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주(교육자)

 

<colbgcolor=#483d8b> '''朴贊珠
박찬주'''

'''본관'''
반남 박씨
'''국적'''
[image] 일제강점기 조선
[image] 대한민국(임시정부)
[image] 대한민국
'''작위'''
공비#s-3(公妃)[1][2] → (신적강하)
'''출생'''
1914년 12월 11일
일제강점기 조선 경기도 경성부
'''사망'''
1995년 7월 13일 (향년 80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
'''가족'''
부친 박일서(朴日緖)[3], 모친 박원희(朴元熙)
배우자 이우(李鍝), 장남 이청(李淸), 차남 이종(李淙)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3.1. 친정
3.2. 시댁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박찬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이다.
대한제국개화파 정치가[4]였던 박영효의 서손녀[6]이고, 흥선대원군의 적장손인 이준용의 양자 이우의 부인으로 운현궁종부#s-2(宗婦)였으며, 일제강점기 왕공족공비#s-3(公妃)였다. 또한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이자 사립학교인 추계학원의 초대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2. 생애


1914년 12월 11일, 아버지 박일서(朴日緖)와 어머니 박원희(朴元熙)의 5남 3녀 중 장녀로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1932년 3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 여자학습원에 진학하였다.
1934년 7월 11일, 궁내성 종질료(宗秩寮)에서 약혼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7]
1935년 4월 17일, 혼인을 인정하는 쇼와 천황의 칙허가 발표되었다.
[image]
[image]
남편 이우와 찍은 사진
1935년 5월 3일, 박찬주와 이우도쿄 별저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같은 해 6월 28일경성부로 돌아와 종묘와 능원을 참배하고 조선호텔과 운현궁에서 피로연을 열었다.
결혼한 지 약 1년 후, 1936년 4월 23일에는 장남 이청(李淸)이, 1940년 11월 9일에는 차남 이종(李淙)[8]이 도쿄 별저[9]에서 태어났다.
1938년경, 여성운동가이자 교육자 황신덕에게 소유 건물을 희사하여 경성가정여숙(京城家庭女塾, 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의 설립을 도왔다.
1945년 8월, 히로시마 원폭 투하남편을 잃은 후[10] 두 아들과 함께 운현궁에 거처하였다. 해방 후 제정된 구황실재산법에 따라 기존의 황실 재산이 모두 국유화되자 정부 및 국회 관계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운현궁이 흥친왕 집안의 사저임을 호소하여 결국 국회의 사유 재산 승인을 받아내었다.
1950년 4월, 지금의 추계예술대학교와 중앙여자고등학교 및 추계초등학교 등의 재단 추계학원의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92년, 운현궁을 서울시에 매각하고, 서대문구 북아현동 자택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다 1995년 7월 13일[11], 8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흥선대원군 묘역에 남편 이우와 합장#s-2되었다.

3. 가족 관계



3.1. 친정


  • 조부 : 박영효(朴泳孝, 1861년~1939년)
  • 아버지 : 박일서(朴日緖, 1897년~1931년)
  • 어머니 : 박원희(朴元熙, 1889년~1969년)
  • 남자형제
  • 박찬범(朴贊汎, 1917년~1986년) - 이해춘(1920년~2009년, 의친왕의 3녀)과 혼인
  • 박찬익(朴贊益, 1920년~2003년)
  • 박찬우(朴贊友, 요절)
  • 박찬웅(朴贊雄, 1926년~1950년)
  • 박찬용(朴贊用, 1927년~1945년)
  • 여자형제
  • 박찬옥(朴贊玉)

3.2. 시댁




4. 대중매체에서


1990년작 KBS1 3.1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유가영이 연기했다.
[1] 재위 1935년~1947년[2] 공작부인을 이르는 말인 공비(公妃)와 같은 한자를 쓰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비(公妃)는 일제강점기 왕공족#s-3.2의 지위 중 하나인 공(公)의 부인을 이르는 말이다. 참고로 일본 정부가 조선귀족들에게 수여한 오등작 제도의 공작이 아니라 별도의 계급이다. 자세한 내용은 왕공족 문서를 참고.[3] 박영효의 차남, 서자이다.[4] 그리고 친일파. 이우가 일본인과 결혼하는 것을 싫어해 박찬주가 결혼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영효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여서 겨우 일제를 달래 혼인할 수 있었다.[5] 비단 이런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적자가 없고 서자만 있을 경우에 서자를 법적으로 본처의 양자로 들여 후사를 잇게 하는 것은 민간 양반가에서 심심찮게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후사를 이은 서자는 당연히 그 집안의 적장자로 취급받았다. 이는 민간뿐 아니라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해군, 경종 등이 대표적인 사례.[6] 박영효는 철종의 딸인 영혜옹주의 남편, 즉 철종의 부마였다. 조선의 법도상 부마는 사별해도 재혼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영혜옹주가 결혼 3달만에 요절했다는 것. 원칙대로라면 박영효는 재혼도 못 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 했고 당연히 후사도 볼 수 없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고종은 그를 배려하여 특명으로 영혜옹주가 하가할 당시 몸종으로 데려갔던 궁녀들을 으로 삼을 수 있게 해주었고, 그 중 한 명인 나인 범씨가 낳은 아들이 박찬주의 아버지 박일서(朴日緖)다. 어디까지나 본처가 아닌 첩의 자식이므로 박일서와 그 자녀들도 원칙적으로는 서자, 서손이 되어야 했지만, 본처와 사별하고 재혼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영효의 유일한 후사였기 때문에 사실상 적장자로 대우받았고[5][7] 결혼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우 #s-2 문서를 참고.[8] 안타깝게도 이종은 브라운 대학교 유학 중 1966년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9]궁내청 보관 기록에 의하면 도쿄 공저의 자세한 위치도 나오는 데 당시 공가 도쿄 별저 주소는 도쿄도 시부야구 도키와마츠쵸 101번지. 현재 이곳은 아오야마가쿠인 대학 시부야 캠퍼스 중등부 인근이라고 한다.[10] 이우히로시마로 발령이 났을 때, 조선에 머물게 해달라는 청원을 조선총독부와 조선군사령부가 거절하였다. 만일 친일파였던 조부 박영효1945년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우가 조선에 머물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애써주었을 것이다.[11] 남편 이우가 죽은 지 약 50년 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