 하였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무카는 옹 칸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여 나이만으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있던 다이타르를 비롯한 일부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때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던 중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옹 칸은 이러한 기만책에 단단히 속게 되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테테르 운듀르''' 산에서 연회를 하던 중인 옹 칸을 밤중에 급습하였다. 케레이트족은 끈질기게 3일 동안 저항하였으나 결국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60]
이렇게 몽골 중앙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제압한 테무진 칸은 몽골 서부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나이만족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 크게 격퇴했으며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 메르키트 족[61] 도 재차 공격하여 복수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나이만에 가서 붙어있던 자신의 친구이자 숙적이었던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대여섯 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그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62]
이렇게 케레이트, 나이만, 자무카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 칸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독자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마친 1206년, 소집한 쿠릴타이(몽골 지역의 대족장 회의)에서 몽골 제국을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올랐다.[63]
3.5. 통일 전쟁 이후
몽골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부족 내부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를 바로잡으며 무엇보다도 칸의 귄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충하는 데 주력하였다.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64] 을 처형한 것이다. 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그리가 자신의 동생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만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하였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에룬이 '같은 젖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어머니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하고, 하소연하였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준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해서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은, 텝 텡게리의 여섯 형제들에게 위협적으로 둘러싸였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텝 텡게리 자리에는 온순하고 나이 든 샤먼을 임명했고 그 결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적하는 자는 없었다.[65]
이 갈등은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이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당시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하였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힘 싸움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몽골 통일 이후 글도 없었던 상태에서 나이만 족의 재상이였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다. 이 몽골 문자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다.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진다.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하였으며 이는 곧 '야샤' 라는 법전으로 성문화하였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그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야사는 관습법적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 시 처형했다. 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강탈해가지 못하도록 법률로 금지한 반면 지참금 제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었다고 한다.[66]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않기 위해 이슬람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9마리로 배상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고 한다. 칭기스 칸 자신도 이 야사를 어기지 않았으며 공통 문자와 법률의 제정은 몽골 내부의 통치를 튼튼히 하고 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교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하나 서요,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하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교역로가 침략로로 변하였다. 결국 원할한 교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변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3.6. 대외 정복
칭기즈 칸의 대외 정복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가졌던 쪽은 바로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67]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고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되버렸다는 것. 그래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결론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 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설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연경을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정말로 '지배' 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이 많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엇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이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스 칸 말년부터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 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 노예로까지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68]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 사망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밖에 채 되지 않는다. 고작 그 정도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세운 것이다.
3.6.1. 서하 원정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69] 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본격적인 대외 정복의 신호탄을 쏘았다. 서역과의 교역로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서하에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한 나이만족의 잔당들이 여전히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3차례에 걸친 전쟁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참패를 면치 못하였다.[70]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서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약탈까지 일삼으면서 서하인들에게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결국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서하 수도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지어서 황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국왕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1207년, 칭기즈 칸에게 딸을 바치고 항복을 청하였다.
3.6.2. 금나라 원정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즈 칸은 금나라 원정을 전격 단행하였다.
북중국을 지배하며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과거에 칭기즈 칸의 증조부인 안바가이 칸을 사로잡아서 목마에 못박아 목숨을 잃게 한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제압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에게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는데[71]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이를 경계하고 나섰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몽골군이 금나라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들이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하였기 때문이었다. 몽골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 총사령관 완안승유[72] 의 40만 대군과 맞붙어 이들을 야호령 전투에서 크게 격파하고, 이어 회하보(澮河堡)에서 남은 금나라군을 수습한 완안승유와 다시 맞붙어 3일간의 포위 끝에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칭기스칸도 자신이 직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돌격해 격렬하게 싸웠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이 두번의 전투로 금나라의 야전군 주력 '''절반이 궤멸되었다.''' 이후 만리장성 부근의 장애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길이 활짝 열리자 장성 부근으로 밀고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으로 진입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73]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하고 이어서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74] 들어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 유수(요양 태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국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 결과 금나라는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해야 했다. 또한 칭기즈 칸을 도와주었던 거란족의 수장 야율유가도 이때 동요를 건국하면서 만주 지역은 이때부터 여러 세력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 위소왕은 승상 호사호에게 목숨을 잃었고 위소왕의 조카 오도보가 금선종으로 즉위하였다. 금나라 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안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면서 화의를 청하여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겨 철수하였다. 그러나 선종이 수도를 중도에서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천도하자 칭기즈 칸은 금나라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고 오랜 포위에 지친[75] 중도는 방어 사령관 완안복흥[76] 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끝내 무너졌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엄청난 약탈을 하고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당시 요나라 왕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하였다. 실무와 정치에 능한 야율초재는 이후로 몽골 제국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하였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77]
3.6.3. 서요, 호라즘 원정[78]
이후 칭기즈 칸은 서요로 도망간 나이만의 왕자[79] 쿠출루크를 사로잡기 위해 제베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요로 군대를 급파했다. 당시 서요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는데[80] 서요의 말제[81] 야율직로고는 쿠출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 등 환대했으나 쿠출루크는 야율직로고가 호라즘을 응징하려[82] 군을 일으켜 원정을 간 사이 모반을 일으켜 서요 본국을 장악한 후 야율직로고를 폐위시켜[83] 오히려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그런데 쿠출루크는 왕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84] 당시 칭기즈 칸은 쿠출루크를 처리하기 위해 서요로 들어갈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는 침략의 좋은 구실이었다. 제베의 지휘하 몽골군이 서요를 침공하자 쿠출루크의 학정에 지친 서요 백성들은 오히려 침략자인 칭기즈 칸을 반갑게 맞았다.[85] 결국 쿠출루크는 전투에서 대패하고 결국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음을 당했다.[86] 거란족의 마지막 왕국 서요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한편 칭기즈 칸은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왕국과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87]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호라즘과의 관계는 차츰 험악해졌다. 이후에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국왕 호라즘 샤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과를 받으러 갔던 전령들은 되려 수염이 깎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88]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친히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 당시 쇠퇴한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왕국은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호라즘 샤 무함마드 2세는 아들 루큰 앗 딘에게 본토 수비를 맡기고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 국경지대까지 향한 뒤 킬리 강와 카임치 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한다. 당시 무함마드가 대치하던 몽골군대는 수베테이 바하두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이 부대는 쿠두를 치기위한 군대였다. 무함마드의 공격에 몽골군은 물러나며 칭기즈칸의 명령이 없어서 호라즘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는 무시하고 공격한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샤 무함마드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앗 딘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한다. [출처1-2-2-2-5]
외형적으로는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 크게 뒤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의 영토 확장 부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대부분의 영토는 6~70년에 이르는 혼란기를 거친 끝에 군사적으로 막 제압된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국가의 통치력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서술한대로 호라즘에 이를 갈던 여러 부족들은 칭기즈 칸을 환영하고 협력했다. 그들이 지리적 정보라든지 여러 정보를 제공해 몽골에겐 큰 도움이, 반대로 호라즘에게 재앙으로 다가온 셈.
칭기즈 칸은 이렇게 협력한 부족들에게 무역이라든지 여러 권리를 보장하여 보답한다. 이렇게 하여 한층 유리해진 칭기즈 칸이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몰아쳐 새 수도인 사마르칸트 등[89]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 도시들을 격파하자 호라즘 세력은 바로 지리멸렬해졌다.
몽골군의 위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도주했으며, 몽골군에 저항한 도시들은 외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저항하다 점령된 뒤 학살당했다. 이란 서부 지역으로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던 무함마드 2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의 추격대는 추격 도중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
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 영주 이날축은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붙잡혀서 두 눈에 금을 녹인 물[90] 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도주 중에 왕위를 계승한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1220 ~ 1231)는 옛 수도인 구르간즈와 왕조의 거점인 호라즘 지역을 포기하고 가즈니 방향으로 갔다. 아프간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한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국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 잘랄 웃 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맘루크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갔다.
잘랄 알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일투트미쉬는 거부했고, 잘랄 알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트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몰아내러 나섰다.
구자라트, 신드 등을 약탈하다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웃 딘은 1224년 기회를 보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여 이란에서의 패권이 무너지자 이번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잘랄 웃 딘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 왕국을 공격,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230년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셀주크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다. 살아남아 도주하던 잘랄 알 딘이 쿠르드인 노상강도(혹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크게 참패한 호라즘 샤는 모든 것을 잃고 카스피 해의 작은 섬으로 들어가 숨어있다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수도인 부하라가 함락당하면서 그의 아들들은 몰살당하였다. 또한 이날축의 처벌을 반대했던 호라즘 샤의 어머니 테르켄 카툰은 수도가 함락된 후에 몽골군에게 끌려가서 몽골인들의 하녀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호라즘 샤의 첫째 왕자 잘랄 웃 딘은 끝내 생포하지 못하였다. 칭기즈 칸은 달아난 잘랄 웃 딘을 추격하여 그가 숨어있던 사마르칸트까지 박살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랄 웃 딘은 기여코 몽골군의 추격을 따돌려 인도 인접 지역까지 달아나서 끝까지 대항하였다. 호라즘에 치를 떨던 칭기즈 칸도 잘랄 웃 딘만큼은 높이 사고 인정해줬다 한다.[91]
그리고 몽골은 끝내 인도를 정복하지 못하고 서아시아로 전력을 집중했다. 심지어 인도는 후에 차가타이 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3.7. 최후
호라즘 정벌을 마치고 돌아온 칭기즈 칸은 얼마 후에 서하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하였다. 몽골군이 오랫동안 원정을 위해 몽골을 떠나있는 동안에 서하가 칭기즈 칸의 물자 지원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몽골 영토를 침입해왔기 때문이다.[92]
그러나 서하 원정 도중에 칭기즈 칸은 낙마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칭기즈 칸은 이미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낙마는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수밖에 없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 칸은 그 부상으로 점차 병이 깊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끊임없이 서하 정벌 명령을 내렸다. 당시 서하의 왕은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서하는 나름 강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말제는 항복하고 만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해 모욕을 한 적이 있어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야사감푸는 처형당한다.[93] 결국 칭기즈 칸은 서하의 탕구트족을 소탕하고[94] , 1227년에 삼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몽골로 귀환 중 서하 부근의 육반산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뒤 서하도 멸망당한다. 죽어가면서도 서하인들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탓에 현재까지도 그 후손이 거의 없다고 한다.[95]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한다. 칭기즈 칸이 죽은 후에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양면에서 공격하였다.[96] 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금나라 애종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한 나절 만에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음으로써 1234년에 완벽히 멸망하였다.
칭기즈 칸의 최후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원조비사에 기록된 낙마 후유증설이 유력하다.
4. 평가
이후에 나오겠지만 평이 아주 '''많이''' 엇갈린다. 위의 영상은 TED에서 이에 대해 다룬 강의.
몽골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문명들인 이슬람, 중국, 유럽 문명과 달리 자신들은 기록을 남기는 데 관심이 없던 유목민이었으니, 남들 입장으로만 역사가 기록되어 나쁜 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당시 몽골 민족들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자신들을 나쁜 놈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고 하며 이것이 그대로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는 계급 폐지[97] , 종교의 자유 보장[98] , 약탈혼 금지[99] , 인종차별 금지[101] 등등 지금 관점에서 보기에는 상당히 훌륭한 정치를 펴기도 했다.
다만 위에 언급한 제도적 개선이 다른 민족, 다른 지역에는 '''기존 지배층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교 질서도 다 뭉개놓고, 우리 모두 평등'''이란 식이어서 토착민들의 입장에서 몽골인 정복자들에 대해 증오심과 혐오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목민족인 그들은 기록을 거의 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입장에 근거한 기록들로만 추정하였으니 좋은 소리가 있을 리 없다. 게다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협박같은 것도 많이 했으니... 하여튼 이 통에 네스토리우스교가 덕을 많이 봤고 이는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퍼져나가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4.1. 인재 중시
인재를 중시하고 다루는 것은 상당히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자무카와 다른 적들은 칭기즈 칸 가문을 얼마나 조롱했던지[102] 칭기즈 칸은 정복한 땅의 귀족에게 혹독한 편이었다.
사실 칭기즈 칸이 일생에 걸쳐 가문이나 부족보다는 스스로 얻은 '인재'를 믿은 편이었다. 친척이라는 사람들은 그를 자주 배신했지만[103] 혈연 없이 맺어진 관계는 끈끈했고[104] 이 때문에 가족보단 다른 사람을 더 믿는 때도 있었다. 타타르족 학살 후 테무르의 휘하에 있던 남은 타타르 부족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칭기즈 칸은 본인이 좋은 혈통을 가지긴 했지만 한 번 몰락한 후 혈통으로 이어진 자들에게 배신당했고, 자신과 혈연이 없는 부하들의 능력을 활용해 성공했기 때문에 핏줄빨로 먹고 사는 귀족을 낮게 본 것. 호라즘 왕국만 해도 왕인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 테르켄 하툰을 하녀로 만들었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존중하며 잘 대접해준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알렉산드로스와 다리우스 3세는 별다른 은원관계 같은 것이 없는 단순한 적장의 입장일 뿐이었고[105]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는 모든 일의 원흉이라 할 만했지만(호라즘 왕국 항목 참고). 이런 가차 없는 점이 서양에서 안 좋게 보는 이유 중 하나다.
4.2. 위대한 정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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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사망 당시 몽골 제국의 영토.'''
'''20세기 초까지 등장했던 어떤 정복자들보다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다'''. '''그야말로 인생이 정복.''' 칭기즈 칸의 후손들은 짧지 않은 백여 년간 나름대로 질서 있는 체계를 유지하며 세계제국을 경영할 수 있었다. 카이두의 난 이후로는 이런 질서도 무너져 가긴 했지만.
그리고 정복 영토의 경우 과거 카라한 왕조 등이 있던 서요 등의 지역은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는 영역에 비해 영토가 워낙 큰 편이라 지도를 그리면 엄청나게 커지는 점은 고려하는 편이 좋다. 칭기즈 칸이 직접 친정하여 물리친 호라즘의 경우는 확실히 그 위세는 절정기였지만 워낙 빠르게 복속이 된 탓에 '제국' 이라고 부를 만한 기반은 전무한 상태였다. 이를 테면 아프가니스탄이 호라즘에 속한 건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4년 전이었고 서부 페르시아가 호라즘의 영역이 된 것 역시 칭기즈 칸이 진군하기 불과 3년 전이었다.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는 호라즘에 속한 지 10년도 아직 되지 않았으며 사마르칸트는 수많은 기습과 학살이 벌어졌던 곳이었다. 호라즘의 영역이 확정된 것은 가장 빠르게 봐도 1217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부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서 어그로를 끌어 몽골군이 쳐들어오게 했다는 게...
워낙 임팩트가 강해서 칭기즈 칸 시대에 중국 끝까지 다 밀어버린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있긴 있다. 칭기즈 칸은 금세종의 절정기 이후로 쇠퇴기에 접어들던[106] 금나라를 손봐주는 데 그쳤다. 다만 금나라의 경우는 호라즘과는 달리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고 생산력 역시 강대한 나라라 꽤나 여러 번 공격을 해야 했고 결국 칭기즈 칸 시대에는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못했다.[107] 이건 칭기즈 칸이 금나라를 공격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서쪽으로의 진군에 집중한 탓도 크지만.
여하간 다른 전선에 신경을 쏟았기 때문에 의외로 칭기즈 칸은 생전에 중국 땅에 그리 오래 있지 않았다. 칭기즈 칸 생전에 대 중국 전선을 주로 담당한 사람은 무칼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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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의 진격로.'''[108]
칭기즈 칸 본인은 유럽 땅을 직접 밟은 적이 없지만 그의 명령하에 호라즘의 칸을 추격하던 수부타이와 제베가 카프카스로 빠졌다가 칼가강 전투에서 키예프 공국을 중심으로 뭉친 연합군을 발라버린 적은 있다. 이 전투로 러시아 공국들의 야전 역량이 뿌리채 뽑혀 이후 몽골의 서방 진군 때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각개격파당한다. 당시 러시아는 흔히 알려진 제국이 아니라 공국들의 연합체였다. 게다가 내부의 도시들은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목책에 둘러싸인 마을이었고 나무를 많이 쓰다보니 몽골군의 화공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이후 바투와 수부타이가 이끄는 황금 부대에게 현 우크라이나 지역은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며 북쪽 도시 몇 개만이 살아남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몽골군이 발길을 돌렸던 당시 공화정이었던 노브고로드 공화국과 세금 징수하던 모스크바다.
4.3. 성격
공사의 구분이 매우 뚜렷했던 사람이었으며 적에게는 역사에서 유례가 없이 무자비했으나 자신의 백성들에겐 대단히 자비로웠다. 지도자의 자질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베푸는 것이라고 하며 베푸는 걸 즐겼다. 인간적으로는 털털하고 때로는 소심하며 소박한 인물이었을지언정 한 번 폭발하거나 필요하다고 여겨 갈아버리리라 마음먹으면 한 번에 갈아버리는 인물이었고[109] 그가 두 번 이상 직접 침공한 나라는 금나라 정도였다. 반란이 있을 것 같으면 아예 도시를 갈아버렸기 때문에 반란 가능성도 최대한 줄였다.[110] 항복해서 한 번 용서해주었더라도 반란을 일으키면 다 갈아버렸다. 그의 후손을 자처한 티무르가 같은 땅을 몇 번이고 침략해야 했던 데 비하면 칭기즈 칸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참고로 저런 말살 명령을 보면 은근히 비유적인 문구가 많다. 수레 바퀴보다 큰 남성은 다 죽이라거나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다 죽이라거나...[111]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은 뛰어난 편으로 13익 전투, 카라칼지드 사막 전투 외에는 그는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다.[112] 기후 변화가 승리의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 쿠이텐 전투에서조차 신속한 기동력을 이용해 유리한 지형을 점거하는 노련함을 보이고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는 횃불을 이용해 나이만을 속이는 등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고 특히 몽골 통일 이후에 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을 발휘하면서 금나라 정벌, 호라즘 정벌, 서하 정벌 등 자기가 지휘한 전투에서는 모두 승리를 거둔다.[113] 문맹인데도 불구하고 슬로-슬로-퀵-퀵 같은 몽골의 전략 전술을 짜낼 정도다. 성격도 잔혹해서 권력에 도전한 자는 벡테르든 아니면 자신의 성공을 예언했던 집단이든 가차없이 죽였다. 몽골의 전통적인 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해서 은근히 무시를 당하기는 했지만 자무카 같은 경우는 그를 진짜 괴물처럼 묘사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괴로운 경험이나 고난을 겪으며 이를 이기는 인내, 긍정적인 성향, 이로 인해 당시 초원의 여타 지도자들이 제시한 바 없던 공평한 사회[114] 의 비전을 지녔고 그것이 그를 승리하게 했다.
하지만 테무진 자신은 인간적으로는 강인한 전사 내지는 마초로만은 해석될 수 없는 부분이 주를 차지하는 남자였다. 인간적으로도 상당히 털털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세계 정복 프로젝트가 이뤄지던 말년의 죽기 며칠 전에 한 말이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라는 부분은 그의 전반기 인생 여정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 자신의 악행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유언도 있다.[115] 이러한 테무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및 분석은 딴지일보에서 연재한 기획물 '테무진 to the 칸' 에 잘 녹아있다. 현재까지 나온 인터넷 연재물 중 칭기즈 칸과 몽골사 전반에 대한 가장 치밀한 분석이 담긴 연재물이다.
다만, 테무진 to the 칸 시리즈의 경우 엄밀한 역사 서술이라기 보다는 역사적 사건을 이야기 형태로 풀어 들려주는 내러티브 히스토리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이런 서술 방식은 필연적으로 저자의 감상이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읽을 때 다소 주의할 필요는 있다. 예를 들어, 해당 기사의 경우 칭기즈 칸의 인간적 측면에 무게를 싣고 서술했지만 그가 인간적이고 공정한 면모와는 별개로 죽이기 시작하면 정말 미친 듯한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람이었다는 점은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더불어 자무카의 전술적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대평가 한다는 점도 감안해야할 필요가 있다.
몽골족 풍습을 죽을 때까지 따랐고 사치를 싫어했다. 자신을 높이는 형용사마저도 싫어하여 황족은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으며 공문서에도 그의 이름 앞에 다른 명칭이 붙는 것을 싫어했다. 각종 종교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 때문에 몽골의 풍습이 침식되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116] 이러한 태도는 현대 몽골인들이 그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이며 그의 후손으로 몽골 제국의 중국화를 몇 단계나 가속시켰다고 평가되는 쿠빌라이 칸과 자주 비교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가 죽을 무렵 도교의 사제 장춘 진인(구처기)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때 그 자신에 대한 상세한 얘기를 했다. 칭기즈 칸 본인은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적들이 사치스럽고 불경하여 승리한 것이라고 얘기했고[117] 본인은 사치를 싫어한다고 얘기했다. 그의 백성은 자식처럼, 능력 있는 자는 출신을 불문하고 형제처럼 대했다고 얘기했으며 그의 장군들과는 끈끈한 우애로 이어져 있다고 얘기했다.[118]
장춘 진인은 처음 칭기즈 칸을 만났을 때 칭기즈 칸이 살육을 멈추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그와 긴 시간 얘기한 뒤 그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가 중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편안히 가도록 조치를 취해주었으며 그로 하여금 중국의 도사들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다. 장춘진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자신을 따라온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 칼리스테네스가 아시아식으로 자신을 숭상하는 것을 거부하자 나중에 죽인 데 비해 칭기즈 칸은 장춘 진인이 칭기즈 칸의 저녁 초대를 거부하고 도사로서 술을 거부해도 그를 공경하며 대했다.
칭기즈 칸의 주 전술은 심리전이었다. 대표적으로 일부러 마을들을 공격한 뒤 마을 사람들을 성 안에 몰아넣어 성 안의 식량이 떨어지게 만들어 스스로 공격하게 하는 것. 또한 몽골군에 대한 악명을 부풀려서 적들이 스스로 기게 만들었다. 이런 소문이 과장되어 중동 역사서에서는 나쁜 부분만 적히게 되었고 칭기즈 칸을 사이코패스로 보는 서양인도 존재. 타임지에서는 13세기의 인물로, 워싱턴 포스트도 칭기즈 칸을 지난 1000년간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으로 골랐지만 '''깡패'''라고 썼다. 반대로 19세기 유럽이 아시아를 야금야금 정복하는 일에 반발한 아시아인들 사이에선 칭기즈 칸을 영웅으로 보기도 했다(예로 인도의 네루). 물론 같은 아시아지만 서아시아는 직접 갈렸기 때문에 유럽 이상으로, 아니 '''끔찍하게''' 싫어한다. 처음에야 살육만 했지만 원정을 하면서 도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칭기즈 칸 본인은 고문을 법적으로 금지하고[119] 죽일 거면 그냥 죽이고 살릴 거라면 그냥 살렸다. 후일 구육 칸 때 구육 칸이 정치에 간섭한 여인 파티마를 죽이며 이 법을 깼다. 또한 살육으로 유명하지만 원조비사에서 호라즘 왕국 정벌시의 이야기에선 자신의 허락 없이 근접 국가를 공격한 부하에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죽일 땐 엄청 죽이지만 이유 없이 죽이지는 않은 것. 자무카를 잡았을 때도 자무카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자 이유 없이 그를 죽일 수 없다고 해서 먼 과거에 있었던 일을 죄명으로 하고 죽였다.
참고로 선전포고 없이 쳐들어간 적은 없다. 선전 포고는 언제나 "'''내가 참작할 기간 줄 테니까 그때까지 항복해. 항복 안 하면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니 기대해라'''" 라고 했고 '''이 말을 어긴 적이 없다'''. 물론 당연하게도 '''자신이 죽은 적도 없다'''. 물론 처리도 엄격해서 항복한 지역에서는 약탈을 금지했고, 맞서 싸웠던 곳은 철저히 파괴했다.
몽골 통일 과정에서 점령한 부족과의 사이를 호전시키기 위해 그들의 여자들과 결혼하고 각 부족에서 찾은 아이들을 자신의 어머니로 하여금 입양하게 하여 자신의 형제의 위치를 주었다. 초창기(보르테를 되찾은 첫 전투부터 자무카와 결별하기 이전까지쯤)엔 아버지가 죽은 후 고생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 따른 행동이었지만 나중엔 몽골 통합에 큰 도움이 되는 정치적 행동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의)형제' 라는 의식에서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야율초재를 처음 만났을 때도 야율초재가 금나라에 멸망당한 요나라의 황족 출신임을 감안해 그를 대신해 원수를 갚아주겠다고 얘기했다. (야율초재가 거부하긴 했지만).[120]
야만스럽고 잔인하면서도 자신의 사람, 믿는 사람에겐 관대하며 친절한 사람이었다. 일단 장수를 채용할 때 제1조건이 바로 '''능력과 충성'''이었다. 자신에게 반항했던 첫 아들 주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며칠 동안 자신의 게르에 틀어박혀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주치를 큰아들로서 사랑한 것만 봐도 인간적인 부분이 있는 사람인데 동양권에선 이 부분에 신경 쓰지만 당연히 서양권에서는 신경 안 쓴다...
적을 용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유일한 예외가 의형제였던 자무카. 자무카와 몇 번이고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자무카가 자신에게 잡혀오자 그를 자신의 2인자로 회유하려고 했다. 하지만 자무카가 죽여달라고 간청해서 결국 피를 보지 않는 방식으로[121] 자루에 넣은 뒤 말발굽에 밟히게 해 죽이게 된다. 다만 자무카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전승이 있다. 자무카 항목 참고.
반면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그 누구도 용서치 않았다. 아들들이 자신의 말을 안 듣고 싸웠을 땐 엄청 화가 나있다가 볼츠의 중재로 설교로 끝났지만 항복한 도시는 약탈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을 어긴 칭기즈 칸의 '''사위'''는 즉시 일반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다 죽었다. 이 덕분인지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도 '칭기즈 칸 그 자식 재수 없긴 한데 나름대로 공평한 면은 있었다' 라고 기록한다.
어릴적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자마자 아버지 부하들에게 배신받아 일가족 전체가 고생한 덕분에 배신자들을 매우 싫어했다. 물론 전쟁 전에 자신에게 항복한 자들은 환대하였지만 자신들 주군이 강성할 때는 온갖 꿀을 빨다가 자신들 주군이 전쟁에 져서 불리할 때 자신들 주군을 배신하거나 죽여서 항복한 자들은 신뢰가 없는 자라 하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중에 자무카를 배신하여 자무카를 포박하여 투항한 자무카의 옛 부하 5명을 사형에 처하였고[122] 자신이 어랄 적의 태무친과 태무친 가족을 버린 것도 모자라 죽이고자 했던 키릴투크의 목을 잘라서 온 키릴투크의 옛 부하들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미리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오고타이 칸을 선정해서 기존 흉노, 돌궐 같은 유목 제국들의 고질병이었던 왕위 계승 문제를 예방해서 몽골 제국이 다른 유목 제국과 달리 급속하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해서 확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123]
4.4. 세계 각국의 평가
간단히 말하면 고향인 몽골에서는 추앙하며, 직접 피해를 받은 적이 없는 지역에서는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만들었으니 멋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서양에서는 그냥 야만인 취급. 다만 직접 피해를 받은 서아시아와 러시아 등의 지역에서는 당연하지만 그야말로 악마 취급이다.
4.4.1.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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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있는 40m 기마 동상.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높다.
몽골에선 '''신적으로 추앙받는다'''. 비록 죽은 지 800년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지만 몽골인들의 국부와도 같은 존재이다. 몽골 사람들은 칭기즈 칸이 없었다면 외국인들은 몽골이란 나라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을 거라고 말한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몽골 족은 칭기즈 칸이 부족을 하나로 모아 통일하지 못했더라면 초원의 격렬한 물살에 휩쓸려 여타 부족들이 그러하듯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124] 때문에 몽골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은 한도 끝도 없을 정도.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칭기즈 칸이 바로 몽골의 문자를 만들고[125] 법전도 만들고 이름값도 높인 사람이다. 거기다가 본인도 자신의 고향을 매우 사랑했으니 국부로 모시기엔 이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허나 공산주의 시절에는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금지되었던 역사가 있는데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이 키예프 공국 시절 몽골에게 처절하게 당한 후 200년 넘게 핍박을 당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들의 위성국인 몽골에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공개적으로 칭기즈 칸을 국부로 대우하게 된 것은 몽골이 민주화가 된 이후의 일이다.
2013년에는 한때 수흐바타르 광장이었던 울란바토르 시내 광장 이름을 칭기즈 칸 광장으로 바꿔서 옛 공산주의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갈등이 있기도 했는데 결국 명칭 변경이 위법이라는 사법부의 판결을 받고 다시 수흐바타르 광장으로 환원되었다.
몽골에서는 좋은 것이나 랜드마크에는 죄다 칭기즈 칸을 붙이고 있다.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이 그 사례. 이런저런 상표에도 쓴다.
2010년에는 기마 동상을 세웠는데 높이 40미터로 현존하는 기마 동상 중 가장 크다.(참고로 저 동상의 말 머리에 올라갈 수 있는데 칭기즈 칸 동상에서 사람들이 나오는 위치가 심상치 않다.)사진.
4.4.2. 동아시아
한국에서는 고려 시대에 몽골에 전 국토가 짓밟히고 치욕을 당한 역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126] , 워낙 오래 전 일이고 직접 고려를 침공한 적이 없는 데다[127] 일본과 비슷한 이유로 칭기즈 칸에 대한 이미지가 꽤 좋은 편이다. 물론,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대두된 한국이나 일본의 몽골-칭기즈 칸 숭배는 서양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는 대리만족적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의 경우 자국과 상관없는 역사라도 칭기즈 칸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던 편이라 일제강점기에 조선인들이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가 이웃에 있던 금나라, 남송, 서하가 완전히 갈려나가고 원나라 통일 후에도 개 취급 받았다는 문제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대우를 받았다는 점도 있다.[128]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원의 약화와 사대주의 등의 영향으로 초기부터 고려는 오랑캐에 굴복했다는 걸 강조했기에 굉장히 이미지가 악화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세계정복의 로망 때문인지, 자기들이 밟지 못한 서양을 군사적으로 짓밟은 동양인이라고 대리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나쁘게 보는 시각은 별로 없다. 일본에서의 칭기즈 칸과 원나라의 호의적인 시각은 비록 자연 재해 때문이라지만 원나라의 침공을 저지했기에 오히려 원나라와 칭기즈 칸을 띄울수록 그걸 막았다는 자신들의 자부심이 더 높아지기 때문인데, 실제로 카미카제만 봐도 일본의 부심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쉬웠던 일제 시대에는 군국주의 사상하고 결합해 역사 연구가 활발했는데 자국의 역사하고 별 상관없는 몽골에 조사단을 파견할 정도로 칭기스 칸과 원나라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헛소리지만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죽지 않고 몽골로 건너가서 칭기스칸이 되었다는 주장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 한국에 잘 알려졌던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 시리즈에서도 제목부터가 몽골이 주인공이며, 몽골계 세력은 매우 강력하며 부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4.4.2.1. 중국의 왜곡된 사랑
中 “칭기즈칸은 위대한 중국인” 억지"스무살이 되자 '''‘우리의’''' 칭기즈칸이 유럽을 정복했으며 그때가 '''‘우리나라의’''' 최전성기였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스물 다섯살이 되었을 때 소위 ‘우리나라(중국)의’ 최전성기는 사실은 몽골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었을 때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중국인 징기스칸....그가 중국인이어야만 하는 이유
중국에서는 칭기즈 칸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중국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일단 칭기즈 칸 자체가 몽골족이고 몽골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즉 몽골인⊂중국인이며 북방 한족들은 혈통상으로 몽골족과 매우 가까우니, '''"칭기즈 칸도 중화영웅이다."'''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심지어 시진핑 찬양가에서도 이 논리를 써먹고 있다. 이 노래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삼황오제, 진시황, 한무제, 마오쩌둥, 시진핑급 중화 영웅이다(...).
실제로 칭기즈 칸과 몽골의 원정 관련 동영상들을 보면 '''"중화민족이 세계를 재패했다.", "이것이 중화의 힘이다!"라며 흡족해하는 중국인들의 댓글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나아가 중화사상에 써먹는 모델로서, 내몽골자치구에서 가짜 무덤까지 만들고, 몽골이 지배한 곳은 죄다 중국 땅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대체로 내몽골족 출신 중국인들과 북방 지역 한족들이 칭기즈 칸을 중국인이라 주장하고 있다. 남중국 출신 중국인들은 원나라 황제들이라면 몰라도 칭기즈 칸에 대해서까지는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는 경우가 많지만 아래 사례를 보면 꼭 그런 건 아니다.
북방 지역 한족들 뿐만 아니라 홍콩인, 대만인 등 중국 외 중화권에서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나오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이전 시대 사람인 루쉰도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말을 들었던걸 보면 중국인들의 칭기즈 칸 사랑이 꼭 중공의 팽창주의적 역사 공정의 결과물인것조차 아니다. 평생 홍콩에서 활동하여 중국의 영향력으로부터 거의 자유로운 입장이었던 무협 작가 김용의 대표작 녹정기에서도 ''''칭기즈 칸은 중국의 황제니까 칭기즈 칸이 정복한 땅은 다 중국 땅'''' 이라는 논리로 러시아인들을 갈구는 장면이 등장한다. 김용의 작품들이 가지는 강한 중화사상적 측면을 생각해 보면 칭기즈 칸+몽골제국사를 중국사로 끌어들이려는 해석은 중화사상 지지자들 사이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화민국 시대에는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했으며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으로 정착한 뒤 요즘도 타이완에서 판매되는 중국 지도를 사서 보면 몽골이 중국 영토로 되어있다. '''즉, 칭기즈 칸을 중국인으로 주장하되 몽골인의 나라 정도는 인정하는 중국과는 달리, 대만은 아예 한술 더 떠서 몽골인의 나라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며 몽골국은 중화민국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지만 이것도 2012년 후에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대만/영유권 주장 지역 참고.
2020년 10월, 프랑스 낭트 박물관에서 칭기즈 칸 몽골 전시회를 하자 바로 중국에서 칭기즈 칸은 중국인이라고 발악하면서 무산시켜 몽골이 분노했다.
칭기즈 칸이 중국인이라는 주장에 몽골은 당연히 피꺼솟한다.
4.4.3. 중동,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반면 아시아 대륙 안에서도 서쪽으로 가면 평가가 크게 갈리는데, 페르시아의 역사서에서 칭기즈 칸은 아예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기록되기도 하고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에드워드 기번은 칭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 때문에 전 세계가 떨었다고 쓸 정도였다. 거기다가 기독교 연대기 중에도(Chronicle of Novgorod) 몽골군은 '''신이 내린 징벌'''이라 불릴 정도의 포스[129] 를 보여주었으니 서구 쪽에서 좋게 보긴 힘들겠다. 거기다가 살아 생전에 초상화도 못 그리게 하고 그에 대한 역사도 못 쓰게 했던지라 그에게 당했던 국가들은 온갖 나쁜 이미지를 그에게 덮어씌웠고, 나중엔 '자신들의 나라가 못 사는 건 몽골족이 다 수탈해가서' 란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예로 중동 정치인들이 칭기즈 칸이 중동을 발라버리지 않았다면 미국보다 핵폭탄을 먼저 만들었을 거라고 할 정도. 뭐, 실제로 몽골 침입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관개 설비가 완전히 파괴되어 농업이 괴멸하고, 이란 지역 역시 아케메네스 왕조 이래 천여 년간 축적해 온 국력과 문화적 저력의 상당 부분을 몽골의 수탈로 상실한 것은 사실이다. 핵폭탄을 누가 먼저 만들었을지야 따져봤자 별 의미 없는 뻘짓거리지만, 중동권에 비해 문화적, 기술적, 경제적으로 명백히 열세였던 서유럽권이 중동을 따라잡고, 추월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몽골 제국의 공격으로 인해 중동 지방이 받은 타격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란, 이라크 같은 중동권 나라들에선 알렉산더 대왕과 살라흐 앗 딘[130] , 티무르와 함께 가장 '''최악의 침략자''' 중 하나로 꼽히는 인물이다. 론리플래닛 지은이인 토니 휠러가 이 나라들에 가서 칭기즈 칸 이야기를 했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멱살까지 잡히고 "'''그 XX 이야기는 왜 하는데? 이름만으로도 기분 더러워. 또 그 말 하면 당신 가만 안 둬'''" 이런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몽골인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하자라족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 흔한 화풀이 대상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대놓고 괴롭혔다는 목격담이 많을 정도다.[131] 다른 나라에서도 이야기하니까 정말이지 기분 좋게, 긍정적으로 대꾸하는 사람을 도통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긴 국토가 뿌리째 갈려나갔으니 그 나라 사람들이 학을 뗄 만도 하다. 이쯤 되면 오히려 동유럽이 온건해 보일 정도이다.
터키에선 조금 다르다. 굴욕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는 이도 있지만 튀르크인과 같은 유목민으로서 그 위치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싸우긴 했어도 이슬람이라고 탄압한 게 아니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푼 점이라든지 다른 유럽 기독교 나라보단 낫다는 평을 내리곤 한다. 물론 터키에서도 기왕이면 같은 이슬람인 티무르 쪽을 좀 더 보기 좋게 여기기도 하고 여기에는 튀르크계 민족과 몽골계 민족이 유목하던 시절에 얽힐 대로 얽혀있어서 그렇긴 하지만. 일부 범투란주의자들은 칭기즈 칸을 터키 민족의 영웅이라고 보기도 한다. 애초에 터키인 남성 이름 중에서 상당히 많이 찾아볼 수 있는 이름 중 하나가 바로 젱기즈(Cengiz) 혹은 티무친(Timuçin)이다. 둘 다 당연히 칭기즈 칸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튀르크인과 몽골인은 원래 같은 생활 공간을 공유했고 오랜 유목 생활로 제법 많이 섞이기도 했다. 그리고 튀르크계인 러시아의 투바 공화국은 몽골의 영향을 걸쭉하게 받았다.
반면 원나라 때 색목인 계급으로 우대받았던 위구르인들의 경우 칭기즈 칸과 원나라를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132] , 파키스탄과 인도, 방글라데시의 경우에도 자신들의 무굴 제국의 후예라는 식의 정체성을 가져서인지 몽골 세력에게 점령당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칭기즈 칸에 대해 긍정적이다. 파키스탄/인도/방글라데시 계 무슬림 이름 중 제일 흔한 이름 중 하나가 바로 Khan으로, 무슬림 국가나 지역 중 이름으로 Khan을 많이 쓰는 나라는 위 세 나라밖에 없다.
4.4.4. 서양
몽골군이 유라시아와 아랍 지역에서 이슬람 교도들을 박살낼 때 유럽 기독교 나라들은 전설 속의 기독교 왕인 프레스터 존이 구원하러 왔다고 멋대로 착각을 했다. '''이슬람 측에서 구원을 요청'''하러 보낸 사신이 "아니다... 저들은 기독교도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적이던 우리가 갑자기 구원을 요청하다니 이가 갈리겠지만 저들은 우리보다 더하다. '''우리가 당한다고 기뻐하지 마라. 곧 당신들 차례가 올 것이다.'''"라고 급하게 말할 때, 유럽 기독교인들은 사신을 비웃으며 내쫓았다.
근데 정작 동유럽 일부가 잠깐 갈린 거 빼곤 딱히 접촉이 없었고[133] 오히려 십자군 왕국들은 일 칸국의 유력한 동맹 후보국으로 몇 차례씩 동맹 요청 사신이 오갔다는 걸 감안하면 프레스터 존의 전설이 딱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을 듯. 캅카스에 있던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 왕국 같은 경우에는 몽골과 많이 엮여서 고생하긴 했다. 조지아는 몽골군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존중을 얻고 몽골의 속국으로 편입되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후진 약소국이었던 러시아는 노브고로드를 제외하면 말할 것도 없이 갈렸다. 후손인 몽케 칸이 본격적인 유럽 정벌(로마까지..)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는 통에 몽골의 전통에 따라 이미 떠난 원정군들도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반쯤 갈아놨던 중부 유럽을 그냥 포기하고 돌아오다보니 때를 놓치고 무산되어버렸다. 만일 몽케 칸이 이때 안 죽고 좀 더 살았더라면 정말로 이슬람 사신이 말한대로 유럽 여러 나라가 몽골 말발굽에 밟혔으리라는 주장을 펼치는 이도 있지만.
아마 서양에 가장 잘 알려진 동양인 중 하나일 것이다. 지옥에서 만나게 될 사람 목록에 올라가 있다거나(히틀러와 함께), 훈족의 수령 아틸라와 더불어 완전 무식한 야만인으로 묘사된다. 닥터후에서만 봐도 닥터가 "칭기즈 칸의 군대가 다 몰려와도 타디스는 안전했다" 라고 말하면서 완전 야만인 취급.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을 다룬 영화 몽골의 리뷰 중엔 칭기즈 칸의 인간적인 모습이 나오자 헛소리하지 말라고 야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안 좋거나 희화화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몽골과 칭기즈 칸을 역사상 최고의 Badass 취급하면서 숭배에 가깝게 좋아하는 서유럽인도 많다. 아무래도 몽골에게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해롤드 램은 몽골인을 이란과 튀르크계의 혼혈로 보았다만 이 사람은 몽골인의 이야기 몇 개를 듣고 그걸 야사의 법문이라고 써놨다고 하니 믿음이 갈 리가 없다. 원래 유목 민족들이야 서로 같은 유목 생활권을 공유했고 거기다 동돌궐이나 위구르는 원래부터 내, 외몽골에 있었으며 더 나아가 위구르 수도 카라발가순은 현재 울란바토르 인근이다. 두 민족이 얽히는 거 자체는 당연하다. 그리고 이곳에 잔류하던 튀르크인들은 서아시아의 연계성은 거의 없었고 중국과의 접촉이 가장 많고 돌궐이야 당에게 시시때때로 괴롭히고 정복하러 다닐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
오래전부터 평이 엇갈려서 중동 쪽에선 아예 갈아먹을 악당으로 묘사되지만, 초서의 켄터베리 이야기에서도 이름이 언급되는데 여기선 킹왕짱이란 식으로 묘사된다. 이름이 라틴어식인 Camius Khan의 변형이라 설명이 없으면 이게 누군지 알기 힘들지만... 연회를 여니까 아랍의 왕들이 알아서 선물을 보내올 정도로 묘사되지만 켄터베리 이야기가 원래 역사적 고증 같은 건 잘 안 따지는지라 칭기즈 칸이 우크라이나 남쪽에 살고 러시아와 싸운 걸로 유명한 걸로 나온다.[134] 거기다가 태어날 때부터 이슬람 교도였다고 나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인이라는 것 같은 소리다. 참고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수습 기사(Squire)의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미완이다. 여하간 칭기즈 칸이 좋은 이미지로 나오는 드문 중세 유럽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위에 나온 대로 중세 유럽에서 몽골을 기독교 나라로 멋대로 좋게 쓴 편이였다는 걸 생각하면 외외로 더 많을지도 모른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봐도 원나라에서 기독교에 흥미가 있다고 쓴 걸 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도 평이 좋지 않다. 물론 그때의 러시아 지방은 작은 소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이긴 했지만 이런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240년이나 지배한 몽골의 지배를 치욕으로 여기며 '타타르의 멍에' 라고 부르며 칭기즈 칸도 증오했다.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타타르가 지배한 것은 파괴밖에 남긴 게 없다고[135] 글을 남길 정도였다. 실제로 몽골 이후 러시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굉장히 낙후된 상태로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136]
결국 키예프 루시의 공국 중에서는 후발주자로서 세력이 작은 편이었던 모스크바 공국이 킵차크 칸국의 세금 수취를 대리하는 과정에서 세력을 축적하여 러시아를 통합하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키예프와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상당히 상실하였으며, 이는 현대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별개의 정체성을 주장하며 친 서방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은 데까지 이르고 있다. 즉,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키예프 공국 성립 이후 350년간 개발이 진행되었던 알토란 같은 영토를 몽골의 침입으로 인하여 상실하고, 춥고 척박한 동북쪽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를 받는 과정에서 러시아는 심각한 문화적 정체와 사회적 퇴보[137] 를 겪었고, 그 사이 과거 대등한 상대였던 서유럽 국가들은 러시아를 아득히 추월하며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8세기 ~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를 다시 어느정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러시아가 열강으로서 유럽사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 18세기 초중반, 표트르 1세의 개혁 이후임을 생각해 보면...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난 이후 피폐해진 국력을 수습하는 데 2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몽골의 침략과 정복, 지배가 열강 러시아의 탄생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을 찾아보자면 기존의 루시 공국들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재통합을 용이하게 만들었다는 정도인데, 그 철저한 파괴를 수습하고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수백년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것을 몽골의 '''덕'''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몽골의 침략 이전 교통과 통신, 통치 기술의 미비로 인하여 루시 공국들은 도시 국가 연합체 비슷한 형태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종주국 격인 키예프 공국에 의한 재통합이 몇 차례 이루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몽골의 파괴가 없었다고 한들 루시 공국들의 통합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 자체가 섣부른 면이 있다. 이를 두고 몽골 제국 '''덕분에''' 러시아가 통일되어 대제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일제와 김일성 '''덕분에''' 한국이 신분제의 잔재를 털어내고 현대 국가로 거듭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138]
소련은 몽골에서 칭기즈 칸에 대한 흔적을 없애고자 갖은 노력을 다 했으나 몽골의 친소파 정치인 같은 허수아비들조차도 칭기즈 칸만은 위대하다고 여겨 목숨 바쳐가며[139] 칭기즈 칸의 흔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고 소련이 무너지기 전에 민주화된 몽골은 아주 열심히 찬양하며 기리며 소련의 이런 뻘짓을 소심하게 복수했다고 비난한다. 다만 이런 소련의 행태를 꼭 몽골 제국의 지배에 대한 복수라고 봐야 할지는 의심스럽다. 꼭 몽골이 아니더라도 원래 소련은 특유의 세계 인민주의(?)로 자국이나 위성국에서 민족주의적 성향이 발호하는 것을 싫어했다. 몽골 이외의 위성 국가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였던 것. 그 예로 스탈린만 해도 고향인 조지아에서 민족주의를 똑같이 처절하게 박살냈고 이전이나 이후에도 소련은 각 위성 국가 민족주의자 및 독립주의자는 학살로 싸그리 대했다.
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치세를 좋게 얘기해서 팍스 몽골리카를 팍스 아메리카나와 비교해서 자신들을 띄운다고 한다. 여하간 죽은 뒤에 이곳 저곳에서 정치적이나 쫀심 싸움에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기독교를 특별히 싫어하지 않은 데다가 중립적으로 대하고 손자인 쿠빌라이 칸이 바티칸에 요청하여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한 사례 등 때문에 의외로 정교회를 제외한 그리스도교에서는 큰 감정은 없는 편이다. 훈족의 아틸라마냥 유럽에 '하느님의 징벌' 급의 포스를 뽐내었지만, 정작 서유럽은 점령 당하지 않은 것도 있고. 물론 동방 교회 쪽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몽골에게 분명 타격을 크게 입었다.
이런 칭기즈 칸의 다양한 면모가 조명되고 있는 현재, 전반적으로 서양 쪽에서는 지도자로서는 최고(Best Leader)였지만 적으로서는 최악(Worst enemy)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4.5. 총평
칭기즈 칸의 등장과 몽골의 부흥은 세계사의 시각에서도 그야말로 혜성과 같았는데, 이를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몽골이란 나라가 큰 족적을 남겼다는 것을 뜻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서양에서 재앙의 징조로 여겨졌던 혜성에 빗댈 수도 있다.칭기즈 칸이 고결한 지도자이자 훌륭한 통치자인지, 반대로 피에 굶주린 살인자인지는 당신이 누구에게 묻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날 몽골에서, 그는 그들이 좋아하는 나라의 아버지이고, 그의 많은 정치 개혁은 선구적이었다고 지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점령지였던 이라크나 이란에서는 그를 학살적이고, 견디기 힘든 파괴와 피해를 일으킨 광적인 폭군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의 스토리가 위대함인지 잔인함인지에 대한 논쟁과 온갖 과장과 관계없이,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고대 세계에 가장 중요하고 영향을 많이 끼친 지도자이며, 그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강하고 뚜렷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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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 5 백과사전
누군가는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중세의 폴 포트라고 할 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칭기즈 칸이지만, 적어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거인'''이라는 것 하나만큼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흔히 비교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수식하는 '설령 위대한 군주가 아니었다고 해도, 거대했던 군주'라는 칭호는 칭기즈 칸에게 좀 더 알맞다는 말이 많다. '동양의 알렉산드로스 대왕vs중세판 폴포트' 같은 양자택일식 이분법은 맞지 않다. 누군가에게 영웅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학살자가 되던 때가 전근대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지고보면 알렉산드로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대중들이 집착하는 "이 사람은 영웅이냐 학살자냐" 식의 선악 나누기 평가를 21세기 들어서는 잘 하지 않는다.
물론 평가가 갈리는것은 인성, 정치등에 관한 얘기이며,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 없는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자 정복군주중 하나다.
그리고, 칭기즈 칸에 대해 평가할때는 이 인물이 몽골 내부적으로는 씨족과 부족의 틀을 넘어 사회를 개편하고 국가의 기반을 건설한 개혁자이자 입법자이고, 몽골 외부적, 즉 세계적으로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라는 점을 분리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자의 업적은 물론 후자의 업적의 기반이 되었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업적이다. 즉, 칭기즈 칸은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정복자이고, 이 정복으로 탄생한 국가(몽골 제국)의 영역 내에서 일어난 방대한 교류가 세계사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칭기즈 칸이 그의 제국 전체에서 입법자이자 개혁자였다고 볼 수는 없다. 흔히 자연공동체에 가까운 부족/씨족과 그 관습적 체제를 탈피하여 보다 광범위하고 공적인 사회의 기반을 만들고, 그 기반에서 통용될 성문화된 법을 만들었다는 것이 창기즈 칸의 대표적 업적으로 꼽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몽골 초원 안에서'나 선구적이고 혁신적인 개혁이었지, 초원 바깥의 세계에서는 빠르면 수천년, 늦어도 수백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던 현상이다. <테무진 to the 칸> 같은 매체에서는 이 두 영역을 제대로 구별하지 않다보니 마치 칭기즈 칸이 그가 정복한 제국의 영역 전체에 대해 위대한 입법자이자 정치개혁자였다고 잘못 묘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몽골 제국을 '세계 최초의 근대국가' 라는 황당한 서술까지 나왔다.[140]
5. 가족 관계
제1오르도 관리
- 제1황후(皇后):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장남: 목종 주치(穆宗 朮赤), 추존황제(追尊皇帝)
- 차남: 성종 차가타이(聖宗 察合台), 추존황제(追尊皇帝)
- 3남: 태종 오고타이(太宗 窩闊台), 몽골 제국의 2대 대칸
- 4남: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 장녀: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창충무왕 패독(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下嫁)
- 차녀: 연안공주 체체 이켄(延安公主 撦撦亦堅), 토랍이길(土拉而吉)에게 하가(下嫁)
- 3녀: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 4녀: 운국공주 투멜룬(鄆國公主 禿滿倫), 적굴(赤窟)에게 하가(下嫁)
- 5녀: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태출(泰出)에게 하가(下嫁)
- 황후(皇后):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 황후(皇后):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후(皇后):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 황후(皇后):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 황후(皇后):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 황비(皇妃):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 황비(皇妃): 야간 비자(耶干 妃子)
- 황비(皇妃): 야축 비자(耶逐 妃子)
- 제2황후(皇后): 홀란 황후 올와사씨(忽蘭 皇后 兀洼思氏)
- 6남: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 황후(皇后):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 황후(皇后):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비(皇妃): 야진 비자(也眞 妃子)
- 황비(皇妃):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 황비(皇妃): 찰진 비자(察眞 妃子)
- 황비(皇妃):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 황비(皇妃):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 8남: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요절(夭折)
- 제3황후(皇后): 야수 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 제5황후(皇后):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 황후(皇后):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 황후(皇后):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 황후(皇后):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 황후(皇后): 찰합 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 황후(皇后):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 황후(皇后):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 황비(皇妃):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 황비(皇妃):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 황비(皇妃): 날백 비자(剌伯 妃子)
- 제4황후(皇后): 공주황후 완안씨(公主皇后 完顔氏)
- 7남: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요절(夭折)
- 황후(皇后):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 황후(皇后):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 황후(皇后):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 황후(皇后): 연리 황후(燕里 皇后)
- 황후(皇后): 독해 황후(禿該 皇后)
- 황비(皇妃): 완자 비자(完者 妃子)
- 황비(皇妃): 금련 비자(金蓮 妃子)
- 황비(皇妃):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 황비(皇妃): 노륜 비자(奴倫 妃子)
- 황비(皇妃): 묘진 비자(卯眞 妃子)
- 황비(皇妃):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 황후(皇后): 모개 황후(謨蓋 皇后)
- 황비(皇妃):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 고려인(高麗人)
- 황후(皇后):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 황비(皇妃):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 황비(皇妃): 탑탑아녀(塔塔兒女)
- 5남: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 황비(皇妃): 불명
- 9남: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요절(夭折)
- 6녀: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파이술 아아특 적근(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下嫁)
- 7녀: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공주(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이 크게 노해 부마를 죽였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쿠트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현재 칭기즈 칸의 자손으로 밝혀진 사람은 '''직·방계를 통틀어 1600만 명이 넘는다.'''[141]
6. 이야기거리
그의 최후에 대해선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 말에 떨어져 죽었다든지 심지어 복상사[142] 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설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이후 쇠약해졌고 이로 인해 병을 얻어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그의 무덤은 아직도 어디 있는지 미스터리. 여기에 대해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다.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당연히 말들과 기수들도 모두 몰살되었다 카더라. 부르한 산 참고. 물론 전설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칭기즈 칸의 유해를 그의 충복이 '그냥 평범하게 몽골식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그야말로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적절하다고도.
일본이 중일전쟁 때 찾으려고 무진 애[143] 를 썼지만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만 어마어마하게 발전했다고 한다.
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만 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144]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들의 조상이 칭기즈 칸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영국인이면서 이 아저씨 후손인 사람이 나오는데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고.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고[145]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꼽은 가장 중요한 정치인 50명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의 예를 볼 때 좋은 얘기는 별로 안 썼을 듯하다.
다만 워낙 효과적으로 정복하고 부하들 관리도 잘한지라 비즈니스 계에선 꽤나 호의적으로 보는 듯하다. 칭기즈 칸의 경영을 배우자는 얘기는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간간이 나오는 얘기다.
여담으로, 칭기즈 칸의 후손을 황금씨족이라 부르기도 한다.
6.1. 환경전사 칭기즈 칸
카네기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협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본의 아니게 지구 환경을 급격히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칭기즈 칸이 주도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이 당시 '''아시아-유럽 구대륙 세계 인구의 1/4을 학살'''하는 방법으로 진행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에 급증하던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는데 그 양이 '''약 7억 톤'''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9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총량과 맞먹는다. 칭기즈 칸이 세계적인 대학살을 하고 다닌 덕분에 지구 온난화는 무려 '''200년'''이나 더 미뤄졌다고 한다. 기사
이 때문에 문명들을 침공하고 파괴하여 탄소 배출량을 줄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농담으로 칭기즈 칸을 환경전사라 칭하기도 한다.[146] 원 출처
7. 이름 표기
8. 어록?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의 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150]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긴 하다. 허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is to vanquish your enemies, to chase them before you, to rob them of their wealth, to see those dear to them bathed in tears, to clasp to your bosom their wives and daughters.”)"'''가장 좋은 삶이란 너의 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이 네 발 앞에 쓰러지는 걸 보며 그들의 말과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여자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148]
[149] "
페르시안 사서 중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진 승리했다고 말하지 마라."'''(#)
이 말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151]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
참고로 "집안이 못났다고 실망하지 마라" 식으로 전개되는 칭기즈 칸이 했다는 말은 사실 '김종래' 라는 기자가 그의 일생을 토대로 독자를 격려하는 내용의 가상의 글을 만들어서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라는 책에 쓴 것인데 어느샌가 그 얘기가 쏙 빠지고 칭기즈 칸의 어록이 되어버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감동적인 역사 인물의 실제 어록이라면서 인쇄해 들고 온 지인을 보고 멘붕했다고 전해진다.“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도입부.'''
거기다 덤으로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 붐이 일어나면서 또 이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어록' 이란 게 유포되어 이순신이 역적 가문 출신이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징기스칸 버전과 이순신 버전이 하도 퍼진 나머지 10년 전만 해도 어른들이 한마디씩 언급하거나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서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9. 각종 매체에서
10. 둘러보기
- 다른 뜻 - 징기스칸(동음이의어)
- 테무진 - 비밀전대 고레인저의 악역은 테무진 장군, 용호의 권 시리즈의 캐릭터는 테무진(SNK)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