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 관계
1. 개요
여몽관계란 고려(高麗)와 몽골제국(蒙古) 및 그 후계인 원나라(元)와의 관계를 말한다. 드물지만 여원관계(麗元關係)라고 불리기도 한다.
관계를 가진 기간은 대략 거란과의 전쟁에 몽골이 개입하게 되는 1218년부터 원나라가 명나라에 쫓겨 몽골초원으로 도망가는 1368년까지의 기간이다.
2. 역사
2.1. 성립
몽골족은 수백 년간 통일된 국가가 없이 부족별로 다툼을 일삼거나 주변국인 중화제국이나 거란, 여진 등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칭기즈칸의 등장으로 통일된 국가가 성립된 후 팽창을 거듭하여 북중국 및 만주를 자신들의 세력권 안에 두면서 좋든 싫든 두 나라는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공(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하면서 두 나라는 조우하게 되었다. 몽골은 거란 격퇴에 공을 구실 삼에 형제 관계를 요구하고 해마다 막대한 공물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몽골의 힘을 잘 아는 고려는 이에 응하여 일단은 평화적인 관계가 성립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이라면 당시 몽골은 세계를 제패할 만한 힘을 가진 강대국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주종관계를 맺으면 맺었지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고려와 형제 관계를 맺은 건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2.2. 파탄
고려는 막대한 공물에 부담을 느낀 데다 오랑캐에 굴복하여 친교를 맺었다는 불만이 있었는데 마침 저고여 피살 사건이 터지면서 관계는 파탄이 나고 만다. 이후 전개는 여몽전쟁 참조.
2.3. 복속
60여년 4대째 이어져온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원나라에 복속을 청하면서 전쟁은 몽골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고려는 정복당하는 치욕은 피했으나 원나라에 복속되면서 자주성과 독립성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자세한 내용은 몽골 간섭기를 참조.) 이 시기에 고려는 철령이북과 제주도를 원나라에 할양(동녕총관부,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 참조)하였고 정동행성과 다루가치가 설치되고 원나라의 일본원정에 동원 되는 등 심한 내정간섭을 받았다. 한편 고려사회에선 몽골의 영향을 받아 몽골의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이를 몽골풍이라고 한다. 그 반대인 고려양도 참조.
원 간섭기 기간동안 고려와 원의 관계 및 고려의 자주성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입장이 갈리고 있으며 논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문서 참조.
2.4. 종결
원나라가 기근과 반란으로 세가 기울더니 결국 한족반란군이 강남일대에서 일어나면서(홍건적의 난) 원나라는 중국에서 통치력을 상실하고 만다. 때마침 고려에서도 공민왕이라는 군주가 등장하여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고 친원세력이 숙청되는등 자주성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결국 홍건적의 일파였던 주원장의 명나라가 북중국마저 석권하자 위협을 느낀 원나라는 1368년 수도인 대도를 버리고 몽골초원으로 도망치고 만다. 고려도 공민왕의 개혁이 좌절되고 1392년 나라마저 망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종언을 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