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위/유럽
1. 개요
유럽 귀족 작위의 대략적인 틀은 모두 고대 로마에서 기원하여 카롤링거 왕조 프랑크 왕국 때 정립된 것이다. 특히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같이 중세 성기에 봉건제가 확립된 나라의 행정 문서를 보면 라틴어로 해당 작위명을 쓴 것을 볼 수 있다. 왕은 REX, 공작은 DUX, 백작은 COMES 같은 식. 중세 유럽의 제도가 다 그렇듯 고대 로마의 영향을 바탕으로 종사제 등 게르만족의 습속이 결합되어 나타난 것이다.
서로마가 갓 붕괴한 중세 초기에는 독립적인 게르만 부족의 수장을 가리켜서, 세력 크기에 따라 REX 혹은 DUX 로 칭한 것이 작위로서의 시초이다. REX는 그냥 왕이라는 뜻이고, DUX는 장군이라는 뜻이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족장을 뜻하였는데, 후에는 Duke 등으로 변형되어 보통은 공작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왕과 공작들은 자신의 영토를 관리하는 가신들을 로마의 관료나 직위명을 따서, 행정관이라는 의미의 COMES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 변형된 것이 꽁테(프)/카운트(영)/그라프(독), 즉 백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 다양한 작위가 나타나고[2] 복잡해지지만, 적어도 제일 핵심적인 작위 구조는 저 셋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로마에서는 5세기 경 이미 직위가 세습 가능한 재산의 일종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로마의 제도를 따라한 게르만족의 봉건제에서도 저런 직위들이 세습 가능한 자산으로 여겨졌다. 특히 공작인 DUX를 자처한 세력들은 애초에 왕, 즉 REX가 임명한 직위가 아니라 별도로 존재하던 독립세력인 것을 정복한 것이었기에 바로 직위를 몰수하지 못하고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계속 남았다.[3]
또 렉스나 둑스의 하위 행정관 개념으로 존재하던 코메스들도 직위가 세습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은 행정구역으로서 할당된 영역의 영역제후가 되어 백작으로써 작위화한 것이다.[4] 영역제후령이 해체된 근세에도 왕국 중앙 귀족이나 관료들이 대부분 백작 작위인 것도 백작의 유래 자체가 왕이 임명한 행정관이라는 관념이 이어진 결과이다.[5] 덕분에 '백작이 공작보다 (권력으로 보나 권위로 보나) 하위의 작위'라는 흔한 인식과 달리, 지방 귀족 세력의 힘이 약화된 근세에는 (적어도 권력 면에서는) 공작보다도 백작이 더 큰 소리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2. 번역의 문제
메이지 유신 시대 일본이 유럽의 작위제를 도입하면서, 동아시아의 오등작에 맞춰서 실제로는 전혀 다른 직책이었던 작위들을 번역하는 바람에 유럽의 작위들의 서열 문제를 오해하기 쉽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 시대 유럽에서는 이미 귀족 작위가 관료나 영역제후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그저 명예로운 호칭으로서 상하관계만 있는 수준으로 퇴색했기 때문이다. 작위를 받는다고 영지와 주권을 받는 것도 아닌데 굳이 유래나 어원까지 세심하게 따질 필요가 없던지라(...) 일본은 그냥 오등작의 서열에 맞춰서 대강 번역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일단 번역 자체는 해야 하니) 굳이 일본의 번역을 비판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저렇게 대충 번역한 것에 맞추어 중근세의 사회상을 이해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문제가 된다.
일단 상기했듯 유럽의 작위 체계는 최초 관료제 시절에 비추어 REX(왕)-DUX(공작)-COMES(백작)의 3단계로 이해하는게 더 낫다.[6] 일본식 번역에서 후작으로 번역하는 Markgraf는 백작의 파생 작위이며, 자작으로 번역되는 Viscount 역시 백작의 보좌역으로 파생작위에 해당한다. 특히 바이카운트는 애초에 군주가 내리는 작위가 아니어서 영지도 없었는데, 중세 유럽 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창작물에서는 자작령이 등장하는 오류가 나오기도 한다. [7]
또한, 백작은 그 근본이 군주의 행정관이고 후대 작위 수여에서도 충실히 반영되지만, 공작은 군사령관에서 출발했음에도 지방 영주로서 성격이 강해지면서, 후대에는 (명목 상으로는 공작이 상위인데도) 백작이 (각종 궁중직 등 중앙 관직을 역임함으로서) 실질적 권력을 더 크게 가지는 일도 흔했다. 이 역시 중세 유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저 오등작 체계로만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상하게 비춰질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유럽 내에서도 어원은 같은데 사회문화적 차이로 지위가 달라진 작위가 있기에 번역 문제가 커진다. 다름 아닌 로마의 프린켑스(PRINCEPS)에서 유래된 프린스인데, 이 작위는 영어-프랑스어권과 독일어권에서 지위가 상이하다. 영어-프랑스어권에서는 왕국(kingdom)에서 후계자에게 주는 작위로 자주 쓰였기에 왕자라고 흔히 번역되나, 동시에 '고귀한 자'라는 원관념에 충실한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부족제적 관념이 이어진 독일어권에서는 각지의 영주들이 저 '고귀한 자'라는 칭호를 쓰기에 충분한 자로 간주되어서 황제에게 임명된 영역제후, 즉 백작과 변경백도 프린스(Fürst, 퓌르스트)를 자칭했다. 결과적으로 영어-프랑스어권에서는 프린스가 '왕자'로써 왕 바로 다음에 놓이는 우월한 작위가 되었으나, 독일어권에서는 공작(Herzog)보다도 낮은 작위가 되었다. 덕분에 현대에도 모나코, 안도라나 룩셈부르크의 군주가 졸지에 왕자로 번역되는(...) 참사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여간 프린스를 독립국가의 군주로 칭할 때는 흔히 대공이라고 번역되나, 이 역시 공작으로 번역되는 듀크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오스트리아 같이 'Archduke'[8] 를 칭한 것 역시 대공이라고 번역되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오해의 여지가 크고, 심지어 Grand Duke, Grand Prince[9] , High Duke 등을 포함하면 더 복잡해진다.
사실 현대 입장에서는 작위를 세세히 따지면서 서열을 따지는 것 자체가 역사학에서 아주 큰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전근대 시대 귀족들끼리의 서열 싸움을 위한 설정놀음(...)에 가깝기 때문. 그래서 일본의 오역은 그다지 진지하게 비판받지 않는데다가, 오역을 바로 잡고자 대체한 번역 사이에도 서로 합의가 되지 않고 통용되면서 이해를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
한편 이 작위에 대한 이해가 동아시아에서도 역사적 맥락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나라별로 다르고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일원적인 번역을 어렵게 만든다.
이를테면 춘추시대에는 중원에서 패권을 지닌 주나라의 군주만 왕을 자칭했고, 주나라의 종법 질서에 따르는 주변부의 수많은 도시국가의 군주들은 후작을 칭했다. 후가 오히려 더 일반적인 군주의 칭호였고, 공은 매우 드물게 사용되었다. 하지만 전국시대에 이르면서 개나 소나 왕을 자칭하여 후작은 그냥 명예직위로 떨어진다. 고조선에 관해서도 '조선후가 왕을 칭하였다'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전국시대가 진나라로 통일되며 황제 칭호를 만들자 왕조차도 황제의 아들에게 붙는 칭호로 또 인플레이션이 이뤄진다.
유럽에서는 프린스가 그래도 나름 독립국가의 군주가 칭할 수 있는 호칭이었는데, King 보다 한 급 낮은 작위라는 인식이 이어지다가 King의 후계자에게 주는 작위로 굴러떨어진다(...).
이런 식으로 작위 인플레로 인해 급수가 떨어지는 일이 빈번했기에, 봉건 시대 국가들은 자기 칭호를 위신에 맞게 고치려고 노력했는데, 아주 가까이로는 구한말 조선이 대군주라는 칭호를 자칭한 것이 있다. 작위 인플레의 결과로 조선 시대에는 이미 왕이라는 작위가 황제에게 봉해진 제후국, 즉 속국의 작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조선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해선 새 작위명을 만들 필요가 있던 것. 서양에서 서술한 동아시아사를 봐도, 동아시아에서 독립국 군주는 Emperor 를 칭했고 King 은 황제국의 속국이라는 점을 강조해서 설명한다. 일본의 덴노를 일반적으로 Emperor 라고 번역하는 것도 그 영향. 베트남도 외왕내제를 철저히 실행했기 때문에 다이비엣과 응우옌 왕조에 대해서도 군주를 Emperor라고 번역해준다.
3. 군주
3.1. 세속 군주
3.2. 성직 군주
4. 주요 작위
4.1. 세속 제후
4.1.1. 선제후
라틴어 : Princeps Elector
독일어 : Kurfürst
영어 : Prince-elector
신성 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뽑는 권한을 가진 제후들. 1356년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통해서 모든 작위 중 제일 우월한 작위로 공표했다. 이후 선제후를 겸하게 하는 작위의 소유 가문의 변동 등 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때때로 선제후를 겸하는 작위가 바뀌기도 하였으나, 선제후 제도 자체는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존속하였다.
법에 따라 자동으로 선제후 작위를 겸하게 되는 작위들은 왕작위(보헤미아), 궁중백작위(라인팔츠), 공작위(작센 등), 변경백작위(브란덴부르크) 등 다양했으나, 황제를 선출하는 특권 자체가 독보적이었기에 선제후라는 작위를 더 내세웠다.[10]
4.1.2. 프린스(Prince)
라틴어 : PRINCEPS
영어 : (royal) Prince
프랑스어 : Prince
독일어 : Prinz
독립 국가가 쓸 수 있는 작위였으나 시간이 흐르며 작위 인플레의 결과로 왕의 후계자가 쓰는 작위가 됐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에서 왕작이 가지는 의미와 매우 유사해져버렸다. (본래 독립국의 군주 작위였으나 작위 인플레로 왕의 친족들에게 친왕작이 수여됨) 조선과 대응하면 왕자들의 작위인 대군, 군과 거의 똑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국 내에서 세력이 큰 봉토를 가진 귀족들은 계속 프린스 작위를 사용했으며, 지금도 일반적으로 군주를 뜻하는 말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어원이 라틴어로는 PRINCEPS로 같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어권과 영어-프랑스어권이 사회문화적 이유로 인해 관념이 전혀 달라진 단어이기도 하다. 독일어에서는 어원을 같이 하는 Fürst는 제후가 되고, 황제의 후계자로써 Prinz는 단어가 돌고 돌아서 재수입되어서 더 우월한 작위로 간주된다. 이에 대한 상세는 이하의 퓌르스트 목차에서 서술.
4.1.3. 둑스(Duke)
라틴어 : DUX
영어 : Duke
프랑스어 : Duc
독일어 : Herzog
상기하였듯 초기 중세에는 독립성이 강한 제후였으나, 중세 성기 이후 군주의 권한이 점점 확대되어 제후들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기자 군주의 필요로 신설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경우 왕족의 방계 가문이 가질 영지를 만들기 위해 여러 백작령을 묶은 공작령을 만들었고,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공위가 된 부족공국을 적당히 약화시키기 위해 부족공국을 더 작은 규모의 공작위를 신설해 분할하기도 했다.[11]
4.1.4. 퓌르스트(Fürst)
라틴어 : PRINCEPS[13]
영어 : (Sovereign) Prince
프랑스어 : Prince (Souverain)
독일어 : Fürst[14]
상술한 사회문화적 이유로 어원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관념의 작위로 나뉜 사례다. 이는 단어의 원관념, 즉 '고귀한 자'라는 관념과 큰 관련이 있다. 프린스는 그 권위가 혈통에서 비롯하였으며, 그 자체로 독립 국가의 군주에 대한 호칭으로써 충분한 칭호로 간주된 것이다.
프랑스는 고대 로마부터 공적 지배체제를 경험하고서 봉건제로 이행하였으며, 영국도 비록 초기 앵글로색슨의 이주 시기에 로만 브리튼의 전통이 상당수 파괴되었기는 해도 프랑스와의 지리적 인접성에 따른 지속적 교류로 기독교와 로마의 유산을 앞선 시기에 재도입할 수 있었지만, 독일은 프랑크 왕국 시대에도 부족제가 유지되었다.[15] 그래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아무리 세력이 큰 제후라도 왕이 권위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이미 자리잡은 관료제적 지위(duke, count 등)를 가산화하여 봉건귀족이 되는 방식을 취하였기에 굳이 부족제 전통인 프린스 호칭을 자칭하려 하지 않았다.[16] 하지만 독일 지역의 부족 공국들을 위시한 유력자 집단은 '고귀한 자'로써 프린스(퓌르스트)로 칭해져왔고, 그에 따라 독일에 난립한 (반)독립적 군소세력들은 오랜 기간 "Fürst"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니 전자와 후자의 귀족 위계가 달라진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특히 영역제후에서 기원한) 프린스는 외부로부터 도입한 것에 가까웠다. 예컨대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잉글랜드 왕국 외부에서 웨일스인 스스로 건국한 웨일스 공령을 정복하면서 편입한 것이다.[17] 이러한 이유로 영어-프랑스어권에서 양자의 엄밀한 구분이 필요하다면, 영역제후로서의 Fürst는 "'''sovereign''' prince"라고 부연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 퓌르스트는 부족제 시절 유력자의 후계로서 선제후(Kurfürst) 탄생 전까지는 제위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격이 떨어진 후에도 그럭저럭 지체 있는 고유 작위로 취급되었다. 일단 황제가 임명한 제후라면 다들 사용할 수 있는 칭호로 간주되었고, 신성로마제국 작위 서열 상으론 fürst는 Duke보다 낮은 '황제 직속 봉신'을 퉁쳐 말할 때도 사용하였다. 이렇게 통칭으로서 쓰일 때는 대개 Graf, 즉 백작이거나 Markgraf, 즉 변경백이었다.
퓌르스트가 저렇게 여러 영주를 퉁쳐 말하는, 즉 제후로써의 의미로 쓰인게 아닌 고유작위로 탄생하는 건 좀 더 후대의 일이다. 일례로 신성로마제국 해체 과정에서 탄생해버린 리페 공국, 샤움부르크리페 공국, 발데크피르몬트 공국, 로이스게라 공국 등은 Fürstentum 의 칭호를 썼으며, 현대에는 리히텐슈타인의 군주가 Fürst 작위를 쓴다. 이들의 사례를 보듯, 고유 작위로서 쓰이는 경우도 Duke보다 격이 낮았다. Duke 이상 작위를 가진 신롬제후는 격이 낮은 퓌르스트 대신 그 작위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러한 문제로 번역이 대공(大公) 또는 공(公), 후(侯) 등 하나로 정해지지 않고 여러 가지가 난립하는 어려움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로써 Fürst는 맥락에 따라 제후나[18] 후작[19] 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어울린다.
하여간 번역에서 제일 많은 문제를 낳는 작위. 작위 서열을 자세히 따지지 않아도 '왕자'라는 의미인지 '군주'라는 의미인지 헛갈려 오역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4.1.5. 마크그라프(Markgraf)
라틴어 : Marchio
영어 : Marquess
프랑스어 : Marquis
독일어 : Markgraf
프랑크 왕국 및 신성로마제국의 작위. 말그대로 변경의 변경주(Mark)를 담당하는 행정관으로서, 자체적인 군사력을 갖추고 외세로부터 제국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실질적으로 유래를 따지자면 변경지역에 파견된 행정관으로서 백작의 일종이지만, 일본이 근대화 때 오등작에서 후작에 마르크를 대응시킨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일반적으로 후작으로 번역한다. 원래 직위의 성격을 살린 대체 번역으로는 변경백이라는 단어가 쓰인다.
4.1.6. 카운트(count)[20]
라틴어 : COMES
영어 : Count, Earl
프랑스어 : Comte
독일어 : Graf
라틴어로 행정관인 COMES에서 유래된 것으로, 자잘하게 나뉜 행정 단위 하나하나에 임명되어 행정관 역할을 하거나 중앙에서 관료 역할을 했다. 사실상 영지를 수여받은 작위 중 제일 핵심적인 지위.[21]
4.1.7. 바이카운트(Viscount)
'''영지를 받은 제후가 아니다.''' 바이카운트는 카운트의 보조자 중 하나로, 백작을 보좌하거나 백작의 부재 시 대리 업무를 본 직위다. 어원도 "vis(=vice)" + "count" 꼴로 조어한 것이다. 즉, 현대적 표현으로 쓴다면 "Vice Count", 번역하면 "부백작(副伯爵)"이 된다. 그래서 봉건제에서 관료제로 전환되던 근대에 작위체계가 재편되기 전까지, 바이카운트라는 작위는 제대로 있지도 않았고, 따라서 바이카운티 같은 영지도 없다. 역사적으로 이들 부백작은 프랑크 왕국의 분해로 혼란스러운 시절 상급자인 백작이 약화되었을 때를 노려 백작위를 자칭하거나 탈취하는 방식으로 유력 제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오등작을 빌어와서 번역하던 일제의 영향으로 자작으로 옮긴다.
4.1.8. 바론(Baron)
자유인, 전사, 영주 정도의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특별히 군주에게 지위나 행정구역을 받은건 아니고, 장원을 소유해서 경제적 여유 좀 있는 자유민들이 중무장을 해서 전사로써 봉사한 것을 유래로 한다. 즉 군주에게 영역을 봉토로 하사 받은 '영역제후'가 아닌, 게르만족의 종사제 속에서 자연발생한 지역 유력자, 호족의 성격을 가진 영주를 유래로 둔다. 후에 명예 지위화 되어 작위화 되었다.
왕 직속 남작 같은 경우는 '군주 직속의 영지를 가진 가신'으로써 중간 단계없이 바로 군주랑 연결이 되다보니, 영지라곤 수도 근교의 장원 하나 밖에 없는데도, 왕의 관료나 고문으로서 왕국의 실세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는 '공작 아래 백작 나부랭이' 따위보다 더 강한 실권을 가지곤 했다.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진 나라는 '중앙집권적 봉건제' 가 발달했던 노르만 잉글랜드로, 이런 실세 남작의 경우는 Lord라는 별도의 호칭을 수여받기도 했다.[23] 물론 반대로 공작 아래 직속 남작, 백작 아래 직속 남작도 있었지만, 당연히 이런 작위들은 나라 중앙의 실권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4.2. 성직 제후
4.2.1. 대주교공
- 대주교공령/대주교령
4.2.2. 주교공
- 주교공령/주교령
4.2.3. 제국수도원
- 제국수도원령
5. 기타 작위
5.1. 왕실
- 부군
- 인판테
- 프린스
5.2. 준남작/군
5.3. 기사
- 제국기사
5.4. 훈작사
5.5. 영주
- 자유영주
- 주영주
- 융커
5.6. 기타
- 항구자유귀족
- 실역귀족
6. 참고 자료
- http://blog.naver.com/sten1/10118459783 - 독일 귀족계급체계
- http://blog.naver.com/sten1/10161228571 - 항구자유귀족
- http://blog.naver.com/sten1/10153260803 - 실역귀족
- http://blog.naver.com/sten1/10161773098 - 자유영주
- http://blog.naver.com/sten1/10164816936 - 주영주
- http://blog.naver.com/sten1/10145291085 - 주교공
- http://blog.naver.com/sten1/10145072365 - 성직자령
- http://blog.naver.com/sten1/10131931415 - 제국교회령
7. 관련 문서
[1] 일반적으로 후작보다 백작이 더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부분은 번역 문제상 원어를 확인해야만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아래 항목들은 단순히 직역상 백작으로 번역될 뿐, 시·공간에 따라서 그 지위와 역할, 명목상(de jure)과 사실상(de facto)은 천차만별이므로 성급히 일반화하지 않도록 유의할 것.[2] 대부분의 작위가 Count (Graf)가 세분화되어 나온 작위다.[3] DUX 외에도 COMES를 자칭하던 세력 중 소규모 세력들을 흡수하여 영역제후로 발전한 이들 역시 반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예컨대 툴루즈 백작이나 플랑드르 백작이 그 대표적 사례. 비슷하게 최초에는 루앙 백작에서 시작한 노르망디 공작도 비록 그 지위를 군주에게서 받았다고는 해도 세력 기반은 자신이 이끌던 노르드인 바이킹이었고, 그래서 오랜 기간 독립적이고도 강력한 권력을 누렸다.[4] 흔히 은대지(BENEFICIUM)의 존재 정도는 아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카운티를 비롯한 후대 영지 그 자체는 은대지가 아니었다. 영역은 순전히 사법이나 행정, 군사 업무 등의 관할권으로, 보통 영내에 일정 부분은 은대지로 지정되었으나, 사유화와 가산화가 진행되면서 관할권 전체를 영지로 삼게 되었다.[5] 그와 더불어 지나치게 높지도(공작) 낮지도(남작) 않은, 적절한 위치인 점도 한몫한다.[6] 혹은 일반적인 귀족과는 어느 정도 구별되는 지위인 군주를 제외하고 자유영주의 작위 체계 편입을 염두에 둔다면, DUX(공작)-COMES(백작)-BARO(남작)의 3단계로 이해하는 것도 적절하다.[7] 아예 없는 건 아니고, 리모주 자작령, 레옹 자작령 등 프랑스에는 자작령도 드물게나마 있었다. 다만 레옹의 경우는 백작령이었던 것을 일시적으로 자작이 탈취해서 임의로 자작령이라고 부를 뿐 공식적으로는 백작령이었다. 또 베안 자작령은 자작이 멋대로 성 쌓고 독립 선포한 사례, 바스 자작령은 백작이 자신의 봉신에게 봉토를 내린 사례다. 하여간 봉건주의의 특성 상 무수히 많은 개별 사례가 있긴 한데, 압도적으로 많은데다가 군주가 봉한 정규 영지(?)에 해당하는 백작령에 비해 좀 애매한 작위인게 사실.[8] 아크 듀크가 아닌 아치 듀크로 발음한다.[9] 보통 러시아계 국가의 벨리키 크냐즈를 Grand Prince로 번역하나 Grand Duke로 번역하기도 한다.[10] 본래 선제후 제도가 성립하기 전까지는 제국 내 제후(Fürst)라면 누구든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11] 대표적으로 작센은 하인리히 사자공이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작센-비텐베르크나 작센-라우엔부르크, 베스트팔렌 등 공국(duchy)과 기타 군소 백작령, 주교후령 등으로 분할된다.[12] 당대에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독일 내 부족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중 과도기를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학술 용어이다.[13] 이 작위가 본격적인 귀족 계급으로 사용된 것은 독일이었으므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이들을 일컬을 때 특별히 "Sovereign/Souverain"을 수식하거나 아예 원어 그대로 "Fürst"라고 표시한다.[14]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First'''와 기원이 같다. 곧 '''으뜸인 자'''를 가리키는 말이고, 혈통적 우월성이 짙으며 부족제 사회에서는 족장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의미 상 자연스레 '''제1시민'''을 의미하였던 prince로 옮겨졌다.[15] 엘베 강 서안은 카롤루스 대제 때에야 막 정복되고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참이었고, 동안은 북방십자군이나 동방식민운동 과정에서 신성로마제국으로 편입하였다. 엘베 강 동역을 정복할 즈음에는 슬라브인 영역이라고는 하여도 기독교나 봉건제를 이미 수용한 상태였으나, 민족 구성이 달랐기에 현지에 정착한 독일인 공동체와는 또다른 지위를 차지하였다.[16] 이들 지역에서는 왕의 봉신인 유력제후를 통칭할 때도 prince보다는 baron(자유민, 직속 봉신)이나 peer/pair(동료, 동지)라는 말을 사용하였다.[17] 이러한 작위 중 일부는 왕실 내 계승자에게 겸하게 하면서 사실상 위쪽의 royal prince와 유사한 지위를 차지하기도 하였으나, 엄연히 왕족(royal prince)이나 황태자(crown prince)라는 의미와는 구분되는 것이었다. 굳이 prince가 아니더라도 이 같은 역할을 하는 사례는 더 있다. 대표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의 모라바 변경백, 스코틀랜드 왕국의 로스시 공작(duke), 프랑스 왕국의 도팽(dauphin. 원래 알봉 백작(count of albon)이었으나, 왕령으로 편입 후 비에누아 태자령(dauphine of viennois)로 바꾸었음) 등이 있다.[18] 상기하였듯 중세 시대 대부분 동안에는 Markgraf 와 graf 등 Duke 이하를 전부 퉁쳐서 부른 칭호이므로 후작이 아닌 제후가 된다.[19] 후대에 생긴 고유 작위로서의 Fürst를 번역할 때는 우리에게 친숙한 용어를 활용하면서 번역할 때 가장 적절하다. 이 경우 Markgraf는 자연스럽게 변경백작으로 번역된다.[20] 일반적으로 후작보다 백작이 더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부분은 번역 문제상 원어를 확인해야만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아래 항목들은 단순히 직역상 백작으로 번역될 뿐, 시·공간에 따라서 그 지위와 역할, 명목상(de jure)과 사실상(de facto)은 천차만별이므로 성급히 일반화하지 않도록 유의할 것.[21] 물론 고대 로마,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이후의 백작은 서로 그 지위가 상이하다. 특히 프랑크 왕국 붕괴 전의 기초 행정 단위(pagus/gau) 백작과 붕괴 이후 그 행정 단위들을 통합하면서 탄생한 영역제후로서의 백작은 권력이나 권위에서 큰 차이가 있다.[22] 성주령(Castellany)은 이들의 영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중세 성기에 각지에 축성이 활발해지면서 성(castle)을 중심으로 할거하는 유력자들이 영역제후령(principatus; principaute;principality)을 해체하였던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23] 애초에 중세 유럽에서는 '''섬기는 행위조차 신분에 따라 제약되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나 대뜸 섬기겠노라 청원한다고 유력 군주나 제후의 가신이 될 수 있던 것이 아니다. 같은 주군을 섬긴다는 것은 (실제로는 어느 정도 위계를 구분하기는 하였지만) 본질적으로는 '''격이 같다'''는 뜻이다. 당장 "Baron"은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국왕의 직속 봉신"이란 의미로서 공작, 백작, 남작 구분 없이 지칭할 때도 사용되었다. 같은 이유로 똑같이 봉사하는 것이 임무였음에도 기사(knight)와 미니스테리알레스(ministeriales) 등은 고귀한 태생에 따라 격이 나뉘었으며, 농민들도 자유민과 부자유민을 구별하였다. 격이 낮은 사람은 같은 탁자에 앉지 못하며, 특정 복장이나 도구를 쓸 수 없고, 재판소에서도 참여하거나 증언하지 못하는 등 불이익이 있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에서 황제의 봉신이었던 제국백작이나 제국기사, 자유 제국시, 주교후, 제국수도원 등은 제국의회에 참석할 특권 등을 누렸다.[24] 물론 기사수도회 소속 기사와 일반적인 세속 귀족에 속한 기사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므로 이를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