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가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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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에바 가드너 (Ava Gardner)
'''본명'''
에바 라비니아 가드너 (Ava Lavinia Gardner)
'''국적'''
미국 [image]
'''출생'''
1922년 12월 24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 그랩타운
'''사망'''
1990년 1월 25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직업'''
배우, 가수
'''학력'''
바턴 대학
'''신장'''
168cm
'''활동'''
1941 –1986
'''배우자'''
미키 루니 (1942년–1943년)
아티 쇼 (1945년–1946년)
프랭크 시나트라 (1951년–1957년)
1. 개요
2. 생애
3. 경력
4. 결혼과 이혼
5. 말년과 죽음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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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가드너(Ava Lavinia Gardner, 1922년 12월 24일 ~ 1990년 1월 25일)는 미국의 배우였다.
그는 1941년에 MGM 스튜디오와 계약하여, 그가 더 킬러스 (1946년)에서 공연으로 주의를 끌기 전까지는 조그마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할리우드를 선도하는 배우 가운데 한 명이 되어 당시 가장 아름다운 여성 가운데 한 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잉그리드 버그만, 비비안 리와 함께 '''1940년대의 상징'''같은 여배우.[1]

2. 생애


19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스미드필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바 라비니아 가드너. 스미드필드는 인구 7,000명의 농촌으로, 미국 제1의 담배 생산지임을 그녀는 평생 자랑스러워했다. 가난한 소작농이었던 아버지는 그녀가 열다섯 살 때 사망했다.
애틀랜틱 크리스천 대학을 졸업한 뒤에 뉴욕에서 사진작가로 살아가는 형부의 주선으로 모델이 된다. 직업모델이 된 것이 아니라 형부가 찍어준 사진을 여기저기에 보내보는 취업 지망생이었다. 아무튼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 MGM사에 주급 50달러의 단역배우로 취직이 된다.
심한 남부 사투리는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였다. 사투리를 교정하고자 학원에 다니며 발성 연습을 했다. 타이틀에 이름도 나오지 않는 영화 15~16편에 출연했다. 무명을 벗어버리고자 했던 그녀가 택한 방법은 유명 배우와의 결혼이었다.

3. 경력


뉴욕의 번화가 사진관 쇼윈도에 장식된 사진으로 인하여 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그녀는 한때 헤밍웨이의 전담배우라고 인식될 만큼 <살인자>(1946), <킬리만자로의 눈>(1952),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1957) 등 그의 원작영화에 거의 출연했다.
그녀는 이외에도 <판도라>(1950), <원탁의 기사>(1952), <맨발의 백작부인>(1954), <보와니 분기점>(1955), <오두막집>(1956), <마야>(1958), <모감보>(1959), <5월의 7일간>(1963), <북경의 55일>(1963), <이구아나의 밤>(1964), <대지진>(1975) 등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고전 여배우로서는 드물게 ‘빛나는 미모와 강렬한 카리스마’를 함께 간직한, 미국영화사 최고의 여배우로 평가되었다.
우디 앨런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 3명 안에 들기도 했다.
생전에 클라크 게이블은 그녀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물', '사내처럼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뱃사람처럼 입이 걸지만, 어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의 몸에 갇힌 영혼'이라고 평가하였다.

4. 결혼과 이혼


그녀가 할리우드 무명 배우 시절에 결혼한 사람은 미키 루니였다. 아역배우로 유명했던 미키 루니는 할리우드에 아내를 알리는 일에 발벗고 나섰지만 두 사람은 18개월 만에 헤어진다. 1943년이었다.
이혼 다음해에 재혼한 사람은 음악가 아티 쇼였다. 1948년, 마침내 기회가 온다. 버트 랭카스트와 공연한 <살인자>에서 에바 가드너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요부 역을 멋지게 소화하여 뭇 남성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준다. 마릴린 먼로가 무식하지만 귀여운 백치미를 보여주었다면 에바 가드너는 귀족적인 품위를 갖춘 관능미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명세는 그녀에게 두 번째 이혼이란 쓰라린 경험을 하게 한다. 바로 이때 할리우드의 명 제작자로서 독신으로 살아가던 하워드 휴즈가 청혼을 한다. 그토록 당당하게 영화계를 호령하던 하워드 휴즈가 평생에 단 한 번 이성을 잃고 무릎을 꿇고 청혼한 이는 에바 가드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녀는 할리우드 최고의 갑부가 한 청혼을 거절한다. 아직은 가난한 이탈리아 태생의 가수 겸 배우인 프랭크 시나트라와 바로 그 무렵 연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돈 대신 사랑을 택한다. 1951년, 그녀는 프랑크 시내트라와 결혼하여 세상의 화제를 독차지한다. 결혼 이후 출연한 영화 <모감보>에서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연기력도 인정을 받는다.
다만 성격이 맞지 않았는지 1957년 프랭크 시나트라와도 이혼한 뒤,[2] 연기에만 전념하다가 1990년에 사망했다. 그녀는 <이구아나의 밤>으로 산세바스찬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탔지만 아카데미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말년에 집필한 자서전을 보면 그녀는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적극적이며 노력파형의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 번의 결혼도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뜻대로는 되지 않는 것을 알고는 남자에게 의존하기를 단념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5. 말년과 죽음


가드너는 여러 해에 걸쳐 잇따른 건강 악화로, 1990년에 런던의 자기 집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가드너는 그의 부모(조나와 몰리 가드너)와 형제가 묻힌 바로 옆 자리에 스미스필드의 선셋 메모리얼 파크(Sunset Memorial Park)에 매장되었다. 스미스필드 타운에는 에바 가드너 박물관이 있다.

[1] 프랭크 시나트라와 같은 세대이다. 공교롭게도 둘은 결혼한 적이 있다.[2] 별거는 1953년부터 했다고 한다. 이혼하고 나서도 친하게 지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