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빈 권씨

 



'''조선 태종의 후궁
의빈 권씨 | 懿嬪 權氏
'''
'''빈호'''
의빈(懿嬪)
'''출생'''
미상
'''사망'''
미상
(향년 알 수 없음)
'''본관'''
안동(安東)
'''부모'''
부친 권홍(權弘)
모친 월성 이씨
'''부군'''
태종
'''자녀'''
1녀
(장녀) 정혜옹주
'''묘소'''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반정리 741
1. 개요
2. 생애

[clearfix]

1. 개요


조선 태종의 첫 번째 간택 후궁. 권홍(權弘)과 이학림(李學林)의 딸 월성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2. 생애


1402년(태종 2) 1월 21일 태종은 권씨를 후궁으로 맞이하기 위해 비단, 쌀 등을 주어 혼수를 마련하게 했다. 또한 권씨를 왕비세자빈처럼 예를 갖춰서 가례를 치르고자 했는데, 원경왕후가 식음을 전폐하고 눈물을 그치지 않는 바람에 태종은 권씨를 환관과 시녀 몇 사람으로 별궁에 들어오게 했다.[1]
이때 당시에 얼마나 소란스러웠으면, 상왕으로 있었던 정종이 나서서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종이 말려서 정식으로 가례를 치르지 않았을 뿐, 태종은 권씨를 무척 총애했다. 오직 권씨 한 사람을 위해서 궁궐 북쪽에 누각을 짓고, 누각 앞에 못을 파기까지 했으며, 1417년(태종 17) 명나라 사신을 맞이했을 때는 사신이 '권 궁주'에게 주기를 원해 금(錦), 단(段), 침(針), 분(粉), 주머니(囊) 등을 받았다.[2] 사신이 태종의 많은 후궁 중에 '권 궁주'라고 지목한 것은 간택 후궁인 데다가 태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은 권씨를 정1품 의빈(懿嬪)에 책봉했고, 태종의 사후에는 신빈 신씨와 함께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이때문에 조정의 비판을 받았고 정인지는 상소를 올려 권씨가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여 옛 모습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도성 안에 정업원이라는 존재가 떡하니 있었고, 왕실 여성들의 불교에 대한 믿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후 소헌왕후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맡아서 길렀고, 단종 대에는 혜빈 양씨의 처소에서 지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단종 일행과 가까운 듯하지만, 권씨의 사위인 부마 박종우는 정혜옹주와 결혼한 지 5년 만인 1424년에 사별해서 재혼한 후[3], 계유정난에 참여해서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또한 세조는 권씨가 지내는 궁을 영수궁(寧壽宮)이라고 부르게 하면서 예우했다.
[1]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3월 7일 경인 3번째기사. # [2] 태종실록 34권, 태종 17년 7월 25일 무인 1번째기사 # [3] 부마의 재혼 금지법은 효종 때였다. 문종의 유일한 서녀 경숙옹주의 남편 강자순도 옹주가 죽자 곧바로 을 들였고, 그것을 비난 받았으나 성종은 그를 벌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