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카
- 광란가족일기의 파괴신은 해당 항목 참조.
- 록맨 시리즈의 등장인물은 엔카(록맨 클래식 시리즈) 항목 참조.
- 중고차 판매 사이트는 엔카닷컴 문서 참고.
일본의 국민 엔카곡 '恋の季節' (1968년작)
演歌, 艶歌
1. 개요
일본의 대중가요 장르 중 하나로 서양에서 전래한 폭스트롯과 일본 민요가 합쳐져 만들어진 장르. 문화/사회적으로 한국의 트로트 같은 위치에 해당하는 통속적이고 구슬픈 노래.# 그래서인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엔카를 한국어로 로컬라이징 할 때 항상 트로트로 바꾸어서 나온다. 주로 바다, 술, 눈물, 여자, 비, 북쪽 지방, 눈, 이별 등의 소재를 중심으로 남녀간 슬픈 사랑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곡으로는 미소라 히바리의 <悲しい酒(슬픈 술)>, 요시 이쿠조의 < 酒よ(술이여)>, 호소카와 타카시의 <北酒場(북쪽술집)> 등.
2. 역사
원래는 자유민권운동을 선전하기 위한 민권가요가 기반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민중가요와도 비슷한 위치였던 것. 1888년 히사다 오니이시(久田鬼石)가 엔카 장사단(엔카 소오시당 演歌壮士団)을 결성할 무렵부터 노래로 인한 연설이라는 뜻으로 연가라는 말이 생겼으며 장사가(소오시카 壮士歌)라고도 불렀다. 여기서 장사란 길거리나 소극장에서 신정부(삿쵸 정부)를 향해 불만을 토로하던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말로서 이들은 반정부적인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건 '다이너마이트 부시(ダイナマイト節)'란 노래였는데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선동적이고 과격한 가사가 주 내용이다. "민권론자의 눈물이 비처럼 흘러 단련해 낸 야마토 담력 / 국리민복 증진하고 민력을 보양하세 / 여의치 않다면 다이너마이트로 쾅!"
다이너마이트 부시. 심지어 "4천만 동포를 위해서라면 붉은 수의도 괴롭지 않네"같은 가사를 볼 수 있다.
일본이 최초로 포르투갈의 영사재판권을 포기하게 만든게 1892년인 만큼 '치외법권 철거를 꿈 꾸는 것도 기쁜 포르투갈'이라는 가사에서 이 노래가 1892년 이후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후 국회 개설이나 청일전쟁을 풍자한 가사가 히트했고, 공창제 폐지를 풍자한 스트라이크 부시(ストライキ節)도 크게 유행했다. 당시 엔카사(演歌師)들은 거리에서 가사집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1902년 엔카장사단이 해체되고 소에다 아젠보오(添田唖蝉坊)[1] 가 스타로 떠오르면서 그의 랏파 부시(ラッパ節)가 1905년부터 크게 유행했다. 랏파 부시가 대 히트를 치자 평소 교류하던 사카이 토시히코[2] 의 의뢰를 받아 랏파부시를 개조하고 일본사회당(1945년) 당가(堂歌)인 '사회당 랏파부시'로 썻다. 사회당 랏파부시는 이후 일본 사회주의 운동 대표곡으로 쓰인다.
랏파부시
이후 엔카에서 사회비판 주제는 많이 사라지고 사회보다는 개인의 애환, 삶의 애환을 다룬 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강경파들은 새로운 엔카에 대해 거세게 반발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변화하는걸 막지 못했다. 소에다 아젠보오를 비롯한 인물들은 여전히 거리에서 노래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레코드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유입되면서 많은 엔카사들은 레코드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1920년대 코가 마사오(古賀政男)[3] 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 '그림자를 사모하여(影を慕いて)' 등으로 시대를 선도한다. 당시 그의 노래는 특유의 멜로디 라인 덕분에 코가(古賀) 멜로디라고도 불렀다. 코가 마사오가 조선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한국민요를 많이 즐겨들었는데 작곡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엔카에다가 한국민요의 특징적인 요소를 결합하는 시도를 했고, 이러한 시도가 히트를 치면서 이 시기를 즈음하여 엔카가 한국 민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이렇게 변형된 엔카가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넘어가 알려지기도 했다.
녹음 기술이 발전하면서 오케스트라 반주도 도입되고, 193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재즈가 아직 금지곡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즈 스타일 반주를 넣기도 하였다. 1940년대는 적성국가였던 영미권 음악은 금지되었지만 남미의 라틴 음악이나 독일 행진곡 음악의 영향이 강해져서 전시 선전음악용으로 만든 엔카에 다양한 퍼커션 반주가 혼합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엔카는 이어졌다. 1950년대 엔카계 최고 국민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등장하여 엔카는 명실상부한 일본 국민 음악으로 자리잡고, 1960년대가 되어 최고 전성기를 누린다. 이 당시 일본 대중음악=엔카일 정도로 엔카는 확고부동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부터 요시다 타쿠로, 나가부치 츠요시, 차게 앤 아스카를 위시한 포크록과 야마시타 타츠로, 마츠토야 유미, 오다 카즈마사로 대표하는 뉴뮤직이 등장함으로서 엔카는 점차 일본음악의 주류에서 밀려났다. 가요곡이 등장하며 엔카는 기성세대들의 음악이 되었고 80년대 이후로는 주로 4,50대 이상 중장년층 인구들 위주로 즐기게 되었다.
3. 특징
4, 7음을 뺀 5음계(도레미솔라) 펜타토닉스케일을 사용한다.[4] 일본에서는 이걸 요나누키 음계라고 부르는데[5] 위에서 언급한 코가 마사오가 등장한 이후 이러한 방식으로 만든 멜로디 라인이 유행하면서 자리잡았다.
이와 함께 초기 클래식 정통파이자 도쿄 예술대학 출신 후지야마 이치로의 성악 기술을 해석한 클론 창법이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일본음악의 기교 표현을 강화한 뒤 1960년대에 거장 미소라 히바리가 등장하여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한 음계에서 각각의 가수들이 부르게 된 것이다.
4. 유명한 엔카 가수
아래 목록은 엄밀하게 엔카 가수를 따졌다기 보단 일본에서 이름 있는 기성 가수들을 모아놓았다고 봐야 한다. 키타지마 사부로 같이 확실히 '엔카 가수'라고 말할 수 있는 이도 있지만 단순히 엔카 스타일 노래(메이게츠 아카기야마, 名月赤城山)는 물론 일제 군가(애국행진곡, 愛国行進曲)나 선전가요(보리와 병대, 麦と兵隊)와 양악 스타일 악곡(비와호 애가, 琵琶湖哀歌)으로도 유명한 쇼지 타로는 일반적으로 '유행가 가수'로 분류한다.
- 계은숙
- 김연자
- 모리 신이치 森進一 1947.11.18~ 2010년 港町ブルース
- 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1937.05.29~1989.06.24[6] 1988년 人生一路
- 미야코 하루미 都はるみ 1948.02.22~ 2010년 好きになった人
- 사카모토 후유미 1967~ 1994년 夜桜お七
- 시마쿠라 치요코 島倉千代子 1938.03.30.~2013.11.08 1987년 人生いろいろ
- 세가와 에이코 瀬川瑛子 1948.07.06~ 2010년 命くれない
- 쇼지 타로 東海林太郎 1898.12.21~1972.10.04 1970년 麦と兵隊
- 스이젠지 키요코 水前寺清子 1945~ 1996년 三百六十五日のマーチ
- 아와야 노리코 淡谷のり子 1907.08.21~1999.09.22
- 야시로 아키 八代亜紀 1950.08.29~ 2010년 舟歌
- 요시 이쿠조 吉幾三 1952.11.11~ 1995년 雪国
- 이시카와 사유리 石川さゆり 1958.01.30~ 1977년 津軽海峡・冬景色
- 이츠키 히로시 五木ひろし 1948.03.14~[7] 2011년 街
- 코바야시 사치코 小林幸子 1953.12.05~ 2011년 思い出酒
- 키타지마 사부로 北島三郎 1936.10.04~ 2011년 おとこの潮路
- 텐도 요시미 天童よしみ 1957.09.26~ 2010년 道頓堀人情
- 호소카와 타카시 細川たかし 1950.06.15~ 2010년 浪花節だよ人生は
- 아오에 미나 青江三奈 1941~2000 1968년 伊勢佐木町ブルース
- 토바 이치로 鳥羽一郎 1952.04.25~ 1982년 兄弟船
- 히카와 키요시 氷川きよし 1977.09.06~ 2002년 きよしのズンドコ節 [8]
5. 그 외
중화권에서도 마찬가지로 같은 음계를 사용하기 때문에 유튜브에서 酒廊情歌,经典老歌, 台語歌曲[9] 라고 검색해 보면 비슷한 느낌이 나는 수 많은 노래를 들을 수 있다. 2018년 전 중국에서 유행했던 夜之光,2019년 유행했던 大田后生仔 역시 마찬가지다.
중국가수 花姐의 夜之光
林启得의 大田后生仔. 5음계를 채용한 통기타 곡이다.
대만 가수 尤雅의 往事只能回味. 오 그대여 춤추자의 원곡으로, 사실상 엔카나 다름없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고풍(古風) 가요들은 동양의 전통음계인 5음계와 서정적인 스타일이 결합한 장르로 한국으로 치면 발라드 트로트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중국인들은 EDM과 결합했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대표적인 EDM화 곡으로는 音阙诗听의 24절기 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보다 엔카 느낌이 비교적 강하다.
대만의 경우 우리와 같이 일제 강점기를 겪은 탓인지, 대만의 台語歌曲은 엔카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의 트로트와도 흡사한 부분이 많다.
중국에서는 5음계와 2박자 계열로 이루어진 엔카와 트로트같은 느낌을 주는 노래를 지금도 많이 작곡한다.
다음에 나오는 DJ처리한 찔레꽃을 들어보자
찔레꽃을 들은 후 다음을 들어보자. DJ처리한 중국가요들이다. 느낌이 비슷하다는 것을 한번에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엔카, 중국가요, 트로트의 뿌리가 같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중국 소호 사이트에서 진정한 중국의 고풍가요는 일본의 엔카와 같아진다고 평가한 바 있다.(正的古风歌其实与日本演歌有异曲同工之妙) 이는 중국 고풍가요와 일본 엔카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1] 초기에는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엔카를 많이 작곡했지만 시간이 갈 수록 비정치적인 엔카를 작곡했다.[2] 일본 초기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와 함께 일본 최초로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공역했다.[3]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지만 7살에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로 조선으로 건너가서 지내다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와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이전까지 학창시절을 조선에서 보냈다. 이 당시 조선에서 살면서 민요를 많이 접했는데 나중에 한국 민요 특징 중 하나인 계면조 음계나 8분의 6박자로 대표하는 장단 등에서 영향을 받아 엔카에 접목시켰다. 관련 문서1 관련 문서2. 나중에 한일수교가 이루어진 이후로는 모교인 선린상고를 수시로 방문해서 시계탑도 기증했는데 이 시계탑이 지금까지 남아있다.[4] 7음계(흔히 아는 도레미파솔라시)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옛부터 한중일 포함 세계 여러 나라에서 폭넒은 형식으로 사용하던 음계이다. 민요나 전통음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분명 서양음악인데 동양음악과 매우 비슷한 멜로디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5] 원래 동양 음악에서 쓰던 음계는 서양 음악에서 쓰던 음계와 미세한 차이가 있었는데, 일본이 서양과 교류하기 시작한 이후로 자기네 나라에서 쓰던 음계와 가장 가까운 서양식 음을 받아들여 정립한 음계이다. 비슷하게 미야코부시 음계도 마찬가지다.[6] 일본의 한 세기를 그은 전설적인 가수이며, 일본에서의 위상은 우리나라의 이미자보다도 높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계라는 설이 많지만 실제로 근거가 있는 설인지는 불명.[7] 일본 엔카 가수들 중에서 가라오케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가수. 미소라 히바리와는 달리 이쪽은 확실한 한국계 가수다. 한국명은 이교부.[8] 1999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당시 동년배 가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엔카 장르를 개척하며 데뷔. 데뷔초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엔카계의 프린스, 엔카계의 아이돌로 기존의 중장년 엔카 팬층은 물론이고 젊은 층에게도 엔카의 매력을 어필하면서 엔카계의 계보를 잇는 젊은 신성으로 입지를 구축했다. 현재는 일본의 엔카 계보를 이어나갈 중견급 가수로서 동세대 중에서도 범접하기 힘든 지위를 누리고 있다.[9] 대만에서 엔카와 같은 곡을 일컫는 말이다. [10] 관련문서: https://www.sohu.com/a/280789986_100022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