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럴 셔먼호 사건

 


''General Sherman'' incident
1. 개요
2. 상세
2.1. 신미양요와 5년이나 차이나는 이유
3. 영향
4. 후세의 평가
4.1. 북한의 역사 왜곡
5. 제너럴 셔먼호 정보
6. 미디어
7. 기타
8. 관련 문서


1. 개요


미국의 무장 상선[1] 제너럴 셔먼 호가 1866년 7월 25일[2], 평안도 용강현 주영포 앞바다에 도착한 뒤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 통상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고 민간인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자, 9월 5일[3] 당시 평안 감사 박규수 휘하의 조선군 부대가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살해한 사건.

2. 상세


사건의 시작은 구한 말, 서구 열강들의 아시아에 대한 개항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얻고자 눈에 불을 켜고 아시아의 문을 개방시키는 데에 혈안을 내세웠고 이 때문에 아시아 패권국인 중국과 일본의 문도 열리게 되었다. 이에 민간상선 따위가 국가를 개항시키겠다는 망상을 품고 조선에 접근한다.
제너럴 셔먼 호의 미국인 선주, 프레스턴은 배를 중국 톈진에 기항하였고 영국의 메도스 상사와 용선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렇게 제너럴 셔먼 호는 메도스 상사에 위탁된 채 조선으로 출항했다. 제너럴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에 이르렀고 평양 관민들에게 수교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반발하여 만경대 한사정(閑似亭)까지 거슬러 올라와 약탈을 감행했다. 처음에는 제너럴 셔먼호에 식량이 떨어졌다고 도움을 요청하자 조선 측에서 소고기채소 등 식량과 배에 필요한 자제를 거저 나눠주기까지 했으나 이들은 장마 비에 불어난 대동강 물을 거슬러 올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군이 출동하였으나 배에서 가해진 포격에 여러 군졸 및 구경하던 백성들이 죽고 다쳤다.
조선군도 대응 포격을 했지만 포의 사정거리가 짧은 탓에 효과를 주지는 못했다. 그래서 평양 감사 박규수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물러가라며 중군 이현익을 보냈으나 되려 그를 잡아가두고 통상을 요구했다. 실록에 따르면 중군이 납치된 것을 본 군졸들과 백성들이 노하여 배를 포위하고 화승총을 쏘아대고 돌을 던지자 제너럴 셔먼 호의 선원들은 두려워 했고, 퇴역 장교인 박춘권이 배를 타고 접근해오자 그에게 중군을 풀어주었다.
영국 웨일즈 출신 개신교 목사토마스가 이 배에 통역관으로 승선해 있었다. 그는 1865년 9월에 세관을 사임하고 1차 조선 선교 여행을 하며 성경책을 나누어주며 선교 활동을 했으나, 조선 당국에 적발되어서 추방당했다. 이듬해인 186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신부들의 학살에 항의차 조선으로 떠나는 프랑스 해군 원정 함대에 통역관으로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때마침 베트남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낭패한 토마스는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 호에 통역관으로 승선하여 다시 조선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제너럴 셔먼 호로 돌아와서 군민들이 몰려오는 것을 본 제너럴 셔먼 호는 도망치려고 했으나, 물이 불어났던 대동강이 포격을 하고 중군을 잡아두던 실랑이를 벌이다가 다시 물이 빠져버리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평양 감사 박규수는 밤중에 짚과 기름을 뿌린 목선들을 가득히 보내서 불을 질렀다. 결국 배는 버티지 못하고 불탔다.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배에 타고 있던 선장과 다른 상선사관 등 승무원 중 서양인은 5명뿐이었고 나머지 선원 19명은 동양인 중국인과 말레이시아 선원이었는데 몇 명이 가까스로 뭍으로 헤엄쳐 올라왔다. 개화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박규수는 이들을 죽이지 않고 잡아서 협상에 쓰고자 했으나 백성들이 내놓으라고 하는 분노가 너무 엄청나서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통역을 맡았던 토마스를 비롯해 청나라 선원 이팔용, 말레이시아 및 미국인 선원들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는다. 조정에선 5명의 서양인은 그렇다쳐도, 중국인 선원까지 다 죽인 것 때문에 청나라가 문책할까 봐 두려워서 역시 죽이는 건 바라지 않았다.
한편 1871년 6월 11일 신미양요미합중국 해군이 초지진을 점령한 첫날, 조선인 천주교도를 태운 배가 작약도에 머물고 있던 사령관 로저스 제독의 기함 USS 콜로라도 함에 접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프랑스인 신부 3명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혹시나 미 해군 함선에 승선했을 지 알아보기 위해 왔다고 진술하였다. 미군이 제너럴 셔먼 호의 진상을 묻자 선원들이 조선 측의 정중한 환대와 교역을 약속받고 상륙하였으나 환대를 받고 취해 쓰러진 뒤 살해되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미국 측은 조선 정부의 공식 답변보다 이들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제너럴 셔먼호 전투가 조선군이 일개 상선을 잡기도 버겁다는 것을 드러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제너럴 셔먼호의 포격으로 죽은 7인은 애시당초 군인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구경하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포를 쏴대서 죽은 것이었다. 정작 배를 불태워 버리는 군사 작전에서 죽은 조선군은 없었다. 하지만 무장 상선으로서 이 배에 정착된 포는 조선군이 가진 포보다 우수했다.
흥선 대원군은 가라앉은 제너럴 셔먼호를 건져내서 '''증기기관을 복제하려고 했었다'''. 정식 국가 기록인 승정원일기는 시범 운행이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화포 시범 사격도 '''성공했다고 나온다.''' 또한 2척을 더 만들어 총 3척을 '''강화도에 배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근세조선정감>의 기록에서는 아주 느리게 움직여서 사실상 실패했다고 하나, 이 책은 '''야담을 모은 야사집이다.'''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서 만들어진 책 <해국도지>와 <화륜선도설>[4]을 통해 화륜선과 와트 증기 기관의 설계도를 확보한 상태였고, 대원군 시절 만들어진 운현궁 소포 / 중포와 <훈국신조기계도설>, <훈국신조군기도설>에 나오는 조선의 수뢰포, 쌍포양륜거, 철모[5], 마반포거, 마반거 등도 이 책에 실린 서양의 최신 무기들과 과학 기술,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은 청나라의 무기들에 대한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일단 배가 처음에 느렸던 주된 이유로는 기관실에 땔감으로 넣은 것이 석탄이 아닌 이었고 숙련된 선원이 없었던 점이 컸다, 그리고 증기선은 예열을 하고 나서나 제대로 속도가 나오는데 예열도 안하고 땔감 넣자마자 움직이려고 해서 그렇게 느리게 간 것이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후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이 한창임에도 증기선을 만들든지 구하든지 하라는 상소가 빗발쳤다고 전해진다. 어쨌거나 증기선 시범 운행은 대원군의 개망신으로 귀결될 뻔하다가 막판에 동력이 확보되면서 성공했고, 이런 증기선을 세 척 건조하여 강화도에 배치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불명인데, 제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선 되었을 확률이 가장 크다. 당시 조선에는 근대 함선에 익숙한 선원도 없었고, 증기선은 연료 때문에 운용에 많은 돈이 들어간다. 폐선되어 후대 기록에 따라 대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조선이 쇄국 정책을 폈던 때라고 하지만 조공 사절단이 청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각종 서적들을 수입했었기에 외부의 사정을 아주 모르는건 아니었고, 조선에도 존재했던 청의 서적인 <해국도지>안에 와트식 증기 기관의 설계도와 설명이 들어있어서 복제가 가능했던 것이었다. 같은 책에 들어있는 철모(대포 주조용 철제 거푸집)나 수뢰포, 사망포거 등은 조선에서도 생산 / 개량되어 만들어졌다.
가끔씩 제너럴 셔먼 호가 남북전쟁에 사용된 미 해군 군함 USS Princess Royal 함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 해군의 공식 문서에 따르면 프린세스 로열 함의 민간 판매 시점이 애초에 이 사건이 일어난지 2년 뒤인 1868년이었고, 침몰한 것도 평양이 아닌 1874년 1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 Cape Fear에서 침몰하였다.

2.1. 신미양요와 5년이나 차이나는 이유


병인양요병인박해 직후 프랑스의 보복으로 일어났지만, 신미양요(1871)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뒤에 5년이 지나서야 일어났기 때문에 흥선 대원군 섭정기의 대외 정책을 공부할 때 상당히 헷갈리는 부분으로 작용한다.
이 사건과 신미양요 간의 시간적 간격이 큰 이유는, 애시당초 제너럴 셔먼호 사건 자체가 미국 정부의 지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민간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독자적으로 벌인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점에 조선은 이미 병인박해 때문에 프랑스가 조선에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미국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외교적으로 좋지 않은 시점을 택할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해 무장상선에 불과했던 제너럴 셔먼호가 몰살당한 것은 바로 이 해적행위 때문이었다. 병인양요 직전이라 조선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잘 대해주고 보내주려는데 해적행위를 했다는 것.[6]
게다가 애시당초 셔먼호가 정부 소속이거나 지시를 받았더라면, 아무런 외교적 군사적 대책도 없이 조선인들 상대로 행패를 부리고, 도주 경로 확보도 없이 무턱대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몰살을 자초하는 병크 짓을 할 이유도 없었다.[7]
더군다나 발생 년도는 1866년으로 남북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난지 겨우 1년 뒤였다. 미국 본토에서는 남북전쟁의 참화를[8] 수습하기도 벅찬 마당에 전임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해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이 후임자로 올라 상황을 수습하던 상태였다. 대응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미 정부는 직접 탐문 조사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와추세트호, 그 다음해인 1868년에는 셰난도어호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두 번의 방문의 목적은 정보 수집이 주안점이었기 때문에 모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 신미양요가 일어날 때까지 전혀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 것이 아니다. 한편, 셰난도어호가 방문했을 때 조선 정부는 미국에 공식 회답을 보내 제너럴 셔먼 호의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때 미국은 조선이 아니라 청나라에도 정보를 구함과 동시에 "님들 지방 정부가 이랬는데 혼좀 내주셈."이라는 컴플레인을 걸었다. 즉, 당시 조선은 미국에게 있어 청나라의 자치주 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셈. 하지만 청나라는 이에 대해 "걔들 독립국인데? 우리 소관 아님."이란 통보를 내준다.
따라서 '''미국이 이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는 데만 3년이 걸린 셈.''' 얼마나 정보가 없었느냐하면, 제너럴 셔먼호가 무장 상선인데 동아시아인 조선 군대에게 아작났다는 것을 근거로 조선의 군사력을 과대 평가해버렸다. 여기에 신미양요 초반부에 대원군이 병인양요 등을 거치면서 준비한 최대의 방어 병력이 보여준 포격을 보면서, 미군은 그에 더해서 최대한의 함포 사격을 하고 다시 공격을 했는데, 결과는(...) 신미양요 참고. 게다가 이 사건에 대해서 조선이 정보를 제공하며 협조를 했는데도 이 정도다.
그리고 미 정부도 조선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논의하고, 이를 다시 동아시아 지역 책임자(베이징 공사)에게 전하고, 베이징 공사는 정보를 수집하고, 군사를 정비하고.... 이런 식으로 따져 보면, 5년이라는 시간적 공백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게다가 미국 본토 역시 남북전쟁 뒤처리로 바빴다는 점. 신미양요 2년 전인 1869년에서야 미 대륙 횡단 철도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관심이 덜 했다는 점, 무엇보다도 조선의 개항은 대외 정책의 큰 틀, 특히 대 러시아 정책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라는 점 등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신미양요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지 꽤 지나서야 발발하게 되었다. 한국근현대사 과목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신미양요 '''순서 맞히기가 단골 출제 문제인데, 왜 이런 순서로 사건이 진행되었는지, 위에서 언급된 이유를 참조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 사건의 진행'''
  1. 병인박해 발생. 1866년1월
2. 병인박해로 프랑스의 보복을 걱정하며 신경을 곤두세우던 차에 뜬금없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생. 1866년 7월
3. 예정대로 병인양요 발생. 1866년 9월
4. 병인양요 이후 유럽의 조선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며 어느 모험가에 의해 오페르트 도굴사건 발생. 1868년
5.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미국 역시 조선에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되어 신미양요 발생. 1871년
6. 이렇게 관심에 시달린 결과 조선은 서양에 학을 떼며 척화비 각처에 세움. 1871년 ~ 1873년

3. 영향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배척을 나타내더니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4. 후세의 평가


'''역사상 이양선(異樣船)과의 첫 무력 충돌 사건'''이다.[9]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꽤 많으나 남아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의 입장을 담은 사료는 없다.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아무도 없으니 기록이 남았을 리가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기는 중요한데,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 근거로 삼는 종교 박해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 게 없기 때문.[10]
당초 제너럴 셔먼호를 두고 조선 조정은 다른 이양선과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고 했다.[11] 그들의 요구에 따라 평안도 관민들은 세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러나 조선 측에서 수교만큼은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한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浿江錄>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 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게 원인이 되었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당시 조선 정부의 공식대처방안과 제너럴셔먼호사건 당시의 평양감영 대처방안은 통상/수교는 안되지만 인도적 입장에서 최대한 도와준다는것이었다.실제로 그렇게 했었고..
어찌 되었든 결론적으로 이 사건의 책임은 국경을 침범하고 조선 관원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함부로 무력을 사용해 조선 민간인들을 살상한 뒤 군인을 납치하기까지 한 제너럴 셔먼호에 있었다. 미국도 1867년 1월 슈펠트(Shufeldt,R.W)의 탐문 항행과 1868년 4월 페비거(Febiger,J.C)의 탐문항행으로 승조원이 도발적 행동을 해서 화를 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12]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거두가 되는 박규수가 이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필연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세력의 강력함을 두 눈으로 경험하고 후학들을 가르쳤기 때문.

4.1. 북한의 역사 왜곡


남한에서는 학교에서의 역사교육과 공무원 시험이 아니면 그닥 관심을 덜 보이는 사건이지만, 북한에서는 이때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13]가 통솔했다고 주장하면서 김일성 일족이 과거부터 조선을 지키는 데 앞장섰다고 선전을 하고 있는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역사왜곡'''이다.
실제로는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도 관찰사이자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이 사건의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군관 출신이었던 박춘권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다룬 당대 사료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 당시 김응우는 22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는 이미 나이 60을 바라보는 노성한 고위 관료였다.''' 상식적으로 누가 대응을 주도했을지는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14][15]

5. 제너럴 셔먼호 정보


[image]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셔먼호'로 의심되는 함선 중 하나인 USS Princess Royal(1863)
(영어 Wikipedia, new world encyclopedia의 자료)
USS Princess Royal(1863)의 제원[16]
종류
스쿠너(schooner)
건조국 / 제작사
스코틀랜드 / Ted & McGregor, Glasgow
미국이 나포한 시기
1863년 1월 29일
재취역
1863년 2월 4일
획득
1863년 3월 18일
매각
1865년 8월 17일
전장
61.0m
배수량
828톤
무장
9인치(230mm) Dahlgren 활강포 x 4문
30-pounder(13.6kg) Parrott rifle x 2문
24-pounder(10.8kg) 곡사포 x 4문
추진 종류
증기 엔진 / 스크류 추진
한국어 위키 백과에서 추정하는 제너럴 셔먼호의 제원
건조국 / 제작사
스코틀랜드 / Ted & McGregor, Glasgow, Scotland
미국이 나포한 시기
1863년 1월 29일
재취역
1863년 2월 4일
획득
1863년 3월 18일
매각
1865년 8월 17일
전장
38.81m
배수량
614톤
무장
8인치 Sg x 4문
32 pdrs x 16문
승무원
150 명
추진 종류
요트(Sail) + 외륜(Side-wheel steamer)[17]
기타
프린세스 로열호와 제너럴 셔먼호의 포획 시기 / 경매 시기 / 판매 시기 / 침몰 지역이
미국 문서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음.[18]
제너럴 셔먼호는 남북전쟁에 참가한 장군(General)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의 이름을 따온것이다.

6. 미디어


  • 1990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대원군>에서도 등장했는데 미국인들이 멋대로 올라와 땅을 측정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것에 지나가던 평양 백성들이 보고 군졸들에게 신고한다. 군졸들이 잡으러 몰려오자 데꿀멍하여 보트로 달아나고 셔먼 호가 포격하여 군졸과 구경하던 백성들이 살상당한다. 이를 본 박규수가 "이, 양놈들이... 내 차마 죽이지 않고 잘 구슬리든지 쓸모있게 하려고 했더니만..." 혀를 차고 공격을 벌이게 하여 화공으로 배를 침몰시킨다. 토마스 목사를 비롯한 선원들이 뭍으로 와서 죽임을 당하는 건 나오지 않았지만, 극중 조선 군관들이 셔먼호에 타서 조선어를 하는 토마스의 통역 아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나온다. 배가 불타며 침몰하자 모여든 백성들이 환호하지만, 박규수는 한숨쉬며 '양놈들이 결코 이걸로 끝나지 않을 텐데' 라며 불안해하며 미래를 예측하는 장면이 나온다.
  • 1996년 방영된 KBS 찬란한 여명에서 등장했는데, 장사하러 왔다고 밝히지만 박규수가 "우린 통상 안 함"...이라며 튕겼다. 그러자 선원들이 보트 타고 육지에 와서 농부를 쏴죽이고 동네 처녀를 강간하다가 박규수가 이끌고 온 포졸들과 대치하는데, 셔먼호에서 포격을 가해 평양 군민들을 살상했다. 이에 관군도 포격으로 대응하다가 야간에 불화살을 쏴서 배를 침몰시켰다. 선주는 헤엄쳐서 빠져나왔지만, 강변에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에게 다구리를 당해 끔살당했고, 한 발 늦게 당도한 박규수는 그래도 죽여서는 안 되었다는 투로 한숨을 쉬었다.
  • 2002년 KBS에서 방영한 태양인 이제마에서도 잠깐 등장했다. 제너럴 셔먼호가 뜬금없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사람들이 강변에 구경하러 몰려들었는데 갑자기 셔먼호에서 무차별 포격으로 민간인을 마구 학살하며, 이후 평양 군민이 야간에 야습으로 배를 통째로 불태워버린다.

7. 기타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과 한국학을 전공한 교수가 미국측에서 연구한 관점에서 셔먼호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2020년 1월 25일자)

8. 관련 문서



[1] 말이 상선이지 군인도 아닌데 교전권 따위도 없는 주제에 남의 나라에 침략/약탈행위를 한 시점에서 이들은 해적선이나 다를 바 없다.[2] 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7월 18일[3]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4] <해국도지>의 요약 필사본격인 책이다.[5] 방탄모가 아니라 철로 된 대포 주조틀이다.[6] 당시 서구에서도 해적행위는 교수형이 기본이었다.[7] 뒷날의 신미양요 때 온 미군들은 이 사건을 일으킨 이들보다는 제법 신사적이긴 했다. 대원군의 철수 권고 편지에 정중하게 거절하고(병인양요 때는 훈련대장 이경하와 극동 함대 제독 로즈가 살벌하게 대립했다.) 파괴, 방화, 약탈도 프랑스보다는 덜했다. 단 전사자 숫자는 신미양요 때가 더 많았다.[8] 미국이 워낙 전쟁에 능하고 여러 네임드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사실이지만 남북전쟁은 미 전쟁 역사상 가장 많은 미국인이 죽은 전쟁이었다. '''심지어 제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았다.'''[9]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나선정벌러시아 제국과 싸웠으니 서양과의 무력충돌이라 할 만하지만 그때는 조선군 단독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으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과 달리 국경선 밖에서 일어난 일이었다.[10] 이 점은 동시대에 박해를 겪었던 천주교의 처지와 대비된다. 병인박해 때 천주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수집한 기록은 조선 조정의 <추안급국안>이나 <승정원일기> 혹은 <일성록> 등과 크로스 체킹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신교회에선 당시 신앙 공동체가 전무하여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할 수 없었고, 무려 사건이 발생한 지 40년 ~ 50년이 지난 다음에야, 토마스 목사의 행적을 수집하였고 글로 남겼다.[11] 낯선 사람을 잘 대접해서 보내는 것을 유원지의(柔遠之義)라고 한다.[1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13] 김정은에게는 5대조 할아버지가 된다.[14] 물론 22세의 나이라면 충분히 성인이고, 어린 나이에 과거를 급제하면 당연히 관직도 일찍 나와서 승진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김응우는 일개 묘지기였다. 과거에 급제할 조건이 있는 신분이나 재산이 있었다면 묘지기가 아니라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려고 노력했을 터이지만 그러지 않고 묘지기를 하고 있었다.[15] "의병 같은 거로 했을 거 아닌가?"라 해도 어차피 의병을 조직하기 전에 해당 관청에서 해결했을 것이다. 의병 같은 건 조직하기에 오래 걸리지만 관아 휘하의 군졸들은 언제나 조직되어 있어서 더 빠르게 모여서 더 빠르게 진압할 수 있다. 게다가 무기도 월등히 뛰어나다. 수십 년 뒤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 때 이들은 1차 때 지방 관아들을 공격하며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강화했는데 중앙군의 무기에 무력했다. 같은 군인인데도 중앙군과 지방군의 무기 차이가 극명한데 하물며 무기가 아닌 농기구 잡고 사는 농민이야 오죽할까. 잘해봐야 지휘를 받으면서 싸우는 수준에 불과했을것이다. 차라리 박규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했다느니 큰 공을 세웠느니 하는게 더 그럴 듯했을 것이다.[16] USS Princess Royal (1863)[17] 과거엔 요트로만 적혀있었으나 영어 위키 피디아에선 외륜 범선으로 기록하기에 외륜 추진도 최근 추가했다.[18] 제너럴 셔먼호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