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역사)

 

한자
領地
영어
fief
라틴어
feudum
프랑스어
Fief
독일어
Lehnswesen
1. 개요
2. 발생
3. 세습재산으로의 발전
4. 급여 보유지
5. 관련 문서


1. 개요


왕이 제후에게 내린 땅. 영지(領地)라는 한자는 본래 '''다스리는 땅'''이라는 뜻이 되며 이것은 영어로는 territory로 표현되나, 본 문서는 주로 중세 서유럽의 봉건제와 관련된 Fief 개념을 위주로 다룬다. 한자 단어의 형태로 인해 의미 상의 혼동이 발생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Fief 는 '왕이 제후에게 분봉한 땅'이라는 의미를 강조해서 '''봉토'''로 번역되기도 한다.

2. 발생


서양에서는 고대 게르만족의 종사 제도(Gefolgschaft, retinue)와 후기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beneficium)가 결합하여 봉건제도(Feudalism)가 나타났다.
고대 게르만족은 자유민 출신으로 구성된 종사들이 약탈 원정 시에 서약을 맺어 수장에게 전투력을 제공하고, 서약의 대가로 수장은 약탈에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종사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로마 제국의 은대지 제도는 야만족 출신 군인이 국경을 수비하는 대가로 국가가 일정량의 먹고 살 땅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봉건제도 항목에서 언급하였듯 서양의 봉건제는 '''실질적으로는 권력이 밑에서부터 모여서 위로 수렴되는 것'''이었다. 즉, 왕이 제후에게 내린 땅이라는 것은 그저 형식이고, 실제로는 정 반대였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종사 선서를 하며 땅을 바치면, 주종 관계가 성립되고, 주군이 된 사람은 종사가 된 사람에게 다시 그 땅을 '하사'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정복이 일상적이던 중세 초기 서유럽 사회의 특성 상, 이렇게 평화롭게 계약을 맺어서 주종관계를 성립한 경우만 있던건 아니다. 하지만 정복자들도 관료제가 별달리 발전하지 못한 시대적 특성 상 그냥 봉건제적 주종관계로 복종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정복했으니 이제 여긴 프랑크 왕의 땅! 하지만 기존에 다스리던 가스코뉴 공작에게 다시 그대로 하사한다' 하는 식인 것이다.
이 은대지는 형식 상으로 왕이 제후(가신 혹은 봉신으로도 표현된다)에게 '하사'한 것이기 때문에, 은대지를 받은 가신이 사망하면 왕이 회수할 수 있는 명분이 있기는 하였으나, 실제로는 저런 서구 봉건제의 특성 상 회수하기 매우 어려웠고, 사망한 가신의 가족이나 후손에게 재수여되는 경향이 금방 나타났다.
또 은대지와 별개로 샤를마뉴 시대에 파견한 공작, 백작 등의 행정관들이 다스리는 행정 관구(공작령, 백작령)가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황제가 파견한 관료라는 특성 때문에 세습할 이유도 없었고, 황제의 의사에 따라 공작, 백작직을 박탈할 수도 있는 등 더 강한 통제가 가능했다. 실제로 초기 신성로마제국은 백작이나 공작이 반란을 모의했다는 명분 등으로 공작이나 백작령을 통채로 회수하고 추방하는 등의 강한 황권을 휘둘렀다. 하지만 게르만족의 관습 상 그러한 관직은 '''세습직'''이었고, 관료의 행정 구역이라는 명분과 구별도 금방 소멸해서 백작령, 공작령 등도 세습 재산화 된다.
결국 이 행정관구와 은대지는 점점 동일시되며 10세기 무렵에는 둘을 합쳐 봉급이라는 의미의 feudum로 불리기 시작한다. 봉건제도라고 번역되는 Feudalism 의 어원이 바로 이 Feudum 이며, 즉 봉건 제도란 봉토를 매개로 맺어지는 관계라는 의미이다.

3. 세습재산으로의 발전


봉건제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사회는 샤를마뉴 이후로 프랑스, 독일, 북이탈리아에서 점점 발전하였으며, 11세기 중반에 노르망디 공 정복왕 윌리엄을 통해서 정형화된 봉건제가 영국에 이식되었으므로, 각국과 각 지역에 따라 발전 방향과 경향이 상당히 다르다.
일단 샤를마뉴 당대에는 공작, 백작이 행정관료라는 명분도 살아 있었고 황제의 실권이 워낙 강해서 쉽사리 제후들이 후손에게 상속하지 못했다. 게다가 11세기 이전의 중세 유럽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자 상습제가 아닌 형제 상습제, 분할상속제가 통용되었다. 또한 은대지는 기본적으로 주군이 종사에게 군사적 충성과 봉사를 맹세하는 대가로 하사한다는 조건이 딸려있기 때문에, 종사쪽이 군사적 봉사를 하지 못한다면 상속할 명분이 없었다. 특히 장자는 '''살리카 법전에 예시된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영지 상속권을 받지 못한다.''' 장자가 너무 어려서 상속이 불가능할 때는 상급자가 영지를 몰수해가서 다른 놈에게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식들 잘먹고 잘 살게 해주고 싶은건 시공을 막론하고 사람들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영지가 다른데로 날아가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은 전대 영주의 아내가 상속자인 장자가 자랄 때까지 영지를 관리하곤 했다. 중세에 여성의 역할은 생각 외로 컸다. 즉 후견인으로서 아내인데, 이때 아내는 죽은 영주의 성을 '''완전하게''' 세습받아 영주 가문의 완전한 일원이 되어야 한다. 즉 '''완전하게 친가와 연을 끊고 성을 가는 거다.'''
영주의 아내 외에도 그 상급자가 따로 영주의 친척이나 또는 봉신들 또한 후견인으로 자처한 것을 인정했으며, 중세 사회가 사실상 거의 가부장적이었기에 사실상 죽은 영주의 친척들이 아이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물론 그 친척들도 금세 태도가 돌변해 영지를 빼앗으려고 하는 전례가 많다.
고중세에는 상속자들 즉 장자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는 '''결혼도 못했다'''. 이는 1영지 1영주 정책으로 영지 내 상속 분란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일반적으로 고중세의 영주들은 40세 이후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은 일반적로 '''15세 ~ 17세의 귀족 여성'''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때문에 영주들이 죽어도, 영주의 부인들은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의 나이였다. 욕정도 강하고, 외로움도 강할 시기라서 이를 노리는 젊은 기사들도 많았다. 후견인인 아내가 상속자가 자라기 전에 누군가와 결혼하면 그 누군가는 해당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친가와 완전히 연을 끊고 성을 갈아야 한다.''' 다시 말해 데릴사위. 주로 젊은 기사들이 이런 수혜를 받았다. 이 경우 상속자는 망했어요 신세. 그러나 이런 식으로 젊은 기사들이 영주가 되는 경우는 많지는 않았다. 고중세는 기본적으로 현대처럼 핵가족이 아니라 대가족 시대였다. 영주가 어린 아들 하나만 남기고 죽었대도, 장성한 딸이 있거나 동생이 있거나 하는 경우는 많았다. 딸은 군사적 종사를 못한다해도, 딸의 남편은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사망한 영주에게 남동생이 있다면? 군사적 종사를 바로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이 후견인이 되거나, 전 영주의 딸이 아들을 낳으면, 즉 원래 영주의 외손자도 충분히 계승권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심지어 윌리엄 1세같은 사생아 출신이라도 전임자의 친아들이므로 어렵게라도 계승이 가능한 경우도 꽤 있었다.
또한 영주 밑에 속해있는 기존의 또 다른 영주나 가신이 있는 경우에도 젊은 기사들이 영주가 되기가 어려웠다. 여태까지 그 영주 집안을 모시던 사람들에게 어느날 갑자기 웬 듣보잡이 결혼 한 방으로 자신의 상관이라고 거들먹거리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이 터지기에 충분했다.
다만 이것은 귀천상혼이 엄격한 나라들이나 최소 백작급은 되는 대영주들의 이야기이고, 귀천상혼 개념이 희박한 나라의 시골뜨기 남작 같은 하급 귀족들 같은 경우는 젊은 기사가 귀부인 꼬셔서 영지를 낼름하는 일들이 꽤 빈번히 일어났다.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영지를 세습하기 위한 영주들의 노력은 후기 중세에 들어선 12세기 무렵 종식된다. 법적인 명분 상으로는 세습이 허용되지 않던 영지의 세습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세습재산으로 굳어진 것이다. 1035년 북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황제의 직속 봉신들과 그 하위 봉신, 즉 배신들 간의 분쟁이 일어나는데, 배신들은 자기들에게 수여된 봉토들을 세습재산으로 인정하라고 주장했고 황제의 직속 봉신들은 봉토란 당대에 한하며 심지어 주군에 의해 임의로 회수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콘라트 2세는 평소에 자기 말 안 듣다가 이럴 때만 자기를 부르는 북이탈리아 봉신들이 아니꼬왔는지 배신들의 편에 섰다. 봉토가 세습재산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한 것이다. 이 법은 아직 황제의 권력이 컸던 당대에는 하급 귀족들과 황제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대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결과적으로 신성로마황제가 영주들의 직위를 임의로 회수할 수 없게 만들어 신성로마제국의 황권을 약화시켰다.
법적으로는 '자유민'이고 실질적으론 귀족이던 계층이 법적으로도 귀족 계층이 된 시대 역시 12세기였다.

4. 급여 보유지


이 봉토 즉 fief 혹은 beneficium 으로 표현되는 토지는 상기했듯 근원적으로 봉급으로써 화폐가 아닌 토지를 수여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커다란 영지 말고 가신들에게 급여로 수여한 작은 밭뙤기도 같은 표현으로 지칭되었다. 이러한 봉토는 전문직, 예를 들면 대장장이, 화가, 목수, 석공, 집사, 병사 등이 수여받았다.
물론 이런 봉토는 그냥 가족을 부양할 정도의 자작 토지였지, 농노들을 부려서 경작한다던가 하는 커다란 권한이 있는 토지는 아니었다. 다만 저런 전문직들은 영주와 가까운 마을 유지 정도의 신분이니 관습적인 권력이 있어 이런 저런 편의는 볼 수 있긴 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런 소토지가 영주가 지배하는 대토지와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는 것을 매우 난감해해서, 이런저런 말을 붙여서 어떻게든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fief 라는 단어가 어원에서부터 가지고 온 '봉급' 이라는 개념은 봉건사회가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았고, 현대에도 영어에 fee 라는 단어로 흔적이 남아있다.

5. 관련 문서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