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조선)

 


'''문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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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5대 국왕
문종 | 文宗'''

[image]
문종 현릉
'''문종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文宗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문종(文宗)'''
'''시호'''
'''조선'''
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
(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
공순(恭順)
'''출생'''
1414년 11월 15일 (음력 10월 3일)
조선 한성부 충녕대군저
'''즉위'''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
조선 한성부 영응대군저 동별궁 휘덕전(輝德殿)[1]
'''승하'''
1452년 6월 1일 (음력 5월 14일) 유시
(38년 6개월 16일 / 13,713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강녕전 혹은 천추전[2]
'''능묘'''
현릉(顯陵)
'''재위'''
'''조선 왕세자'''
1421년 11월 21일 ~ 1450년 3월 30일
(음력 1421년 10월 27일 ~ 1450년 2월 17일)
'''조선 국왕 대리청정(섭정)'''
1442년 7월 ~ 1450년 3월 30일
'''조선 국왕'''
1450년 3월 30일 ~ 1452년 6월 1일
(음력 1450년 2월 17일 ~ 1452년 5월 14일)
(2년 2개월 1일 / 79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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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향(珦)[58]
''''''
휘지(輝之)[59]
'''전호'''
경희전(景禧殿)
'''부모'''
부친 세종, 모친 소헌왕후
'''부인'''
휘빈 김씨, 순빈 봉씨, 현덕왕후

'''문종의 친필 글씨 (열성어필)'''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세자 시절
3.2. 왕위에 오른 후: 저평가된 명군
4. 외모
5. 3명의 아내를 두었던 홀아비
5.1. 공빈 최씨?
6. 가계
7. 사후
8. 독살설
9. 사극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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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5대 국왕. 묘호문종(文宗), 시호는 '''공순흠명인숙광문성효대왕'''(恭順欽明仁肅光文聖孝大王). 휘는 향(珦), 자는 휘지(輝之).
세종소헌왕후 심씨 사이의 8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3]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된 뒤 세종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다가 세종이 사망한 뒤 세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2년만에 어린 아들 단종을 남기고 사망한다.
태조-태종-세종-문종으로 이어지는 부자 계승의 임금으로서, 조선왕조 개국 초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마지막 임금으로도 평가받는다.[4]
조선왕조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다. 정종, 태종, 세종은 모두 적자이긴 했으나 장자는 아니었다. 단 그가 태어났을 때 세종은 왕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에(충녕대군 시절), 태어날 때부터 금지옥엽인 왕의 원자나 원손은 아니었다. 이 경우로서 최초로 왕위에 오른 사람은 그의 아들 단종이다.[5]

2. 상세


세종의 3년상을 치르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어린 단종을 남겨두고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재위 기간이 2년 정도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탈상도 못 하고 붕어했다. 하지만 세종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세종 말기 7년 반은 문종의 대리청정 기간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약 9년 반 정도였다. 이 대리청정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시킨 것 같은 야매가 아니라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한 실전 임금 연습이었기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무방하다.
대중 매체에서는 흔히 계유정난의 프롤로그에서 다뤄져서 병약하거나 잠깐 재위하는 모습으로만 그려지지만 실상은 선왕의 적장자, 29년간의 세자위 등, 정통성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 스스로도 총명해 동생들이 설설 기었다. 이 때문에 계유정난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종 스스로가 능력도 있고 정통성도 있어 동생들이 감히 대들지 못하니 그들이 그저 충직한 줄로만 알고 충분히 견제하지 않아, 문종 사후 후원 세력이 없는 어린 왕이 즉위하자 그 때까지 숨 죽여 살던 동생들이 딴 생각을 품을 수 있었기 때문.
또한 문종은 과학적 업적도 많고 병법에도 조예가 깊었다. 군사적 업적도 만만치 않아서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농담삼아 밀덕후라고도 부른다. 특히나 그가 재위 기간 동안 업적을 낸 부문은 세자 시절부터 관심을 가져온 군사 부문이다. 신기전을 100발로 추가시키고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위진법을 저술했다.(병력 편제, 결진, 용병, 군령, 장표, 전투 훈련) 이 오위진법의 이론에 따라 군사 조직도 기존의 12사 체제에서 5사 체제로 개편되었다. 과연 이성계증손자라고 할 수 있다. 측우기 또한 문종이 아이디어를 내 장영실에게 제작을 하명한 것이다.
조선 임금들 중 유일하게 왕후가 없었던 왕이기도 하다. 세자 시절 정실 둘은 쫓겨났고[6], 세번째로는 세자빈을 새로 뽑지 않고 후궁 중 쓸만한 사람을 세자빈으로 올렸는데 그만 단종을 낳고 죽고 만다. 그 후로는 새로 세자빈을 들이지 않았고 그대로 왕이 되었다가 너무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재위기간 중 중전이 없다.

3. 생애



3.1. 세자 시절


세종 치세 말기에 세종의 건강이 빠르게 악화되자, 세자로서 약 7년 반 동안 대리청정했다. 때문에 세종 치세 말기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봐도 된다.

3.2. 왕위에 오른 후: 저평가된 명군


"송나라가 문치를 택한 이래 오랑캐의 기병이 황성(皇城)을 횡행하고 다녔다. '''문(文) 역시 중요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하루에 무(武)에 소홀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혹자는 임금이 직접 무기를 조련하고 손질하는 것에 임금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지만 내가 직접 무기를 정비하는 이유는 '''하루도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환란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성상께서 부국 강병 등에 대해 논의하다

"송(宋)나라의 무비가 한(漢)나라·당(唐)나라에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매양 이적(夷狄)우환이 있었으니, '''국가의 무비는 진실로 닦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오로지 숭상할 수도 없다.''' 문(文)을 숭상하되 무비를 닦지 아니하면 경계할 만한 송(宋)나라의 예(例)가 있고, 문덕(文德)을 닦지 아니하면 또 진(秦)나라·수(隋)나라의 예(例)가 있다. 내가 근일 자주 관사(觀射)[7]

를 하니, 글 읽는 사람들도 따라서 사모하여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이가 많은데, 이는 비록 주지(主志)가 없는 선비이겠으나, 또한 무(武)를 숭상하는 징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군병(軍兵)을 훈련하고 한편으로 학문을 흥작(興作)하는 것이 또한 옳은 일이니''', 후일에 친히 성균관(成均館)에 나가서 학생들을 권려(勸勵)하겠다."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사헌 집의[8]

신숙주가 궐내에 있는 공장[9]을 파할 것을 청하다 #

'문종(文宗)'이라는 묘호 때문에 문약한 군주로 인식되고는 하나 이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쓴 박영규마저도 "문종은 병약했으나 문약은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일단 사후에 아들 단종이 올린 묘호가 문종인데 중국의 예법으로도 꽤 고평가를 받는 묘호이다. 고려문종은 고려의 전성기를 이룩한 성군으로 평가받는다.[10] 문종은 대리청정을 하며 세종 후반기 정책을 주도하였으며 재위 기간 동안 언론의 활성화, 역사책 편찬, 병법의 정비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유연함과 강함을 병행하는 정치를 실시하려고 했다. 문종은 6품 이상까지 윤대를 허락하는 등 하급 관리들의 말도 빠짐없이 경청하는 등 열린 정책을 펴는 한편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문종은 역사와 병법을 정리함으로써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제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세자 시절부터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문종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가장 발달시킨 게 바로 군사 부문이다. 경연 때 병서를 강연하자고 했을 정도로 조선 왕조에 유례가 없는 밀덕후 군주. 스스로 자부심이 있었는지 실록에 자신의 병법이 제갈량보다 조금 모자랄 것이라고 자화자찬하는 부분이 있다. 짧게 보는 문종과 수양대군의 일화[11]
무기 제작에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다며 이를 비판하던 신숙주가 '''"주상이 숭상하는 것을 만인이 숭상하는 바이니 주상께서 무(武)만 숭상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다 무(武)에만 관심을 가집니다."'''라고 문종에게 말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문종은 "군사를 준비하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인데?"라며 일축했다. (신숙주와 문종의 대화)[12]
개국 이후부터 병사들이 패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멋대로 환도의 칼을 분질러서 짧게 만들고 다니거나 심한 경우 칼 자루만 남겨두고 칼날을 없애는 막장스러운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법적으로 기병보병의 환도 길이를 규정했다.[13]
세자 시절의 대리청정과 재위 기간을 통해 부왕의 사업을 이어받아 4군 6진의 북방 정비를 완료했으며, 군제를 개편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재정비하고 병력을 증강했다. 화차 같은 신병기도 직접 설계했으며, 세종 기에 이뤄진 화포의 규격화 및 국가적인 법제화, 부대 운영과 인원수의 결정 등에도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종 항목을 참조.
또한 문종이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전쟁사를 정리한 《동국병감》을 편찬하라 명하였다. 현존본은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즉, 책 자체는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지만 현존하는 책이 선조 41년에 간행된 책이고, 문종조에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어서 '문종의 명으로 편찬되었고 선조 41년에 간행되었다'고 한다. 결국 이 또한 문종의 업적이다.
'병장도설'도 문종이 편찬했다고 하는데 여기보면 문종은 진법을 편찬했고 그걸 성종조에 개정했다.
나아가 문종은 직접 화차(신기전)를 개발해 그 운영법을 스스로 정하고 진법을 짜는 방법도 치밀하게 고안해 낸 진정한 화력덕후이자 밀덕후 군주다. 평지에서는 2명, 오르막 길에서는 4명이 운영하게 하였으며 장전에서 발사 과정 그리고 불발탄 처리 방법까지 완벽하게 구현했다. 이 화차를 '문종화차'라고 하는데, 이 화차는 후기에 성종 조에 "나라에서 화차를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으니 잘 쓰도록 하라."는 말이 나올만큼 큰 활약을 한다. 기사를 찾아서 읽어보면 적의 위치를 확인하고 사격을 해서 타격을 줄 경우에는 그야말로 당시로써는 핵폭탄 급이었고, 설령 맞추지 못한다고 해도 그 소리와 빛 때문에 여진족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는데 급급했다.
논의만 하고 끝나기는 했지만 북한산성 축성도 고려했던 인물이다. 만약 북한산성이 이때 축성되었으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상당히 골치아픈 존재가 되었을 것이며 병자호란 때는 여기로 인조가 피난했다면 남한산성 임시 행궁에 홍이포를 발사했던 일 등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14]
이런 면모들로 역덕후들은 이 페이지에도 여러 번 나오듯 '밀덕 군주'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문종의 군사에 대한 관심을 단순 취미 수준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문종이 짧은 치세기간에 군사 부문에 집중한 것은 단순히 군사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절박하게 필요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종 말엽에 조선은 토목의 변 소식을 전해듣고 말 그대로 비상이 걸린다. 오이라트의 대대적 침공은 결국 현실화되지 않았지만, 이건 후대의 속편한 소리고 당시 상황은 상당히 급박했다. 세종은 이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북방의 방어체제를 일신하려는 노력을 사망 직전까지 기울인다. 이 당시 국가행정에 깊이 관여했던 문종이 이를 몰랐을 리가 없다. 나무위키의 밀덕후 항목도 고작 문종이 '경연에서 병서를 읽자고 했다는 이유'를 들며 문종을 밀덕후 목록에 올려놓고 있지만, 이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고려 멸망의 직접적 원인이 전방위적인 외침이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의 위정자들은 안정적인 군제 정비와 군대 양성에 대단히 신경을 많이 썼다. 문종은 왕으로서 자기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를 '덕후'라 부르는 것은 당치않은 노릇이다. 그렇게 따지면 정도전을 비롯해서 조선 전기에 군사 문제를 고민했던 정치가들은 모두 밀덕후 목록에 올라야 할 것이다.[15][16]
농업과 과학 등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흔히 장영실의 작품으로 알고 있는 측우기의 제작 아이디어도 사실 세자 시절의 문종에게서 나왔다. 가뭄이 들자 땅을 파 젖은 깊이를 쟀는데 부정확하자 구리통을 만들어 비 온 양을 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구휼 제도(환곡제도)에도 관심이 있어서 태조 때 설치한 의창의 원곡이 부족해지자, 세종 때 대구에서 시범적으로 시행한 사창제를 1451년(문종1년) 제도화하였다.[17]
이 정도까지 보면 명군 축에 속할 만하다. 그러나 여러 고정 관념 때문에 후세 사람들에게 오해를 많이 사는 왕.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는 조선의 임금 중 하나다. 대리청정과 관련하여 실록에 따르면 세종 24년 7월부터 추진하여 세종 말기 7년 반은 문종의 대리청정이 지속되었다.
  • 안평체의 안평대군과 더불어 상당한 '명필'이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글씨를 받아서 본을 뜨려고 했을 정도.#
  • 우애도 지극해서 동복동생들은 물론 이복동생들도 아껴주었다고 한다. 신빈 김씨의 아들인 담양군이 장가 들기 직전 12살의 나이로 요절을 하는데, 아우사랑이 지나쳤던 탓인지 아직 납채도 안한 상대 약혼녀에게 '장가도 못 가고 죽은게 너무 불쌍한데 상복 입고 장례 좀 치러주면 안될까'하고 부탁해서 신하들을 벙찌게 만든다. 물론 양갓집 규수 하나를 비녀도 안 올린 과부로 만들 수는 없어[18] 신하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문종이 계속 애를 썼지만 논리에도 안 맞는 일이고 왕족의 신붓감이 될 만큼 세력도 있었던 집안이라 결국엔 우야무야되고 말지만, 이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로 장남답게 아우들은 극진히 챙겼던 셈.[19]
  • 수양대군이 국법을 어겼을 때도 몇 번이고 상소를 올려 지적을 해도 그때마다 '수양은 충직하여 다른 마음이 없는 사람이다'라며 끝까지 보호했다.
  • 수양대군의 행위를 미리 예방하지 못했다고 하나 문종은 나름대로 할 수 있는데까지는 했다. 신권을 강화시켜 왕족을 견제시키고 믿을 수 있는 신하들(김종서, 황보인, 정분 등 고명대신들)에게 단종의 보좌를 부탁한다. 문제는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킬 때 쓴 사유가 신하들이 단종을 농락한다는 주장이었고 이로 인하여 수양대군의 행동이 일부 왕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비(妃)를 들여서 사후 단종에게 든든한 후원세력을 만들어주었다면 더 나았을거라는 평도 있지만, 역으로 조선 후기의 꼴이 될 가능성도 있다. 물론 성종의 사례처럼 수렴청정이 무난하게 이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문종 본인의 왕권이 워낙 막강했던데다 문종은 훗날 사극에서 보여주는 유약한 이미지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이 시기 수양대군은 형인 문종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문종실록에는 수양대군이 사극에서 마냥 전횡을 일삼는게 아니라 열심히 문종의 비위를 맞추고 다녔던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다.
  • 거기다 단종은 아버지인 문종보다 훨씬 강력한 정통성을 지닌 왕이었다. 후대의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가 그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왔는데, 왕의 아들로 태어난 숙종보다 의 손자인 원손에서 세손, 세자, 왕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갔던 단종의 정통성이 훨씬 강력했을 것이다. 거기다 그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문종의 정실 세자빈이었으니[20] 단종은 적장손이기까지 했다. 이처럼 태어날 때부터 누구도 넘볼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완벽한 왕위 계승자였으니 그의 왕위를, 그것도 아버지의 동생이 빼앗기란 명분상으로도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애시당초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은 <왕과 비>부터 <인수대비>까지 방송사 불문하고 사극들이 죄다 '''문종을 병약하고 힘없는 임금으로 그리고 문종 때부터 수양대군이 설치고 다녔다고 왜곡한 탓이 크다.''' 수양대군의 세력은 문종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단종 때도 경쟁세력들 중 가장 약한 축이었다.[21] 만약 문종이 5년 내지 10년만 더 오래살아 단종이 완전히 성인이 되었던 상태였거나 왕실에 수렴청정할 어른 한 명[22]만 있었다면 수양대군은 기껏해야 태종 시기 의안대군 이화 정도의 위상에 만족해야 했을 것이다. 단종 역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견제세력으로 김종서 등 대신들이 있었고 종친 중에도 안평대군, 금성대군같은 견제세력이 있었기에 수양대군이 그렇게 막나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하다.
문종은 기록 면에서도 불운했다. 조선의 26명 임금 가운데 가운데 '''유일'''하게 '''재위 기록이 일부 소실된 임금'''이다. 문종실록 열세권 가운데 11권(음력 1451년 12월 ~ 1452년 1월)이 사라졌는데 '전주사고'의 문종실록 11권이 표지는 11권이였지만 내용은 9권으로 잘못 들어가 있었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실록을 제외한 나머지 사고와 실록들이 죄다 불타면서 9권 표지를 단 책을 포함한 나머지 문종실록 11권이 모두 사라졌고, 임진왜란 이후 전주사고 실록을 복사하는 과정에서 문종실록 일부가 사라진 것을 알았지만 남은 사본이 모두 사라져서 복원할 수는 없었다. 조선 후기였다면 내용을 짐작할 승정원일기라도 남아있었겠지만 전기 승정원일기는 전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추측밖에 할 수 없다.

4. 외모


기록에 보자면 문종은 체격도 크고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우와 같은 풍모를 보였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12살 때 명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연회인 하마연을 열었는데, 이 때 사신은 문종의 외모를 극찬하며 '이 나라는 산수(山水)가 기절(奇絶, 기이하고 절묘)하므로 이런 아름다운 인물이 난다'고 말하였다.(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윤7월 19일 병진 2번째기사) 외교관의 특성상 립서비스가 있음을 감안해도 문종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케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런 일화가 있는데, 병자호란 이후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가 큰 왕의 어진이었는데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신익성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23] 다른 신하들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어진의 표장을 고치기 위해 묵은 배접을 벗기자 그 뒤에 '문종대왕 어진'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여러 난리통에 겨우 건진 문종의 어진은 소실되고 말았다.

임금의 화상 한 본이 있었는데 후에 잃어버렸다. 신익성(申翊聖)이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24]

을 방문하고, 조용히 말하되, "병자호란 뒤에 비로소 열성(列聖)의 모습이 그려진 족자 한 축을 얻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인종(仁宗)의 어진이라고 의논하였다 하였지만, 나는 그 용안의 수염이 길게 그려졌다는 말을 듣고 혼자 문종의 어진이라고 하였더니, 대신들이 듣고서 낭청(郞廳)을 보내어 상세한 내용을 말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문쇄록(謏聞瑣錄)》 속에 기록된 문종의 수염이 매우 길었다고 한 부분에 찌를 붙여 보냈습니다. 대신들이 그래도 안 믿더니, 다시 표구할 때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그 뒷면에 문종의 진(眞)이란 글자가 씌어 있으므로, 의논이 드디어 정해졌습니다." 하였다. 김시양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 야록(野錄) 중에 있는 문종의 의표가 웅위(雄偉)하고, 수염이 매우 길다는 구절은 기억하나 《소문쇄록》을 지은 조신(曺伸)은 곧 연산군 시대의 조위(曺偉)의 서제(庶第)로, 문종을 뵈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고, 《소문쇄록》을 가져다 살펴보니, 그런 내용이 없고 그 말이 씌어있는 책은 《용재총화(慵齋叢話)》였다. - 《하담록(荷潭錄)》

요지는 인종의 어진이라 믿고 있던 그림에 대해 신익성이 '수염이 길다'는 말을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는데, 신하들이 '님 출처 제시 좀'이라고 신익성에게 묻자 그는 '소문쇄록에 그런 기록이 있다'고 근거를 제시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았으나 나중에 어진을 손보기 위해 묵은 배접을 벗겨 보니 뒷면에 '문종대왕 어진'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는 얘기. 하지만 김시양이 이 일에 대해 "나도 신익성의 말처럼 문종의 수염이 길다는 구절은 봤는데, 소문쇄록은 연산군 때 누구누구의 동생이[25] 지은 거니 그 사람이 문종을 만났을 리 없잖음?" 이라고 했고, 소문쇄록을 뒤져 보니 그런 기록이 없었으며, 문종의 수염이 길었다는 기록은 용재총화에 있었다는 얘기다. 출처 제시가 잘못되어서 옳은 얘기를 하고도 신하들에게 무시당한 듯하다. 다만 용재총화는 중종 때 저술된 야사이다. 하지만 문종의 수염이 길었다는 기록이 소문쇄록에는 없었고 용재총화에 적혀 있었더란 얘기다. 아무래도 신익성이 혼동을 했던 모양.[26]

5. 3명의 아내를 두었던 홀아비


첫 번째 세자빈인 휘빈 김씨는 야사에 박색이었다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로 세자가 첫날밤 이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에 세자빈은 남편을 꼬시기 위해 이상한 술법을 쓰다가 폐위되었다. 문종에게 사랑 받는 궁녀의 신발을 앞코를 잘라 태워서 재로 만든 다음 문종한테 먹이면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다는 말 등을 듣고 실행하다가 들킨 것.
두 번째 세자빈 순빈 봉씨는 세자빈 후보 중 외모가 예쁜 사람을 간택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자신이 순빈 봉씨를 총애하면 한나라의 여후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순빈 봉씨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문종과 관계가 멀어진 후 순빈 봉씨는 궁녀와 동침하는 황당한 행동을 하여 폐위되었다.
차기 왕이 될 왕세자가 후사를 못 본다는 건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세자빈이 두 번이나 쫓겨난 상황이라 세종의 생각은 3번째 세자빈은 새로 간택하지 말고 기존 후궁 중 1명을 올리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하여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를 새로운 세자빈으로 뽑았다. 문종과의 관계는 문제 없었지만 이번엔 세자빈이 단종을 낳은 직후 사망하여 다시 세자빈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새 세자빈을 뽑는 문제는 흐지부지되었고, 문종이 즉위한 후에도 결혼하지 않았기에 조선에서 재위할 동안 유일하게 한번도 왕비를 두지 않은 왕이 되었다.
의례상의 중전 역할은 수석 후궁인 숙빈 홍씨가 대행하였다. 1441년 아내 현덕왕후가 사망한 이후에, 1446년 어머니 소헌왕후가 사망하고, 1450년 아버지 세종이 사망한 상황에서 문종이 왕비를 세울 틈이 없었고, 탈상하자마자 문종이 사망했기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연이은 초상에 미처 대처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단종이 즉위한 후, 그를 보호하며 수렴청정을 할 왕실의 웃어른이 없어서 왕권이 약화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세종대왕에 필적하는 성군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재위 2년 만에 여러 골치아픈 문제들을 어린 단종에게 떠넘기고 과로와 여러 요인으로 작용된 병으로 세상을 뜬다.[27] 그렇다고 해서 문종이 아주 단명한 왕은 아닌데, 문종은 성종보다 오래 살았다.[28] 세종 말년에는 강무나 종묘 제례같은 국가 중대사까지 대신하는 등 사실상의 국왕 업무를 권한대행했지만 실제 재위기간이 짧았던 탓에 몸이 약하고 요절했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차기 국왕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최초의 적장자 출신 임금이라는 정통성도 완벽했기 때문에 그 위세도 대단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문종이 몇 년만 더 오래 재위했다면 단종의 보위는 안정화에 접어 들었을것이고, 계유정난과 같은 끔찍한 살육전이 없었을 것이다.[29] 그럼 적어도 단종은 세자 시절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한 사건은 없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위 단락의 이유로 단종을 늦은 나이에 얻었고, 후계자인 단종이 자신의 사후에도 별 탈 없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 만한 확고한 권력 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한 상황에서 사망하는 바람에 권력 공백을 초래했다. 물론 문종의 뒤를 이를 세자 자체의 정통성이야 최강이었지만 문제는 그의 나이(문종이 승하할 당시 단종의 나이는 겨우 11~12살)가 너무 어렸고 그를 뒷받침할 왕실의 내명부 어른(대비, 왕대비, 대왕대비는 단종 재위 시절에는 모두 죽고 없음)이 부족했다는 점. 문종 정도로 뛰어났던 군주가 동생 수양대군의 강력한 야심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텐데 이렇다 할 확실한 대비책을 세워놓지 않았다.[30] 게다가 문종에게는 수양대군이 딴 마음을 먹을 경우를 대비할 만한 방법이 여럿 있었다. 일단 왕비를 다시 한 번 들이기만 해도 최소한 단종을 대신해 수렴청정할 대비 1명을 만들어 둘 수 있으며[31], 극단적으로는 장래의 화근에게 적당한 죄를 뒤집어씌워 제거해버린다는,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고 효과도 확실한 방법도 있었다.[32] 다만 문종 당시에는 수양의 세력이 워낙 약했고 계유정난 당시에도 수양의 세력은 대신들, 종친들 가운데서도 강하지 않았다. 어쩌면 문종도 그것을 고려해 '''수양이 방해물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고 놔둔 것일 수도 있다.'''[33]
다만 문종이 병약해서 자식을 못 낳아 문종이 어린 단종만 낳았다고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문종은 당시 40세 가까이 살면서 현덕왕후와의 사이에 1남 2녀(단종, 경혜공주, 요절한 맏딸)를 포함해 '''3남 5녀'''를 보았다. 전근대 시절 높은 유아사망률 때문에 1남 2녀만 생존하게 된 것이고 유일한 아들 단종도 28세에 보았으니 아주 늦게 본 것도 아니다.[34]
사실 숙빈 홍씨를 가장 총애하거나 승은 후궁 사칙 양씨와 상궁 장씨 등이 있는 걸 보면 여자에 관심이 없다는 이미지는 실화가 아닌듯하다.
약간 딸바보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문종의 장녀이자 단종의 동복누나 경혜공주가 혼인해서 살림집을 마련하기 위해 한성부 양덕방[35]의 민가들을 허물고 새로 지어 주었다. 신하들이 공주의 집을 위해 30여 채나 철거했다며 이는 지나친 행위라고 비판하자 문종은 "다시 조사해 보니 5채만 허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차피 벼슬아치들이라서 다른 집에 가서 살 수가 있는데 뭔 상관이냐?"라며 반박하였다.

5.1. 공빈 최씨?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의혹이 있는데, 문종 대에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한 문종의 계비로 추정되는 인물로 공빈 최씨영조실록에 등장한다. 현덕왕후 권씨를 관련 문헌에 "원비"라고 적었는데, 보통 원비라 함은 뒤에 계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적합한 문헌을 찾을 수가 없어서 의문으로 끝났다. 그리고 명사(역사책)에는 "조선 국왕과 왕비 '''최씨'''에게 고명과 면복을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빈 최씨 묘비에는 예종의 후궁이라고 표기되어 있지만, 공빈 최씨의 아버지인 최도일[36]의 묘비에는 공빈 최씨가 문종의 왕후라고 표기되어 있다. 세조실록에는 "최도일의 딸을 세자의 후궁인 소훈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공빈 최씨는 문종의 계비가 아니고 명사와 묘비의 내용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었다.영조실록 영조는 그 근거로 소헌왕후와 문종이 승하했을 때 따로 중궁의 복제, 즉 소복을 입는 형식을 정하지 않은 점, 단종 때 '중궁에 아무도 없으니 귀인 홍씨(문종의 후궁)가 내정을 총괄하도록 하라'라는 상소가 올라왔다는 점, 세조(당시 수양대군)가 단종에게 '모후와 왕비 모두 없으니 왕비를 맞아들여 후사를 구하라'라는 상소를 올린 점 등을 꼽았다.
정조 15년에 다시 이 문제가 재차 상소에 올라와 다시 조사한 결과 역시 공빈 최씨는 문종의 계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와 정조는 이 결론을 조보에 반포하여 뒷말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한다.정조실록 하지만 이 문제는 고종 24년(1887년)까지 끈질기게 상소에 올라오고 있다.고종실록 물론 이 역시 영조의 결론처럼 명사가 틀렸다고 결론을 내렸다. '경솔하고 근거없이 이런 상소를 올리는 자를 벌해야 한다'라는 발언도 나왔으나 고종은 '그냥 잘 몰라서 그랬다고 자백했으니 풀어주고 잘 타이르는(曉諭) 것으로 끝내라'라고 결론을 내렸다.
물론 틀렸다고 해도, 왜 저런 기록이 남아있는지는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선 앞서 언급한 정조 대의 논쟁 때 문제의 명사 부분은 정식으로 출간한 정본이 아니라 초고이므로 아직 제대로 된 첨삭이 되지 않아서 틀렸을 수 있다는 추측이 나왔다.

6. 가계


  • 아버지: 세종 이도
  • 어머니: 소헌왕후
  • 폐빈: 휘빈 김씨
  • 폐빈: 순빈 봉씨
  • 정비: 현덕왕후 권씨
    • 딸: 왕녀(1433년~1433년 3월 3일)(후략) -《세종 15년 3월 3일 병진 1번째기사》">[37][38]
    • 딸: 경혜공주(1436년~1473년 12월 30일)
    • 아들: 단종 이홍위(1441년 7월 23일~1457년 5월 14일)
  • 후궁: 숙빈 홍씨
    • 딸: 왕녀(1441년~1444년 12월 4일)[39]
  • 후궁: 숙의 문씨
  • 후궁: 소용 정씨
    • 아들: 왕자(?~?)[40][41]
  • 후궁: 소용 유씨
  • 후궁: 소용 권씨
  • 후궁: 소용 윤씨
  • 후궁: 궁인 장씨
    • 아들: 왕자(?~?)[42]
  • 후궁: 사칙 양씨
    • 딸: 경숙옹주#s-2(1439년~1482년 이전)
    • 딸: 왕녀(1450년~1451년 8월 12일)[43]

7. 사후


[image]
그가 사망한 이후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단종이 '''문종'''이라는 묘호를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안에 있는 현릉(顯陵)이다. 단종의 생모인 현덕왕후와 안장되어 있는데 동원이강릉 형식의 능묘이다. 본래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에 승하해서 안산시의 소릉(昭陵)에 묻혀 있었고 문종은 1452년 승하한 후 지금의 능에 묻혔는데 이 때 현덕왕후의 묘를 이장해서 남편 문종이 있는 동구릉 내 현릉에 함께 묻었다. 그런데 현덕왕후 집안이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자 세조는 1457년에 형수를 폐서인하고 무덤을 파헤쳐 버렸다. 세조가 괜히 욕먹는 게 아니다. '''형수는 형과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 즉, 단순히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 게 아니라 '''형의 무덤을 파헤쳐 버린 것.''' 문종 독살설 같은 게 설득력을 얻는 이유도 이 때문. 현덕왕후가 오늘날처럼 문종 곁에 묻힐 수 있었던 것은 중종 때인 1513년 다시 왕후로 복위되었을 때였지만 합장되지는 못하고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안장되었다.
거기에 수양은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현릉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과 다섯 아들들을 죽였는데 이들을 참살한 장소 역시 형의 무덤이었던 현릉이었다. 세조가 찬탈 뿐만 아니라 우애까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패륜아라고 두고두고 까이는 이유 중 하나. 이쯤 되면 세조는 형 문종에게 열등감이나 질투심 같은 뭔가 쌓인 감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할 정도다.
사실 세조가 문종에 대한 악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세조는 세종 대부터 이미 야심이 매우 강했고, 은연중에 자신의 능력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이 형 문종보다 더 유능함을 어필하려는 흔적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정통성이 확실하고 본인의 능력 자신이 비비지 못할 정도로 뛰어났던 문종이 폐세자되고 세조가 세자로 등극할 가능성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좌절감과 극도의 야심이란 심리가 형 문종에 대한 악감정을 증폭시켰을 가능성이 크다.[44]
문종 화차의 복원에 얽힌 실화가 있다. 한국 고화기 연구가이자 로켓 공학 박사, 국내 최초 화차 복원자인 채연석 박사가 문종 화차를 복원하려 했으나 부품 조립이 제대로 되지 않자 하다 못해 어느날은 문종왕릉에 화차와 관계된 자료가 없을까 하고 찾아갔다가 자료를 전혀 찾지 못하자 몰래 들어가 왕릉을 붙잡고 호소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서 화차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대로 복원을 했더니 제대로 되었더라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나올 듯한 신기한 이야기. 문종의 현릉은 지금도 능침 바로 앞으로 올라가지 못하게 울타리로 막아 놓았다. 이렇게 울타리를 쳐 놓은 능들은 별도의 안내원 인솔 없이는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하는 것이 원칙. 왕릉에 가면 꼭 울타리 넘어가서 능침 앞까지 올라가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지 말자. 현릉이 있는 동구릉에서 능침 앞까지 올라가도 되는 능은 선조의 목릉 뿐이다.농담이 아니라, 이 일화는 채연석 박사가 쓴 책인 <로켓이야기>에 자신의 경험이라고 나오는 이야기다.

8. 독살설


조선왕 독살설 중에서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는 설이다. 문종이 즉위 후 2년 밖에 살지 못한 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쳐서 그런 것이지만.
문종은 세종 말기에 심각한 병을 자주 앓아 아버지에게 손자 걱정까지 하게 만들긴 했지만, 원래 몸이 그리 약한 편은 아니다. 오히려 고기를 좋아하고 운동을 꺼려서 생긴 비만에 당뇨성인병이 있었던 아버지 세종에 비해서 체격도 엄청 좋았고[45] 무예에도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사망의 원인은 할아버지인 이방원과 같은 종기.[46] 태종, 현종, 정조 등 조선 시대 왕의 사망 원인 중 상당수가 종기였다.[47]
원래 고질병이었긴 했으나 당시 어의 전순의가 병을 오히려 키우는 처방을 내려 죽음을 앞당겼다는 설이 제기된다. 식이요법의 중요성을 주장한 책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식료찬요(食療纂要)》를 저술한 것 외에도 "전통 온실" 등에 대한 놀라운 기록[48]을 남겼고, 이후로도 어의로 계속 재기용되었던 그는 계속 문종의 종기에 나쁘다는 열이 많은 음식인 꿩고기와 활쏘기 구경 등을 처방으로 내렸다.
문종실록에서 문종의 사망 장면은 기가 막힌 수준이다. 실록에서 대놓고 어의가 능력 없다고 까고 있을 정도이다. 전순의는 문종이 회복 중이라고 주장했고, 결국 말도 하기 힘든 지경이 되어서야 청심환을 들이는 등의 기존 치료법이 시도되었으나 때를 놓치고 유언도 제대로 못 남기고 사망한다. 이 때문에 문종은 고명대신(顧命大臣, 임금의 유언으로 나라의 뒷일을 부탁받은 대신)이 없다. 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은 모두 세종의 고명대신이다.
이 전순의는 귀양 갔다가 수양대군의 쿠데타 이후 공신에 책봉되고 복권되었다. 다만 전순의가 책봉된 공신은 원종공신으로 급이 크게 떨어지며, 1등만 무려 79명이다. 정작 이보다 윗등급인 좌익공신에서도 성삼문, 이휘가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고, 원종공신 중에도 단종복위운동으로 이름이 떨어진 사람이 많다. 원종공신까지 합하면 세조 때 공신이 된 인물은 2,000명.
전순의를 탄핵한 것은 대부분 삼사(대간)였는데, 이를 반대한 것은 김종서와 황보인 등의 세종의 고명대신(권신), 즉 세조의 반대파였다. 오히려 세조 쪽인 신숙주는 이에 대해 "대간들 얘기가 맞는데 왜 전순의를 싸고 돔?"이라면서 대신들을 깠다.
문종의 죽음은 독살과는 관계 없고 본인의 스트레스+건강 악화, 아버지 세종에 대한 지극한 병문안에 따른 결과라는 이야기도 있다. 역사학자 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계유정난 편에서 문종 독살설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문종의 어머니인 소헌왕후 심씨가 1446년에 사망하여 3년상을 치른 뒤, 이어 1450년에 세종이 붕어하여 다시 3년상[49]을 치른 탓에 기력이 쇠하였을 것이라고.
상주로서 장례를 치러본 사람은 알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상주가 되어 3일장을 치르고 난 뒤에는 온 기력이 다 쇠한다. 의료기술이 발달하고 건강에 대한 정보와 관심이 많은 현대 사회에서 사흘만 장례를 겪어도 이런데, 이걸 3년 내내 겪고 1년 후에 또 3년을 겪는다면? 항우장사라도 버텨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종 역시 풍채가 좋고 무인 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으나 총 6년이나 상주 노릇을 이어서 한다는 건 그에게 있어서는 좀 무리였을 것이다. [50]

9. 사극


드라마 한명회에서는 송승환이 연기했다. 문종 배역은 통상 이 문단 하단에 서술된 이유 때문에 실제 인물보다 훨씬 나이든 배우가 맡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만큼은 실제 인물과 거의 비슷한 연령의 배우[51]가 담당하였다.[52]
드라마 왕과 비에서는 전무송이 문종을 맡았다.[53] 서서히 죽어가는 문종과 단종을 걱정하는 아버지로서의 문종의 모습은 최고로 평가된다. 제2화에서 사망하나, 이후 때때로 회상씬에서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선우재덕이 연기했다. 회상씬에서 세종에게 "나약한 세자 따위 갈아치우고 강한 수양대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역설하는 양녕대군에게 "자네가 한 일이 뭔가!"라는 면박을 받았다. 세자 섭정을 맡아 국정을 잘 이끌었고 세자 시절에 이미 과학, 문화, 군사적 업적들을 세운 문종에게 부당한 비난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말 한 것 없이 비행을 일삼다 폐세자가 된 양녕이 모범생 문종에게 할 말은 아니다. 이 사극 극본이 왕과 비의 정하연 작가인 것을 생각하면 세조빠 문, 단종까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양녕대군이 이랬으면 왕의 백부고 나발이고 바로 역적으로 탄핵받고 숙청이다.
KBS 대왕 세종에서는 제법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세자로 책봉되던 어린시절부터 세종 말년 대리청정하는 시기까지 나온다. 어린 시절은 아역배우 강빛이, 성인 시절은 탤런트 이상엽이 맡았다.[54] 여기서는 아버지 세종대왕을 닮아 똑똑하고 능력 있으며 신하들과의 관계도 두터운 훌륭한 왕재로 나와, 기존 사극 중에서는 문종을 가장 잘 그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55] 다만 세자 시절을 자세히 다루다보니 그 대가로 세자빈들로 마음고생하는 것까지[56] 상세히 다뤄졌다. 세자빈이 죽을 때 비가 내리며 문종의 눈물과 빗방울이 겹쳐지며 OST 소원이 흘러나오는 씬은 드라마 전체로 보아도 가장 애잔한 장면.
KBS 2TV 공주의 남자에서는 야인시대최동열 기자로 유명한 배우 정동환이 문종 역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해당 작품에서 장년 김두한 역할로 출연한 배우 김영철이 수양대군 역할로 출연해 묘한 분위기를 이뤘다. 여기서는 몸이 많이 약해져 병마에 시달리는 임금으로 나오면서도 어린 자식들을 너무나 끔찍히 아끼는 자식바보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image]
영화 관상에서는 김태우가 맡아 단종을 걱정하고, 수양대군의 야심에 노심초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관상 참조. 여기서는 수양대군의 눈치를 보는 모습은 안 나오고 대신 낌새는 어느정도 알고 조사하려고 했으나 결국 수양대군과 측근들은 역사대로 문종이 죽기 전까지는 꼼짝을 하지않고 조사를 교묘히 방해했으며 문종이 죽고 바로 행동에 들어가 역모를 성공시킨다.
상술한 내용에도 나오듯이 전체적인 경향을 보면 30대 후반에 사망한 임금이지만, '문약'하다는 기존의 이미지 때문에 40대 이상의 중장년 배우가 맡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계유정난이 낀 작품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짙은 듯 하다. 예를 들자면, 왕과 비에서의 전무송이나 공주의 남자에서의 정동환은 문종을 연기할 당시 2명 모두 예순 전후에 30대 후반에 죽은 문종을 연기한 것이다. 다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는데, 바로 세조 역의 배우가 대부분 중장년이다 보니[57] 그 형인 문종 역시 젊은 배우를 쓸 수 없다는 것이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천문에서는 박성훈이 분했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세자로 등장하는데, 전체적으로 큰 영향력 있는 역할은 없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작중에서 세종이 문종에게 선위를 하겠다고 선언하는 소동도 벌어진다. 그리고 문종의 업적 중 하나인 측우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장면이 짤막하게 등장하기도 한다.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세종의 적장자이고 화차 등등 군사부문에서 능력을 보여주었고 수양대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자주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가 있다.

10. 관련 문서



[1] 세종의 빈전이 설치된 동별궁에서 상을 치르다가 세종 사망 5일 후 상복 차림으로 빈전 밖에서 즉위했는데, 즉위식 도중에 눈물을 흘리느라 상복 옷소매가 다 젖었다는 기록이 있다.[2] 문종실록에서는 유시에 강녕전에서 훙서했다고 하나, 단종실록 총서에서는 또 문종이 천추전에서 훙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확실하진 않으나, 천추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니 이미 병환이 위중했던 문종이 천추전에서 거처하다가 사망했을 리는 없고, 침전인 강녕전에 있다가 사망했을 것이다.[3] 위로 누나 정소공주, 아래로 여동생 정의공주가 있다.[4] 단종 또한 조선왕조 개국 초기의 전성기를 구가한 임금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잃고 세조에게 왕좌를 빼앗긴다. 이후 세조 대를 시작으로 조선의 색채는 이전 명군들이 추구하던 이상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세조 치세에 형성된 폐단은 장기적으로 조선의 국운이 내리막길을 걷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5] 적장손 출신 임금. 물론 단종도 세자 신분으로 왕위에 올랐다.[6] 첫번째 휘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주술을 쓰다 들켜서였고, 두번째 순빈 봉씨는 동성애 스캔들이라는 대형사고를 쳐서였다. 다만 순빈 봉씨의 경우 실록에 따르면 그 외에도 성격적 결함이 많았다고 하며, 문제의 동성애 스캔들도 그녀가 실제 레즈비언이었는지 위계로 아랫사람을 압박한 것인지는 의견이 좀 분분하다.[7] 관사(觀射) : 임금이 활 쏘는 것을 구경함.[8] '사헌 집의' : 고려 말기ㆍ조선 전기에, 사헌부에 속한 정삼품 벼슬.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중승(中丞)을 고친 것으로, 이후 다시 중승으로 고쳤다가 조선 태종 원년(1401)에 다시 이 이름으로 바꾸었다.[9] 무기 공장을 의미한다.[10] 종과 조의 차이는 유덕자는 '종', 유공자는 '조'를 쓰는데 갈수록 예의 과잉 차원으로 '세조, 선조, 인조, 순조'처럼 막 퍼주면서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여기다 인조는 한술 더 떠서 최고의 묘호라는 인(仁)까지 받았다.[11] 더 재미있는건 옆에서 '어디 제갈량을 형님한테 비교하겠냐' 하는 수양대군(세조)의 아부성 멘트.[12] 그런데 문종이 나중에 한 말을 보면, 궁 안에서 실험을 할 때 환관들에게 일을 맡기는 것을 본 신숙주가 국왕에게 신하의 능력을 못 믿냐고 돌려 말하는데, 핵심은 말하지 않아서 진짜 주제를 말하지 못하고 끝난 것에 가깝다. 이때 문종이 한 말을 보면 신하들에게 맡기면 너무 느려터져서 답답했기에 환관들에게 맡겼던 것으로 보인다. [13]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문종 당시의 척법을 적용하면 여전히 짧다. 기병도의 날 길이가 기껏 해야 30~45cm 정도로 계산된다. 후대의 영조척을 적용하면 어느 정도 검의 길이가 나온다. 일부에서는 영조척을 적용해서 칼 길이를 계산하는 경우가 있으나 문종 역시 화력적인 측면을 강조하면 면을 볼 때 주무기로써의 검이 아니라 호신용 내지는 최소한의 방어를 위한 보조 무기로써의 길이를 규정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아니면 당시까지는 기병 활용이 많이 있어서 그러할 수도 있다. 말 위에서는 검이 너무 길면 사용하기가 어렵다.[14]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시기 청군의 빠른 기동에 남쪽으로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서 북쪽, 그것도 청군에게 포위되기 좋은 북한산성으로 가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였다. 조선 후기 방어 전략에서 북한산성은 탕춘대성과 연계되어 서북변을 방위하는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그렇다고 왕이 도망가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서북방의 청군의 침입에 만약 도망가야 한다면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 정석이다.[15] 이 부분은 조금 지나치게 예민하게 기술한 면이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근간에 두고 세워진 국가이며, 왕은 고위 신관에 해당한다. 당연히 본보기가 되어야 하기에, 매우 절제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 문안인사 하고, 수시로 경연을 하고, 정사도 보아야 하고, 때마다 제사도 지내야 하는 등 기본적인 일정만 해도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가는데다, 밤에는 경연에 대비해 경전 공부해야 한다. 이 때문에 왕이 무에 관심을 두기 쉽지 않다. 기껏해야 신하들에게 관심 기울이라고 할 수 있는 정도. 선조도 전쟁 중에 스스로 무기를 고안해서 시험해보라 했다가 사관에게 까인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 판이니 경연에서 병서를 읽자고 한 것 말고도 직접 무기를 고안하는 등의 군사에 관련된 사업을 다수 벌이며 무에 깊이 관심을 두는 것은 흥미가 없다면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고, 이를 두고 애칭으로 밀덕이라 부르는 것인데, 하면 안된다고 하는 건 조금 어폐가 있지 않은가 싶다. 그리고 정도전을 반례로 들었는데, 정도전은 왕이 아니라 재상이다. 직접 실무에 관련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군인이 일선 무기상태에 대해 고민하는 건 당연한 담당 실무겠지만, 대통령이 직접 일선 무기상태에 대해 고민하는 건 담당 실무라 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더구나, 왕이 국가에 필요한 부문에 취미를 가진 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러나 이는 여전히 '흥미가 있다=덕후'로 등치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취미를 갖는게 무슨 문제냐?'는건 더 이상한 논점 일탈이다. 막 개창해서 자리를 잡아가는 조선 왕조에서 국방은 대단히 중요한 현안이었으며, 성리학 근간의 나라라고 하지만, 태조 이래 조선 초기 왕들은 대부분 새로운 나라의 군제 개편과 군사력 강화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다. 태종은 자신이 죽인 정도전의 진법을 부활시키면서까지 군사력 강화에 큰 관심을 보였고, 세종은 화약 무기를 비롯해서 무기 상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본문에 나와있듯 오이라트와 토목의 변 문제 때문에 세종은 군사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문종의 군사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취미를 가져서 한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16] 즉 첫번째 주장은 당시 조선은 토목의 변, 오이라트의 위협 덕분에 국방에 대해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두번째 주장은 조선은 예로부터 문치주의 국가이며, 국왕이 군사분야에 관심을 갖는 것이 사관한테 까일 만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세번째 주장은 조선 전기는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모든 왕들이 군사부문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사실 문종에게 밀덕이란 애칭이 생긴것은 그동안의 문종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모두들 알다시피 그동안 문종은 골골앓다가 단명하고 수양대군한테 밀려나는 유약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최근들어 문종이 재평가되었는데, 문제는 태조, 태종, 세종은 확실하게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는데, 문종도 명군이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리려면 특별한 개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이미지와는 완전 반대인 군사적 업적에 집중한 밀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닐까 싶다. [17] 관영 주도의 의창을 향촌에서 자치적으로 운영한 제도이다. 이후 성종 때 폐지되었다가 흥선대원군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고자 다시 부활시켰다.[18] 사실 좀 그런게 상복을 입으면 담양군의 부인임을 의미하게 되는데, 그러면 평생 과부로 살게 된다. 약혼녀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몰라도 십대에 결혼도 한번 안하고 과부가 되는 것. 조선 시대에는 반역죄로 누가 걸렸을 때 그 일가 중 결혼한 사람은 피해를 입지만 약혼한 상태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며 연좌하지 않고 약혼한 상태에서 상대가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는다.[19] 예조에서는 상복입히라고 상소까지 올렸다. 당시 대신들마저도 '거 뭐 임금말씀이 옳지요' 하고는 별 말도 없어서 생짜 과부를 하나 만들 뻔 했다. 그런데 다들 '가합니다'라고 합창한 후였는데, 공자말씀 및 고사를 인용해 딴지를 거하게 건 사람은 정인지 하나였다. # 생각도 안해보고 남씨 여인 생과부 만들려던 조정 대신들이 아뜨거 하고 물러난 경우. 문종도 군말없이 없던 일로 했다.[20] 현덕왕후는 세자빈 당시 단종을 낳다 죽었으며 문종이 즉위한 후 추존되었다.[21] 그래서 설마 쿠데타를 일으킬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고 수양 세력 내에도 주저하는 이들이 있어 수양이 직접 앞장섰다. 계유정난이 성공한 건 이런 인식 때문에 다들 방심하고 있었던 탓이 컸다. 단, 수양대군의 위치를 생각하면 세력이 가장 약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 단종 즉위 이후 왕의 숙부 중에서 가장 연장자이자, 세종의 적자였다. 즉, 신하들이 가장 위협시하였던 왕족이 바로 수양대군이였다. 이에 견제 차원에서 동생인 안평대군을 밀어준 측면이 있었다.[22] 어머니인 현덕왕후나 할머니인 소헌왕후. 아무래도 소헌왕후가 살아 있었다면 어머니에게 대단한 효자였다는 수양대군이 조카를 밀어낼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23] 신익성은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신흠의 아들로 선조의 딸 정숙옹주와 혼인해 동양위라는 작호를 받고 부마가 됐다. 정숙옹주는 인빈 김씨의 딸로서 정원군의 동복여동생이므로, 당대 임금 인조의 (친)고모부가 된다.[24] 진주 대첩 때 조선군을 이끈 김시민의 사촌동생이다. '하담'은 김시양의 호.[25] 단순히 시간적으로는 단종에서 성종까지가 40여년 정도이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26] 아무래도 중종 때 책에 문종 얘기가 있는 건 신빙성도 적고 주장하다 보니 머릿속에서 자체 보정이 된 듯하다. 단 용재총화 자체는 중종때 발행됐지만, 저자 성현은 세종 말기때 태어나 세조때부터 관직에 종사했다. 또한 지체높은 명문가라 부친과 형들이 먼저 조정에 나가 출사했기에 그들을 통해 젊었을적 문종을 보았거나 그와 관련된 소문을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27] 단, 아버지 세종이 몸이 안 좋은 관계로 세종 말기 때부터 사실상의 통치를 맡겼기 때문에 실질적인 치세는 약 10년 정도 된다.[28] 1414년 출생~1452년 사망으로 사망 시 39세. 성종은 1457년 출생~1494년 사망으로 사망 시 38세였다. 단, 양력으로 따지면 문종이랑 같이 39살에 승하했다.(성종의 사망 날짜: 음력 1494년 12월 24일, 양력 1495년 1월 20일)[29] 7년만 더 재위했다면 단종은 나이 19세(만 18세)에 즉위하는데, 후대 세조의 뒤를 바로 이어 신하들을 쥐고 흔들었던 예종의 즉위 나이와 같다.[30] 문종과 수양대군이 결코 우애가 좋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형수를 폐서인하고 형의 무덤을 파헤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수양이 세종과 세자 앞에서 일부러 자신의 재주를 자랑했다는 일화까지 있는 마당에 문종이 수양의 야심을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이 형제들을 전반적으로 잘 대해줬던 것을 봤을 때 그냥 성품 자체가 너그럽고, 본인이 왕세자로서 당당하게 명분을 휘두르며 살았던 터라 정치적이고 교활한 인성을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31] 후일의 조선 임금들은 국모의 자리가 비면 어떻게든 왕후를 다시 세웠다. 예를 하나 들어 보면 영조가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굳이 15세의 정순왕후를 들이고 이로부터 불과 3년 후 놔둬봐야 왕실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사도세자를 처분했던 것(임오화변)을 생각해보자. 영조가 그 나이에 굳이 적손을 얻기 위해 그녀를 중전으로 들였을까? 이미 영조는 영특한 세손을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고 세자를 배제하고 세손을 후계자로 세울 작정을 하고 있었다. 정조는 임오화변 당시 불과 11세의 나이였는데 설령 영조 본인이 세손이 장성하기 전에 승하하더라도 정순왕후라는 왕실의 어른이 정조의 뒤를 이어 수렴청정을 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두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대대로 정순왕후는 세손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의 뒤를 봐주었다. 물론 문종의 계비가 반드시 좋은 계비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단적으로 문정왕후의 경우 인종 독살설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인물이며 이전에도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명종)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다만 문정왕후가 인종을 홀대한 것은 결국 중종의 또다른 아들인 '''명종을 자기가 직접 낳았기 때문'''이다. 명종을 낳기 전의 문정왕후는 의외로 나쁘지 않은 새어머니였으며, 만약 명종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중종이 승하하면 인종을 등에 업어야 하니까) 그대로 괜찮은 새어머니로 남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인종이든 명종이든 어쨌든 '''둘 다 중종의 적자'''니까 누가 왕이 되더라도 중종의 가계가 이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문종의 사례에 대입해본다면, 문종이 계비를 들이고 나서 승하했을 경우 문종 다음의 왕이 단종이냐 단종의 동생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문종의 아들이 즉위하고 문종의 왕비가 수렴청정한다'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이는 명백히 실제 역사에서 일어난 결과(=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가계가 단절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말이다. 따라서 문종이 계비를 들이지 않은 건 확실한 실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계비를 들이지 않는 것이 실책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생각하지 못했을 가능성보다는, 시기적으로 아내가 죽은 뒤 5년 후에 어머니가 죽고, 다시 4년만에 아버지가 죽은 상황이라서 재혼을 진행할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비를 들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32] 수양대군을 굳이 죽일 필요까지도 없다. 할아버지회안대군에게 했던 것처럼 심복 부하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숙청해서 수양대군의 세력을 완전히 와해시킨 후 수양대군을 적당한 곳에 귀양보내버리는 정도만 되었어도 계유정난은 결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설령 수양대군이 어찌어찌 정난을 도모할 만한 세력을 다시금 모으는데 성공했다 쳐도, 그 시간이면 이미 단종이 장성하여 왕권을 제대로 휘어잡고도 남았을 것이다.[33] 당장 당시 재상들이 누구인가? 면도날 황보인과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이다! 아직 저자거리 깡패 십여 명 모아서 활쏘기나 가끔 시키던 수양대군과의 세력과는 비교불가이다. 또한 이때는 오히려 안평대군의 위세와 인망이 수양대군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 세력을 비교하자면 이 시기의 수양대군의 세력은 변변찮았다. '''그러나''' 모인 인물들이 별볼일 없는 무뢰배 수준이였다고 하더라도, 이들 대다수가 무관들에 중앙군 각 부서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을 무시하면서 방심한 탓이 크다. 이건 문종에 잘못이라기 보다는 황보인과 김종서가 이러한 위험성을 무시한 측면이 컸는데, 수양대군의 양면전술에 놀아난 탓이였다.(겉보기에는 수양대군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듯하게 보여줬지만, 실제로는 자기 세력들을 중요 부대에 배치하면서 계유정난 당시 단종을 손쉽게 확보하였다.)[34] 물론 30대에 할아버지가 되는 일이 부지기수인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꽤 늦게 본 아들이다. 오죽하면 3살 아래인 동생 수양대군이 '''3년이나 먼저 아들을 보았을 정도였다!''' 같은 나이에 첫 아들을 본 숙종은 돌도 안 지난 경종을 원자에 책봉하면서 "내가 너무 늦게 아버지가 되었어"라고 한 일이 있고 정조는 31세에 첫 아이 문효세자를 얻고 "비로소 아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하였으며, 3개월 만에 원자로, 만 22개월에 세자로 책봉하였다. [35] 현대의 종로구 계동, 가회동 일대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한성 제일의 부촌이었다.[36] 임영대군의 처남이다.[37] 동궁의 딸이 죽었다. 권 승휘(權承徽)의 몸에서 낳았는데 (중략) "나이가 한 살이 차지 못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무덤을 지키오리까.''(후략) -《세종 15년 3월 3일 병진 1번째기사》[38] 요절한 다른 왕녀들은 사망나이가 정확히 적혀있어 태어난 년도를 알 수 있는 반면, 권씨의 큰 딸은 적혀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 살이 차지 못했다는 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1433년 1월~3월 이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즉, 태어난 해에 죽은 것[39] 승휘 홍씨(承徽洪氏)의 딸이 죽으니, 나이 4살이었다. -《세종 26년 12월 4일 기유 1번째기사》[40] (중략) 왕세자빈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 전(專)의 딸인데, 원손과 평창 군주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 양씨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 장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세종 28년 6월 6일 임인 2번째기사》[41] 문종의 요절한 왕녀들은 전부 죽었을 때 의 기록이 있는 반면, 요절한 왕자들은 생몰년 기록 자체가 없다.[42] (중략) 왕세자빈 권씨는 증 의정부 좌의정 전(專)의 딸인데, 원손과 평창 군주를 낳고 일찍 졸(卒)하였고, 사칙 양씨는 딸 하나를 낳았고, 궁인 장씨는 아들 하나를 낳았고, 정씨도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중략) -《세종 28년 6월 6일 임인 2번째기사》[43] 왕녀가 졸(卒)하였다. 나이는 2세인데 궁인 양씨(宮人楊氏)의 소출이었다. -《문종 1년 8월 12일 정축 1번째기사》[44] 문종은 상왕이던 태종이 세종 사후 정통 후계자이기에 많은 신경쓴 것에 비하여서, 태종 사망시기에 겨우 6살이였을 수양대군은 고려대상도 아니였을 것이다. [45] 아버지처럼 살찐 모습이기는 했으나, 근육돼지였다는 소리. 앉아서 공부만 해서 비만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세자 재위 말기 워낙 일이 많아서 (적절한 예시) 운동을 못 한 나머지 살이 쪄버린 것으로 추정된다.[46] 옛 문헌에는 흔히 '등창' 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지금에야 종기는 단순한 질병이지만 항생제가 없었던 옛날에는 종기가 심각한 질병이었다.[47] 조선 왕가는 유전병이 있다. 유전병은 종기와 피부병. 몸에 종기가 났을 때 치료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무식한 방법은 환부를 제거하는 것인데, 왕의 몸에 쇠토막을 함부로 댈 수 없었던 때였으니 사망률은 더했을 듯. 현대 의술로도 초기에는 항생제를 통해 스스로 가라앉기를 유도하지만 약으로 안된다 싶으면 외과적 수술을 통해 제거한다. 항생제야 제쳐두더라도 한의학 자체가 외과에 대한 내용은 전무한데다 당대 유럽이나 중동 등지의 외과술도 파상풍을 막지 못했으니 어쨌든 종기는 고질병이었다.[48] 이전 문서까지는 온실에 대한 기록이 《식료찬요》에 나오는 것처럼 기술했지만, 실제로는 《산가요록》(山家要錄)에 나온다. 저자는 동일하다.[49] 영화감독 이해영은 이 사실에 대해 '군대를 연이어 2번 다녀온 셈'이라고 표현했다. [50] 다만 문종이 이렇게까지 상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고려말까지도 3년상은 정착되지 않아서 이렇게 한 사람이 몇 명 없었다. 태종조차 3년상을 다하지 말고, 하루에 1개월을 계산하는 방식으로 하라고 할 정도였다.<물론 본인은 고려 말에 생모 한씨가 사망했을 때에 3년상을 한 몇 없는 사람 중 하나이기는 했다.><고려시대에 왕이고, 관료들이고, 대체로 이렇게 개월수를 날수로 고쳐서 상을 치렀다.>[51] 1957년생으로, 드라마 방영 당시인 1994년 기준으로 만 37세.[52] 단, 아우들인 수양대군 역의 서인석이 1949년생(만 45세), 안평대군 역의 노영국이 1948년생(만 46세)이었다는 게 함정. 지금이야 세 분 다 60대 ~ 70대 초반이라 외모에서 오는 위화감이 그리 크지 않지만, 당시에는 아무리 봐도 형과 아우로 보기 힘들었다. 더구나 송승환은 하이틴 스타 출신에 그때까지도 자주 총각 역할로 나오곤 했으니...[53] 재미있게도 같은 작가가 집필한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아버지인 세종으로 출연했다.[54] 어머니 소헌왕후로 나온 이윤지보다 1살 위다.[55] 특히 측우기를 발명하는 순간[56] 본인의 학구열로 빈궁이 애정결핍에 빠지는 것은 덤이다.[57] 계유정난과 등극 후까지 긴 시간을 다루기도 하고 대부분 작품의 주역이다 보니 세조 역은 젊은 배우를 쓰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