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람

 




'''엘람'''
'''𒁹𒄬𒆷𒁶𒋾'''
''Haltamti''
[image]

존속기간
BC 2700년경 ~ BC 539년[1]
위치
이란
수도
수사[2]
국가원수

주요 국왕
슈트룩 나흐훈테
(BC 1184?~BC 1155?)
언어
엘람어
종교
엘람 신앙(주신: 키리리샤)
종족
엘람인
멸망 이후
아케메네스 왕조
언어별 명칭
엘람어
𒁹𒄬𒆷𒁶𒋾 (''Haltamti'')
고대 페르시아어
𐎢𐎺𐎩 (''Ūvja'')
페르시아어
عیلام‎‎ (''Ilâm'')
영어
Elam
1. 개요
2. 역사
2.1. 제1기
2.2. 제2기
2.3. 제3기
3. 문화


1. 개요


이란 남부 후제스탄 지역에 위치했던 문명으로 이란 고원에 문명이 들어서기 전인 기원전 4000년경에 먼저 인류 문명이 정착하여 생활하였다. 이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흡사하였으나 보통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포함시키기보단 별개로 설명한다. 메소포타미아가 티그리스 강유프라테스 강 사이라는 뜻이라 지명의 의미상으로도 벗어나 있고, 실제로 꽤 거리가 있기도 하다. 아리안족이 이동해 오기 이전에 엘람(약 BC 2700~BC 639)이라는 고대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 엘람 왕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작업이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발견된 유물 또한 적어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엘람 왕국의 수도는 수사로 데즈 강이 흐르며 이로 인해 토지가 비옥하고 밀과 과일이 풍부하였다. 아시리아에 의해 폐허가 된 수도 수사를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다시 수도로 재건하였다. 엘람 사람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할타미, 자신들의 땅을 할탐티(신의 땅)라고 불렀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엘람 문명은 중앙집권적 통일제국보다는 부족별로 독립적으로 살았으나 왕국에 주변국이 침입을 하는 위급한 상황에 놓이면 서로 연합하여 적을 물리쳤다. 엘람 왕은 제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혼인관계로 결속력을 강화하여 충성을 얻어냈으며 이 정책은 엘람 왕국이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사람들은 엘람 왕국의 돌과 나무, 철 등의 자원들이 필요했으므로 평화 시에는 무역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약탈도 끊임없이 발생하여 늘 긴장관계를 유지하였다.

2. 역사


현재 엘람에 관한 역사적 내용은 성서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견된 석비와 점토비 등에 의존하고 있다. 엘람 왕국에 대해 처음 언급된 문서도 수메르 왕국의 것이다. 이들의 기원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건국 설화에 따르면 이들은 메소포타미아 산악지대에서 내려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부분에서 뱀을 숭배하는 것을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와 매우 흡사하였으며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는 이란 슈쉬 인근의 초가잔빌(Chogha Zanbil)에 있는 지구라트[3] 모양의 신전도 메소포타미아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모든 것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농업을 주로 하였던 반면 엘람 왕국은 광물질과 지하자원을 수출하는 무역을 경제의 근간으로 삼았다. 엘람 왕국은 지금의 후제스탄 지역을 중심으로 북쪽과 동쪽으로 더 확장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연방제 성격을 띠었다. 연방 수도인 수사(현재 슈쉬, 구약성경의 수산궁이 있던 곳)를 중심으로 각 제후국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가졌다. 점차로 후제스탄 주, 파르스 주, 부셰르 주, 그리고 케르만 주의 일부분, 쿠르디스탄과 로레스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엘람의 역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2.1. 제1기


제1기는 고대 엘람(BC 3000~BC 1500)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왕국들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시기이다. 고대 엘람의 첫 왕조는 기원전 2700년경에 나타났고 그 왕조를 이은 것이 바로 아완(Awan) 혹은 슈스타르(Shustar)라고 하는 왕조이다. 곧 시마쉬(Simash) 왕조가 뒤를 이어 100여 년을 통치한다. 기원전 1900년경에는 불운하게도 바빌로니아함무라비와 동시대에 에파르티(Eparti)조가 등장한다. 이들은 바빌로니아와 매번 전쟁을 치렀지만 고대 시대 가장 강력한 왕 중 하나였던 함무라비에게 늘 패하고 만다. 그러나 함무라비가 죽고 난 후에 엘람은 바빌로니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을 누리게 된다. 기원전 16세기에 에파르티 왕조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약 200년간 기록이 남지 않은 암흑의 시대가 지속된다.

2.2. 제2기


제2기는 중세 엘람(BC 1350~BC 1100)으로, 엘람 제국의 황금기로 알려져 있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제압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는 안잔(Anzanite)왕조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이 왕조에서는 다섯 번째 왕인 운타쉬-갈(Untash-Gal)이 가장 유명한데 그가 바로 지금도 남아 있는 세계문화유산 초가잔빌을 세운 왕이다. 엘람은 당시 최강국이었던 아시리아와 전쟁에서 패하고 잠시의 어려움을 겪지만 곧 엘람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구축한 왕으로 평가 받는 슈트룩-나흐훈테(Shtruk-Nahhunte)가 집권하면서 다시 발전해 간다.
이 시기에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함무라비 법전이 적혀진 석비를 빼앗아 온다(이란이 빼앗아 온 함무라비 법전은 프랑스에 다시 빼앗겨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고 테헤란의 국립박물관에는 복사본이 있다.). 슈트룩-나흐훈테의 후계자들도 강력한 군대를 계속 유지하면서 잠시 동안이지만 티그리스 강에서부터 파르스 지역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한다. 그러나 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Nebuchadnezzar I)의 공격을 받고 세력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중세 엘람 시대도 종지부를 찍는다.

2.3. 제3기


제3기는 신(新)엘람(BC 900~BC 639)으로, 아시리아와 정치·군사적으로 경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로 돌입하면서 그동안 강력했던 중앙 정부의 권력이 약화되고 지방의 분권세력들이 커졌다. 또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도전이 거세졌다. 뿐만 아니라 쿠르데스탄파르스 지역으로 들어온 아리안족들도 엘람의 국경을 위협했다. 결국 기원전 639년에 있었던 아슈르바니팔 아시리아 왕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다.[4]

3. 문화


이들이 썼던 언어인 옐람어는 현대 페르시아어와는 거리가 먼 언어로 어족 자체가 달랐다. 그래도 엘람어 표기에는 일반적으로 쐐기 문자로 표기한데다가 엘람 자체가 2000년 넘게 존속된 국가인 자료가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에 해석이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페르시아어와도 셈어파 계통의 언어와도 어족 자체가 다르다 보니[5] 해석에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이 엘람어는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쓰인 것으로 보이나 이후에는 페르시아어 계통의 언어로 교체되면서 사어가 되었다.

[1] 이 기간 내내 존속한 것이 아니라 여러 왕조를 거치며 망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2] 엘람어로 슈샨(Ŝuŝan). 엘람의 별칭 수시아나는 여기서 유래했다.[3] 고대 바빌로니아 유적에서 발견된 네모반듯한 계단이 있는 피라미드 모양을 한 구조물로 신과 지상을 연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4] 이때 아슈르바니팔은 엘람의 왕을 참수하고 '''그 머리를 나무 위에다가 걸어놓고 그 앞에다가 만찬을 즐겼다.'''[5] '엘람-드라비다어족'이라는 견해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드라비다는 남인도의 그 드라비다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