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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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중국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기량을 지녔던 선수로 평가를 받는다. 양양(S)와 이름의 발음이 완전히 같아서[1] 구분을 위해 이름 뒤에 알파벳을 붙여 구분한다.[2] 처음에는 나이가 1살 많다는 점에 착안해 '대(大) 양양'이라는 뜻인 '양양('''L'''arge)'로 불렀으나, 본인이 이를 싫어해서 '양양('''A'''ugust)'로 호칭이 바뀌었다. 양양(S)는 Small이나 September(9월 14일생이라서)나 첫 글자가 S이다.
특히 후배선수들이 더티 플레이로 비난을 받는 데 비해 깨끗한 플레이를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다. 여담으로 1996 하얼빈 동계 아시안 게임 1500m 결승에서 전이경에 이어 2위로 들어왔지만 당시 주심인 왕시안 심판의 편파판정으로 금메달을 땄다. 선수생활 내내 페어 플레이를 보여 주었지만 이 사건은 옥의 티다.
2. 선수 경력
쇼트트랙 역사상 최고의 여자선수로 불리는 전설적인 선수. 1997년 전이경과의 공동으로 세계선수권 우승을 한 이후 2003년 최은경에게 저지당할 때까지 '''세계선수권 6연패(1997-2002)'''를 했다. 이는 빅토르 안의 6회 우승과 타이기록이며 연속우승으로는 역대 최다. 양양(A)가 올림픽+세계선수권에서 획득한 메달은 총 55개로(금메달 34개/은메달 15개/동메달 6개) '''남녀통합 역대 최다 (금)메달리스트'''다.[3] 500m부터 3000m 슈퍼파이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목에서 최강의 모습을 보여준 올라운더였다. 전성기 시절엔 아웃코스를 이용하여 한번에 선두로 치고나가는 화려한 플레이를 주로 선보였으나 복귀이후엔 상대적인 체력열세를 노련하고 탁월한 경기운영으로 적절하게 커버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4]
실력과 세계선수권에서의 업적에 비하여 올림픽 메달이 상대적으로 적은데(금2/은2/동1) 전명규 감독이 지도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견제작전 때문에 매번 올림픽에서 아쉬운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1997년 이후 전이경과의 대결에서 줄곧 앞섰으나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지나친 부담감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였고, 라이벌 전이경이 큰 경기와 중요한 순간에 강한 모습을 보여서 개인전에선 빈손으로 돌아갔고 계주 은메달에 그쳤다. 나가노 올림픽의 충격으로 은퇴하려고도 생각했다고 하나 마음을 다잡고 복귀하여 4년 간 세계 여자 쇼트트랙을 평정했다.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500m와 1000m에서 금메달을 땄으나 1500m에서 최은경의 견제와 고기현의 깜짝 등장으로 메달은 따내지 못했다. 2003 세계선수권에서 7연패가 무산된 뒤 2003-04 시즌을 스킵하면서 휴식을 취했고, 복귀한 2004-05 시즌에는 나이에 따른 체력저하와 진선유라는 괴물의 등장으로 장거리보다는 단거리에 집중했다. 2005-06 시즌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만 30세의 나이로 1000m 동메달을 따고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선수생활 내내 대한민국 여자대표팀의 견제를 받았던 선수로 노골적인 견제와 팀플레이를 당한 적이 많았지만 언제나 깨끗한 매너로 많은 선수들에게 실력과 인품 모두 존경을 받았다. 중국의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을 안겼고 수년 간 쇼트트랙 여자부 최강자로 군림하면서 '''중국 인민영웅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은퇴 후에는 국가적으로 IOC 위원 선출에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 2010년 '''IOC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4. 수상 기록
[1] 양양(S)의 이름은 阳이다. 정체자로 쓰면 양양(A)는 揚이고 양양(S)는 陽이라 표기로도 알아보기 어려웠을 것이다.[2] 이게 단순히 중계할 때만 구별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공식 선수명이었다. 그들의 활동 시기 장내 아나운서가 '양양에이~', '양양에스~'라고 외치는 소리를 올림픽 및 여러 대회에서 자주 들을 수 있었으며, 둘 중 한 명이 안 출전하는 대회에서도 그냥 양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꼭 에이와 에스를 붙여서 불렀다.[3] 현재 빅토르 안과 메달수 (55개)와 금메달수 (34개) 타이를 이루고 있다. 빅토르 안이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 (금)메달 하나를 더 추가하면 이 기록이 깨질 수 있었으나 빅토르 안이 2017-18시즌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하면서 무산되었다.[4] 한 예로 전성기였던 나가노와 솔트레이크에선 주로 뒷쪽에 있다가 후반부에 한번에 스피드를 내서 치고나가는 플레이 위주였던 반면, 복귀이후인 토리노에선 초반부터 선두권을 유지하며 적절한 체력안배와 견제위주의 플레이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