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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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 때 찍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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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찍혔다고 알려진 사진. 즉 67~68살 때 찍힌 사진이다. 하워드 휴즈의 비서는 하워드 휴즈라고 주장하나 몇몇 연구가들이 중년 때 얼굴과 상당히 다르다며 아닐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1. 개요
Howard Robard Hughes Jr.
하워드 로바드 휴즈 주니어
1905년 12월 24일~1976년 4월 5일
미국의 사업가(휴즈 공구회사, TWA 등)이자 비행사이자 공학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
가장 미국적이었던 부자이고, 평생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은 다 해보거나 시도해본 사람이었다. 이런 모습이 진취적이고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억만장자의 삶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워드 휴즈가 사망한 후 그가 실제로는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여러 신체질환과 정신질환을 앓았으며 이상적인 억만장자의 삶과는 억만광년 먼 삶이었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도리어 그의 뚜렷한 캐릭터 때문에 더 유명해졌다.
2. 유년기
1905년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성공한 사업가인 하워드 로바드 휴즈와 유복한 영국의 귀족혈통인 알렌 스톤 가노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인 하워드 휴즈 시니어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였다가 석유를 채굴할때 쓰는 거대한 드릴을 발명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으며[1] , 어린 하워드 휴즈도 이런것 저런것을 스스로 만들어보며 기계공학에 상당한 소질을 보인다.
12살때 아버지의 회사에 있던 기계 부품들을 조립해서 모터가 달린 전동자전거를 만들었으며 칼텍 (당시 칼텍은 생긴지 별로 안돼서 지금과는 위상이 좀 달랐다) 에서 수학과 공학 수업을 청강했고 텍사스주의 명문 라이스 대학교에 기부입학으로 진학해 공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1922년 16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2년 뒤인 1924년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하워드 휴즈는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Hughes Tool Company를 물려받았다. 18살의 어린 하워드는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다 자퇴한 뒤에 엘라 라이스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영화제작을 위해 할리우드로 떠난다.
3. 영화 제작자로서
어리고 야심많은 억만장자 하워드 휴즈는 할리우드에서 여러편의 영화를 제작한다. 처음에는 코미디 영화를 찍었으며 흥행에도 성공하고 아카데미상에 후보로 오르며 승승장구 했다.
하워드 휴즈는 내심 아무도 범접하지 못할 대작을 만들어내겠다는 욕망이 있었으며 그의 욕구는 1927년부터 제작된 1930년작 영화 지옥의 천사들을 제작하기에 이른다. 1차 세계대전의 조종사들에 대한 이 영화는 100만불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으며 3년의 제작기간이 소요된다. 게다가 처음에 3년의 기간 동안 1년은 비행기 모형을 이용해 촬영하려 했으나 하워드 휴즈는 조잡한 모형에 실망해 결국 진짜 비행기를 이용해 촬영했다.
진짜 비행기를 이용한 촬영 때문에 촬영기간 동안 비행기 조종사들 3명이 죽었으며 하워드 휴즈도 비행기 추락사고로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를 다치고 만다. 결국 제작과 광고비에 무려 3백만불이 더 들어갔지만, 8백만불의 수익을 거두면서 대성공하였다. 하워드 휴즈는 이후에도 스카페이스 그리고 무법자를 통해 영화 제작자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이때 할리우드에서 영화 제작사들 및 소위 큰손들은 하워드 휴즈를 매우 기피했다. 하워드 휴즈가 너무 무리하고 허황된 의뢰를 하거나 부탁을 했기 때문. 오죽하면 당시 워너 브라더스사의 사장이 "휴즈씨, 우리는 당신처럼 취미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돈을 벌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라고 했을 정도로[2] 도저히 그 당시 기술력으로 감당할 수 없거나, 철저히 본인의 취향으로 점철된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하워드 휴즈가 그냥 꿈만 큰 애송이라면 코웃음치고 넘어가겠는데 당시의 그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부호였고, 영화계는 아직도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때라서 도저히 그에게 밉보여서는 안될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다만 그 당시에도 기분은 안 좋았는지 자기 비서에게 "내가 내 아들만한 놈 시다바리나 하다니"라며 푸념을 했다고 한다.
이 기간동안 하워드는 엄청난 수의 여배우들과 데이트를 했는데, 하워드 휴즈의 첫번째 부인인 엘라 라이스는 이런 휴즈의 태도에 염증을 느껴 1929년 그와 이혼한다. 이혼하고도 24살의 젊고 키크고 잘생긴데다 돈도 많았던 휴즈는 집중적으로 여배우들과 교제를 시작한다. 이때 탑스타였던 여배우들은 다 하워드 휴즈와 데이트를 해보았다고 할 정도로[3] 하워드 휴즈는 열정적으로 여배우들과 교제를 했으며, 심지어 몇명의 아름다운 여성들을 자신의 영화사와 계약시켜서 스타로 키워냈다.
이렇듯 RKO 픽처스를 인수하면서 영화 제작에 몰두했으나, 1957년 존 웨인이 등장하는 제트 파일럿 프로듀서를 맡은 것을 끝으로 영화 제작은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4. 파일럿으로서
하워드 휴즈의 비행기, 그리고 하늘에 대한 동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타 보았던 수상기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하워드 휴즈는 항공면허를 취득, 이 와중에 찰스 린드버그와 비슷한 면허번호를 가지고 싶어 담당부서에 끈질기게 요청하여 결국 훨씬 앞선 번호로 면허를 재취득하면서 곧바로 더글라스 항공사[4] 등을 통해 개인 비행기를 발주하면서 광범위한 개조를 실시하여 자신만의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하워드 휴즈는 곧 기존의 항공사들이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작업을 하기가 어려움을 깨닫고[5] 오너 오데커크 등 항공 엔지니어들을 영입, 휴즈 공구 주식회사 내에 항공기 사업부[6] 를 세우고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기존의 항공기를 개조하기 시작했지만 하워드 휴즈는 성미에 차지 않아 결국 새로운 항공기 설계에 돌입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H-1 레이서. 속도경주용으로 제작된 레이서를 탄 하워드 휴즈는 곧바로 1935년 9월 13일 시속 352마일(563km/h)를 돌파, 세계신기록을 수립한다. 이어 하워드 휴즈는 북미 대륙횡단기록에 도전, H-1 레이서에 더 큰 주익과 익내연료탱크를 탑재하여 항속거리를 늘려 북미 대륙횡단기록을 갱신한다.
그리고 1938년 7월 1일, 휴즈는 휴즈 항공기 회사에서 개조한 록히드 L-14 슈퍼 엘렉트라를 이용, 세계일주 비행기록 수립에 도전하여 91시간만에 세계일주를 완수, 파일럿으로써 영광의 자리에 다다른다.
5. 항공기 제작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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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기에 대한 휴즈의 열정은 결국 '휴즈 항공기 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진다. 2차 대전 기간 중 휴즈는 XF-11이라는 고고도 고속 정찰기의 개발을 의뢰받는다.
XF-11은 사실 휴즈가 이전에 고고도 고속 전폭기로 제작한 D-2의 후계기종에 가까운 성격을 갖는다. 휴즈가 개발한 D-2는 금속외피 대신 나무를 사용하여 외피를 제작했는데, 이때문에 휴즈의 D-2 군납 제안은 방어력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으나 D-2의 우아한 외관과 카탈로그 스펙을 본 미 육군은 이 설계를 그대로 사장시키기는 아까웠는지 금속제 외피를 갖춘 고고도 사진촬영 정찰기의 개발을 휴즈에게 의뢰한다.
2차 대전중 설계가 완성되자 미 육군은 곧바로 XF-11을 100대 발주했으나 이중반전 프로펠러 등 기술적 난제가 산적한 XF-11은 2차대전 종전시까지 실기가 완성되지 못했다. 1945년 2차 대전 종전 후 고고도에서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RB-50이 미 육군에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XF-11의 100기 납입계약은 파기, 기술시험을 위한 시제기 2기의 발주만 남겨졌다.
1946년 7월 7일, XF-11 시제 1호기(등록번호 44-70155)가 하워드 휴즈의 조종으로 이륙했다. 당초 20분 정도의 짧은 시험비행 후 착륙 예정이었으나 휴즈의 변덕으로 로스엔젤레스 상공을 돌아보는 비행을 실시했고, 캘버시티의 휴즈 항공기 회사 활주로로 돌아오기 위해 기수를 돌리는 순간 좌측 프로펠러축 감속기어 오일 누출로 이중반전 프로펠러 중 전방 프로펠러 정지, 후방 프로펠러는 역회전을 시작하여 조종불능 상태에 빠진다. 휴즈는 XF-11을 달래가며 근처의 골프장에 비상착륙을 시도했으나 실패, 비벌리힐스 주택단지에 추락한다.
XF-11 시제 1호기는 이 추락사고로 완파되고 휴즈 역시 심각한 부상을 입는데, 이때 얼굴에 생긴 흉터를 가리기 위해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콧수염을 기르게 되고, 진통제로 사용한 모르핀 중독에 빠지게 된다.
남겨진 XF-11 시제 2호기는 사고의 원인인 이중반전 프로펠러를 일반 프로펠러로 교체하여 비행시험에 성공, 육군에 인도되었으나 시대는 이미 제트엔진 시대로 접어들어 별다른 활약 없이 폐기 처분된다.
또한 휴즈는 XF-11의 개발과 병행하여 유럽 전선으로의 군수물자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휴스 H-4 허큘리스라는 초거대 수송 비행정을 제작한다. 현재까지도 이 항공기가 가진 '''가장 날개폭이 긴 항공기'''라는 타이틀은 2019년 스트라토런치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까지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비행기를 굴리는 데에 필요한 조종계통의 반응에 관한 문제를 당시로서는 도저히 고칠 수 없어서 시험비행 1회만 한 후 실제 운용은 되지 않았고, 이 비행기에는 '스프루스 구스'라는 멸칭이 붙었다. 이 수상기 역시 종전시까지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고, 결국 종전 후에 시험비행 후 현재는 박물관에 전시중이다.
그 후 휴즈 항공기 회사는 고정익기보다는 당시의 최신 항공기인 헬리콥터의 개발과 생산에 몰두했고, 유명한 군용 헬기 500MD이나 AH-64도 휴즈 항공기 회사의 작품이다. 그러나 냉전 종식 후 맥도널 더글라스사에 합병되었다가 현재는 보잉사의 산하에 있다. 그 외에도 F-14에 탑재된 AIM-54 피닉스 미사일과 AIM-120 AMRAAM 공대공 미사일도 휴즈 항공기 회사에서 처음 개발한 것이다.
6. 노년
1966년, 하워드 휴즈는 수 차례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한 후유증과 정신병이 더욱 심해져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계에 다다랐다.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결국 캘리포니아를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며 라스베가스로 향한다. 그는 그 곳의 한 호텔(Desert Inn)의 펜트하우스를 임대한뒤에 그곳에서 기업을 운영한다. 호텔에서 업무를 보던 도중에 자신이 머물던 호텔에 자신 외에 다른 사람도 묵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 호텔을 사버린다.'''
타고난 사업가인 하워드 휴즈는 측근에게 라스베가스를 더 '글래머러스'하게 바꾸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7] 그때만 해도 라스베가스는 어중이떠중이 노름꾼이 와서 싸구려 카지노나 해대던 저급한 유흥도시였다. 하워드 휴즈는 잘 차려입은 신사숙녀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멋지게 놀 수 있는 고급 유흥도시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라스베가스의 중심지라 불리는 스트립에 있는 대형호텔을 5개나 구입했다. 그중에 실버 슬리퍼라는 작은 호텔도 하나 구입했는데 이유는 '''잠 좀 자려고'''이다. 실버 슬리퍼 호텔은 하워드 휴즈가 머물던 호텔 펜트하우스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했는데 실버 슬리퍼 호텔의 간판에서 나오는 불빛이 하워드의 수면을 방해했던 것이다. 하워드 휴즈는 라스베가스의 고급화를 꾀했으며, 그와 동시에 '''본인이 원하는 영화를 원하는 시간에 텔레비전에 나오게 하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라스베가스의 텔레비전 방송국도 사버린다.'''
당시 라스베가스를 이미 주름잡고 있던 마피아들은 하워드의 이런 행동이 당연히 아니꼬웠겠지만 제아무리 수십개 조직과 수백수천의 조직원을 거느린 마피아들인들 당시 미국의 최고의 부자이자 군수산업을 통해 높으신 분들과도 친분이 두텁던 하워드 휴즈에게는 찍소리도 못하고 도리어 휴즈에게 밉보이지 않게 알아서 바짓가랑이 밑을 기었다. 다만 채찍만 휘두른 것은 아니었고 그가 인수한 호텔의 전 주인들처럼 마피아들에게 그대로 경영을 맡겼다. 그리고 마피아들은 하워드 휴즈가 필요한 것들을 조달시키고 충족시켜줬다.
이때 재미있는 일화들이 많은데, 그중 하나는 당시 배스킨라빈스의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에 필이 꽂혔던 하워드 휴즈를 위해 마피아들이 그 아이스크림을 공수하려고 했으나 아쉽게도 그 맛은 이미 단종되었던 맛이었다. 죽어도 하워드 휴즈에게 밉보이면 안 되었던 그들은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을 구하기 위해 배스킨라빈스 본사에 연락해 애걸복걸해서 결국 단종된 맛을 특별주문하는데 성공했다.
근데 단종된 맛의 아이스크림을 특별주문하는 최소 주문단위가 '''200갤런(!)'''(약 760 리터)이었다. 마피아들은 간신히 하워드 휴즈만을 위한 바나나 리플맛 아이스크림을 배스킨라빈스 공장이 있던 로스 엔젤레스에서 공수해왔다. 하지만 하워드 휴즈는 한 이틀정도 그 아이스크림을 먹더니 질려버렸고 결국 200갤런 가까이 되는 아이스크림을 처리하기 위해 하워드 휴즈가 머물던 호텔의 카지노에서 고객들에게 공짜 아이스크림을 1년간 대접했다고 한다.
라스베가스에 엄청난 숫자의 호텔과 시설, 그리고 부동산을 소유한 하워드 휴즈는 자연스럽게 라스베가스를 넘어 네바다주에까지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하워드 휴즈에게 Baron Las Vegas, 한국말로 하면 라스베가스 남작, 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또한 그는 당시 미국 정부가 네바다 주에서 하고 있는 핵실험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각계에 로비를 통해 핵실험을 막아보려고 했으며 심지어 그의 측근들을 시켜 대통령에게 백만불의 뇌물까지 제공하겠다는 제의를 했으나 맨해튼 프로젝트에 들어간 20억 달러의 예산에 비하면 휴즈의 뇌물은 정말 작은 것에 불과했다. 핵실험은 강행되었고 핵 폭발로 인한 충격때문에 그가 머물고 있던 호텔에서 진동이 느껴지는 것을 보며 하워드 휴즈는 대노했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에는 라스베가스도 질렸는지, 해외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주로 있었던 곳은 니카라과였으며, 바하마나 멕시코에도 꽤 많이 머물렀다. 미국에서는 주로 플로리다, 텍사스, 네바다주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텍사스에 온 이유는 의료 목적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매우 그럴듯한 루머에 따르면 자신의 입김이 세게 닿는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간인 매우 늦은 밤이나 매우 이른 새벽에 진찰을 받으러 갔다고 한다.
1970년에 이혼소송이 있었고, 1972년에는 클리포드 어빙이라는 작자가 자신이 휴즈의 허가를 받은 자서전을 집필했다고 발표하는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휴즈의 극단적인 대인기피로 인한 소극적 대처로, 헛소문으로 인해 상당히 큰 타격을 입고 무마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나이가 들면서 기행이 점점 더 심해졌고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다시피해서 사진이 찍힌 것도 얼마 없고, 그중에서 공개된 것은 더 적다. 1961년에 공개적으로 마지막 사진이 찍혔고, 1973년에 찍힌 사진이 한장 더 있다. 그의 기행 중에 한가지는 바로 유난히 대인기피증이 심해질 때면 자신의 생활공간뿐만이 아니라 아예 자신의 방이 있는 층으로 사람들이 올라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그 방 창문 앞에 도르래와 바구니를 설치했다. 긴 막대기로 창문에 노크를 하고 창문이 살짝 열리면, 바구니에 필요한 결재서류나 사업현황 보고서등을 넣은 뒤에 올려 보내는 방식으로 소통을 했다.
그리고 세균이 무서워서 물건을 맨손으로 만지는 것을 극도로 꺼릴 때가 많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의 곽휴지와 소독한 손수건과 수건들을 썼다.[8] 그외에도 곽휴지 상자를 신발로 신었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지만 이건 그냥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가능성이 높다.
1976년 4월 5일 멕시코에 있는 그의 펜트하우스에서 몸 상태가 악화되자 급히 비행기로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병원으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다. 그의 사체는 정말 알아보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머리카락, 수염, 손톱, 발톱은 관리를 안해서 매우 길었고, 185cm[9] 의 큰 키와 다르게 몸무게는 42kg였고, 아무래도 외부와 단절된 채로 살아서 그랬는지 얼굴 알아보는데도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결국 FBI에서 지문 조회를 통해서 하워드 휴즈라고 확인했고, 부검을 통해 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고 결론내린다. 그외에도 팔에 진통제를 주사하다가 주사바늘이 팔 근육에 박힌 것도 5개나 발견해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실제로는 멕시코에서 죽었는데, 부패한 멕시코 관료들이 괜히 시신인도를 거부하며 돈을 뜯어낼까봐 미국 상공에 도착하자마자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말도 있다.
7.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
그의 사망 3주 뒤에 웬 솔트레이크 시티의 모르몬 교회 총본부에서 1968년 작성된 하워드 휴즈의 유언장이 발견되었다. 일단 서명은 휴즈의 것이었으며, 글씨도 대충 비슷했으며 휴즈 측의 측근들을 꽤나 잘 알고 있었다. 그 내용에는 여러 자선 단체에게 돈을 기부할 것과, 가족 및 자신의 주윗사람에게 돈을 남기고, 모르몬 교회에도 1/16[10] 이나 남기고 네바다의 멜빈 던마르라는 사람에게도 1/16이나 되는 큰 돈을 남겼다.
즉시 멜빈 던마르라는 사람을 네바다에서 찾아보니 라스 베가스 인근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던 젊은이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1967년 주유소 밖에 웬 노인이 지쳐 쓰러져 가길래 그 노인에게 집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 노인은 라스 베가스의 어느 호텔에 내려달라고 했으며, 도착하고 나서 그 노인은 자신이 하워드 휴즈이며 고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뒤에 웬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의 주유소에 밀봉된 서류봉투를 두고 갔고 거기에 모르몬 교회 본부에 보내달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워드 휴즈의 사촌이자 최우선 후계자인 윌리엄 러미스 및 휴즈 측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결국 소송이 걸린다. 법정에서 내린 판결은 위조된 문서라는 것이다.
첫번째, 멜빈 던마르의 아내는 미국의 여러 부호들이 많이 보는 잡지를 발행하는 회사에서 일했고 그 곳에서 여러 부호들의 필체 및 서명과 그들의 신상정보를 입수하기가 쉽다는 점을 들었다.
두번째, 유언집행자로 노아 디트릭(Noah Dietrich)을 임명했는데, 디트릭은 하워드 휴즈의 양친이 다 사망하고 회사를 물려받은지 얼마 안된 시점부터, 휴즈 밑에서 30년 넘게 일하고 상당한 신뢰관계를 구축한 사이였지만 1950년대에 사이가 틀어져서 이미 갈라진 뒤였다. 즉 하워드 휴즈 입장에서는 디트릭을 굳이 총책임자로 임명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었다.
세번째, 휴즈의 측근으로 일해서 유명했던 사촌형제인 윌리엄 러미스를 제외하고 다른 여러명의 사촌 형제들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다. 하워드 휴즈는 친척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고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물론 서로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죽을때 설마 한푼도 남겨주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11] .
결국 소위 말하는 모르몬 유언장 스캔들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하워드 휴즈의 유산은 하워드 휴즈의 22명의 사촌 형제들과 그의 전처와 딸이 균등하게 나눠가졌다. 그리고 사촌 형제인 윌리엄 러미스는 계속 소송을 걸어 자신이 물려받은 하워드 휴즈 메디컬 인스티튜트가 최상위 지주회사로 올려지게 했다.
참고로 지금도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25센트의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위 멜빈의 주장이 훈훈한 미담(?)처럼 포장되어 떠돌고 있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
2017년 07월 02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일화가 소개되었다.
8. 매체에서
아무래도 억만장자들중에 가장 캐릭터가 확실한 억만장자라 그런지 여러 매체에 그를 오마쥬하거나 패러디한 캐릭터들이 많다.
휴즈 생전에 나온 영화인 막스 오퓔스의 포획에서 로버트 라이언이 연기한 스미스 올릭이 하워드 휴즈를 모티브로 했다. 작중에서 올릭은 사업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아내에게 이기적이고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생전에도 대중들 나아가 할리우드 내의 인식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 에비에이터가 하워드 휴즈를 다룬 영화이다.
멜빈과 하워드는 하워드 휴즈의 말년 일화 중 하나를 영화화한것이다. 다만 실제로는 도시전설에 가까운 내용이다.
워렌 비티가 감독하고 하워드 휴즈역을 맡은 영화 '그 규칙은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아요'도 있는데 방대한 제작 기간과 화려한 출연진들에 비해 영화 자체는 묻혀버렸다...
폴아웃: 뉴 베가스의 미스터 하우스가 하워드 휴즈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베가스를 다스리는 천재 사업가라는 이미지부터 그의 말년까지도, 그야말로 웨이스트랜드를 기반으로 비틀어냈다.
아이언맨 토니 스타크와 그 아버지인 하워드 스타크 역시 하워드 휴즈를 기반으로 했다. 특히 하워드 스타크는 외모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하워드 휴즈의 그것을 충실하게 재현했을 정도. 다만 하워드 스타크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수성가한 인물이지만 실제 하워드 휴즈는 태어날 때부터 부잣집 아들이었다.
참고로 일부에선 토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 테슬라 & 스페이스X의 창업자인 엘론 머스크라고 알려져 있는데, 정확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토니 스타크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영감을 얻기위해 만난 인물이라는 점이 잘못 알려진 경우다.[12]
영화 '인간 로켓티어'에서 사건의 발단이 되는 로켓을 개발한 사람도 하워드 휴즈. 영화 마지막엔 주인공 클리프 시코드를 자신의 비행기로 멋지게 구해주기도 하고, 엔딩에선 자신이 만든 비행기를 클리프에게 감사의 선물로 주는 훈훈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는 라스베가스 호텔 펜트하우스에 은둔해 있는 대기업 회장 화이트가 등장하는데, 누가 봐도 하워드 휴즈가 모델이다. 다만 하워드 휴즈는 최고급 호텔에 머무른게 아니라 조금 좋은 모텔 수준의 호텔의 펜트 하우스에 머물렀다. 금전적인 이유가 아니라 극심한 대인기피증때문. 아예 꼭대기층을 통째로 임대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원천차단하는 방식을 썼다. 그외에도 심슨에서 번즈가 카지노를 세우고 점점 더 미치면서 병균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나온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역시 하워드 휴즈 패러디다.
고르고 13의 16권 2화에서 하워드 휴즈가 낳은 아들이 그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는데 그가 한 마피아 조직과 연결되 있어 그에 적대하는 조직이 그걸 막기 위해 고르고 13에게 그를 살인의뢰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심슨가족 시즌 5 10화에서는 번즈사장이 카지노를 차리면서 노년의 하워드 휴즈 모습으로 변해가며 결정적으로 그가 만든 허큘리스의 모형이 나온다.
한편, 태평양 전쟁 개전 초기에 연합군의 제공권에 큰 타격을 안겼던 제로센에 대해, 종전후 휴즈는 이 기체가 자신의 H-1레이서를 베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3] 이 얘기가 와전되어서 위키 관련 항목에서는 휴즈가 태평양 전쟁 중 준전범 취급을 받았다고 기재되어 있기도 했다.
지팡구(만화)에선 묘하게 흑막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한다.
웹소설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이 미국에서 쓰는 이름 하워드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엔터테인먼트나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진취적인 인물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고. 즉 빙의 전 본래 삶에서의 희망을 이룬다는 의지인 셈이다. 물론, 하워드 휴즈가 금수저인데다 권력 집단과의 두터운 인맥으로 스스로도 권력자가 되어 역사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소설의 향방을 암시하는 스포일러이기도 하다.
웹소설 '겜블링 1945'에도 등장한다. 처음에는 주인공 선우 진의 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나 이내 친해지고, 나중에는 선우진에게 투자도 받았다.[14] 그런데 그 금액 중 일부를 뉴욕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민주당 후보에게 정치자금으로 후원했고, 이는 선우진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는 계기가 된다.
9. 기타
네바다 대학교/라스 베가스 캠퍼스의 공과대학에 그의 이름이 붙어 Howard R. Hughes College of Engineering라는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http://www.unlv.edu/engineering
이 사람이 세운 하워드 휴즈 메디컬 인스티튜트(HHMI)는 미국 최대의 민간 생명공학 연구지원재단이 되었다. 이곳은 최고의 과학자들에게 연구 분야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젊은 날에는 진취적인 모습을 보이며 하고 싶은 것 다해봤지만, 그에 대한 반동으로 육체와 정신적으로 심각하게 피폐해져 중년에서 노년까지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보이며 진정한 방구석 폐인의 모습을 보였다. 다만 노년에 그가 겪던 고통이 워낙 대중에 알려진게 없고, 도리어 시대를 앞서나간 의도치 않은 신비주의때문에 이미 살아 생전부터 지나치게 미화되었다.
휴즈의 측근들조차 노년에 알음알음 나오던 불쏘시개급 휴즈 관련 서적들을 소송걸거나 합의를 통해 출판을 막는게 일이었다. 휴즈가 죽은지 고작 1년만에 그에 대한 전기 영화가 나왔을 정도. 그나마 휴즈가 살아 있을때 나온 서적들중에 가장 정확하고 봐줄만한 것이 노아 디에트릭이 쓴 회고록이다.
영화를 만들때 슴가가 크고 섹시한 여배우들을 많이 발굴했다. 특히 제인 러셀은 아예 '내가 본 가슴 중 가장 풍만한 가슴'이여서 이 여성이다!하고 영화 주연으로 발탁했다.
[1] 드릴을 파는 것보다는 임대형식으로 영업을 해서 경쟁자들보다 더 싼 가격에 드릴을 제공하고, 회수까지 할 수 있었다.[2] 이 이야기는 영화 "에비에이터"에서도 지나가는 식으로 나오는데 카메라를 수십대 빌려달라는 하워드 휴즈에게 영화사 사장이 비웃듯이 가진 돈 다 날리기 싫으면 그냥 영화 적당히 만들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며 거만하고 시니컬한 모습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 워너사 사장은 정중하게 하워드 휴즈에게 충고해준 것이고, 결국 약속한 숫자는 아니지만 상당한 숫자의 카메라를 빌려줬다.[3] 공식적으로 언급된 여배우만 해도 캐서린 헵번, 베티 데이비스, 에바 가드너, 진저 로저스, 리타 헤이워스, 진 티어니 였을 정도다. 보면 아시겠지만 다들 쟁쟁한 네임드들.[4] 후에 맥도넬 에어크래프트와 합병하여 맥도넬 더글라스가 되는 그 더글라스 사이다.[5] 더글라스 항공사에서 비행기를 구입 및 개조를 하며 납입일과 작업비는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고, 휴즈는 개조로 추가된 비용에 대해 지불을 거부하며 더글라스사와 오랜 싸움에 들어간다. 결국 빡친 더글라스사의 오너 도널드 W. 더글라스는 "기체 가격은 니 맘대로 지불하시고 앞으로 우리한테 항공기 발주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오"라고 질러버렸고, 하워드 휴즈는 룰루랄라하며 더글라스에 개조비용을 뺀 순수 항공기값만 지불하는것에 더불어 후일 TWA의 오너가 되었을 때 TWA에서 보유한 맥도널 더글라스 기체를 죄다 팔아제끼고 보잉의 항공기를 구매하는 것으로 엿을 먹였다. 여담이지만, 맥도널 더글라스사는 훗날 보잉에 합병당하고 만다.[6] 후일의 휴즈 항공기 회사이다.[7] 한국에서 쓰이는 글래머러스, 글래머는 콩글리시다. 항목참고. 콩클리시 의미의 글래머도 좋아하긴 했다. 가슴 사이즈가 100이나 되는 15세 소녀와 섹스를 한 일로 그녀의 어머니에게 소송을 당해 배상금을 지불한 적도 있다.[8] 영화 "애비에이터"에서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증거는 없다. 다만 어머니가 그 당시 사람들치곤 청결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9] 젊은 시절엔 191cm였다. 나이가 들어서 키가 많이 줄어든 편이다.[10] 1976년 당시에 1억 5천 6백만불이나 되는 큰 금액이었다.[11] 여담이지만 그 친척들도 다 잘 사는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하워드 휴즈의 아버지도 그 당시에 아들들을 다 명문 대학에 보내줄 수 있을만큼 잘 사는 집안 출신이고, 사망할때 그의 형제, 즉 하워드 휴즈의 삼촌들에게도 상당한 양의 유산이 돌아가서 다 잘 살고 있었다.[12] 국내에도 2015년 중순경에 정식발매된 엘론 머스크의 공식전기에도 이 이야기가 나오는데, 토니가 직접 엘론을 찾아가 공장등을 둘러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의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온몸을 불사르고, 한순간도 낭비하지 않는 인물'이란 느낌을 엘론에게서 받았고 이게 토니 스타크란 캐릭터와 잘 맞는거 같다는 언급을 한다. 이때문인지 로다주의 요청을 받고 엘론이 아이언맨2에 까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13] 실제로는 H-1레이서 보다는 동시기에 만들어진 영국제 전투기 Gloster F.5/34가 더 비슷했다. 상세는 제로센 항목 참고.[14] '''지옥의 천사들''' 촬영에 쓸 거라고 한다. 그래서 이 세계의 지옥의 천사들은 200만 달러짜리 영화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