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무호

 

[image]
'''제원'''
전장
105미터
전폭
12.5미터
흘수
4.2m, 7.3m (만재시)
인원
72명
기준 배수랑
3,432톤(추정)
만재 배수량
4,087톤
엔진
왕복 증기 기관 (1,750 마력)
속력
최대 13.5노트
순항 거리
??.?노트로 ?,???해리[1]
무장
80mm 단장 함포 x 4문(함수에 2문, 함미에 2문.)
5mm 기관총 x 2정(함교 근처에 좌우 배치)
건조사
영국 R. 딕슨 조선소 (Sir Raylton Dixon & Co)
진수 시기
1881년 8월
도입 시기
1903년 4월 15일
1. 소개
2. 굴욕의 도입
3. 어쩌다 들여오게 되었나?
3.1. 반론
5. 역대 함장
6. 이야깃거리
7. 같이 보기


1. 소개


한국 최초로 도입한 근대식 군함이자 최초의 기선형 군함이다. 대한제국 말기인 1903년에 들여왔다. 대한제국의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이 들여온 군함으로 길이는 105미터, 무게는 3432톤으로 당시 적지 않은 크기의 선박이다.
그러나 그 크기에 비해, 무장은 대포(80mm) 4문과 총(5mm) 2정에 불과한데...'''원래 이 배는 군함을 목적으로 만들어 진 배가 아니었다.'''

2. 굴욕의 도입


양무(揚武)호는 원래 군함이 아닌 화물선이었다. 영국 미드스버그(Middlesbrough)에 있는 R 딕슨(Sir Raylton Dixon & Co) 조선소[2]에서 만든 3,400톤급 화물선 팰라스(Pallas)로 처음 건조되었으며 선덜렌드에 있는 클라크 조지 사(Clark George Ltd, Sunderland)사에서 쓰다가 1893년 일본 미쓰이물산가 사들였는데 그 당시 일본에선 적지 않은 크기의 화물선이었다.[3] 미쓰이상사가 이 배를 카치다테마루(勝立丸, 승립환)이라 명명하고 선착운반선으로 사용했는데 배를 움직이는데 하루 43t의 석탄이 쓰이면서 유지비가 오라지게 나가자 9년동안 있는 대로 뽑아먹을 만큼 굴리다가 이후 일본정부에서는 쓰다남은 포 몇 정만 달아 구색맞추기 경무장을 하여 새 군함이랍시고 속여 대한제국에 거금을 요구하고 반강제로 떠넘긴 것이다.
실제 무장도 화물선에 조그만한 포 몇 개만 단 것 뿐이어서 군함 같지도 않은 화물선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고장이 잦은 낡은 배였고 앞서 말한 대로 하루에 40톤이 넘어가는 석탄을 넣어야 해서 운용비용도 많이 들어가는 고철덩어리였으며,[4]일본은 항해술을 전수해주겠다고 계약만 해놓고는 막상 이 배가 정식 배치되자 깔끔하게 씹어버렸다. 게다가 더더욱 개탄할 사실은 일본이 곱게 넘겨주지도 않고 구입할 때 25만엔이었던 배를 9년 뒤 55만엔으로 부풀려 강매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손해까지 봐가며 구입한 비용은 대한제국 돈으로 110만원이었는데 당시 대한제국 전체 국방예산이 약 412만원이었다고 하니[5][6]거의 국력을 기울여서 구입한 게 군함 축에도 못끼는 폐선이라는 것이다. 사기를 당해도 이런 사기가 없다.
게다가 고종은 군함 구입 전에 근대식 항해술을 익힐 사람들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영국에서 교관까지 모셔오며 해군사관학교를 설립했지만 이마저도 일본의 방해로 얼마 못가 문을 닫았다. 결국 배도 군함 같지도 않은 배를 넘겨받고 실질적으로 군함을 몰 인원도 제대로 양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3. 어쩌다 들여오게 되었나?


원래 고종 측에서는 일본에서 군함을 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고, 되레 왕실 비자금을 통해 독일과 영국에서 근대식 군함을 새로 주문하기 위해 여러 모로 접근을 했을 정도로 군함 마련에 있어서 노력했다. 하지만 정작 독일과 영국측에선 아니꼽게 생각하고는 단박에 거절했다. 설상가상으로 한일합방을 계획하던 일본은 대한제국이 군함을 마련하려는 계획과 정보를 바로 입수해 여러 각도로 훼방을 놓아가며 군함 구입 계획을 무산시켰고, 비자금을 전달해야 하는 사람인 이동인을 암살한다.[7] 결국 어느 쪽으로든 새로운 근대식 군함을 얻을 방법은 막혀버렸고, 일본의 계획대로 대한제국은 쓰다버린 화물선에 낡은 대포 조금 끼운 통통배를 새 군함 살 값으로 일본에게 강매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시 독립신문 등에서도 고종이 근대식 군함을 들이려 하고 해군력에 집착하는 점에 대해 나라 기반은 생각하지도 않고 방위비만 뿌린다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원래 고종이 그렇게 해군력을 중시하게 된 이유가 있기는 있었다. 고종은 아버지 흥선 대원군 때 서양의 기범선형 증기 군함들이 들어오고 이로 인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의 국가적 난리를 목도하면서 "적어도 근대적인 해군력은 있어야 나라 구실을 한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고 이로 인해 어떻게든 자기 재위 안에 증기군함을 도입하고 해군의 틀을 양성하려고 했던 것이다. 애시당초 운요호 사건만 해도, 따지고 보면 코딱지만 하면 소형 포함에게 농락당했다.
일본이 1.동래 도발로 조선군을 끌어들임
2.강화도 도발로 다시 끌어들임
3.운요호로 빈집털이
결국 해군을 포기한 해안방어의 맹점을 일본이 후벼판 것이고, 이를 막으려면 기동전력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시궁창이었다.
그러면 "왜 자체적으로 개발하지 않고 사오려 하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데, 고종은 16세 때 아버지 흥선 대원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장인을 불러모아 특명을 내려 근대식 외륜증기선을 제조하고 운행한 결과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을 통해 화륜선과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배운 상태였고 이를 통해 한선 몸체에다가 외륜과 증기 기관을 단 배를 몇척 제작하긴 했다. 하지만 처음에 운항 속도가 이상하게 느렸고 숙련된 선원이 없었던지라 활용하기 힘들었다.[8] 고종은 그때부터 제대로 기술을 들여오던지 하는게 아니라면 안되겠다 생각하여 아예 기선형 군함을 서양에서 도입해 오는 방식으로 노선을 바꾼 것이다.

3.1. 반론


다만 이 거래가 단순히 일본에 의해 덤티기를 쓴 것에 불과하다는 데에는 반론이 있다. 해당 선박이 대한제국이 근대적인 해군을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위해 들여온 배이며, 전투용[9]이 아니라 훈련용이라고 가정하면 그리 납득 못할 선택은 아니라는 것. 양무호 자체가 중고 화물선을 개조한 것이긴 해도, 해당 거래는 기초적인 설비, 식기 무장까지 전부 포함되는 것은 물론, 마쓰이 측에서 데려온 인력 양성을 위한 교관단까지 전부 포함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훈련이 이루어지고 인력이 양성되기도 전에 러일전쟁으로 빼앗겨 제구실을 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훈련용으로만 도입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가정이므로 덤티기를 쓴 것은 여전히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예산을 적재적소에 쓰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고종황제의 궁궐을 방비하는 근위병력과 수도서울에 주둔하는 중앙군을 황제가 충분히 양성하고 통제하지 못한 건 결국 예산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양무호와 광제호에 든 예산은 비교하면 국가예산의 몇 할에 해당할 만큼 컸다. 얼마 후 결국 황제가 도성에서 겁박을 당하고 을사늑약과 이후의 수순이 된 것을 보면, 구한말의 저 배들은 해군사적으로는 의미를 찾지 못하지는 않으나, 당시의 상황에서는 심각하게 잘못 지출한 것이었다.
관련 링크
양무호 도입은 과연 방산비리였을까.
구한 말 근대 해군 창설과 그 준비 과정
1902년 이후 대한제국의 해군 양성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들[10]

4. 그러나 이 배가 군함이었던 적은 없었다



▲인천시에서 방영한 양무호와 광제호에 대한 짤막한 비화
거금만 날리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들여온 양무호는 한번도 한민족의 바다를 지키는 군함으로 쓰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이 배가 대영제국의 민간회사 에서 석탄운반선 으로 사용하던 팰러스(Pallas)호를 슬슬 퇴역시기가 되어서 일제 파쇼 에게 팔아넘기고 대한제국이 군함이 필요하다고 해서 급하게 무장을 올린 것이라 제대로된 군함이 아니었다. 게다가 군함 도입 이전 설립한 해군사관학교도 무산되어 정작 군함을 다룰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양무호는 움직이는데 40톤의 석탄이 필요하고 고장이 잦아 유지비용이 막대하게 들어 임무는 커녕 인천항에 정박만 시키는 날이 많았다. 또한 무장도 고작 80mm 함포 4개, 5mm 기관총 2개가 전부 였는데 당시 양무호와 비슷한 크기의 군함들을 살펴보면 양무호의 무장은 굉장히 빈약한 편이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포탄들도 대부분이 공격용인 고폭탄, 철갑탄이 아닌 '''예포용 포탄''' 이었다. 그리고 함내식당은 서양식 고급 장식품들로 꾸미고 주방에는 서양식 고급 조리기구들을 배치 했으며 침실은 서양식 고급 장식품들로 장식해 놓았기 때문에 사실상 예포 쏘고, 함내식당 에서 고급 서양 요리 먹고, 서양 장식품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침실 에서 잠자는 행사용 배였다.
그나마 신순성이라고 항해술을 배워온 사관이 있었고 이 사람이 양무호의 함장으로 내정되긴 했으나 실질적으로 양무호를 몰고 제대로 된 임무를 할 기회가 없었다. 이 신순성이라는 군인은 이후 일본에서 들여온 군함 광제호에 기용되었다가 나중에는 상선 항해사로 일하게 된다.
결국 제 구실 한번 못하고 1907년 일제에 의해 무장해제된 후 선원실습선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러일전쟁 때 일본이 이 배를 징발해 지원함으로만 썼는데, 잠시 신형 엔진으로 교체해 쓰다가 전쟁이 끝난 후 기술유출을 염려해 다시 원엔진인 구형엔진으로 교체해 대한제국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한일합방을 앞둔 1909년에는 일본 하라다상점(原田商店)의 계열 해운사인 하라다 기선에 4만2천엔에 매각되었고[11] 이후에도 화물선으로 소소히 쓰이다가 1916년에 일본의 철광석 운반선으로 철광석을 싣고 싱가포르로 가는 도중에 침몰했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은 광제호라는 군함을 일본에서 들여온다. 왜 일본에게 그렇게 당해놓고 또 일본에서 들이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이 서양에서 군함을 도입할 길을 끊어 놓았기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이 배도 무장이 크진 않았으나 그나마 새 배였고, 이 배에도 마찬가지로 신순성 선장이 내정된다. 하지만 광제호 역시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한일합방 후 일본이 제멋대로 굴리다 광복 이후엔 일본인들을 일본 본토로 수송하는 데 쓰이면서 일본으로 건너가 자취를 감춘다. 이후 1949년대한민국 해군은 최초의 근대식 군함인 백두산함을 도입하게 된다.[12]

5. 역대 함장



6.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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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같이 보기



[1] 최대 몇 해리까지 항해가능한지는 기록이 없다.[2] 영국의 레일튼 딕슨 경이 설립한 조선사로 Sir Raylton Dixon & Co가 풀네임이나 약칭으로 R.Dixon으로 불려서 그렇게 표기한 듯 하다.[3] 당시 일본의 화물선 평균 톤수가 600톤[4] 다만 어디까지나 화물선 치고는 많다는 것이지 군함 기준으로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니다. 군함들은 수백톤 단위로 나간다.[5] 55만엔, 당시 국방예산 약 30%투입[6] 사실 대한제국이 워낙 가난한 나라라 제대로 된 군함을 구입한다해도 기껏해야 구축함정도였을것이다. 일본이 시키시마급 전함 4척을 구입하는데 5800만엔을 썼는데 이정도면 대한제국 국방예산의 '''30년치''' 와 맞먹는다.[7] 일본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실종되었다는 말도 있다.[8] 보일러에 땔감으로 넣은 것이 석탄이 아닌 숯이어서 증기가 생각보다 모이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증기선은 예열을 하고 나서나 제대로 속도가 나오는데 예열도 안하고 땔감 넣자마자 움직이려고 해서 그렇게 느리게 간 것이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9] 애초에 해당 선박 자체가 청일전쟁 시절 청 해군에 비해 열세일 적에 나름 큰 체급을 활용하여 가장순양함으로 개조했었다.[10] 여기 링크 걸린 글 말고도 다른 연재글에도 언급이 되는데, 몇년 후면 러시아에서 순양함 4척과 일본 마쓰이로 부터 보조전력으로 구축함 8척이 도입될 예정이기 때문에 훈련함이 필요했던 걸 사실이다. 다만, 글쓴이의 말대로 그 전에 전쟁이 터져서 먹힌(...) 게 문제지...[11] 이후 1933년 11월 하라다 기선은 大阪商船三井船舶 주식회사에 합병되었다.[12] 이전에도 경비정은 있었다. 정이 아닌 함으로 최초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