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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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철종의 딸.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이다.'''[3]
2. 생애
1858년(철종 9) 궁인이었던 범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5남 6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녀로, 사실상 철종의 무남독녀로 볼 수 있다.[4]
1866년(고종 3) 2월 13일, 9세의 나이로 정식으로 옹주로 책봉되고, 어머니는 궁인에서 종2품 숙의로 품계가 오른다. 이때 처음에는 영숙옹주(永淑翁主)로 책봉되었다가[5] , 같은 날 영혜(永惠)로 작호가 바뀌었다.[6]
박원양의 아들 박영효와 혼인했으나,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15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7] 조선의 법도에 따르면, 부마는 왕의 사위임으로 아내인 공주나 옹주가 죽더라도 재혼을 할 수 없는 것이 국법이었다.
그러나 박영효는 왕의 허락을 받아 영혜옹주가 세상을 떠난 후, 박영효는 궁녀 범씨를 첩으로 들여 자녀를 낳았고 손주들도 보았다.[8] 그 뒤 박영효는 사망한 후, 정식 부부인 영혜옹주와 같은 묘에 묻혔다.
3. 관련 문서
[1]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30번지다. [2] 본관은 반남, 자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필명은 현현거사(玄玄居士)이다. [3] 덕혜옹주를 조선의 마지막 왕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작 덕혜옹주는 조선 멸망(1910년) 이후인 1912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조선의 왕녀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고종에게 덕혜옹주보다 먼저 태어난 딸들이 있었으나, 모두 갓난아기일 때 요절해서 영혜옹주를 조선의 마지막 옹주로 보는 것이 맞다.[4] 헌종도 숙의 김씨에게서 딸을 얻었지만, 옹주로 책봉 받지도 못하고 요절했다. [5]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철종(哲宗) 때의 궁인(宮人)인 범씨(范氏)가 낳은 딸이 지금 9살이 되었다. 그를 영숙옹주(永淑翁主)로 봉하고 범씨는 숙의(淑儀)로 봉해줄 것에 대하여 오늘 정사(政事)에 하비(下批)하도록 하라."하였다.《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2월 13일 계묘 2번째 기사》[6] "대왕대비의 하교를 받았으니 귀주(貴主)에 대한 봉작을 ‘영혜(永惠)’로 고쳐 써서 들이라." 하였다.《고종 실록 3권, 고종 3년 2월 13일 계묘 3번째 기사》[7] 죽기 전에 병이 심하다는 실록의 기록과 대행대비(철인왕후)의 묘지문에서 철인왕후가 병에 잘 걸리는 옹주를 걱정하였다는 지문이 있는걸로 보아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모양이다.[8]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는 의친왕의 차남 이우와 결혼했다. 일본은 이우를 영친왕이나 이건(의친왕의 장남)처럼 일본 여성과 결혼시키려 했으나, 이우는 조선 여성과의 결혼을 고집하여 일제에 맞서서 박찬주와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