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의 일본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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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원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일본 가마쿠라 막부를 침공하면서 발생한 전쟁. 1259년 여몽전쟁에서 패배하고 강화한 후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된 고려 역시 연합군으로서 동원되었으나, 몽골군의 전투 의지 부족 및 태풍 등 자연재해의 발생과 막부의 반격 등으로 상당수의 병력을 잃었으며,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2. 명칭
당시 원나라에서는 동(東)쪽을 정(征)벌한다 하여 '''정동'''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 역시 정동을 준비하기 위한 행성(行省, 파견 기구)라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1274년의 1차 원정과 1281년 2차 원정을 합쳐서 이야기하며, 대한민국에서는 원나라(몽골)의 일본 원정 혹은 고려군의 중요성과 고려의 자주성을 부각하여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르며 중국에서는 원군침일전쟁(元軍侵日戰爭), 즉 원나라의 일본 침략 전쟁이라고 부른다. 혹은 원일전쟁, 몽일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1274년의 원정을 분에이의 역(文永の役, 문영의 역), 1281년의 원정은 코안의 역(弘安の役, 홍안의 역)이라 부르며 이때 쳐들어온 여몽연합군을 원구(元寇), 몽구(蒙寇)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역사 용어에 비추어 볼 때 '원나라의 일본원정'이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이라는 단어는 선전과 침공 사실을 대칭적으로 나타내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7] . 이는 다분히 민족주의적 역사관이 작용한 것으로, 고려군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되었기는 했지만) 침략의 피해자가 아니라 거꾸로 침략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을 한국사 학습자에게 전달하기에는 심리적 장벽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만 이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나라가 자신들이 벌인 전쟁은 '원정', '정복 사업', '영토 확장'으로, 자신들이 당한 전쟁은 '침략', '침공', '○○구(寇; 도적)', '○○의 난(亂)' 등으로 적의를 담아 부른다.
영어로는 "Mongol invasions of Japan(몽골의 일본 침공)"이라고 부른다. 이 당시 고려는 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최일선 교두보였으며, 원나라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막대한 함선 등에서 전쟁의 한 축을 또한 담당했다. 또 1차 원정군과 2차 동로군은 합포(마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여몽연합군(혹은 여원연합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 (고려를 독립국으로 볼 것이냐에 관하여는 여몽 관계 참조.) 다만, 숫자와 전력상으로 보았을 때 주체는 몽골이 맞다. 1차 원정에서 몽골군은 2만 5천, 고려군은 1만 5천[9] 이었고, 2차 원정에서 강남군[10] 은 10만 명[11] , 나머지 4만의 동로군은 몽골군 1만, 고려군 1만, 고려의 수부 1만 7천[12] 이 동원되었다. 한편 1차 원정에서 900척의 전선을 만드는데 4개월 동안 고려인 3만 5천 명이 동원되었다. 사실 이는 고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달가운 전쟁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며, 농경지나 도시의 복구에 쓰여야 했을 인적, 물적 자원을 전쟁용으로 돌리게 되면서 고려 말기는 더욱 더 피폐해지게 된다.
이 전쟁에서 중요한 변수가 된 태풍은 후에 카미카제라는 말이 생긴 원인이 되었다.[13]
3. 몽고습래회사[14]
전체 그림을 보면 화살 맞고 도망가는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들의 복식이 몽골 병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선두에서 싸우는 3명의 병사들을 고려군으로 보는 설이 있다. 도망가는 병사들이 쓰고 있는 투구를 보면 투구 옆의 드림이 목의 앞부분까지 모두 감싸는 형태로 여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 몽골 갑옷의 형식이다.[15] 굳이 다른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 활을 쏘고 있는 이들이 몽골군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이 그림이 1274년 1차 원정 때의 사실을 그린 그림임을 감안하면 저 몽골군과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군대가 남중국 병사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군은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선봉에 세우곤 했는데, 이 그림에서도 저 병사들이 선봉에 서 있다. 더구나 몽골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저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당시 원정 기록을 살펴보면 몽골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고려군이 막부군의 습격을 격퇴한 사실이 여러 번 보이므로 근거가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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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국 오스프리(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에서는, 본문에서 몽골군으로 지목했던 병사들을 고려군(Korean auxiliaries, 고려 외인 부대)으로 보고, 위 그림과 같이 고려군 복색을 후방 병사들의 그것에 맞추어 삽화를 그린 적이 있다. 아무래도 억지로 끌려온 군대가 적극적으로 싸웠을 리 없다고 봐서 도망가는 군인들이 고려군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몽고습래회사를 전체적으로 보면, 전방에 있는 소수 (고려군) 병사들의 복장보다 후방의 본대 (몽골군) 병사들 복장이 더 많은 걸 충분히 알 수 있고, 본 문서에 나온 부분 외의 다른 그림 부분에도 목까지 보호하는 북방식 갑옷을 입은 (몽골군) 병사들 투성이다. 몽골군이 고려군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고려한다면, 도망가는 몽골군을 고려군으로 표현한 영국 출판사가 그림 전체를 다 보지 않고 무성의하게 제작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참고로 토탈워 시리즈 첫 작품 쇼군: 토탈 워의 확장팩인 몽골 인베이전에서도 이들은 고려군으로 나온다. 다만 외국 출판사라 일부러 무성의하게 제작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저 그림은 오스프리의 상당히 초창기 타이틀에 속한 것이고, 삽화가인 앵거스 맥브라이드는 이미 고인이다. 이때 나온 그림들은 지금 기준으로 틀린 고증이 많다. 로마군 관련 그림도 지금 보면 상당수가 부정확하다. 최근에 일본원정을 주제로 다시 나온 책의 삽화는(아래에도 있다) 훨씬 더 정확한 고증을 보여준다. 또한 오스프리 삽화에서 한중일 3국중에 한국쪽이 제일 정확도가 떨어지는데, 근본적으로는 자료(오스프리 책들 한국 관련 삽화는 정확성이 떨어지는 국내 민족기록화를 참고한게 많다)와 전문가(그쪽 필진들중에 나름 일본사와 중국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쓰는 저자들도 있고, 축적된 데이터도 그만큼 많지만, 한국 관련 저자는 없다) 부족에서 기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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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안타깝게 여겼는지 조선전쟁 생중계로 유명한 산그림 작가가 그나마 양호하게 고증해서 그려내었다.
하지만 앞의 병사들이 고려군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앞의 병사들을 보면 옷깃을 지우고 가필(加筆)한 흔적을 근거로 드는데, 후대에 몽골군을 좀 더 포악하게 묘사하고자 상상으로 그림을 덧그린 것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이 주장에 대해선 몇 가지 반박이 가능한데, 목화는 물론 직령깃 두루마기의 경우 전부 한국의 복식에서 전부 찾아볼 수 있다는 점, 활집의 경우도 이성계의 어궁구와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는 점, 애초에 저 앞의 병사를 제외한 후방의 병사들의 복식도 고려군, 몽골군 어느 쪽도 닮지 않았으며, 그나마 몽골군 쪽을 닮았다는 점을 보면, 오히려 앞의 병사가 고려군이 맞고, 이 그림은 애초에 구전된 말만 듣고 그린 것이라 세세한 부분을 잘못 그렸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4. 제1차 원정
4.1. 발단
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쿠빌라이 칸은 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송 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16] 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게 좋다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재상인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17] 겁을 잔뜩 주었다.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8년 6월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반부(潘阜)[18] 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당시 일본의 대외창구였던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데다[19] 교토의 천황을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 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다만 겉으로는 무시로 일관한 가마쿠라 막부도 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제관 등을 신궁과 산릉에 보내 국난을 고했으며, 여러 신사와 사찰에서는 신불(神佛)의 자비를 빌었다. 물론 무사들에게도 수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렸다.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몽골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갔다가 그 곳에서 섬 사람 두 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 듯. 쿠빌라이는 섬 사람 두 명을 잡아온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20]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21] 그러자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선언하며 고려에 병선의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22]
고려사에 따르면 1268년 4월에 고려에서 이장용이 사신으로 몽골에 왔을 때 쿠빌라이가 이장용에게 "너희 나라 왕족인 영녕공 왕준에게 다 들었다. 너희 나라에는 강한 군사가 5만 명은 있다면서? 1만 명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내가 송나라와 일본을 원정하는 데 필요하니까 원병으로 보내. 그리고 쌀 3, 4천 석까지 실을 수 있는 전함 1천 척도 만들어 와"라고 윽박질렀고, 이장용은 "재목은 있지만 독촉하셔도 현실적으로 말씀하신 기한은 너무 짧습니다."라고 곤란하다고 했고, 쿠빌라이는 이에 "너 예전에 서하가 칭기즈 칸께 금나라나 호라즘을 칠 때 꼭 돕겠다고 약속해놓고 입 싹 닦았다가 무슨 꼴 났는지 알아, 몰라?"라며 이장용을 을렀다. 이장용은 다시 "고려에 군사가 4만 명이 있었던 것은 옛날 이야기고요, 30년 전쟁에 역병까지 돌아서 거의 다 죽었습니다. 군사라고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여기서 이어지는 쿠빌라이의 대답이 참 걸작이다. "'''너네 나라에는 죽은 사람만 있고 산 사람은 없냐? 여자가 있을 테니 새로 태어난 사람도 있을 거 아냐.''' 너 노망났지?" 이에 새로 태어난 애들은 이제 겨우 9~10살이라고 이장용이 힘겹게 답했으나 이미 결심을 굳힌 쿠빌라이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출처: 고려사절요)
4.2. 몽골의 원정 준비
이듬해인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 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이때 원종은 진도에 거점을 마련한 삼별초가 아직 진압되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당시 삼별초는 진도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해안을 따라 오가던 조운선을 약탈하고 육지부를 공격해 배를 불사르고 몽골군을 죽이거나, 심지어 일본에 사신을 보내 협공을 제의하기도 했다. 막부 측이 삼별초가 보낸 국서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지...[23]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을 늦어지게 한 셈.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조양필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 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천황과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조 도키무네였는데 도키무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24] 와 지토[25] 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말로는 도저히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그와 더불어 1272년에는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제주도의 삼별초를 토벌했다.[26]
1273년에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27] 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이 건조됐다.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부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했다. '''하루 종일 물 속에 있다보니 그들의 다리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기도 했다'''.
지휘관은 원나라 측은 몽골인 훈둔(忻都, 忽敦), 홍다구, 남송인 유복형이었고 고려 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이 2만 5천[28] ,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 7백이었다.[29]
'''그리고 1274년 음력 10월 3일 여몽연합군은 고려 경상도의 합포를 출발했다.'''
4.3. 쓰시마 섬 전투
음력 10월 5일 여몽연합군은 쓰시마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했다.
이에 쓰시마의 소가 당주인 소 스케쿠니가 이끄는 80여명의[30] 쓰시마 현성 군들이 응전을 시도하여 선발대로 먼저 상륙한 300여명의 상륙군과 맞서 싸우며 수십기를 쏘아 죽이고, 스케쿠니의 장남이 현장을 지휘하던 원나라 무장을 활로 쏘아 낙마시켜 이들을 잠시 동안 패주 시키는등 용전하였으나, 연합군의 본대 1천이 상륙하여 맹공을 펼치자 '''단 반나절 만에''' 전멸 당하고 연합군에게 섬을 내주었다.[31]
4.4. 이키 섬 전투
음력 10월 14일 신시(오후 네 시에서 여섯 시 사이)에 연합군은 쓰시마 섬과 큐슈 사이에 있는 이키 섬에 도달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 대리인 타이라노 카게타카(平景隆)에게 전해졌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가신 100명을 이끌고 출전해서 소자부로(庄三郎)라는 자의 성 앞에서 활을 쏜 다음 연합군과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한나절 만에 참패했다(아래 무력차 항목 참조).
결국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살아남은 20명의 가신들과 함께 이키 섬의 본거지인 히츠메 성(樋詰城)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도했지만, 날이 저물어서 배로 돌아갔던 몽골군이 다음날인 15일 다시 히츠메 성을 공격했을 때, 최선을 다해 싸웠으나 앞서 언급한 이유 때문에 성은 짧은 시간만에 함락당했고, 그는 다자이후에 전령을 보내 본토에 위급함을 알린 뒤 목을 매고 자결했다.[32]
비록 참패라고 하지만 쓰시마 섬과 마찬가지로 이키섬은 지형 특성상 동원 가능한 가신과 병력들이 매우 적었기 때문에 100여명 이상의 병력을 소집하기도 힘들거니와, 이들을 압도하는 원나라군들의 화력과 병력들의 숫자를 감안하면 한나절 동안 버티고 20명이 살아남은 것은 상당히 치열하게 분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쓰시마만큼이나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이 이키 섬으로, 쓰시마에 이어 이키 섬은 몽골군에 의해 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일본측 기록으로 다소 과장이 있겠지만, 하치만우동훈(八幡愚童訓)의 기록을 보면 몽골군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서 태아를 꺼내고, 젖먹이들의 가랑이를 찢고, 잡은 남녀의 코나 귀를 베고, 젊은 여자들은 강간하고, 저항하면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그 구멍에 밧줄을 꿰고 끌고 다니거나 뱃전에 매달기도 했다. 또한 처자식을 데리고 산속으로 달아난 주민들은 아기 우는 소리를 듣고 군사들이 올까 봐[33] 아이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키 섬에는 ‘가쿠레아나(隱穴)’라고 불리는 동굴이 도처에 남아 있는데, 이키 섬 주민들이 몽골군을 피해 숨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이키 섬에는 다이라노 카게타카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죠 신사(新城神社)라고 불리는 신사가 있는데, 신사의 부지는 다이라노 카게타카가 농성했던 히즈메 성터로 당시 섬이 함락되고 학살당했던 이키 섬 주민들의 시신을 묻은 천인총(千人塚)이라는 무덤과 원구순국충혼탑(元寇殉國忠魂塔)이 세워져 있으며, 현지 안내문은 몽골군이 이키 섬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에 방점을 두고 이를 상세히 기술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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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하카타 만 상륙 작전
음력 10월 17일에 연합군은 규슈에 있는 다카시마에 상륙했고, 일본 막부군은 급히 내려가서 산성을 구축하고 싸웠으나, 막부군은 계속 밀리기만 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몽골군이 쓰는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리고 여몽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지금의 후쿠오카시인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이미 쓰시마 섬, 이키 섬이 점령당했다는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또한 하카타 지구에는 총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게스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은 대략 1만 7천 명 이상이었다.
4.6. 사와라 전투 & 하코자키 전투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사와라(현 후쿠오카현 사와라구)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 대로 적군을 싹쓸어 몽골군 지휘관 훈둔조차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34] 여기에 몽골군 주력 부대가 합세함으로써 막부군이 만든 하카타 만의 해안 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
그래도 아카사카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다. 전선 사령관 쇼니 가게스케는 시마즈 가문의 병사들과 함께 하카타에서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몽골군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때 화살에 맞은 이는 몽골군 좌우군부원수 유복형이었다.[35][36] 결국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 성(水成)에 집결했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군은 추격을 해오지 않았다. 한편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그런데....
4.7. 신의 바람(神風)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전함 중 몽골 군함 200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 여부는 의미 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오직 철수 뿐이었다.'''
참고로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 배를 너무 빨리 건조하다보니 발생한 내구도 문제와, 배가 부족한 나머지 대양항해에 부적합한 강가용 배를 징발한 문제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37]
태풍 덕이었지만 어찌됐든 일본은 승리했다. 일본은 이 태풍을 神風(신푸, 신의 바람)[38] 이라 부르면서 기렸다.
그리고 수백년 후, '''이 태풍의 이름은 일본군의 자살폭탄 공격을 작전이라 포장할 때 쓰였다.'''
5. 제2차 원정
5.1.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
1차 원정군 사령관 훈둔은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한 사정은 숨기고 일본을 패퇴시킨 전적만 부풀려 보고한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일본이 충분히 쫄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원나라에 굴복하고 입조할 것을 권하는 사신단을 보냈다.
1차 원정이 끝난 이듬해인 1275년, 예부시랑(외무차관 급) 두세충과 병부시랑(국방차관 급) 하문저 등 원나라 사신단 30여 명이 쿠빌라이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하자, 호조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고려인 수행원 4명을 제외하고는[39] '''모조리 참수해버렸다.'''[40] 이들의 운명은 4년 동안이나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고, 원나라는 다시 사신단을 꾸려 보냈는데, 이때 생존한 고려인 수행원 4명이 기적적으로 일본에서 탈출해 돌아와 자초지종을 알린다.
당시의 항해 기술로는 이미 출발한 배를 다시 따라가 잡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새로운 사신단은 아무것도 모른 채 일본에 당도했고, 이들은 가마쿠라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바로 하카타 만에 내리자마자 포박되어 처형당했다. 1년 후, 2차 사신단도 1차 사신단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크게 빡친 쿠빌라이 칸은 2차 원정을 결심했고, 1280년 8월 '정일본행성'(정동행성)을 설치하고 다시금 일본 침공을 명령한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전함의 건조 및 병량 비축은 무리'라고 호소했으나, 쿠빌라이는 일본을 족치기로 결정한 터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2차 원정은 1차 원정으로부터 7년 후였는데, 당시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에 골몰한 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76년이 되어서야 바얀이 지휘한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을 공격해 점령했다.
같은 해 '''가마쿠라 막부 측은 연합군의 원정에 대한 응징으로 고려에 반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전함 건조와 병력 징발을 명했으며, 비용의 부과 및 징수는 쇼니 쓰네스케에게 일임했는데, 이를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이라 했다. 원정군의 본영은 하카타에 설치되었으며 총사령관은 쇼니 쓰네스케가 임명되었다. 출격에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 내에서 조달했지만 부족하면 시코쿠와 주고쿠에서도 보충하기로 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끝내 실행되지는 못했다.[41]
5.2. 몽골과 고려의 원정 준비
한편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2차 일본 원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갑자기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몽고의 침략과 동시에 50년 전부터 출몰해 약탈을 해대기 시작한 왜구가 지긋지긋한 데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여 지분을 얻고 원나라의 앞잡이 홍다구가 고려에서 패악질을 벌일 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1279년 원나라가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사는 동시에 원나라는 홍다구를 곧 본국으로 소환했다.
1280년, 2차 원정군이 편성되었는데,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몽골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몽골군 지휘관은 훈둔과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 1만 명, 고려군 전투병 2만 명, 뱃사공·수부 1만 7천 명, 함선 9백 척, 군량 12만 3000석이었다. 강남군은 주로 옛 남송군이었는데 병사 수는 10만에 지휘관은 범문호였다.[42]
실제로 2차 원정군은 고려군이나 몽골군이나 1차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고려군이 특히 소극적이었는데도 원은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은 걸로 보건대 쿠빌라이의 본의는 일본 정벌보다는 그냥 두들겨패서 후방에서 엉뚱한 짓을 못하게 막는 것 + 왜구 소탕이 목적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존재한다. 물론 이게 맞아도 결국은 실패한 게 맞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는 것이 일본 자체의 역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던 데다가 왜구는 오히려 더 활개를 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1281년 음력 5월 3일 여몽연합군은 합포를 출발했다 .'''
5.3. 쓰시마 섬 전투
1281년 음력 5월 21일, 동로군이 쓰시마 섬을 공략했지만, 이번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저번과 달리 저항이 심해서, 점령도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5.4. 제1차 이키 섬 전투
1281년 음력 5월 26일, 이키 섬에 상륙한 동로군은 저항하는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이때 막부군의 지휘관은 7년 전 11살의 나이로 전쟁을 경험한 쇼니 스케토키(少弐資時)로 쇼니 쓰네스케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싸우다 전사했다.[43]
5.5. 시카노 섬 전투
10일 간 휴식을 취한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때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혔으니, 1276년에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 연안 20㎞에 축조된 높이 2m 전후의 방루가 그것이었다. 하카타 만 해안에 즉각 상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동로군은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는 시카노 섬에 상륙했고 같은 날, 오토모 가문의 당주이자 고케닌인 오토모 요리야쓰가 이끄는 막부군이 시카노 섬에 상륙한 동로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시카노 섬 쟁탈전은 6월 8일까지 이틀 동안 지속되었는데 고려군과 몽골군의 동로군은 생각 외로 고전을 반복했다.
5.6. 제2차 이키 섬 전투
시카노 섬 상륙을 포기한 동로군은 다시 이키 섬으로 철수해 야영 생활에 들어가고, 20여일 간 교전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후 7월 2일, 동로군은 대륙에서 오는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히라도 섬으로 이동했고 이때를 틈타 쇼니 가게스케의 지휘 하에 오토모 가문, 시마즈 가문, 마츠우라 가문, 류조지 가문, 다카시 가문에 속한 1만의 일본군 병력이 이키 섬을 탈환했다.
북서부 해안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오토모 가문의 주요 가신 한명이 전사하고, 1차, 2차 원정 동안 여몽군을 상대로 주력으로 맞선 쇼니 가문의 장수이자 쇼니 쓰네스케, 가게스케의 아버지인 쇼니 스케요시(少弐資能)가 중상을 입는 등 막부군은 상당히 분전했으나 동로군을 격퇴시켰고, 사실상 이키 섬에서 히라도로 옮겨가려던 동로군은 빠르게 히라도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부상당한 쇼니 스케요시는 평생 이 부상으로 고통받았고 늙은 나이에 입은 부상이 후일 악화돼 전쟁 이후 사망한다.
5.7. 하카타 만 공략
음력 7월 27일, 히라도에서 합류한 동로군과 강남군은 다카시마에 상륙하여 진영을 축조하는 한편, 다시 하카타 만 공략을 준비했다. 막부군은 이 소식을 듣고 반격을 준비했으나 4천여 척의 대함대의 위용에 눌려 전면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소선으로 기습전을 벌였다.[44]
당시 기습전에 참가한 이요국의 고케닌 고노 미치아리(河野通有)는 3척의 배들에 자신의 일가를 포함한 별동대를 분승시켜 몽골군 군함에 접근해 분전을 벌이다[45] 몽골군의 석궁에 맞아 부상을 입게 되지만, 배를 접현시키는데 성공하여 몽골군 배에 횃불을 던지고 적병을 베며 몽골군 지휘관 한명을 납치하고 귀환하는 등 활약했다 심지어 무사들이 직접 수영하여 여몽군의 선박 하나에 침투해 다수의 병사들을 베고 돌아오는 기막힌 상황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몇 차례 감행된 소선 기습 당시 일본 수군은 여몽군의 배에 설치된 투석기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동로군과 강남군이 합류한 비슷한 시기 일본 본토에서는 호조 도키무네의 직명을 받은 우츠노미야 사다츠나(宇都宮貞綱)가 산요 산이 지방 등지의 고케닌들로 부터 소집한 6만의 증원군을 이끌고 기타큐슈를 향해 출전했다.[46]
5.8. 또다시 신의 바람이 불다
'''그러나 음력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고[47] , 적어도 2000척의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하거나 떠내려가 버렸다. 이에 훈둔, 범문호 등 지휘관들은 그 즉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멀쩡한 배를 골라 타고는 병사들을 몽땅 내버린 채 일본에서 달아난다.''' 그 외 2만 명 가까운 고려군이 배를 타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공식적인 생존자는 이들밖에 없다. 일본에 남겨진 나머지 군사들은 전부 포로가 되거나 몰살당했다. 이미 육지에 있었거나 박살난 배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인원은 약 10만에 달했는데, 이들은 장백호라는 인물을 장총관이라 부르며 우두머리로 삼은 후, 산 속으로 들어가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돌아오려 했으나, 소형 선박만으로 게릴라전만 하던 막부군은 이를 기회삼아 본함대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격을 가했고, 결국 생존자들도 굶주림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고려사와 원사에 따르면 막부군은 포로들중에서 우선 고려인, 몽골인, 한인(북중국인)을 선별해내 이들부터 모조리 참수했고, 신부군(남송인)만이 살아남았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 뒤 8월 7일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자, 기술자 등 2~3만 명만 살려주고 나머지 남송인을 모두 참수. 9일에도 추가로 다수가 참수되었고, 나머지는 당인(당나라 사람)이라 하여 노예로 삼아 본토로 끌고 간다.[48]
일본 기록들을 참고하자면 막부는 포로가 도망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선박이 왕래하며 감시하도록 고케닌(御家人)에게 명하였다. 또한, 근래에, 오사카부(大阪府) 이즈미시(和泉市)내의 한 절이 소장하고 있는 『대반약파라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経)』 경전의 수정(修正)에, '코안의 역(弘安の役)' 때 투항했던 포로가 코안 9년 (1286년) 4월 초순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본 서적에는「대당국강서로서주군인하삼어(大唐国江西路瑞州軍人何三於)」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경전의) 수정(修正)에 종사하고 있었던 사람은 강남군(江南軍)에 소속되어 있던 군인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남송인 포로들의 처분은 각기 따로 맡겨진 곳에서 자율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졌다.
제 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군 26,989명 중 7500여명이 죽고 19,397명이 생환했다. 남송에서 참전한 지휘관급을 제외한 병사는 공식적으로 '''단 3명'''만 귀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그나마도 당장 귀환한 자는 없고 나중에 도망쳐온 자들만 있었다. 물론 지휘관급이 아닌 몽골인 중에는 단 한 명도 생존자가 없었다.[49]
고려군의 생환자가 몽골군보다 많았던 데는 전투에 소극적인 점도 한몫했다. 김방경의 태도와 별개로 고려군 자체는 전의가 몽골군보다도 떨어져 있었으며[50] , 방어할 때는 잘 싸웠으나 공세에는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견해는 원사(원나라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추측하는 것이고, 실제 전투 주력군은 고려군이었으며 이 증명은 당시 일본군 지휘관이던 가마쿠라 막부의 다케나키 스에나가 장군이 제작한 몽고습래회사 라는 그림의 분석을 토대로 고려군이 몽고군에 비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음이 확인되고 있다. [51] 이로 인해 원에서는 고려군이 일부러 몽골군을 몰살시키기 위해 사보타주를 한 것으로 의심하기까지 했다. [52]
6. 두 세력의 무력 차이
원정은 실패했으나, 1차 원정때의 여몽연합군의 전반적인 전력은 일본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시대의 일본의 주 전투 무장은 '''활'''이었고, 원거리 전투로 화살만 주고받고 끝나는 전투도 존재했으며, 일기토조차 기마궁술로 치룰정도로 활 위주의 전투를 하였다. [53] 또한 일본의 병력은 사무라이 세력을 위시한 기마궁병이 주전력이였으며 보병은 보조병력에 불과 했다. 또한 대다수의 전투가 씨족단위에 다툼이었기 때문에 많을 병력을 소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러한 경향으로 사무라이들은 개인의 무력에 의존하는 형태를 보이는데 소규모 전투에서는 이러한 기형적 구조가 오히려 유리했을 지라도 대규모 집단전에 익숙한 만단위가 넘는 외세의 전력과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였다. 그들에게 만단위가 넘는 대규모 전투는 그들의 할아버지의 군담에서나 나오는 숫자였다.
화약이라는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무기와 압도적인 병력차, 상대적으로 미숙한 대규모 전투에 일본군은 적응하지 못하고 패퇴했다.
일본의 기술에 따르면 '몽고의 활은 짧다고는 하나. 촉에 독이 발라져 비와 같이 내리니 감히 대적할 수 없었다. 몽고군에게 돌격한 무사는 좌우로 포위당하여 몰살당했다...'[54] 고 기록했다.
당시 일본에서의 전투 방식은 부하에게 우는 살(명적)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은 뒤, 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자신의 가계, 이름, 전적들을 자랑스레 읊는 나노리라는 것을 한 뒤 싸우는 거였다. 쉬운 말로 무사도를 준수하는 일기토 시전. 물론 여몽 연합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몽골군 역시 명적을 사용했는데, 이는 진격을 알리거나, 대량으로 사용해 적의 사기를 꺾거나, 전투 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휘관끼리 연락을 취하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이 명적을 쏘는 것은 장수가 나서서 가계를 읊겠다는 신호였지만, 몽골군은 이걸 진격 시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만구다이가 돌격해 측면을 돌파 중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전에 지휘관이 앞으로 나와서 예법에 맞춰서 말을 하는 건 여몽 연합군 입장에서는 나 죽여 주시오 하는 꼴이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드라마적 과장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치만몽고기(八幡ノ蒙古記)'의 기술에 따르면 '무사들은 서로 '''아군끼리''' 자기소개 '나노리'(名乗り)를 하며... '[55] 라고 기록되어 있다. 가마쿠라시대 전투는 씨족간의 소규모 전투 위주였다. 따라서 개개인의 무력과 성과가 중요했다. 이에 소집된 무장은 눈에 띄어 은상을 받기 위해 공을 세웠다는 증인이 필요했는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이 참전했음을 알리고 공을 세웠음을 어필하고자 자기소개를 하는 풍습이 생긴 것이였다. 또한 현대전에서도 삐라를 돌리듯 적군의 사기 저하와 아군의 사기진작을 위한 정당성 주장 등을 위해 나노리를 하는 목적 또한 존재 했다. 쓸모없는 게 아니라실용적인 목적이었다는 것.
몽고의 침략의 경우,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나노리를 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게 바로 이 기록의 아군끼리 나노리, 즉 서로 '나는 이 전투에 참가했으니 나중에 증인 부탁드립니다.'를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설사 명적을 울리고 전투를 개시하기전 '名乗り'를 했다 했을지라도 그건 아군들이 들으라고 하는거지 몽고군이 들으라고 한게 아닌것. 다만 동 서적에 기록에 의하면 습관적으로 일본군 장수가 적진에 돌격하며 명적을 쏘자 몽고군이 비웃으며 징과 북을 치자 말이 놀라 달아나 버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파훼법까지 쓸 정도로 철저히 전술을 준비했는데, 기병 중심인 일본군에게 극상성인 병력 구성인 도검병(말을 직접적으로 공격해서 기병을 무력화) + 화포 동화창[56] + 최초의 수류탄이었던 철포(테츠하우, 鉄砲)[57] 로 밀어붙였다.[58]
전장이 넓은 평야 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도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거니와 화포의 활용도가 높았고, 덕분에 여몽연합군은 막부군을 압도적으로 유린했다.
또한 원정 당시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대한 공포심은 극에 달해, 일본인들은 무쿠리(몽고)와 고쿠리(고려)라는 두 마리 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한 마리의 도깨비로 부르며 어린아이가 울 때 "'무쿠리와 고쿠리가 잡으러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라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59] 당시 일본에서 여몽 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2차 원정 때는 일본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1275년 이국경고번역을 실시하면서 각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할 준비를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던 데다, 고려 쪽에 첩자를 계속 보내 침공군의 규모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원정 당시 큐슈의 방어군은 1차 원정 때의 2배 정도를 동원했으며, 이요의 수군에 중앙에서 아다치 모리무네의 1만 가량의 증원군까지 파병해 4만 이상의 숫자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여몽 연합군은 쉽사리 상륙하지 못했으며, 결국 태풍이 불어올 때까지 일본이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2차 때 일본의 대비가 잘 되어있기도 했지만, 연합군의 대비는 반대로 너무 부족했다. 앞선 문서에서는 원나라의 철저한 대비에 대해 설명했지만, 이것은 전술적으로 전체군의 일부에 불과한 몽골군만이 전투에서 사용할 수있는 장비에 불과했고, 병력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강남군의 장비는 농기구였다는 설명만 봐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몽골군은 전략적으로 허술한 면모가 있었는데 칸이 밀어넣어서 오기는 했는데, 본토인 몽골과는 수천리나 떨어져있으면서 섬나라인 일본을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점령하고 싶진 않았고, 그렇다보니 남송의 대군이 올때까지 전면전은 보류하고 방어가 약한 곳을 찾으며 바닷가만 계속 맴돌던 상황이라, 오히려 가뜩이나 출정 기간이 길어지고 농번기에 가까워져서 한시라도 빨리 귀국을 해야했던 고려군의 김방경이 더이상 시간을 끌지말고 적극적인 공세를 하자고 주장하던 상황이었고, 실질적인 주력이라고 할 대규모의 남송 해군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출정 자체를 늦추며 늦장을 부리다가 반년이나 늦게 도착하면서 기껏 피했던 장마철에 전쟁을 시작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다. 결국 상륙 준비를 끝내고 저녁을 보내는데, 이때 태풍이 불어닥치면서 연합군은 전투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수만명이 일본 앞바다에 수장되어버렸다.
7. 원정의 여파
7.1.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두 번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신단을 일본에 보내고[60]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3차 원정을 계획하는 등# 일본을 복속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계속되는 반란에 직면하는 바람에 추진에는 실패했고,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일본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61] 쿠빌라이의 후계자인 성종 테무르 칸 시기에 일본 원정을 재추진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으나 칸 본인이 직접 반대의사를 내비쳤고, 고려인 출신 관리인 홍군상[62] 도 쿠빌라이 칸이 죽자마자 곧장 승상에게 가서 일본 원정 계획을 중지할 것을 간언했기에[63] 이를 마지막으로 일본 원정에 관한 논의 역시 완전히 사라진다.#
7.2. 가마쿠라 막부
태풍 덕에 두번이나 원정군을 물리치긴 했으나 일본 측의 피해도 적지 않은 편이었으며, 게다가 막부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바로 보상으로 무사들에게 내려줄 토지가 없다는 것이었다.[64] 이기긴 이겼으되 영토를 얻은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영토를 얻으려면 원나라를 공격하던가 해야 하는데, 홈그라운드에서 방어도 힘들게 해낸 일본 무사들이, 바다를 건너 원나라를 공격해도 이길 리 만무했다.
결국 자비를 들여 여몽 연합군과 싸웠던 무사, 즉 고케닌들은 보상으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해 갈수록 궁핍해졌고, 막부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에 자동적으로 고케닌들에게서 쫓겨난 비(非)고케닌 무사들 및 총령(가문의 상속자)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서자들이 악당을 조직해 슈고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것은 곧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막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 무렵, 교토 조정에선 천황의 후계 문제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고, 내전은 고다이고 덴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를 외딴 곳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하지만 호조 정권의 장기독재에 반감을 품은 무사들, 특히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가 호조 타도를 노리고 있었다.
1333년 마침내 전국에서 호조 정권 타도의 깃발이 올랐다. 같은 해 5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함락시졌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략했으며, 호조 씨 일족은 마지막 싯켄 사다도키를 비롯해 전원 자결하여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 연합군을 막아낸지 반세기도 채 못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예상하고 경고한 승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창가학회의 기반이 되는 일련정종(日蓮正宗)을 만든 니치렌(日蓮)이다. 그는 몽골 침공이 있기 10년 전부터 법화경 이외의 다른 경전을 사도(邪道)라며 부정했고, 당시 빈발하던 지진, 이상기후, 역병, 기근 등 재해의 원인이 사람들이 법화경을 믿지 않고 염불교나 선종, 정토종 따위의 사도를 믿는 데에 있으며, 이대로 그들을 내버려두었다간 국내에 조만간 큰 내란이 일어날 것이며, 외국으로부터의 침공이 있을 것이고, 정법인 법화경을 중심으로 세워야 국가와 국민 모두가 평안무사함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내용을 막부에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이라는 제목으로 올렸다가 다른 종파의 승려들에게 내몰려 귀양까지 갔다. 몽골 침공 아니었다면 그냥 좀 맛이 간 땡중1 정도로 취급받고 역사에서도 묻혀버렸을지 모를 이였지만, 그가 입정안국론을 올리고 꼭 10년 뒤에 몽골 침공이 두 차례나 벌어지면서, 정신나간 중에서 순식간에 예지를 지닌 고승대덕으로 격상되었다. 다만 몽골 침공이 실패로 끝난 이후에도 니치렌의 주장처럼 법화경 하나만을 정법이라 주장하는 니치렌종이 일본의 '국교'로 지정되는 일은 없었다.
여담으로 두 차례 일본원정에서 항상 처음부터 두들겨 맞았던 대마도의 경우, 두 차례의 전쟁과 위의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 덕분에 행정 체계가 마비되었고, 이는 차후 조선 초기까지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연구가 있다.
7.3. 고려
동국통감과 고려사에서 드러난 기록들을 보면 고려의 왕과 조정대신들부터가 원정을 그다지 찬성하지 않았는데, 문하시중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 인공수(印公秀)[65] 를 원에 보낸 표문 내용은 이렇다.
한마디로 원정에 참여한 김방경조차 직접 이 표문을 낼 정도로 정벌의 필요성보단 오히려 회의를 느낀 전쟁이었다. 애초에 고려 땅 늘리자고 하는 전쟁도 아니라, 원나라 땅 늘려주자고 하는 전쟁인데 좋다고 했을 리가 있나. 게다가 인명피해가 적었을 뿐이지, 1, 2차 원정에서 침몰된 군선이 장난아니게 많았고, 부역에 끌려간 백성들도 사고 혹은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면서 사회 전체가 큰 타격을 받아 카다안의 침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결과까지 만들었다.소방(小邦)이 근래 역적들을 소탕하는 일로 인하여 몽고 대군의 군량미를 해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어 들였으며, 게다가 왜국을 정토(征討)하려고 전함(戰艦)을 수리 건조하는 일 때문에 장정(壯丁)들은 모조리 공사 부역에 나가고 노약자들만이 겨우 밭을 갈고 씨를 뿌렸으나, 시절이 일찍이는 가물고 늦게는 큰물이 졌습니다.
그리하여 곡식을 제대로 거두지 못하여 나라의 비용마저 피폐한데, 더구나 싸움에 다치고 물에 빠져 죽어서 돌아오지 못한 자가 많으니, 비록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더라도, 어느 세월에 소생될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다시 일본을 치더라도, 그에 필요한 전함과 군량미를 실로 소방에서 감당해낼 수 없사오니, 삼가 간절한 정성을 굽어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일본 측에선 극우사관과 식민 사관의 영향에 일제강점기와 임진왜란 관련짓기 위해, 고려가 이 전쟁을 주도한 원흉으로 꼽았으며, 다른 고려사의 기록을 인용하기도 하나, 이것은 일본 측에서 하나만 본 거지 저건 보지 못한 것이다. 실제로 이노우에 야스시의 경우는 고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던 듯하다.
한편 원나라가 2차 원정 직전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약 76년 후 공민왕이 철폐할 때까지 고려에 남아 사사건건 내정간섭을 일삼는 귀찮은 존재가 된다. 일본 대신 고려를 수탈했던 것이다.[66] 또, 위에서 언급한대로 일본의 악감정만 촉발하고,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 되면서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에게 지속적으로 시달리며, 임진년 침공 명분을 주는 등, 결과적으로 한국사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쳤다.
대략 700년 뒤 당시 원정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기사
8. 가미카제가 없었다면 과연 원정은 성공했는가?
학계에서는 1차 침공 때 가미카제가 불지 않았다면 규슈 전역은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을 거라 본다. 실제 1차 침공 당시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으로 하카다의 일본군을 쫓아냈고, 공세가 계속된다면 다자이후마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졸장 몽공군 사령관 힌두의 결정으로 공세를 포기한 채 배로 철수했고, 결과는 결국 재앙으로 끝났다. 만약 이때 김방경의 말대로 공격을 계속했다면 다자이후는 연합군에게 함락되었을 것이며, 규슈 섬을 정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규슈에 모인 고케닌들의 병력은 많아야 1만명을 넘지 않았고, 연합군은 3~4만명에 달했으니 정복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 규슈섬을 정복했다 해도 일본 전역을 정복하고 막부를 전복시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규슈섬을 정복하고 고케닌들과 백성들의 저항을 진압하는데 연합군은 상당한 병력을 소모해야 했을것이며, 여기서 세토 내해를 건너 혼슈를 공략하려면 더욱 복잡한 준비를 거쳐야 한다. 설사 어찌저찌 하여 줄어든 병력을 이끌고 혼슈섬에 상륙했다 해도 규슈섬때와는 차원이 다른 저항을 마주해야 하는데, 이를 모두 뚫고 가마쿠라까지 진격할 수 있었을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아주 잘해봐야 교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철수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2차 원정의 경우, 태풍이 불지 않았다 해도 난이도는 한층 어려워졌을 것이다. 이때 막부는 1차 침략을 교훈삼아 '''하카다에 20km에 달하는 장벽을 쌓았으며, 이전보다 훨씬 많은 4만명의 병력을 배치했다.''' 실제로 이 장벽과 고케닌들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여몽연합군은 제대로 상륙조차 하지 못했으며, 강남군과 합류하기 위해 철수했을 때도 일본군 선박들의 기습에 시달리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몽골의 침략-몽고르이 거대원정군에 맞서 싸운 가마쿠라 무사단>에 의하면 2차 침공때 막부가 서일본에 배치한 병력은 규슈에 4만명, 주코쿠에 2만명, 쿄토에 6만명이었다고 한다. 이때가 중세이고 당시 일본군이 중세 봉건적 기사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전력이다. 이 정도 방비라면 규슈섬을 정복하는 일만으로도 상당한 출혈을 강요했을 것이며, 서일본에 진격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문단주제에서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의외로 몽골이 정복한 국가들을 보면 가마쿠라 막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남송과 금의 경우 물론 세계 최강국이었고 당연히 가마쿠라 막부보다는 훨씬 강력했으나 몽골군의 주력 수십만명을 수십년간 때려박고 나서야 겨우 정복했다. 호라즘은 인구와 영토는 많아도 정치시스템이 잘 갖춰져있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 2세와 어머니간에 내분이 일어나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호라즘 왕국은 호라즘 지방을 기반으로 한 투르크계 부족들이 다른 부족들을 정복하고 세운 연맹체에 가까워서 왕국 내에 있는 부족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오거나 심지어 몽골군에 붙는 일도 흔했다. 러시아는 마찬가지로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았지만, 이쪽은 아얘 통일조차 안된 채 수십개의 공국들로 분할되어 있었고 각 공국들간의 연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손쉬운 각개격파가 가능했다. 폴란드와 헝가리는 인구가 200만명 아래인 소국[67] 에 마찬가지로 분열상태가 심각했고 미얀마의 파간 왕국과 대리국은 인구가 지나치게 작은 소국들이었다. 그나마 서하와 고려 정도가 가마쿠라 막부와 비슷한 급이라고 보는데, 고려는 한국인이라면 알겠지만 '''내부 사정이 가마쿠라 막부 이상으로 막장이었다.''' 일단 지형상으로도 불리했고, 무신정권의 뻘짓과 최충헌의 자기 위신을 위한 기존 군대 약화 및 사병 병설으로 인해 군사력과 행적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상태였다.
반면 가마쿠라 막부는 인구가 최소 600~700만에 달해 당시 중세 기준으로는 상당한 사이즈의 국가였고, 섬나라라는 지형적 이점이 있었다. 몽골군의 최대 강점은 대규모 기병을 이용한 기동력인데, 일본은 그 지역의 특성상 군마를 대규모로 운송할 수 없었으며, '''이는 몽골의 최대 강점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했다.''' 봉건국가이긴 했지만 분열상이 호라즘, 서요,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같은 동네들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고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을 중심으로 한 단일화된 국가체계와 청환을 중심으로 한 동족의식을 갖추고 있어 조직적이고 단일화된 저항이 가능했다. 실제로 가마쿠라 막부의 쇠망 원인을 이때 너무 열심히 전쟁준비를 한 탓이라고 보는 사견이 있을 정도로 당시 일본은 일종의 총력전을 준비했고, 모든 고케닌들이 군사를 뽑아내고 전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을 정도이니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원정군이 장기전이 과연 가능했냐'''는 것. 보급의 경우 고려에 크게 의존해야 하고 고려는 등골이 휘는데 십만이 넘는 대병력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백년전쟁의 영국군처럼 보급이 부족해 아무 곳이나 약탈하다 도리어 원정군이 민심을 잃고 일본군이 게릴라나 지연전으로 몰고 가면 일본은 바다 건너 세력이라 원군조차 보내기 힘들며 그곳은 그들의 홈그라운드이니 답이 없다. 이는 '원사'(元史)에도 지적하는데 "일본은 바다가 멀고 사람이 많고 땅이 넓으며 사방에 병사가 모인다. 아군의 원군은 없고 만일 불리해져도 지원을 보내기 힘들다."고 일본 정복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다.[68] 쓰시마나 이키 섬의 장렬한 전투의 예를 보면 오히려 극렬한 저항에 질색하며 떠났을 가능성이 더 크다. 애초에 전쟁은 잘 싸운다고 이기는게 아니다.
'가능성이 높았다, 장기전을 하면 이긴다'고 태풍만 없었으면 확정적으로 이겼을 거라 주장했지만 여몽전쟁조차도 아홉 차례의 원정 끝에 겨우 항복을 받아냈다. 고려 무신정권도 그리했는데 호조 가문은 안 그러했겠는가? 고려는 그럴수록 더더욱 빈곤해질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론적으로 1, 2차 원정때 가미카제가 불지 않았다 해도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정복하기는 힘들었으리라 본다. 물론 규슈섬 정도는 정복했을 확률이 높으며, 일본 서부 지역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수준이 되었겠지만, 일본 동부의 가마쿠라까지 진격해 막부의 모가지를 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8.1. 대체역사: 만약에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면?
어떻게 원정에 성공했는지는 일단 둘째치고, 만약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고 가정한다면 일단 천황 가문에 원나라의 공주를 보내 몽골인의 피가 섞인 황족을 천황으로 세우게 할 것이다. 또한 고려처럼 시간을 들여 조정에 간섭세력을 만드는데 이 경우 일본은 고려보다는 훨씬 간단하다. 일단 싯켄 호조 일문을 멸문시키고 새로운 무사 세력을 옹립시켜 주던가, 그 슈고를 쪼개어 나누어서 인세이와 쇼군, 싯켄 기타 등등 일본 역사 속에 등장한 모든 섭정세력을 전부 부활시켜 버리면 된다. 조정 내에서는 고셋케의 관백과 상황(조우고), 천황이 삼파전을 벌일 것이고, 동서로는 조정과 쇼군이 대립할 것이고 쇼군가 내에서는 쇼군과 칸레이가 서로 대립할것이며 지방에서는 슈고와 고케닌들이 대립할것이다. 여기서 가운데 이들 사이에 중재자 역할을 할만한 원나라의 외교 대리인을 잘만 뽑으면 원나라는 이들을 조율하면서 단물을 빨아먹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고려에게 정복지의 일부를 때어내 통치를 시키면 설사 일본에 대한 간섭력을 상실하더라도 고려와 일본은 자연스레 대립하게 되니 원나라를 직접 위협하는 고려의 군사력 상당수가 일본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일본의 구 황족 귀족 세력은 세가 너무 약했고 만약에 세력의 균형이 깨지게 되면 바다건너 개입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금방 영향력을 벗어나게 될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는다 해도 사실상 무력개입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들은 수당 시대도 중원과 맞먹으려 하며 독자성을 기른 국가란 것을 잊으면 안된다. 따라서 원정이 성공했다 쳐도 조공국으로 끝날 것이며 그마저도 금방 독립해버릴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다시 원정할 만큼의 무력 개입은 1-2차 원정의 결과를 보자면 여러 모로 수지가 안 맞는 원정이다.
전국시대가 더 빨리 일어날 수도 있는데 원나라의 비호가 사라진 괴뢰장권이 실권을 잃으면서 지방 씨족들이 들고 일어날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는 무역이나 교류가 활발해져 복식이나, 식습관 관례 등 몽골 문화가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직접적인 외세의 영향력 앞에서 그 반작용으로 전통 종교인 법화종 등의 불교나 신토가 중시되거나 중국과의 교류가 원활해짐에 따라 고려 말처럼 유교학자들이 크게 대두했을 가능성도 높다. 또한 원나라를 통해 정식으로 무역을 하면서 밀무역이 줄어들고 왜구가 쇠퇴했을 가능성 또한 있다. 적어도 원나라의 간섭하에 있었다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같은 대규모의 왜구 침입은 없었을 수 있다. 다만 이는 일본 괴뢰정부가 지방 통제가 가능 할때나 가능한 이야기.
만약에 천황을 통해 중앙집권을 한다 처도 천황은 다시 무사세력에게 실권을 뺏길 것이다. 애초에 원나라가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중앙집권 및 천황 권력 강화로 일본의 천황의 만세일계가 끝날수도 있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글이 있었는데. 당장 원나라 봉토 조차도 중앙결집력이 상당히 떨어지는데 바다건너 수백년에 세월이 흐르며 고착된 향토세력을 자기 땅도 관리 못하는 원나라의 개입으로 멀리 바다 건너 속국의 미미한 천황을 후원해 적대하는 무사세력을 일소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적으며, 애초에 일본 내부세력중에 천황의 대를 끊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은 없었다.[69][70]
확실한 것은 '''일본인들이 항공기를 이용한 자살 공격을 카미카제라고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란 점이다.
한국인 중에는 일본 원정이 실패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점령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원나라 본토와 일본과의 거리가 먼 관계로 조공을 운송하는 업무의 대부분은 고려에 맡겼을 수는 있고, 중간 과정에서 약간의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뱃길로 수송해야 하는 관계로 손실분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당연히 원나라는 그 손실분의 보충은 고려에 맡겼을 것이다. 또한 전쟁에 동원됐던 고려군의 상당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 계속 주둔하여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 당연하다. 이게 공민왕 대까지 지속됐다고 치면 원명 교체기에도 가용 병력이 부족해서 원나라에 저항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71] 또한 고려를 몽골 침략자의 주구로 치부할 일본의 적대 혹은 보복 등 오랫동안 더 나빠질 한일관계로 이익보다는 손해가 더 클 뿐이다.
9. 현대 일본에서 바라보는 시각
근현대 일본에서는 이 승리를 자랑하면서 국가적 자긍심으로 찬양했다. 이를테면 , 아시아에서 몽골을 이긴 건 유일하게 일본 뿐이니 하는 말 등. 이에 대하여 반대 주장을 펼친 책이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이다. 사실 원나라를 진짜로 크게 물리친 베트남에서도 원나라에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베트남의 명장 쩐흥다오 지휘 아래, 원나라군을 크게 물리친 경우도 있고, 인도나 자바 등 여러 아시아 나라들도 원나라군을 이겨낸 적이 있다. 문제는 이 허황된 이야기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불법 출판한 여러 일본 책자에서 나온 걸 그대로 썼었다는 점이다.[72] 물론 아시아 국가중 점령을 통한 원나라의 영역권[73] 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일본만이 유일하니 국가적 자긍심으로 여길만한 여지는 충분하다.
1950년대 일본에서 이 원정을 흥미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지은 《풍도(風濤)》.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원제를 그대로 쓴 것과 적당히 의역해 '검푸른 해협'이라고 제목을 붙인 두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일본"이 주인공이 아닌 충렬왕과 김방경이 주인공으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다룬다. 사실 이 당시의 고려를 미 군정 하의 일본에 빗대어 냉전 시기 군사 기지화 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야스시의 이 소설이 의외의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고 평가받는다.[74] 물론 본토는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별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는 등 개인차는 있다.
NHK 대하드라마 <호조 도키무네>(2001년)에서 이 원정을 다루었다. 해당 방송 38화 中. 참고로 해당 영상에서 처음 날리는 화살은 '카부라야' 혹은 효시, 명적 화살이라고도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는 화살인데 일본에서는 당시 이것과 나노리로 개전의 신호를 알렸다. 하지만 고려나 몽골인들은 그런 격식을 갖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여몽 연합군이 트레뷰셋을 사용해 던지는 폭탄은 진천뢰로 추정된다. 이미 금나라 때 개발되었으며 조선의 비격진천뢰와는 달리 수류탄에 가까웠다. 주로 손으로 던지지만, 각종 투척기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작가의 독특한 해석인지, 1차 원정 때 몽골군의 철수 이유를 태풍 때문이 아닌 일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1차 원정이 몽골의 무력 시위였다는 해석.[75] 다만 연출시 고증에 문제가 있는데, 몽고습래회사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는 고려군을 몽골군과 똑같이 만들었다. 또 고려의 김방경과 원의 홍다구도 등장했는데, 다만 한국 배우가 아닌 중국 배우를 김방경으로 출연시켰다. 사실 한국 사극도 일본인이나 중국인 배역에 한국 배우를 기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을 고려하면 그냥 되는대로 쓴듯.
1892년에는 이것을 기념하는 군가도 만들어젔다. 원구 항목 참조.
9.1. 음모론
일설엔 원나라가 남송의 잔여 부대들을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반란 위험도 줄이고 입도 덜고''' 하는 심정으로 원정을 보냈다는 말도 있다. 결국 10만의 병사들은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었으니...
일본사의 음모론자들은 이 사건이 반가마쿠라 막부 성향의 다이묘들이 사주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반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 가운데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고려와 손잡고 '가마쿠라 막부 좀 밟아주세요' 해서 원정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고려가 굳이 이득도 없는 일본 원정을 단지 저런 이유만으로 강행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반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들은 저 원정 당시에 왜 배후에서 군사 행동을 안 했던 걸까?[76] 그런 걸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해당 정벌의 원흉을 충렬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10. 번외: 몽골의 아이누 침공
몽골 제국은 아이누 족이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년, 1284년, 1285년,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몽골이 사할린섬을 공격한 사연은? 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몽골군은 겨우 2만 병력으로도 러시아 공국 연합군 8만을 탈탈 털어버릴 만큼 당대 기준으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누인들에게는 가히 외계인의 침공이나 마찬가지의 날벼락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에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일궜지만, 아이누들의 저항이 의외로 강력했고 하필 1287년 몽골 본국에서 카이두를 중심으로 동몽골의 왕가들이 합세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사할린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조공 체제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여몽연합군의 규슈 침공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나라 , 명나라 시기의 지도를 보면 당대인들은, 규슈 , 혼슈 , 홋카이도, 사할린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아예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원나라 지도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봐도 연해주와 사할린 및 일본 열도는 실제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계속 이어져 있지만 지도에는 완전히 다른 위치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서는 일본 열도가 대륙의 먼 남쪽에 위치해있고, 연해주와 사할린이 대륙의 극동쪽에 위치하는 것으로 그려져있다.
만약 그걸 알았다면 여기서 도호쿠 방면으로 남진하면 태풍도 거의 없고 몽골 본토에서도 더 가까운 침공 루트인데다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이 얼어붙어서 걸어서 건널 수도 있기 때문에 이쪽 루트로 침공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지리 지식의 부재로 그러지 않았다. 물론 이쪽 길은 상당히 험하기도 하고 여름에 출병한다 해도 원주민들의 저항이나 당시 숲과 산으로 울창하게 둘러싸인 홋카이도와 사할린 섬의 특성상 몽골 기병이나 원정군들이 게릴라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가능성도 있는지라 태풍만 없다 치면 고려를 통해 공격해 들어가는 루트가 훨씬 안전하다 볼 수 있겠다. 더욱이 이 당시 일본의 중심지는 교토와 그 서부지역이었기에, 현재의 도쿄는 그냥 뻘밭이었고,[77] 일본 동북부는 미개척지였다. 따라서 사할린, 홋카이도, 일본 도호쿠(동북부) 지방을 거쳐 큐슈로 간다는건 지리를 알아도 수만명의 보급이 힘든 루트였다. 지역민들의 게릴라는 덤.
11. 대중문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는 앙골모아 ~원구전투기~가 있다.
그보다 먼저인 1980년에 나온 마르코 폴로가 주인공으로 나온 마르코 폴로의 모험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1회를 거의 차지했다. 각색되어서 1281년 24살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군과 같이 가는게 나오는데 고려군은 아예 생략. 극중 일본군은 대사도 없이 나와 그야말로 원나라군에게 학살 수준으로 마구 당한다. 갑옷차림 일본 장수도 극중 마르코 폴로와 친하게 된 원나라군 젊은 장수에게 가볍게 한 칼에 베여 쓰러졌다. 폭풍 때문에 원나라군이 지자 그 장수가 원나라군이 지다니라고 절규한다.
쇼군 토탈워의 확장팩 몽골 인베이젼에선 몽골군이 이기면 몽골제국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몽골제국의 주요 영토가 된 일본 주가 된 가상 역사로 막을 내린다.
좀 더 최신 게임으로는 고스트 오브 쓰시마가 있고 1차 원정 당시 쓰시마 전투에서 생존한 무사가 홀로 몽골 군대에 맞서는 내용이라고 한다.
12. 관련 문서
[1] 그레고리력으로 11월 11일 ~ 11월 26일. 동시기 서양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 날짜로는 7일을 뺀다.[2] 그레고리력으로 6월 16일 ~ 8월 29일. 동시기 서양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 날짜로는 7일을 뺀다.[3] 칭기즈 칸의 동생인 동방 3왕가의 테무게 옷치긴의 6세손으로 홍다구와 함께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여력이 있다.[4] 남송 출신 병력이다.[5] 강풍이 불었을 때는 상당수 인원이 육지에 들어가서 생존율이 높았지만, 이후 막부군에 포위되면서 남송군과 몽골군은 거의 몰살되었다.+토네이도[6] 한국에도 '몽고습래 에고토바'라는 제목으로 201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7] 특히 일본을 낮추어 부르는 '왜'가 아니라 '일본'이라는 어휘를 선택한 것도 주의할 만하다. 사실 '일본'이라는 국호 자체는 훨씬 이전인 8세기에 정립되었지만, 중국과 한반도 국가들은 자신들이 처한 외교적 상황 및 대의명분에 따라 왜국과 일본의 호칭을 혼용했다.[8] 이 지도의 항로가 잘못된 점은 고려군은 합포에서 출발해 지금의 거제대교가 있는 견내량과 거제도 서쪽 해안선을 거쳐 남진한 뒤 대마도로 건너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반영하지 않고 거제도 동쪽 해안으로 이동한 것처럼 그린 것이다. 당시 고려수군 진영도 거제면에 있었고 이는 대한 해협의 해류로부터 안전하여 고대부터 쓰인 항로다. 2차원정도 그렇고 여말선초 대마도 원정 때도 마찬가지[9] 전투 병력은 8천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뱃사공이었다.[10] 몽골에 의해 패망한 남송의 잔여 병력.[11] 함선 3,500[12] 함선 900척[13] 1차, 2차 전쟁 모두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14] 한국에도 '몽고습래 에고토바'라는 제목으로 2017년에 번역 출간되었다. [15] 몽골과 만주의 갑옷이 이같이 목까지 보호한다. 청군의 두정갑을 봐도 알 수 있는 부분.[16] 경남 함안 출신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잦았던 합포 및 금주(김해)와 가까워 일본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17] 이른바 풍도험조(風濤險阻). 후술할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제목 역시 여기서 따왔다.[18] 거제 반씨의 시조.[19] 다만 그보다는 한반도나 중국의 대외 사정에 대해서 정말로 무지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더 높다. 실제로 일본 조정은 고려 조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 삼별초와 고려 조정의 차이점도 몰라서 허둥댔을 만큼, 정말이지 대외 사정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20] 잡은 섬 사람들한테는 "내가 니들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너네한테 국서를 보냈는데 너네가 대답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21] 이후로 1268년, 1269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을 초유했으나 일본은 거듭 이를 무시했다.[22] 쿠빌라이가 이때까지는 남송을 먼저 칠지, 일본을 먼저 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하다.[23] 고려 원종의 조정이 보낸 국서와 삼별초에서 보낸 국서에서의 몽골에 대한 태도가 판이하여, 같은 고려 국서인데 왜 이러냐고 무지 헷갈려했다. 삼별초 문서 참고.[24] 지방 군벌[25] 슈고보다 하위 계급[26] 제주도에 목장을 설치한 것도 일본 원정에 필요한 군마를 이곳에서 조달하기 위해서였다.[27] 그의 가문은 일찍이 조부 홍대순(洪大純) 시절에 몽골에 투항해 부역하였으며, 부친 홍복원(洪福源)도 여몽전쟁 시절에 몽골군 앞잡이로 활약해 매국노 짓을 했다. 거기에 홍다구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기에 고려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홍다구의 동생 홍군상(洪君祥)은 일본 정벌 당시 고려의 사정을 원 조정에 전달하여 그 부담을 경감시켜주게 해 고려에서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로 봉하였다.[28] 다만 말이 몽골군이지 몽골인은 지휘관 몇 명을 제외하면 매우 적었고, 대부분은 이미 원나라에 항복한 한족이나 여진족들이 훨씬 많았다. 실제로 밑에서 서술할 일본군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은 유복형도 산동성 출신의 여진족이었다.[29] 이때 격군이 전투 병력보다 배로 많았던 판옥선과 비교하여 뱃사공이 전체 규모의 절반도 안 되는데 어떻게 일본까지 간 건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판옥선은 연안 전투함이자 평저선이었다. 격군이 많았던 이유는 돛을 이용하기보다 전장기동성을 위주로 운용했기 때문. 반면에 일본 원정용 함선이라면 원양 항해를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수부가 적게 필요한 것이다.[30] 어째서 의외로 병력이 이렇게 적은지 의문을 표할수도 있지만 쓰시마의 지형 특성상 동원 가능한 무사들의 숫자가 적을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이키섬도 마찬가지였기에 이키의 슈고다이 타이라노 카게타카도 고작 100여기의 무사들과, 당시 큐슈에서 활동하던 해적 무리들인 마츠라토(松哺黨)의 전사 소수만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31] 이 전투가 애니메이션 앙골모아 ~원구전투기~,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배경이다.[32] 다이라노 카게타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정4위가 추증된다.[33] 그리고 어차피 몽골군 손에 죽으나 자신의 부모 손에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자포자기 심정에서였다.[34] 1차 원정에서 훈둔이 말하길,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35] 호조 도키무네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이것이 묘사되는데, 실제로 가게스케 본인이 직접 활을 쏘았지만, 드라마상 묘사와는 달리 분전 중 추격해오는 유복형을 맞추었다고 한다. 또한 몽골군에게서 노획한 활로 맞춘걸로 묘사되지만, 승마 상태에서 자신의 장궁으로 맞추었다.[36] 산둥성 출신의 여진족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이 심해서 상처를 치료한다고 먼저 배를 타고 원나라로 돌아가 버렸다.[37] 1274년 홍다구의 악랄한 독촉으로 4개월 만에 전함 900척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38] 원래는 음독인 신푸로 읽었다. 훈독인 카미카제로 읽기 시작한 건 태평양 전쟁 때.[39] 후일 붙잡힌 고려군 포로들이 모조리 참수당한 걸 보면 왜 살려뒀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당시 고려인 수행원들이 단순 안내자 역할 또는 통역 역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0] 이때 사신단을 이끈 정사 두세충은 원나라의 처자를 걱정하는 시를 짓고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41] 이국인 고려 측의 상황이 막부 측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데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해외로 출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에는 고려가 평화를 찾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고려군이 원에 복속된 형태이기는 해도 그럭저럭 재건된 데다, 몽골군도 다수가 고려에 주둔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려군이 진짜 막장테크를 타는 건 14세기 중엽 이후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나면서부터고, 이 시기에는 그나마 건재했다. 게다가 막부의 고려 원정 계획에 일본의 영주들과 무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기에 더욱 할 수가 없었다.[42] 숫자로 보면 강남군이 훨씬 많지만 실제론 전함에 무기보다는 괭이·삽 등의 농기구와 씨앗 등을 잔뜩 싣은 데다 병사 대다수는 급히 징집하여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남송군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진 집단이었다. 주력은 당연히 동로군일 수밖에 없었다.[43] 현재 이키 섬의 신사에서 제신(祭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44] 이 당시 막부군이 동원한 배들은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퍼나르던 아주 작은 크기였다(...)[45] 참고로 배가 소선이였던 탓에 보다 체급이 컸던 고려 함선인 '천료주'에 접현이 힘들어 배의 돛을 부러뜨리고(...) 올라탔다고 한다.[46] 이때 총대장 우츠노미야 사다츠나의 나이는 무려 '''16세'''였다. 물론 당시 15세 정도면 성인 취급이었기에 가능했으며, 당시 우츠노미야가는 관동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문무가 뛰어났기에 호조가 신뢰하고 맡긴 것으로 보인다. [47] 사실 이번 2차 원정 시기는 동아시아에서 태풍이 많이 활동하는 6월 - 8월(양력)이다, 즉 앞의 1차 원정과 달리 '''2달 동안 강풍을 안 만난 게 기적이었던 것이다'''.[48] 당시 일본은 중국대륙의 왕조나 문화권을 그 시점에서의 정식 국호로 호칭하지 않고 일본과 제일 밀접한 관계였을 시절의 국호인 당(唐, 일본어로는 카라 또는 도우라 읽는다.)으로 퉁쳐 불렀다. 명나라로 쳐들어가려던 임진왜란 역시 카라이리(唐入り)라 불렀다. 심지어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도 당인(唐人, 도진)이라 불러서 조선 통신사가 항의하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으며(아메노모리 호슈 문서 참조.), 통신사의 수행원이었던 조선인 최천종이 일본측 역관에게 살해당하는 사건 역시 당나라 사람 살인사건(唐人殺し)라 불렀다. 사실 무로마치 막부부터 당시 일본 사상가들의 세계관은 전통적인 일본(本朝), 중국(唐土), 인도(天竺)의 삼국관에서 무로마치 말기 이후 인도가 탈락하고 유럽(南蛮)이 추가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를 근세적 삼국관이라하며 이들의 세계관에서 조선, 류큐, 에조 등은 중국이나 일본에 종속된 존재로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았다.[49] 이들이 일본에서 탈출해 고려에 귀부한 해는 충렬왕 8년인 1302년이었다. 여몽연합군이 합포를 떠난 해가 1281년이었으니 장장 20년 이상을 노예로 혹사당한 것이다. 나머지 포로들은 노예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50] 특히 강제로 동원되었고 몽골에 대한 악감정이 많았다.[51] 이에 대한 내용은 KBS 역사스페셜 145회에 방영되었다.[52] 1차와 2차 원정 모두 귀환병의 절대다수는 고려인이었고, 고려군 병력들만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제대로 된 함선에 타고 있었기에 의심할 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군의 조선술과 고려 지휘관인 김방경의 판단력이 원나라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에 귀환 비율이 높았다는 역사학자들의 의견도 다수다.[53] 이 활의 중시되는 일본의 전투는 언어적으로도 남아서 최고의 무사를 '弓取り'(활잡이)라 칭할 정도였다.[54] 蒙古か矢、みじかしといへとも、矢のねに毒をぬりたれは、ちともあたる処、とくに氣にまく、かくて敵より数百人、矢さきを、そろへて雨のことくに、いけるに、向ふへくもあらす、楯、鉾、長柄、物の具の、あき間をさして、はつさす、一面にたちならんて、もし、よする者あれは、中に包て引退て、左右より端をまはし合せて、とりこめて、皆ころしける...그 후에 그 무사의 간을 뽑아먹고 말까지 잡아먹었다는 기술이 있으나 생략. (小野尚志『八幡愚童訓諸本研究 論考と資料』三弥井書店 2007年 194〜195頁) [55] 日本の軍の如く、相互に名のりあひ、高名せすんは、一命かきり勝負とおもふ処に、此合戦は、大勢一度に、より合、足手のうこく所、われもと取つきて、おし殺し、又は生捕けり、この故に、かけ入ほとの日本人に、一人として、もれたる者こそなかりけれ[56] 물론 화포라고는 해도 시대가 시대인지라 대포가 아닌 44cm 정도 길이에 직경이 3센치정도 되는 핸드캐넌이었고, 두명이 뒤에 나무 대를 잡고 버티는 형식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화약이 터졌을 때의 반발력은 사람이 온전히 감당할만한 수준이 아니다보니, 150m 이상 날아가도 유효사거리는 50m가 채 안되는 것은 물론, 바로 앞에 갖다 대고 쏘는게 아니고서야 사람을 맞추는 건 매우 힘들었다고한다. 물론 화기의 특성 상 활과는 달리 어디를 맞든 치명상을 입히며, 딱히 막을 수단도 없으므로, 한명만 맞아도 병사들이 공포에 질리게 하기엔 충분했을 것이다.[57] 지름 14cm의 청동 용기 안에 화약을 담고 심지를 꽂은 것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터트리는 원시적 수류탄이다. 폭발하면서 주위로 흩어지는 깨진 청동 조각으로 피해를 줄 순 있었겠지만, 수류탄의 특성 상 매우 근접하지 않고선 정확하게 던지기 힘들고, 정확히 던진다고 해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건 둘째치고 불발될 가능성부터 높은데다, 당시 화약의 폭발이 균일하지도 않고 충분히 강하지도 않아, 직접적인 피해를 노리기보다는 폭발음에 말이 놀라서 일어나는 기동력 상실을 주로 노렸다.[58] 몽고군은 퇴각하면서 이 철포(鉄砲)를 던져 퇴각시 추격을 막았다는 기록도 있다.[59] 여담으로 이 무쿠리 고쿠리는 산 사람을 잡으면 생가죽을 벗겨 내버린다는 전설이 있다.[60]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에 불교가 융성하다는 정보를 듣고(당시 일본의 지배자 호조 도키무네가 머리를 깎고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승려를 부사로 삼아 보냈으나 배의 승무원들과 수행원들이 과거 사신단들의 최후를 알아내고는 선상반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도망쳤다는 기록이 있다.#[61] 사실 쿠빌라이 칸이 일본보다 더 치려는 상대가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원격한 거리와 열대 밀림 지대, 그리고 쩐흥다오의 지휘 아래에서 '''육로로 이루어진 몽골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위업'''을 이룩했다. 이외에도 몽골을 격퇴한 건 자바, 이집트, 인도를 꼽을 수 있다. 원의 3차 베트남 침공은 대(對) 일본 원정을 중단시키고 침공한 상황에서 1287년에 이루어졌고, '''쿠빌라이 칸은 4차 베트남 침공을 준비하던 와중에 죽었다'''.[62] 홍다구의 동생이다.[63] 이 공으로 홍군상은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공신으로 우대받았다.[64] 몽고습래회사를 제작한 다케자키 스에나가만 하더라도 1차 몽골 침공 당시에 선봉장으로 싸웠음에도 자신의 공을 막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해 자신의 말까지 팔아가면서 여비를 마련해 직접 가마쿠라로 가서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를 만나 호소, 기어이 히고 가이도 향(海東鄕)의 지토 자리를 얻어냈다.[65] 제국대장공주를 따라 원에서 와서 고려에 정착해 살게 된 훌라타이(忽剌歺)라는 몽골인이 이 사람의 성을 빌려 써서 인후(印侯)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연안 인씨의 시조가 되었다. 인공수 본인은 고려인이며 교동 인씨인데, 사마진의 풍익대부(馮翊大夫)로 신라에 귀순했다는 인서(印瑞)의 33세손인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를 지내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진 것을 시작으로 교동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인공수의 손자가 공민왕 때에 압록강 서쪽 8참을 공격했다가 처형당한 장군 인당(印璫)이다.[66] 애초에 원이 조공체제 등 중화 전통에 대한 이해가 심각하게 부족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저 수탈해대기만 하고 주는 건 없으니, 힘이 없어 굴복하긴 했다지만 고려인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있나.[67] 마조비아, 소폴란드, 대폴란드, 슐레지엔 등[68] 『元史』巻一百六十八 列傳第五十五 劉宣「況日本海洋萬里、疆土濶遠、非二國可比、今次出帥、動衆履險、縱不遇風、可到彼岸、倭國地広、徒衆猥多、彼兵四集、我帥無援、万一不利、欲發救兵、其能飛渡耶、隋伐高麗、三次大擧、數見敗北、喪師百万、唐太宗以英武自負、親征高麗、雖取數城而還、徒增追悔、且高麗平壤諸城、皆居陸地、去中原不遠、以二國之衆加之、尚不能克、况日本僻在海隅、與中国相懸萬里哉、帝嘉納其言[69] 한가지 착각하는 게 미나모토 가문이나 헤이시 가문 등조차도 천황의 방계 출신이며 이들이 권력은 가졌어도 명분은 어디까지나 황가에 있기 때문에 천황을 완전히 몰아낼 만큼의 세력은 아니었다. 쇼군은 무가의 대표자이지 전제군주가 아니였기 때문. 가장 강력했던 에도 막부조차도 명분을 잃자 토막파와 전쟁 후 대정봉환해야 했다.[70] 사실 천황가는 먼 방계나 여계 자손이 군주의 자리를 계승하여 왕조 명칭이 바뀌는 유럽식 왕조 교체와 비슷한 일이 여러 번 일어났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천황가가 만세일계로 이어져왔다는 표현은 반만 맞다고 볼 수도 있다.[71] 단 역으로 보면 일본에 주둔하면서 왜구의 영향력이 고려에 미치는 것을 차단할 수도 있겠지만, 몽골이 쇠퇴하여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바다 건너 병력을 유지하기 힘든 고려군은 바로 귀환했을 것이다. 당장 고려, 그리고 조선이 왜구에 시달린 가장 큰 이유는 왜구의 기지가 일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 당시에도 일본의 영토로 분류되었던 이키 섬 등이 왜구의 근거지라는 건 조선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영토라는 이유로 공격하지 않았다.[72] 19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저자들이 쓴 인문 역사 서적들에는 전 세계에서 몽골군을 이긴 유일한 나라가 일본 뿐이라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갔다. 사실 1990년대까지 국내의 세계사 관련 서적들은 거의 다 일본 서적들을 그대로 번역해서 나온 것들이었고, 그 밖에도 국내의 세계사 관련 지식이 매우 빈약했던 탓도 있었다.[73]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를 거두는 지역[74] 출처: 매일신문 사설 "일본 각료들의 자질을 우려한다"[75] 독특한 해석까지는 아니고, 일본에서도 몽골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많은 수가 이런 의견을 보이고 있다.[76] 굳이 따져보자면 김자점이 청의 침공을 유도해 혼란을 일으킨 뒤에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과 비슷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저런 혼란한 시점에 가마쿠라 막부를 급습하려고 하는 게 정상이다.[77] 도쿄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건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부터고 에도 막부시기쯤 되어야 현재 도쿄 모습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