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1945년)

 


※ 아래 정보는 해산 당시를 기준으로 함
[image]
'''日本社会党 | 일본사회당'''
(にっぽんしゃかいとう)
<colcolor=#173283><colbgcolor=#f5f5f5> '''영문 명칭'''
Japan Socialist Party: '''JSP'''
'''약칭'''
社会党(사회당), 社会(사회)
'''한글 명칭'''
일본사회당
'''창당일'''
1945년 11월 2일
'''당명 변경'''
1996년 1월 19일 (사회민주당)
'''전신'''
사회대중당
'''이념'''
사회주의, 비무장주의, 평화주의,
민주 리버럴(무라야마 내각 이후)
'''스펙트럼'''
좌익 빅텐트[1]
'''주소'''
도쿄도 치요다구 나가타초1초메 8-1
(東京都千代田区永田町1丁目8番1号)
'''중앙집행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富市)
'''중앙집행부위원장'''
오카자키 도미코 (岡崎トミ子)
'''집행부서기장'''
구보 와타루 (久保亘)
'''참의원'''
39석 / 252석 (15.5%)
'''중의원'''
63석 / 511석 (12.3%)
'''국제 조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기관지'''
사회신보
1. 개요
2. 역사 및 성향
3. 지지기반
4. 역사
4.1. 초기
4.2. 가타야마 데쓰 내각 ~ 분열
4.3. 재통합, 그리고 극좌화.
4.5. 몰락
5. 당명변경 이후 사회민주당
6. 역대 선거결과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
6.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clearfix]

1. 개요


1945년 창당해 1996년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일본사회주의 정당.

2. 역사 및 성향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비공산당 계열이던 합법 사회주의 세력이 단결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좌파의 노동농민당, 중도파의 일본노동당, 우파의 사회대중당 등이 결집하였으며, 우파와 중간파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는 수정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일부였던 사회대중당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사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그럼에도 대체적으로 미국에 비판적이었으며 신생국인 중공(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이는 1945년의 사회당 결성 때에는 우파계열의 사회대중당 의원 출신이 수가 많았지만, 이후 우파사회당과 좌파사회당으로 나눠서 선거를 여러번 치루며 우파사회당의 당세가 쪼그라들고 좌파사회당의 당세가 증가하며 재통합할 때에는 좌파계열의 강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회당의 지도자였던 아사누마 이네지로 의원은 중공을 방문하여 미국은 일본, 중공의 공동의 적이라고 하기도 하였으니...
일본의 원내정당에서는 가장 친북성향이 강했다. 1970년 대에 대거 방북단을 보낸 것을 계기로 조선로동당의 유일한 해외우당을 자처했다. 오죽하면 이런 에피소드도 있는데, 1978년에 김일성이 사회당 방북단 접견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조선로동당 간부들이 김일성이 말할 때마다 기립하며 아부를 했는데, 이를 본 사회당 의원들도 똑같이 김일성의 말이 끝날 때마다 기립하며 예를 표했다고. 이런 성향 때문에 반북성향의 좌파정당이었던 일본 공산당에게 많이 비판받았다. 또, 일본 공산당은 사회당이 신좌익등의 '폭력집단'을 '동맹군'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하는 등으로도 비판했다. 다만 실제 선거연합에 있어서는 사회당이 유연한 편이었다. 이는 민사당이 사회당과 종종 연합을 했기 때문이었다.

전쟁 이전에도 창당 당시에 당명을 ‘일본사회당’으로 할지 ‘사회민주당’으로 할지 논의하다가 '''일본어 명칭은 일본사회당'''으로, '''영문 명칭은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SDPJ,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Japan Socialist Party(JSP)라는 영문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져 사회민주주의가 당의 노선이 되면서 SDPJ의 영문 명칭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3. 지지기반


  • 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정당답게 초기에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여(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은 자민당의 압도적인 우위였다. 물론 중소도시나 시골이라도 노조나 농민단체 가입률이 높은 일부 지역은 사회당의 지지세가 높았기는 했지만 홋카이도 지역을 뺀 나머지 지역에서 가입률이 높은곳이 그리 많지 않았다.) 선거구당 후보를 여러명씩 내보냈으나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 신자유클럽 등이 사회당의 지지기반을 잠식했고, 이 때문에 대도시 지역에서 우위를 상실하면서 한두 명씩 정도나 후보를 보내서 당선시키는 수준이 되었고 오히려 농어촌에서의 세력 보존이 잘 된 편이었다.[2]
  • 그 이외에는 홋카이도에서 상당히 강세였으며 타 지역에서 공명당, 공산당, 민사당으로 표가 상당수 빼앗기는 와중에도 홋카이도에서만큼은 세력 보존이 잘 되었다.

4. 역사



4.1. 초기


도쿠가와 요시치카 후작 등의 명망가를 추대하려는 의도로 당초의 위원장은 공석으로 되어, 초대 서기장으로는 가타야마 데쓰가 취임했지만, 요시치카는 미군정으로부터 공직추방을 당해, 곧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4.2. 가타야마 데쓰 내각 ~ 분열


일본국 헌법에 의해 치러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데쓰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히라노 리키조 농림성 장관이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고, 당내의 좌파는 공공연하게 내각을 비판하는 등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48년에 가타야마 내각이 당내의 파벌 대립의 선동으로 와해되었다. 니시오 스에히로 내각관방 장관은 좌파의 입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좌파는 사실상 당내의 야당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결국 1949년 제4회 당대회에서 일명 모리토 · 이나무라 논쟁[3]으로 당 노선에 대한 격렬한 토론 끝에 사회당 좌파가 주도를 잡는 것으로 결론났다.

4.3. 재통합, 그리고 극좌화.


이렇게 좌우로 분열하는 문제를 저지르고 자민당으로의 합당이 이루어질 즘(1955년, 55년 체제)에야 다시 심기일전하여 뭉쳤다. 1956년 참의원 선거에서 49석을 확보, 사실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며 전국구 의석수에서 자민당을 앞지르는 위엄을 보였다. 하지만 1958년 총선에서 8석을 늘리는데 그치고 1959년 지방선거에서도 의석을 늘리기는 했지만 예상에 미달한데다가 참의원 선거에서 당시에 도쿄에서 표 분열로 한명도 당선시키지 못하며 38석에 그치면서 계파갈등이 격화, 니시오 스에히로를 비롯한 일부 우파 성향 계파가 민사당(민주사회당)으로 탈당하여[4] 점점 의석을 깎아먹는 계기가 되었다.
안보투쟁 국면에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도쿄 찌르기 사건으로 아사누마 이네지로 위원장(대표격)이 죽은 동정표도 얻지 못했다. 그나마 탈당파들이 결성한 민주사회당으로부터 의석을 다시 되찾아 오면서 전체의석수는 122석에서 145석으로 늘리기는 했지만 1958년 총선에서 얻은 의석이 166석을 감안하면 선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당 자민당이케다 하야토 총리가 아사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 때문에 역관광되었다. 이케다 총리는 소득배증계획을 제시하며 선거 의제를 자민당에 불리한 안보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교묘히 바꾸었고, 안보 문제를 중심 의제로 선거를 치루려고 했던 일본사회당도 결국 경제 정책을 주요 공약으로 내놓게 되었다. 이 때 이후 사회당은 '만년야당'으로 전락했다.
이후 1960년대 후반, 사회당은 친중[5]친소[6]의 불편한 동거로 인한 당내 갈등이 격화되어 유권자에게 실망감을 주었고[7] 이는 1968년 참의원 선거와 1969년 중의원 선거에도 영향을 미쳐 자민당의 득표율 감소에도 텃밭인 대도시 지역에서 타 야당(공명당, 일본 공산당)에게 표를 빼앗기며 참패하였고 이후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 치하에서 세력이 회복되었을때도 이때 빼았긴 지지기반은 끝내 회복되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이 때 사회당의 내부논쟁이라는 것이 중도파의 지지를 잃기 쉬운 소재였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지지해야 하는가 지지하지 않아야 하는가 등이었고[8],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을 지지해야 하는가 지지하지 않아야 하는가(...) 등의 논쟁도 있었다 . 나리타 공항 투쟁에서는 경찰과 시위 측 합쳐 12명이나 죽은 쟁의에 참가해서 신좌파계열의 극좌학생들을 독려하는 등 점차 극좌색채가 강해지며 중도층의 지지를 잃어가는게 이 시기의 사회당이었다. 오히려 일본공산당이 사회당을 폭력집단과 손을 잡았다며 비난하는 광경이 펼쳐지기도. 도이 다카코 위원장 시대가 와서야 공명당과 공산당으로 흩어진 해당 지지기반을 회복하는데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마저도 오래가지못하고 1992년 참의원 선거와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신당붐으로 잇따라 날린다.
잠시 1960년 후반 ~ 1970년대 후반의 야권 연대(사회당-공산당)로 도쿄교토, 나고야 등 상당수 지역에서 지자체장을 차지했고, 1970년대 초반에 자민당 득표율의 감소가 의석수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중,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9] 그러나 이러한 세력회복에다다가 1974년 참의원 선거와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잇따라 과반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사회당을 포함한 야당이 자민당과 비등한 의석을 확보하여 어느정도 힘을 쓸수있는 정도의 선전을 거두웠음에도 1960년대 중반부터 진행된 야당의 다당화로 사회당은 여전히 정권확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자민당에서 떨어져나간 표는 공명당, 민사당, 신자유클럽으로 향했고, 더 선명성있는 야당을 원하는 유권자들은 공산당을 지지했는데 사회당은 이 둘의 중간에 위치한 어쩡쩡한 상태에 놓여있었고 그렇다고 중의원 선거에서 후보자 수를 크게 늘린것도 아니었던지라 정권을 확보하지 못하는 불임야당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져서 부동층들의 표를 확보하지 못한것이었다. 또한 정권교체를 목표로 한다해도 민사당, 공산당과의 관계가 크게 문제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사회당을 포함한 야당이 의석을 늘리고 자민당의 득표율이 낮아져도 정권탈환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들 야당과 어쩡쩡하게 관계를 유지해야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는데 공명, 민사당과 연합을 하면 그나마 정권교체에 근접하는 의석과 득표율을 얻을 수 있었지만 민사당이 반공노선을 내세우며 자민당과의 연합을 할지말지를 놓고 간을 보는데에다가, 공산당은 천황제 부정에다가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중도파 유권자가 떨어져나갈 위험이 있었으니 어떤쪽을 택하든간에 정권 확보를 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사회당이 이들 야당을 힘으로 누를수도 없던것이 소선거구제를 체택할 경우 이들 야당들을 거진 쩌리로 만들어버릴수야 있겠지만 그 대신 그나마 가지고있던 농어촌 지역 의석은 그대로 자민당에게 헌납하기 때문에 자민당 의석수만 늘여주는 꼴이 되기에 사회당에게 별다른 메리트가 없었다. 후의 일본 민주당이 소선거구제의 장점을 잘 활용하여 공산당 후보자들의 표를 흡수하는데 성공해서 2000년대 당시에 자민당이 삽질할때마다 표를 잘 챙겨먹어서 의석수를 크게 늘린것과 대비된다.
결국 1976년 중의원 선거 이후로 에다 사부로를 비롯한 일부 세력들이 사회시민연합이라는 정당을 따로 만들며 세력이 누수되었고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27석에 그치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이후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지방권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6개월 후에 치뤄졌던 중의원 선거에서도 자민당의 부진(248석)에도 불구하고 또 의석을 까먹었다(119석에서 107석으로[10]). 하지만 자민당의 내분이 장기화되자, 상황은 역전되었고, 이 와중에 의회해산안이 통과되어 중참의원 동시선거가 펼쳐지자 드디어 정권교체를 이룰 기회를 잡았다.[11][12]
하지만 선거운동기간 도중 민사당이 사회당을 비방하는 일이 터지면서 생각보다 버프를 못 탄데다가 무엇보다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중의원 의석수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참의원 의석수는 최저수준을 기록했다. 그 이후에 별 다른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며 선거마다 족족 져버리는 모습을 보였고[13], 1986년 중, 참의원 동시선거에서 사회당의 지지율이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의회해산을 막을려고 했지만 의회해산이 강행되면서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통합 이후 최악의 참패를 당했다.
최악의 참패를 당한 사회당은 여성인 도이 다카코를 사회당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그 결과 80년대 일본 버블경제로 요약되는 호경기였을 때였음에 불구하고 선거때 마다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리쿠르트 사건우노 소스케 총리의 불륜문제로 자민당에 대한 지지여론이 악화되며 드디어 자민당을 제치고 '''개선 1당'''이 되는데 성공한다.[14]
그러나 다음 해 중의원 총선거에서 연립 정부구성에 참여하기로 한 타 야당(공명당, 민사당)이 지리멸렬한데다가[15] 후보자수를 1986년 총선거보다 5명 더(1986년 144명->1990년 149명) 내는데 그쳤고 결국 야당 전체의 의석을 크게 늘리는데에 실패해 정권교체엔 실패했다.[16]
그리고 1991년 걸프전이 터지자 사회당은 걸프전을 협상을 통해 종결하자는 비현실적인 논평을 발표했고 이는 도이 위원장의 지도력에 의심을 가게 만들었다. 결국 사회당은 그 해 통일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 도이 다카코는 사회당 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사회당 우파가 권력을 잡았다.
당초에는 사회당이 제1당이 되지못하더라도 어느정도 의석수를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이 되었지만, 하지만 1992년 참의원 선거전에서 PKO(유엔평화유지활동) 법안이 쟁점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PKO법을 민사당과 공명당이 찬성하면서 야당의 공동 전선이 흐려졌고, 결국 PKO법안 시행에 대해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당내도 분열되었다. 독자후보를 내세우는 측과 그래도 공명-민사당과 같이 가야한다는 측이 나눠진 것. 그 결과,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는(사과와 규빈사건까지 겹쳐 자민당의 지지율이 최악이었을 때임에도) 투표율이 50.7%에 그쳐 반사이익을 얻지못하고 22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다음해엔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을 대신할 비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되려 쇄신이미지를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이 가져가면서[17] 기성 정당적인 이미지가 씌여지며 1986년 총선거보다도 의석 수가 적은 70석에 그쳐 참패했다.

4.4.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


1993년 중의원 선거 참패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가 되어 호소카와 모리히로 내각의 여당내 1당이 되었으나[18] 여당내 갈등으로 1994년 4월에 연정을 깨고 그 해 6월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가 되는 조건으로 자민당, 신당 사키가케와 새롭게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무려 46년만에 야심차게 출범한 사회당 정권이지만 무라야마 내각은 연이은 사건 사고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수차례 삐끄덕 거렸고, 실망한 국민들이 등을 돌린 상황에서 힘겹게 내각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다. 결국 한계에 부딪힌 무리야마 도미이치가 1996년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뒤,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그래도 아예 공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1년 2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 무라야마 담화 발표, 피폭자 구제법 성립, 미나마타 병 미확인 환자에 대한 전면 구제 등 나름 사회당 내각다운 모습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민당에서 워낙 많은 내각 각료를 가져간 탓에 무라야마 총리가 뜻을 펼 수 있는 한계는 뚜렷했다.

4.5. 몰락


이렇게 짧은 여당시기를 거치면서 자민당이 부진했던 기회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사회당이 정체성을 잃고 자멸해버렸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센고쿠 요시토, 아카마츠 히로타카, 오하타 아키히로, 이노우에 잇세이, 하치로 요시오 등 사회당 우파가 민주당으로 건너가고, 오카자키 히로미 등 좌파가 신사회당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설상가상 지지기반마저 민주당으로 떨어저 나가 계속 의석수가 반토막나고, 결국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만다.

5. 당명변경 이후 사회민주당


이후의 역사는 사회민주당(일본) 참고.
  • 사회민주당으로의 당명변경 이후 지금의 일본 사회민주당 이외에 무라야마 내각의 온건화를 반대하던 강경파들이 떨어져 나가 스스로 살림 차린 신사회당이 있다. 국회 원내로는 진출하지 못하고 기초자치단체 의석만 전국구적으로 엄청 많이 갖고 있다. 이전에 한국의 민주노동당과의 간담회도 있었고 통합진보당을 응원했고 박근혜 정부에게 진보세력에 대한 탄압을 중지하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방북한 적도 있다.
  • 이외에 2000년에 사회당의 전 국회의원이었던 우에다 테츠(上田哲)에 의해 창당된 사회당이라는 정당이 또 있었으나 여기는 2000년에 치뤄진 제42회 중의원 선거에 한 번 나오고 국회 입성에 실패한 뒤 2008년 우에다가 사망하며 현재는 와해되었다. 그래도 당시 원내정당이었던 자유연합과 보수당보다 득표율이 높았다.
  • 박상희 기자 - 일본 사회당의 몰락은 무엇을 말하는가 #

6. 역대 선거결과


※ 제1당을 차지한 선거는 총 의석이 '''볼드체'''로 되어 있다.

6.1. 중의원 의원 총선거


※ 의석 증감은 직전회차 선거 의석 수와의 비교임.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증감]'''
'''정당투표'''
'''득표수'''
'''득표율'''
1946(22회)
331
93 [{{{#red,#ff0000 ▲78}}}]
9,924,930
17.90%
1947(23회)
289
'''143''' [{{{#red,#ff0000 ▲50}}}]
7,176,882
26.23%
1949(24회)
187
48 [{{{#blue,#0000ff ▼95}}}]
4,129,794
13.50%
좌우분열
1952(25회)

96
54
4,129,794
9.62%

109
57
3,398,597
11.63%
1953(26회)

108
72 [{{{#red,#ff0000 ▲18}}}]
4,516,715
13.05%

117
66 [{{{#red,#ff0000 ▲9}}}]
4,677,833
13.52%
1955(27회)

121
'''89''' [{{{#red,#ff0000 ▲17}}}]
5,683,312
15.35%

122
'''67''' [{{{#red,#ff0000 ▲1}}}]
5,129,594
13.86%
재통합
1958(28회)
246
'''166'''[19] [{{{#red,#ff0000 ▲10}}}]
13,093,993
32.94%
1960(29회)
186
145 [{{{#blue,#0000ff ▼21}}}]
10,887,134
27.56%
1963(30회)
198
144 [{{{#blue,#0000ff ▼1}}}]
11,906,766
29.03%
1967(31회)
209
140 [{{{#blue,#0000ff ▼4}}}]
12,826,103
27.88%
1969(32회)
183
90[20] [{{{#blue,#0000ff ▼50}}}]
10,074,100
21.44%
1972(33회)
161
118 [{{{#red,#ff0000 ▲28}}}]
11,478,742
21.90%
1976(34회)
162
123 [{{{#red,#ff0000 ▲5}}}]
11,713,008
20.69%
1979(35회)
157
107 [{{{#blue,#0000ff ▼16}}}]
10,643,450
19.71%
1980(36회)
149
107 [-]
11,400,747
19.31%
1983(37회)
144
112 [{{{#red,#ff0000 ▲5}}}]
11,065,082
19.49%
1986(38회)
138
85 [{{{#blue,#0000ff ▼27}}}]
10,412,584
17.23%
1990(39회)
149
'''136''' [{{{#red,#ff0000 ▲51}}}]
16,025,472
24.39%
1993(40회)
142
70 [{{{#blue,#0000ff ▼66}}}]
9,687,588
15.43%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6.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연도(회차)'''
'''후보자'''
'''당선자'''
'''비개선
의석
'''
'''총 의석 [증감]'''
'''전국구'''
'''지방구'''
'''전국구'''
'''합계'''
'''지방구'''
'''전국구'''
'''합계'''
'''득표수'''
'''득표율'''
1947(1회)
?
?
101
30
17
47
-
'''47''' [-]
3,479,814
16.36%
2회
1950년
36/25
'''61'''(제2당)
250
'''25.2%'''/'''17.3%'''
3회
1953년
좌파 사회당 10/16
26
250
10.5%/6.4%
우파 사회당 18/22
40
14.0%/14.3%
총 28/38
66
24.5%/'''20.7%'''
4회
1956년
'''49'''/31
'''80'''
250
37.58%(제2당)/'''40.38%'''(전국구 제1당)
5회
1959년
38/47
'''85'''
250
6회
1962년
37/28
65
250
7회
1965년
36/39
75
250
8회
1968년
''28''/36
64
250
9회
1971년
'''39'''/27
66
252
10회
1974년
28/34
62
252
11회
1977년
27/29
56
252
12회
1980년
25/27
52
252
13회
1983년
''22''/25
47
252
14회
1986년
''20''/21
41
252
15회
1989년
'''46'''/22
'''68'''[21]
252
16회
1992년
''22''/49
'''71'''
252
17회
1995년
''17/21''
38
247
일본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1] 중도좌파 ~ 극좌까지 다양했다. 극좌 계열로는 당의 청년조직인 혁명적노동자협회(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의 주류파)가 있다.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실현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노선을 따랐다.[2] 다만 농어촌 지역이 포함된 선거구의 경우에는 자민당 2명 vs 사회당 1명, 자민당 3명 vs 사회당 1명 정도의 구도를 띄는 경우가 많았고, 심하면 자민당 4명에 사회당 1명 당선구도를 띄는 경우도 있었다. 그 정도가 가장 심했던 지역은 이시카와 2구였다.[3] 사회당 좌파였던 모리토 타츠오와 사회당 우파였던 이나무라 쥰조를 따왔다.[4] 이 과정에서 CIA의 개입이 있었다.[5] 길게 사회당의 톱을 차지했던 나리타 도모미 위원장 등[6] 사회주의협회 등[7] 이 때 사회당 우파를 대표한 정치인이었던 에다 사부로가 무당파층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거기에다가 사토 에이사쿠가 그리 지지율이 높지 않았던지라 에다 사부로가 당권을 잡았다면 공명, 공산당으로의 표 이탈을 막아 정권교체를 이룩했을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지만, 안보투쟁 직후 치루어진 제29회 총선에서 에다가 사회당의 대표 주자로 나섰음에도 사회당이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면 딱히... 생각은 알아서.[8] 여담이지만 당내좌파가 이 논쟁에서 이겨먹어서 결국 지지했다(...)[9] 단, 의석 회복이 후보자 줄이기(당시엔 일본 중의원 선거제도가 중선거구제라 후보를 많이 내면 오히려 "나가리" 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았다.)로 인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의석수로 보면 분명 선전했지만 득표율은 정체되거나 되려 줄어드는 양상을 보인다.[10] 그 덕분에 자민당이 계파싸움으로 갖기 총리후보를 2명을 내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총리 선출 선거에서 3위로 밀려났다. 안습.[11] 이 때 그동안 지방선거에서 꾸준히 연대해온 일본공산당과 완전 결별하고, 반자민/비공산 야권연합 정권 창출을 내걸고 공명당, 민사당과 손을 잡는다. 이때 사회당은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우파의 세가 강해진데다가, 공산당과 민사,공명당의 사이가 원수급인지라 모두를 함께 끌고 갈수 없는 상황에서 민사당,공명당과의 연대를 선택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보수적인 일본의 여론지형상 공산당이 의석을 크게 늘린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현실적 판단도 한몫했다.[12] 이 때 사회당은 그동안 거의 포기하고 있던 정권교체에 나름 의욕을 보였으면서도, 여러 가지 제약(당내 파벌투쟁, 부족한 자금력, 다른 야당과의 관계 등)으로 후보자를 크게 늘리지는 못했다.[13] 이 시기 승리했던 유일한 중앙 선거가 1983년 중의원 선거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그나마 이 선거에서도 1980년 선거보다 5석 늘어나는데 그쳤다.[14] 이 때 일본 최초의 여성 당수 도이 타가코는 "산이 움직였다."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 때를 마돈나 열풍이라고 부른다. [15] 하필 리쿠르트 사건에 민사당 의원과 공명당 일부 간부도 연류되었다. 이 때문에 사회당이 136석으로 의석을 늘린데 반해, 공명당은 부진하고 민사당은 참패했다.[16] 본래 180명을 공천할 예정이었으나 타 야당(공명, 민사, 사민련)의 반발과 후보자를 너무 많이 내면 오히려 선거에서 부진할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후보자를 줄였다는 안타까운 후문이 있다. 그 덕택에 타 야당이나 야당계 무소속의원의 의석까지 합해도 257명에 그쳤다. 그에 반해 자민당은 보수계 무소속 후보까지 합해서 328명을 후보자로 내걸었다. 물론 정권교체 되었어도 버블 붕괴 때문에 되려 책임을 뒤집어 쓰어 영 좋지 않은 꼴로 끝났을 것이라는 전망이 있기는 하지만.[17] 이는 사회당이 중의원 의원수 감축 방안(512->511석)을 반대했던 영향이 컸다.[18] 하지만 의석이 많지 않았기에 각료배분에서 단 3자리만을 얻는 불이익을 당한다.[19] 개헌선(156석) 단독 저지[20] 국내적 요인으로는 과격화된 학생운동, 국외적 요인으로는 프라하의 봄 유혈진압으로 인해 신좌익에 염증을 느낀 지지자들이 대거 이탈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면 신좌익과 대립각을 세우던 일본 공산당은 오히려 9석에서 14석으로 늘었다.[21] 개선 제1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