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궁
1. 개요
慈壽宮.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대로 68[1] 일대에 있던 조선의 별궁.[2] 지금은 없다.
2. 역사
원래 무안대군 이방번이 살던 집 터였다. 그러다가 문종이 옛 무안대군 집을 수리하고 세종의 후궁을 옮겨 살게 했다. 이후 선대왕들의 후궁들이 모여 살았으며 성종 때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가 머물면서 잠시 이름을 창수궁(昌壽宮)으로 바꾸었다. 이 외에도 폐비 윤씨와 단경왕후도 폐출된 후 한동안 머물렀으며 인종의 후궁 정씨[3] 도 살았다.
후궁들은 당연히 재혼을 할 수 없었고[4] , 자수궁에 들어온 후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거나 또는 비구니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불교가 잠시 권력 층과 가깝던 명종 때에는 이 곳에 종각과 나한전을 지어주었다. 나한전은 절에서 아라한과[5] 를 얻은 성자를 봉안하는 곳이다. 그래서, 아무리 비구니들이 같이 산다해도 엄연히 왕실 사람이 머무는 곳에 불교 건물이 생긴다며 신하들이 반발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궁궐 공사에 병적이었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른다는 명분으로 인경궁, 경덕궁[6] 등과 함께 옛 자수궁 일대에 큰 궁궐을 짓고 이름도 그대로 자수궁이라 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은 사용하지도 못한채 쫓겨났고(...) 자수궁의 궁 지위를 박탈한 뒤 '자수원(慈壽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아예 이원(尼院), 즉 비구니들을 위한 전용 공간으로 활용하였으며 많을 때는 최대 5,000여명의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명나라 황실의 궁녀였던 굴씨(屈氏)도 소현세자가 귀국할 때 함께 들어와 이 곳에 머물렀다.
3. 마지막
그러나 비구니들의 폐단이 심하다고 하여[7] 부제학 유계의 상소를 계기로 1661년(현종 2년) 자수원을 폐지하여 없앴고 어린이들은 환속시켰으며 노인들은 성 밖으로 옮겼다.[8] 이 자리에 도성 내 5학 중 하나인 북학(北學)을 세웠으며 1663년(현종 4년)에는 자수원 건물의 자재로 성균관 서쪽에 비천당(丕闡堂)과 일량재(一兩齋), 벽입재(闢入齋)를 세웠다.
4. 기타
- 경복궁에서 자수궁 가는 길에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사이에 있던 백운동천(白雲洞川)에 '자수궁교(慈壽宮橋)'라는 돌다리를 세웠다. 일제강점기까지 남아있었으며 1927년 백운동천에 암거 공사를 진행하며 없어졌다. 줄여서 '자수교(慈壽橋)', '자교(慈橋)'라고도 불렸으며 그래서 근처 교회 이름도 이 다리에서 따와 '자교교회'가 되었다.[9]
[1] 구 지번주소 종로구 옥인동 45-1.[2]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는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이완용 집 터 사이다.(...)[3] 송강 정철의 누나.[4] 사대부가의 부인들도 재혼하면 엄청난 사회적인 비난에 시달렸는데 하물며 후궁들이야...[5] 아라한의 깨달음의 경지. 곧, 소승불교의 궁극에 이른 성자의 지위.[6] 훗날 경희궁으로 개칭.[7] 비구니들이 잘못을 한 건 아니었다. 단지 사대부들 입장에서 도성 한복판에 큰 절이 있고 비구니 수천 명이 머무른다는 것 자체를 엄청난 낭비 및 폐단으로 생각한 것이다.[8] 선왕의 후궁들이 살던 곳이라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으나, 폐지 논의 당시 남은 후궁들이 별로 없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9] 다만 한자는 '紫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