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1. 개요
烈女
남편을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살아가는 아내를 일컫는 말. 뜻은 한평생 남편과 가문을 위해 열(烈)의 정신을 지키며 산 여인이다.
2. 열녀의 기원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중국 전국시대로 올라간다.
여기서 열녀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였다.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불사이군 열녀불경이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중국 전국시대 왕촉
3. 한국사에서 열녀
3.1. 조선시대 이전의 열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열녀에 대한 기록은 신라 진평왕 시기 설씨(薛氏)에 대한 이야기와 백제 개로왕 시기의 도미(都彌) 부인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고려 말 전란 속에서 수절을 지킨 여성들의 이야기가 고려사에 수록되었다.
3.2. 조선시대의 열녀
한국사에서 열녀를 가장 많이 강조했던 시대가 바로 조선시대였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유교사회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수절이 강조되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열녀를 장려하였고, 한 지역에서 열녀가 탄생하면 열녀를 기리기 위한 열녀문을 세웠다.
1413년(태종 13년), 태종이 전국의 이름난 효부, 열녀 등을 추천하라 명하자 백성들은 수많은 열녀 사연들을 올렸다.[1][2] 그 중에는 경상도 도관찰사가 추천한 한 사례가 있었는데 안동의 김씨부인이 남편을 구하러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았다고 한다. 태종은 저 먼치킨 스토리를 듣고 딱히 별말 없었다고 한다(...)참고
조선 전기에는 유교적 가부장제를 강화하기 위해 삼강행실도를 발간하여 열녀 제도를 장려하였다. 성종 시기에는 과부가 재혼하면 재혼한 여성의 자손들이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였다.
다만 이는 양반층에 한했고, 농업이 주된 일반 평민들 사이에선 부부 중 한 쪽이 없으면 농업을 이어가는 게 불가능해지니 재혼이 굉장히 일반적이었다. 조선이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나아갔으나 우리 민족들에게 남아있는 망탈리테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3.3. 양란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는 혼란과 무질서가 야기되었다. 양란 이후 조선 사회는 국가 질서 회복과 안정 추구를 중시하였다. 열녀의 개념도 이때 변화되어 정절과 순종이 점차 강조되었다.[3] 조선 초에 수절한 여성들이 열녀로 포상받았다가, 양란 이후 남편을 따라 죽었거나, 정조를 지켰거나, 남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들이 열녀로 포상받았다.
조선 후기 과부의 수절을 의무로 하는 풍속이 조선 사회에 생겨나며, 많은 여성들이 재가하지 않고 수절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서 열녀에 대한 보고가 전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3.4. 문제점
광명한 햇빛을 스스로 꺼버리는 일인데 어찌 장려하는가?
-연암 박지원, <열녀 함양 박씨전>
어떤 지역에 열녀가 나서 열녀문을 하사받으면, 지역에 큰 혜택이 돌아가는 점을 이용하여 각주에서처럼 억지로 손가락을 끊는 경우도 있었지만, 극단적으로는 여성을 의도적으로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순조 시기에는 이런 사건도 있었다. 상술한 것처럼 재혼한 과부의 자식들의 벼슬길이 차단된 것도 마찬가지였다.남편이 죽었을 때 처가 따라 죽는 것을 열(烈)이라 말하며 정표하는 문을 세우고 기둥을 붉게 칠하며 그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고 그 아들과 손자의 요역(徭役)을 감면해 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열이 아니라 소견이 좁은 것이다. 이것은 담당 관리가 살피지 못해서일 뿐이다.
-다산 정약용, <열부론>
이처럼 조선 후기부터 열녀에 대한 보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위와 같은 비판이 나온 것도 양란 이후 18세기~19세기 갑오개혁 이전까지였다.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부의 재가가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