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궁

 



1. 개요
2. 역사


1. 개요


영수궁(寧壽宮)은 태종후궁들이 모여서 살았던 궁가의 말한다.
왕실의 궁가인만큼 영수궁의 위치는 한성부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흔적이 없으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2. 역사


조선 전기에 왕이 죽으면 왕의 후궁들은 모두 궁궐을 나와서 거처를 별궁으로 옮겨야 했다. 당연히 후궁은 재혼이 허락되지 않았고, 자식들과 함께 사가에서 살지 못하고, 나라에서 마련해준 궁가에 모여 살았다. 이때문에 왕자, 왕녀들이 자신들의 생모를 모시고 살길 원해도 허락받기가 매우 어려웠다.[1]
태종이 승하하자 세종은 부왕의 후궁들을 위해 의빈궁을 설치하였다. 처음의 이름으로 보아 당시에는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의 거처를 의미했을 것이다. 의빈궁이 설치된 이후에는 자수궁, 수성궁, 창수궁, 정청궁, 인수궁 등이 설치되었다. 나중에 후궁의 궁가는 후궁들이 죽으면 곧 폐지되어, 중종 이후에는 자수궁과 인수궁만이 유지된다.[2]
궁가에 머무르는 후궁들은 모두 그에 걸맞는 예우를 받았다. 의식주와 관련된 각종 물품을 제공받고, 궁가의 유지를 위해 궁녀환관, 노비 및 여러 인력을 제공받았다. 당시 기록을 보면 신빈궁, 의빈궁 등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모두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는 곳을 부르는 말이다. 세조는 의빈궁에 별감과 소친시 8인을 두어 관리하고 시중들게 하였다.[3]
의빈궁은 세조 연간에 자수궁과 수성궁[4]의 제도에 의거하여 영수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5] 영수궁의 이름은 《성종실록》에서도 언급된다. 1471년(성종 2) 2월 이전까지 물품 등을 진상하다가 2월 이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더이상 선왕의 후궁들이 남아있지 않아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1] 예를 들어 금성대군은 자신을 키워준 의빈 권씨가 나이들어 병에 걸렸으므로 자신의 집으로 옮겨 간병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세종 연간에 궁인이 나가서 사는 일을 금지하였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 [2] 특히 자수궁와 인수궁은 불교에 귀의한 선왕의 후궁들이 불사를 행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3]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 11월 13일 갑신 2번째기사. # [4] 문종의 후궁들이 모여살던 궁가. [5]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 5월 22일 갑신 3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