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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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종황제의 고명딸로[2]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된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춘기(梁春基)이다.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이 되었다. 양씨의 친정오빠는 백정으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으로 벼락출세했다.
‘덕혜’(德惠)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황제가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아기’,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ひめ, 아가씨)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李德惠)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이 없다.'''[3] 따라서 '대한제국(or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사실 틀린 셈.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정식 봉작받은) 왕녀는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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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유년기
2.1.1. 덕수궁의 꽃
고종이 '''59세'''일 때 얻은 늦둥이이자 당시 유일한 고명딸이어서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4] 고종이 아기였던 덕혜옹주를 보기 위해 입실했을 때 옹주의 유모를 맡은 변복동 상궁이 옹주에게 누워서 젖을 물리고 있었는데, 고종은 옹주가 놀라거나 울까 봐 일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때문에 '''"천하의 황제 폐하 앞에 누울 수 있는 것은 변 유모 뿐"'''이라는 말이 돌 정도였다.
덕수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덕수궁의 꽃'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덕혜옹주가 조금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준명당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까지 했다. 거기다 150m밖에 되지 않은 거리인데도 옹주가 가마를 타고 다니게 했다. 함께 다닌 원생들은 옹주와 또래인 사대부 가문의 딸들이었는데 모두 옹주에게 극존칭을 사용했으며, 항상 시중을 들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상 덕혜옹주만을 위한 유치원이었다.
덕혜옹주는 어린 나이에도 신분 고하에 대한 이해가 빨랐던 모양이다. 외삼촌인 양 상관이 덕수궁에 입궐할 때마다 "양 상관이 온다"며 하대하고, "아기씨의 외가는 어디입니까?" 라고 묻는 궁인들의 질문에 생모 귀인 양씨의 친정이 아니라 적모(嫡母) 명성황후의 친정인 죽동[5] 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전통적으로 왕의 자녀는 생모가 누구던 간에 모두 왕후의 자녀이기도 하였으므로, 자신을 황제의 딸이라고 의식하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2.1.2. 호적에 오르지 못하다
그런데 덕혜옹주가 점점 성장하는데도, 일제는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려주지 않았다. 이에 고종황제가 직접 나서,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에게 덕수궁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는 덕혜옹주를 보여주며 '''"이 아이가 바로 내 딸이다"''' 라고 소개, 결국 황적에 올렸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데라우치가 총독 관저로 돌아가서 측근들에게 "오늘은 멋지게 한 방 먹었다"고 했다고.[6]
참고로 이 유치원의 원장은 교구치 사다코(京口貞子)라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로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한다. 유치원 졸업 후, 덕혜옹주는 일본인 학교인 히노데 소학교(ひので 小学校)에 입학했다.
2.1.3. 추측
일제가 덕혜옹주를 이왕가의 호적에 올려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 어딘가에서는 "고종황제가 순헌황귀비 엄씨 사후에 여러 궁녀들을 후궁으로 삼았으나, '''일제는 일부일처제 국가라서 후궁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연히 후궁 소생들을 황실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신뢰성이 없다.''' 역시 동아시아의 왕실들 중 하나인 일본 왕실 또한 후궁을 잔뜩 들이는 관습이 있었고, 덕혜옹주가 태어날 때 천황인 메이지 덴노부터가 고메이 덴노의 측실 나카야마 요시코 소생이다. 게다가 메이지 덴노 역시 후궁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정실인 쇼켄 황후는 자녀를 1명도 낳은 적이 없고, 후계자인 다이쇼 덴노를 비롯한 5남 10녀를 모조리 후궁들에게서 보았다. (야나기하라 나루코, 소노 사치코 등)
후궁을 하나도 들이지 않은 최초의 천황은 다이쇼 덴노로, 데이메이 황후(사다코)가 아들만 4명을 낳았기 때문에, 굳이 측실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쇼와 덴노는 아내 고준 황후(나가코)가 결혼 후 딸만 줄줄이 4명을 낳자 "후궁을 들여 아들을 낳으라"는 신하들의 압박을 받았으나, 끝내 거부했다. 그 정성이 닿았는지 고준 황후는 1933년에야 간신히 다섯째 아이로 그토록 바라던 아들 아키히토를 낳았다.[7] 이에 비하면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대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에''' 호적에 올리지 않았다는 주장이 차라리 더 신뢰성이 있다.
사실 일제강점기 당시 덕혜옹주가 태어난 사실은 이미 한참 전에 조선총독부에 알려져 있었다. "덕수궁 (소주방) 나인 양춘기가 여자 아기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즉 일본인들이 덕수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사건건 감시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만약 덕혜옹주를 조선의 황녀로 인정하게 되면 다른 조선의 황족들까지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일본은 덕혜옹주를 황적에 올리는 것을 일부러 미루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8]
2.2. 일본행
당시 대한제국 황족들은 대개 일본으로 끌려가 사실상 인질이 되었기 때문에, 1925년 13살인 덕혜옹주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가서 황족과 화족 영애들이 다니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女子學習院)[9] 에 편입학되었다. 영친왕 부부는 덕혜옹주가 자신들의 자택인 영친왕저택에서 지내며 학교에 재학하는것을 희망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옹주는 고향을 떠나자마자 가쿠슈인 내에 있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했다.
이때 함께 여자 가쿠슈인에 다닌 동기들 중에는 메이지 덴노의 외손녀인 다케다노미야 아야코(竹田宮禮子) 여왕과 기타시라카와노미야 사와코(北白川宮佐和子)[10] 여왕, 사가 히로, 소마 유키카(相馬雪香)[11] 등이 있었다.
그중 유키카는 덕혜옹주를 안타깝게 여겼고, 독살이 두려워서 '''보온병'''에 담아 가지고 온 물만 마신다는 말을 듣자 덕혜옹주에게 '''덕혜님은 조선의 공주라고 하셨지요? 내가 덕혜님 입장이라면 독립운동에 나섰을 텐데, 왜 덕혜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덕혜옹주는 이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유키카는 독립운동 운운하는 발언 때문에 교무실로 불려가 교사들에게서 히메에게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고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12]
당시 가쿠슈인 학생들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덕혜옹주에게 '토쿠에사마(덕혜님)', '토쿠에히메사마'라는 존칭을 쓰며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고준 황후 항목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당대 일본 황실에서 황족 여인은 이름의 뒤에 미야(宮)를 붙이고 귀족 여인은 이름의 뒤에 키미(君)를 붙였다. 본래 히메(姬)는 고귀한 신분의 여인 전반을 칭하는 말이었다. 구 대한제국 황족들은 일본에서는 왕공족이라고 해서 황족도 아니고 화족도 아닌 애매한 취급이었는데[13] 그것이 호칭에서도 드러난 것. 하지만 화족영애는 물론이고 황족영애들도 다니던 가쿠슈인에서 급우들이 '~님'(~さま)이라고 부른 시점에서 상당히 높은 대우를 받은 것이다.
가쿠슈인, 히노데 소학교, 사관학교 등, 일본 학교에 입학한 조선의 황족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맨 앞자리에 앉아 급우들과는 다른 재질의 넓은 책상을 단독 사용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높은 의자에 앉아있는 등[14] 여러 특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가쿠슈인은 이미 특권층인 일본의 황족과 화족들이 다니는 학교인데 그 중에서도 더 특별 대우를 해준 것.
2.3. 강제 유학 시절
그러나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내내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러다 1929년 5월 30일, 어머니인 귀인 양씨가 끝내 유방암으로 사망하자, 이때부터 처음으로 '''몽유병'''과 '''조현병(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2가지 추측'''이 있다. 황실의 호적에 올라간 탓에 생모인 귀인 양씨와는 공식적으로는 남남이 되어 어머니의 장례식에 자녀로서 3년 복상을 하지 못한 것에 크게 상심했기 때문이라는 설과[16] 이 시기 즈음에 일제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일본 방계 황족인 야마시나노미야 후지마로(山階宮藤磨) 왕[17] 을 거론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없던 일이 된 것으로 인한 충격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아버지가 식혜를 먹고 얼마 안있어 의문사한 뒤에 일본 사회에서 고립된데다 평소 독살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곤 했는데[18] 이 역시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올케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일본에 온 직후에 이방자 여사가 덕혜옹주를 만났을 때 "처음 내가 본 옹주의 모습과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발랄함과 영롱한 눈초리는 없었다. 나를 보고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낯선 환경에 대한 불안한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그 후 여자 가쿠슈인에 편입학하기까지의 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영친왕, 이방자와 함께 살았다. 영친왕 부부는 아직 어리고 그동안 여러 일로 충격이 컸을 덕혜옹주를 위해 자신들이 데리고 살며 보살피겠다고 했지만, 일본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덕혜옹주를 기숙사로 보냈다고 한다.[19]
덕혜옹주는 이미 10대 후반 때부터 정신병 증상이 시작되어 등교 거부를 한다. 이후 올케 이방자 여사는 의사를 불러 덕혜옹주를 진찰하게 했는데,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으로 인해 등교 거부 상태였으나, 설상가상 졸업 이전의 시점이던 이때는 이미 정신질환 진단을 받은 데다 혼담까지 오가고 있어, 당시에는 여자 가쿠슈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덕혜옹주가 학업을 마친 건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이듬해인 1931년의 일이다.
2.4. 혼담
고종황제는 사실 덕혜옹주가 '''8세 때 황실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약혼'''을 시켰다. 김황진에게 아들이 없다고 하자 "그럼 조카라도 달라"고 해서 맺은 혼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고종황제가 세상을 뜬 후 약혼은 무효화되고, 일본은 그녀를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 모두, 자신들에 이어 어린 옹주를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삼으려 든다며 해당 혼사를 굉장히 불쾌히 여기고 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특히나 이 시기 이미 몽유병이나 신경쇠약을 비롯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던 덕혜옹주를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고 한창수[20] 가 자신의 공적을 높이기 위해 결혼을 서둘러 진행한 탓에 옹주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더욱 반대를 해서 어떻게든 혼담을 깨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끝내 실패했지만.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는 "식사도 잘 하시고 조금은 조리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어 무사히 결혼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 말은 이미 증상은 지속되고 있으나 일시적으로 나았다는 뜻이 된다.
어쨌든 병세가 호전되는 듯하자 1931년 데이메이 황후에 의해, 데이메이 황후의 오빠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를 후견인[21] 으로 두고 있던 대마도의 번주 출신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혼인'''하게 된다.
2.5. 소 다케유키와의 정략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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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감정 때문인지 소 다케유키는 오랫동안 한국에서 애꾸눈에 키가 작은 추남이라니느니, 꼽추라느니, 덕혜옹주를 폭행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22] 아예 부부가 나란히 찍은 결혼사진에서도, 다케유키는 지워버리고 덕혜옹주의 모습만 남겨 신문지상에 실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고보면 소 다케유키는 (황족은 아니었지만) 가쿠슈인 고등과와 도쿄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엘리트에[23] 명문가 출신 귀족영식이며 허우대도 멀쩡한 미남으로 부부 사이도 원만한 편이었다고 한다[24] . 두 사람은 신혼 초에는 각종 행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기도 했는데, 대체로는 표정도 밝았다고 한다. 다만 한쪽 눈이 사시였는데 애꾸눈이라는 소문은 여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2.6. 딸 마사에(정혜)의 출산
결혼한 지 1년쯤 후인 1932년 8월 14일,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사에(正惠)'''라는 딸이 태어났다. 한국식으로 읽으면 '정혜'이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이 두 사람의 상의 하에 자신의 이름 중 '혜' 자를 붙여 정혜라고 지었다고 전해진다.
소 다케유키는 아픈 아내 대신 마사에를 데리고 여러 번 조선 황족들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 마사에의 양육도 다케유키가 도맡았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2.7. 병환과 이혼
그러나 마사에를 낳은 후 덕혜옹주의 조현병이 재발[25] 했고, 점차 부부 사이도 파탄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더욱 부끄러운 일로 취급받았고[26] 때문에 소 다케유키도 심정이 복잡다단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945년 일제가 패망함에 따라 들어선 미군정(일본)은[27] 1947년 신적강하를 통해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을 신적강하를 통해 평민으로 강등시켰고,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역시 그에 따른 특권을 상실해 생계 유지가 어려워졌다.[28]
결국 1946년 덕혜옹주는 남편에 의해 마츠자와(松澤)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951년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을 주선했던 데이메이 황후가 사망하고, 1955년 덕혜옹주는 이혼을 당한다.[29] 사실 이방자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이 이혼은 다케유키와 영친왕, 이방자 여사 세 사람의 논의 이후 결정된 합의 이혼이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정신 질환자였기 때문에 오빠 부부인 영친왕, 이방자 여사가 후견인으로서 대신 협의해주었다.
그리고 같은 해 다케유키는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立人), 차녀 와키(和木), 차남 나카마사(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때문에 이 부분에서 "소 다케유키가 너무 성급한거 아니었냐"고 비판받기도 하는데, 사실상 별거 상태가 10년 가까이 지속된 상태였기 때문에 아예 이해하지 못할 행동도 아니긴 하다. 게다가 쓰시마 종가의 당주로서 다케유키는 대를 이어야 할 책임도 어느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이미 50줄을 바라보던 나이였으니. 어쨌거나 현재는 일본뿐만이 아닌 한국의 역사학자들도 소 다케유키에 대해서 본인이 할 수 있는 만큼은 했다는 평을 내린다.
후일담으로 덕혜옹주가 귀국한 뒤 소 다케유키는 1972년 한국에 한번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옛 아내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청하기도 했으나 당시 주변에서 "괜히 덕혜옹주의 병세만 악화될 수 있다"며 이를 거절하였기에 결국 만나진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뒤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했고, 대마도에 있는 선친들의 묘터에 함께 안장되었다.
2.8. 딸 마사에(정혜)의 실종
한편, 덕혜옹주의 딸 마사에(정혜)는 어머니와 사이가 소원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버지 다케유키가 재혼할 즈음인 1955년에 1살 위의 스즈키 노보루(鈴木昇)라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분가했다. 노보루는 마사에와 마찬가지로 와세다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중학교 교사이자 시인이기도 했다. 결혼한 후, 흔히 하는 것처럼 마사에가 남편의 성씨를 따른 게 아니라, 마사에는 '소'라는 성씨를 유지하고 남편이 마사에의 성씨를 따라 '소 노보루'가 되었다. 이는 장인어른인 소 다케유키의 요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1956년 8월 26일 아침,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마사에가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었다는 루머도 있으나, 유서에 의하면 마사에는 야마나시현과 나가노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30] 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다.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것은,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다케유키는 죽을 때까지 끝끝내 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 생존 상태에 있었지만, 다케유키의 사후 마사에의 이해 관계인에 의하여 일본 민법 제30조 조항에 따라 마사에의 실종 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그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종 선고가 성립되어[31] 사망 처리되었다.
일본어 위키 백과에 의하면, 마사에(정혜)의 실종 이후 수색대의 노력에도 그녀의 생사를 알 수 없자 부재자의 상태로 노보루와의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이후 전 남편이 된 노보루가 2007년 4월 발표한 시집에 의하면, 실종 후 50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에서야 마사에(정혜)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유품인 수첩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마사에의 사망이 실체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보인다.
2.9. 정신 병원 입원 후
덕혜옹주의 입원비를 내준 사람은 이복오빠 영친왕으로, 당시 돈으로 월 1만 엔에 달하는 거액의 병원비를 다달이 지불한 것도 영친왕이였다고 한다. 이혼 전까지는 다케유키가 지불하였다고. 당시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이 약 6,500엔 정도 하던 시절이니, 당시로서도 상당히 큰 금액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시가로 계산해보면 약 30만 엔 가량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거금을 대납한 것이었는데, 당시 영친왕은 더이상 왕공족이 아니어서 예전처럼 풍족하지도 않았다. 신적강하나 이승만 정권의 황실 재산 강제 국유화 등으로 인해 이때부터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한 시점이었기에, 원래 살았던 이왕가 저택마저 헐값으로 내놓는 지경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집세를 핑계로 참의원에서 공건물을 빌렸다고 서류에 쓰고 돈을 줄 정도로 빈털터리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 거액의 병원비를 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대가 가족이라 해도 정신질환 환자를 어떻게 대했는지를 알면, 영친왕이 동생에게 정말 최선을 다했음을 알 수 있다.
2.10. 귀국
1962년이 되어서야 덕혜옹주는 김장한의 형인 기자 김을한[32] 의 노력으로 '''37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김을한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덕혜옹주의 모습을 보고, "고종황제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까"라며 눈물을 흘렸으며, 그녀의 귀국을 위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결례임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부탁하여 국적을 회복시켜 돌아오게 해주는 등 신경 써주었다고 한다.[33]
덕혜옹주와 같은 전주 이씨인[34] 이승만 대통령은 공적으로 대한제국 황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황족들의 국적 회복과 송환 요청 등을 전부 묵살해오고 있었다. 첫 공화국이었던 이승만 정권 특성상 대한제국 황실은 국체(國体)를 뒤흔들 수 있는 정적이었다.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에선 패전과 신적강하의 여파로 천황 직계 황족 외엔 죄다 평민으로 강등되어 조선 황족들도 경제적으로 꽤나 막막한 처지에 처해있었다.[35]
이승만 정부가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해 몰락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섰을 당시엔 장면 총리가 영친왕 이은에게 주영 대사직을 권유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즈음 영친왕은 뇌일혈 후유증으로 건강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고사했다. 그리고 이후 5.16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해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이미 공화국으로서 확실히 기반을 잡은 상황이라 옛 황족들이 큰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영친왕을 비롯한 생존 황족들 중 아예 일본인으로 귀화한 이건을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 모두에게 귀국을 허락했다. 이는 정통성 확보 차원도 있었는데, 국민의 선거가 아닌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기에 정통성이 딸리는 군사정권으로서는 과거 대한제국 황족들을 불러들여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을 계승했다는 것과, 자신들은 그 대한제국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합법정부이기에 황족들을 데려올 수 있다는 걸 광고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덕혜옹주가 하네다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여자 가쿠슈인 재학 시절 동기들이 나와서 꽃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환송했다. 굳이 가쿠슈인의 전 황족과 귀족 출신 여자들이 도와준 걸 볼 때, 대부분 덕혜옹주를 동정했던 모양. 자신들도 신적강하로 생계가 막막해졌으니 공감대가 형성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술한 덕혜옹주의 유모 변복동 여사는 이때까지 생존해 있었는데,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가 김포국제공항에 착륙하자 창덕궁에서 순정효황후가 보낸 상궁들과 함께 입국장 앞에서 비행기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연신 "아기씨!"라 불렀으며, 덕혜옹주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통곡했다.
돌아온 덕혜옹주는 주변 사람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지만, 창덕궁으로 돌아오자 옛 기억이 살아났는지 궁 안을 돌아볼 때 연신 눈물을 흘렸다. 자신을 맞이한 친척들 앞에서 옛 황실 예법을 그대로 따라 황실의 큰어른 되는 순정효황후[36] 에게는 모로 꺾어 큰절을 올리고, 아랫사람 되는 이우 공의 아내 박찬주 여사[37] 가 자기한테 절을 할 때는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전부 울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조선의 궁(宮)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이후 죽을 때까지 간간히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상인으로 돌아오지는 못했으며, 덕혜옹주의 간병 및 간호는 유모이던 변복동 여사와 올케 이방자 여사의 몫이 되었다.[38] 변복동 여사는 1972년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옹주만을 걱정했다고 한다.
덕혜옹주가 귀국한 지 1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창덕궁 낙선재로 일본인 신사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바로 덕혜옹주의 전 남편 소 다케유키였다. 당시 낙선재의 지배인으로 있었던 이공재한테 다케유키는 "옛 아내를 한 번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공재는 당시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가둬버리고 이혼했다고 알려진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39] 그래서 "만나봤자 옹주가 할 얘기도 없고, 이미 이혼한 사이니 만나야 할 이유도 없다. 당신을 만나게 된다면, 옛날 생각이 나서 오히려 병세가 더 악화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면회를 일절 허용치 않으니 썩 돌아가시오." 하면서 그를 매몰차게 쫓아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소 다케유키는 그대로 일본으로 떠났고, 이후 죽을 때까지 덕혜옹주와 재회하지 못하였다.
2.11.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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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덕혜옹주(왼쪽에서 두 번째)의 회갑 잔치 당시 모습. 맨 왼쪽이 변복동 여사로,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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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덕혜옹주가 잠깐 정신이 맑았을 때 썼다는 글. 기억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이 글귀가 <한국사 전(傳)>과 소설 <덕혜옹주>에서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런데 이 글귀가 1983년 KBS 뉴스파노라마에 처음 공개될 무렵에는 '살고 싶어요' 부분만 공개되어서, 이게 '살려달라'는 뜻으로 왜곡이 되는 바람에,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학대를 당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그 외 덕혜옹주를 모신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정신이 간혹 맑아지면 옛 상궁들과 '''화투'''를 즐기곤 했다고 하며, 의사 표현은 불편한 부분이 있을 때만 "싫어" 라는 말을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나는 낙선재(樂善齋)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비전하가 보고 싶습니다''''''대한민국 우리 나라'''
씨가 보고 싶어요'''
고종의 손자인 이석의 증언에 의하면 덕혜옹주는 복상궁이란 이름의 상궁의 시중을 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이석이 면회를 가서 덕혜옹주에게 절을 하며 "고모님"하고 불렀지만 치매와 정신착란 때문에 아무 반응없이 천장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시중을 들던 상궁의 기록에 의하면 가끔 딸의 이름(마사에)을 부르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고도 한다.
1985년 전남편 소 다케유키가 일본에서 사망했다. 4년 후인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도 76세를 일기로 창덕궁 수강재에서 별세한다.[42] MBC 뉴스데스크 덕혜옹주 사망 보도. 장례식은 4월 25일에 황실 가족장으로 엄수되었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능역에 안장되었다. 묘비의 앞면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묘표가 새겨졌다.
- 앞면 : 大韓 德惠翁主之墓(대한 덕혜옹주지묘)
- 뒷면 : 開國五百二十一年五月二十六日生 五百九十八年四月二十一日卒 全州李后李旺載謹書(개국[43] 521년 5월 26일 생 598년 4월 21일 졸 전주 이씨 후손 이왕재 삼가 씀)
이후 우리 황실 사랑회 등 대표적인 대한제국 황실 복원 단체 및 모임에서 전주 이씨 종친회, 혹은 남양주시에 옹주의 제향을 지낼 것을 건의했으나 전자는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후자 측에서는 관할 밖의 일이란 이유로 이뤄지지 못해 우리황실사랑회가 이갑 황손[44] 으로부터 일임받아 추모제향을 지냈다. 2014년 4월 제향부터 전주 이씨 종친회에 제향 업무를 이관하였다.
2015년 6월 24일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日本 文化学院服式博物官)으로부터 덕혜옹주가 입던 한복 유품을 돌려받았다. #1, #2, #3, #4, #5 동년 8월 국립 고궁박물관에서 덕혜옹주 유품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https://www.gogung.go.kr/specialView.do?pageIndex=4&menuCode=GADM02&bizDiv=2&gallDiv1=2&cultureSeq=00017031KF
3. 평가
상기된 소설과 영화 <덕혜옹주> 등이 나오면서, 대한제국의 황족들에 대한 다양한 평이 나오기도 했다.
3.1. 비판적
대중 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완전히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일본 황족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았고 적어도 신적강하 이전까지는 엄연한 상류층의 일원으로써 부유하게 살았다. 당시 이왕가는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는데, 오죽하면 이방자 여사가 영친왕부로 시집갈때 황족 여성들이 다들 부러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비록 덕혜옹주가 평생을 신경쇠약과 조헌병 증상에 시달리며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지만, 그 당시 일제치하 당시 조선 여성들의 삶과 비교한다면 황녀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환경의 주어짐만큼 누리지 못했을 뿐이지 비교적 안온한 삶을 살다 간 것이였다.
간혹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소문도 있는데, 실제 덕혜옹주는 독립운동과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2016년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는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진짜 독립운동가도 아닌 사람을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람처럼 대놓고 왜곡한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신병(조현병) 때문에 무슨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3.2. 동정적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황녀의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이방자 여사의 기록이나 여자 가쿠슈인의 일본인 학생의 기록을 봐서는, 자신도 독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듯 하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 쇠약 같은 정신 질환이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게 아니다. 암살을 두려워해서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름의 풍족한 생활을 했다는 것도 한 나라의 황녀로서 비판거리는 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덕혜옹주에 대한 친일 논란이 없진 않지만, 애초 정신병 증세로 대외활동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복오빠 영친왕만큼 친일 논란이 있진 않다. 물론 영친왕도 속을 파고보면 참작의 여지가 없는건 아니지만,[45] 어쨌건 정신병에 시달리던 동생에 비해 일제 치하에서 부유한 생활을 누렸고, 일제의 선전 활동에 자의건 타의건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
오히려 더 나아가 덕혜옹주는 일제에게 핍박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막말로 덕혜옹주가 일본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면 일본에 처음 온 이후 오빠 영친왕 부부와 같이 지내지 못하게 한 것이나, 어머니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 상복조차 입지 못하게 한 것이 말이 안 되고,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정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 소 다케유키에게 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였고 오히려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학벌을 갖춘 재인(才人)이긴 했으나, 백작. 그것도 세력이 약한 대마도 도주 후손은 일국의 왕녀의 신랑감으로서는 격이 맞지 않았다. 실제로도 당시 사람들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을 황족 중에서 정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다못해 공작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
다만 혼인상대를 물색할 때쯤엔 덕혜옹주가 이미 정신병이 발발하여 조현병 진단이 내려져 앓고 있을 때였고, "말이나마 조금은 조리있게 하게 되어 결혼을 한다" 는 이방자 여사의 말을 보면 말도 이미 결혼 한참 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조현병 특유의 지리멸렬한 언어를 보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제 아무리 황족이라도 말까지 횡설수설하는 정신병 있는 여자를 명문가와 혼인시키긴 힘들었을 듯하다[46]
덕혜옹주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사의 공주 / 옹주들은 대부분 덕혜옹주처럼 풍족하게 살다 어른들이 정한 부마와 혼인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살았으며,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들에게 기대하고 교육하는 것은 딱 그 정도 뿐이었다.
덕혜옹주가 조선을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는 기대의 근거는, 그저 군주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시대적 상황이 안 좋아 의지와 상관없이 망국의 마지막 황녀가 되어버린 평범한 여성에게, 죽음의 두려움도 이기는 강한 정신력과 제 한 몸 내던져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희생 정신을 가진 영웅이 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특권층으로 태어났다고 보통 사람과 다른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영웅이 되지 않아서 잘못했다는 비판이 과연 정당한 비판이냐는 것.
사실 이 부분은 미디어 매체의 과도한 왜곡으로 형성된 이미지가 오히려 덕혜옹주를 욕보이는 측면도 강하다. 실제의 덕혜옹주는 말 그대로 '''수동적이고 평범한 그 시대의 보통 여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어떤 식으로든 독립운동 및 애국과 연관지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이런 평가가 따라붙게 된 것이다.[47]
왕녀들은 어느 나라든 대부분은 독립된 존재와 권력 없이 살았고, 오히려 말 그대로 '왕실의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최소한 영친왕은 이왕가의 수장이라는, 이름뿐인 명분이라도 있었고 아내 이방자 여사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나름 개인으로선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48] 덕혜옹주는 그야말로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일반적인 생활도 하지 못했다.
4. 대중매체에서
- 1996년 8월 MBC에서 8.15 광복 특집극으로 <덕혜-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라는 제목의 단막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극본은 김진숙, 연출은 이창섭 PD가 각각 맡았다. 그러나 연속극이 아닌 8.15 광복 특집 1일 2부작 단막극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까지는 덕혜옹주는 역사 전문가들 빼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인터넷도 대중화가 되지 않은 시절이라 그리 주목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해피타임> 2014년 12월 7일 '명작극장' 코너에서 축약한 채 나왔고, MBC Archive에선 <덕혜옹주>란 제목으로 업로드돼 있다.
당시 덕혜옹주 배역은 배우 이혜숙이 맡았으며, 고종 배역은 배우 이낙훈이 영친왕[49] 역은 김홍석이 각각 맡았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덕혜옹주 역을 아역배우 전유경과 김민정이 각각 따로 연기하였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가공인지는 모르지만 일본인 여자아이로 '헤이코'(平子) 라는 이름을 가졌던 아이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증이 엉망이다. 첫 번째로 덕혜옹주의 약혼자 이름이 김장한이 아닌 '김재영(전광렬 분)'으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1918년으로 되었을 때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등장,[50] 이왕직 장관[51] '한창수' 라는 인물(김동현 분)도 등장하는데,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5년이 지난[52] 내용 중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여전히 총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실제론 1921년 사망한 한창수는 1935년에도 살아서 등장한다. 게다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소 다케유키(정승호 분)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면서 덕혜옹주를 마구 박대하였고, 그럼에도 덕혜옹주는 꿋꿋이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자존심을 지켜왔다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오류.
참고로 헤이코라는 여자아이는 드라마 시작 부분에서 백발의 노인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김서라 분), 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모 대학에 가서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덕혜옹주의 복장을 확인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 보관 감독자 역할로 배우 최불암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증이 엉망이다. 첫 번째로 덕혜옹주의 약혼자 이름이 김장한이 아닌 '김재영(전광렬 분)'으로 나온다는 점, 그리고 배경이 1918년으로 되었을 때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등장,[50] 이왕직 장관[51] '한창수' 라는 인물(김동현 분)도 등장하는데, 1919년 고종황제가 붕어하고 5년이 지난[52] 내용 중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여전히 총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한술 더 떠서 실제론 1921년 사망한 한창수는 1935년에도 살아서 등장한다. 게다가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 소 다케유키(정승호 분)이 천하의 개쌍놈으로 나오면서 덕혜옹주를 마구 박대하였고, 그럼에도 덕혜옹주는 꿋꿋이 대한제국의 황녀라는 자존심을 지켜왔다고 나온다. 명백한 고증오류.
참고로 헤이코라는 여자아이는 드라마 시작 부분에서 백발의 노인으로 처음 등장하였는데(김서라 분), 1996년 일본 도쿄에 있는 모 대학에 가서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덕혜옹주의 복장을 확인하기 위해 들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 보관 감독자 역할로 배우 최불암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 1990년작 KBS1 광복절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이주경이[53] , 2006년작 일본 후지TV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에선 이예림이 각각 연기했다.
- 2007년 8월 11일에는 KBS1 <한국사 전(傳)>을 통해 덕혜옹주의 삶이 재조명되기도 했고, 재연 파트에선 배우 이홍이 연기했다.
- 2009년에는 소설가 권비영이 덕혜옹주의 삶을 소재로 한 소설을 냈다. 이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영향인지 사람들 사이의 인지도가 많이 올라갔다. 그런데 2010년 9월 26일 소설 <덕혜옹주>의 표절 문제가 제기되었다. 동명의 소설 <德惠姬>를 출간한 일본 작가 혼마 야스코(本馬恭子)가 한겨레신문 독자 투고란을 통해, "권비영의 소설은 나의 표현과 소 다케유키가 썼던 시의 해석을 베낀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비영도 과거 인터뷰에서 "일본 소설 <德惠姬>를 많이 참고했고, 2008년에 그 책이 번역 출간되었기 때문에 원고의 상당 부분을 수정해야 했다"고 밝혔다. 위 발언이 "그거 번역 안 되었으면 그대로 출판했다" 로 해석될 수도 있어 논란이 가속화되기도 했다.
- 2010년 8월 18일 KBS별관에서 드라마 국장 주제로 열린 드라마제작국 회의에서 <마지막 황녀> 극본 기획안이 회의 의제로 올라온 적이 있었다. 제목으로 유추해보건대 덕혜옹주를 주제로 한 드라마 기획안임이 분명한데.. 결국 실제 방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기획안은 통과되지 못한 것 같다.
- 1995년에 극작가 정복근과 연출가 한태숙이 연극 <덕혜옹주>를 창작하여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했는데, 덕혜 역은 배우 윤석화가 열연했으며 일본 베세토 연극제에도 출품됐다. 다만 위에 소개된 잘못된 이야기들, 이를테면 소 다케유키가 꼽추에 천하의 개쌍놈이니 하는 것들을 총 집합한 것들. 때문에 작품 내용은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
- 2013년부터 70주년 특집으로 뮤지컬이 기획되었다. 주연인 덕혜, 정혜(마사에) 역을 맡은 문혜영이 직접 각본을 썼고 2015년에 크레용팝 초아가 문혜영과 더블 캐스팅이 되어 공연을 했다. 초아의 연기력에 대해선 호평이 많은 편.
- 2016년 3월 역사저널 그날 116화 "세계 여성의 날 특집 3편"에서 덕혜옹주의 삶에 대해 토론했다. 출연진들은 대체적으로 덕혜옹주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마음대로 살지도, 선택하지도 못한 불행한 여인" 정도로 평가했다.
- 2016년에는 허진호 감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했다. 당시 덕혜옹주 역은 배우 손예진이 맡았으나[54] 덕혜옹주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역사적 사실과 영 무관한 내용이 들어가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에 시달리기도 했다.
[1] 덕혜옹주의 사진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많이 알려진 사진으로, 일본 제국으로 강제 유학가기 직전의 시기(14세 이전)이다. 덕혜옹주는 같은 시대를 지내온 다른 황실 친족보다 유년 시절 사진이 자주 노출되는데, 요절하지도 않았고 성인이 된 후의 사진도 상당하지만 굳이 유년기 사진을 애용하는 것은 '옹주' 라는 세간의 인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2] 이복 언니들이 몇 있긴 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고종황제의 정실인 명성황후 민씨도 딸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죽었다. 아직 정식으로 공주 책봉을 받기도 전이었다. 그 외에 자신이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이문용 여사도 있었지만 진위여부는 확실하지 않다.[3] 일제강점기 이후에 태어난 덕혜옹주, 이우#s-1 등도 고종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간주하는 편이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대한제국의 황태자비였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의 아내라는 이유로 황태자비로 간주되는 이방자와 마찬가지로, 덕혜옹주도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딸이라는 점에서 통상적으로는 대한제국의 황녀로 간주되는 편이다.[4] 사실상 공주보다 더한 호강을 누렸다.[5] 지금의 종로구 안국동 지역[6] 그러나 훗날의 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을 생각해 보면, 황적에 올리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이복오빠 영친왕이 '황족은 일본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인질로서 강제 유학을 간 선례가 있었으니 말이다.[7] 만약 쇼와 덴노가 이때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면, 오늘날 일본 황실의 후계자(=남자) 부족 문제는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긴 하다.[8] 출처 : 역사저널 그날, 덕혜옹주 편.[9] 現 가쿠슈인 여자 중등과, 가쿠슈인 여자 고등과, 가쿠슈인 여자대학교의 전신[10] 훗날 아키히토 황태자의 비가 될 뻔했다가 평민 쇼다 미치코에게 밀려난 시마즈 하츠코의 고모.[11] '일본 헌정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1953년까지 60년 넘게 중의원 의원을 역임한 오자키 유키오의 딸. 생몰년대는 1912년 1월 26일 ~ 2008년 11월 8일. 혼마 야스코(本馬恭子)의 저서 《德惠姬 : 李氏朝鮮最後の王女》에 소개된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12] KBS 한국사傳 2007년 8월 11일 방송분, http://m.blog.daum.net/kim0909/18289411[13] 왕공족이란 신분 자체가, 황족보단 낮고 화족보다는 높은 신분이다.[14] 그래서 덕혜옹주의 학창시절 사진을 보면 많은 학생들 중에서 옹주가 누구인지 한눈에 바로 알아볼수 있다. 심지어 급우들은 다 서있는데 덕혜옹주 혼자 모직코트 차림으로 화병이 놓인 테이블 옆에 앉아있는 학급단체사진도 존재한다.[15] 기록에 남아 있는 덕혜옹주의 학급 생활 기록을 보면, 조선에 있던 히노데 소학교 시절에도 덕혜옹주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이 그려진 하카마를 입고 전용 책상과 개인 화장실이 딸린 교실을 사용했으며, 수업 중에도 유모와 상궁들이 교실 뒤에서 지키고 서 있기도 했다. 학교수업이 끝나면 옹주를 궁으로 모실 어마차가 교문앞에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16] 이왕직에서는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왕공족이 아닌 귀인 양씨를 위한 상복을 입을 수 없다"고 주장해, 덕혜옹주는 3년상이 끝난 후에 입는 천담복을 입고 장례에 참석한 후 이틀 만에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17] 데이메이 황후의 형부 야마시나노미야 키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아들. 즉 쇼와 덴노의 사촌동생이다. 키쿠마로 왕은 데이메이 황후의 동복언니 쿠죠 노리코(九條範子)와 결혼했으나, 노리코 비는 2남 1녀를 남기고 사망했다. 키쿠마로 왕은 시마즈 히사코(島津常子)를 후처로 맞이하여 3남을 더 낳았는데, 히사코 비의 첫 아들이 후지마로 왕이다. 후지마로 왕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거론되었으나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츠쿠바(筑波)라는 성씨를 창씨, 황족에서 화족 츠쿠바 후지마로 후작이 되었으며, 모리 키요코(毛利喜代子)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18] 보온병을 갖고 다녔는데, 사람들이 이유를 물어보면 ''''독살을 당할까봐 무서워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19] 영친왕은 자신에 이어 어린 여동생이 볼모로 끌려온 데 대해 매우 불쾌해 하고 있었는데, 오라비 내외가 데리고 있는 것조차 거부당한 것에 심하게 화가 나서 오랫동안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20] 영화 덕혜옹주의 등장 인물인 한택수의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 당시 이왕직 장관으로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다만 한창수는 한택수와 달리 해방되기 한참 전에 죽었다. 참고로 이런 한창수에게 당당하게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 여사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며 빅 엿을 날린 게 이우 공이다.[21] 소 다케유키는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었다.[22] 소 다케유키에 대한 글. 참고로 댓글 중에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의견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동정심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고 배우자로써 존중해 주었을 뿐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 다만 소 다케유키의 인격 자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은 그리 많지 않다.[23] 중학교까지는 대마도에서 다녔다.[24] 다만, 덕혜옹주에게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심각한 수준의 정신질환이 있었기에, 소 다케유키도 심적으로 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래도 당시 기준으로는 하는데까지 병수발을 하는 등, 아내에게 대단히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서 결혼 생활이 생각보다 원만했던 편이다. 집에 정신질환을 앓는 가족을 둔 사람으로서 이 정도만 되어도 대단한 수준인 셈이다.[25] 혼마 야스코의 저서에 의하면 "임신은 모체에 많은 부담을 주긴 하지만, 조현병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고.[26] 혼마 야스코에 의하면, 소 다케유키를 비롯한 덕혜옹주의 주변인들이 정신장애에 대한 이해가 완전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한다. 다케유키는 치료를 시도하려 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신분상의 이유로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고, 정신과 의사가 아닌 안마사 등을 불러 긴장을 풀어주는 정도의 시도를 하는 것에만 그쳤던 모양이다. 사실 당시의 의학 기술로 정신질환을 치료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했지만.[27] 정책을 실행한 것은 미군정이지만 실제로 이 신적강하를 처음 밀어붙인 사람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총리였다.[28] 넓은 저택에서 다소 좁은 곳으로 집을 옮기고, 하인들도 다 내보내 마지막엔 하인이 딱 한명만 남았었다고 한다.[29] 이혼한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의 증언도 있어서 1955년이 유력하다. 다케유키도 이에 대해 특별히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30] 정확히는 카이고마가타케 산.[31] 아마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와 이혼 후 재혼하여 낳은 마사에의 이복 동생들이 실종선고를 청구한 것으로 보인다. 부친이 사망한 시점에서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수십 년간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복 누나 / 언니를 위해 호적을 한도 끝도 없이 그대로 두기에는 상속 문제도 걸려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원만한 법적 해결을 위하여 결단한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다.[32] 상술되었듯 김장한과 약혼한 적이 있었던 덕혜옹주 입장에선 시아주버님이 될 뻔한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로 김을한의 아내 민덕임은 어린 시절 덕혜옹주와 함께 덕수궁 유치원을 다닌 친구이기도 하다. 2016년 영화 덕혜옹주(영화)에서는 이 내용을 각색하여 김장한이 직접 모셔오는 것으로 나온다.[33] 이때 박정희는 "고종에게 딸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원래도 남자 왕족이 아니라 왕위계승권(비록 식민체제하의 명목상 권리일 뿐이지만)이 없어서 이복 오빠들에 비해 주목을 덜 받았는데, 정신병이 재발한 후로 오랫동안 언론에 등장하지 않은 탓에 세상 사람들에게 많이 잊혀졌기 때문이다.[34] 양녕대군의 서자의 후손인, 그러면서도 자칭 프린스. 항렬상으로는 고종황제의 멀디 먼 친척 '''숙부''' 뻘이다.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이방원의 17대손, 고종이 이방원의 18대손. 굳이 촌수를 따지자면 35촌이다(...).[35] 오죽하면 의친왕의 장남 이건은 장사를 하며 근근이 살았다고 한다. 영친왕과 이방자 비는 이건을 찾아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건에게 미처 말을 걸지도 못하고 돌아오면서 '이제 우리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방자 비의 외가인 나베시마 가문은 엄청난 부자여서, 이방자 비의 어머니 이츠코(伊都子)를 시집보낼 때 온갖 사치스러운 혼수들을 마련해 줄 정도였다. 이렇게 부유한 환경에서 살았던 이방자 비가 순식간에 생계 걱정을 해야 되는 삶으로 떨어지게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36] 이복오빠인 순종황제의 아내이므로 덕혜옹주에게는 손위 올케에 해당한다.[37] 이우 공은 덕혜옹주의 또 다른 이복 오빠 의친왕의 아들이므로, 이우 공의 아내 박찬주 여사는 조카며느리에 해당.[38] 오빠 영친왕은 귀국 당시에는 이미 말도 못 하는 중증 장애인이 되어 있었고, 1970년에 뇌일혈이 재발하여 사망했다.[39] 당시 정신병은 물론 정신병원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던 데다가 이혼까지 더해졌음을 고려하면 이공재가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게다가 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인들에 있어 일본에 대한 인식이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제 3자 입장이었던 이공재로서는 덕혜옹주의 전 남편은 천하의 개쌍놈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공재만 그랬던 것이 아닌 것이, 당시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담았던 드라마에서도 소 다케유키를 부정적으로 표현했었다.[40] 순종황제 사후 명목상 이왕(李王)의 자리를 계승해 황실 가족들은 '왕전하' 라 불렀다.[41] 영친왕의 아들. 즉 덕혜옹주의 이복조카다.[42] 당시 기준으로는 75세 정도가 아시아인 여성의 평균 수명이었으니,기대 수명 정도 산 것이다.[43] 서력기원이 아닌, 대한제국 이전 잠시 쓰였던 연호 '개국(開國,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서기 1392년을 원년으로 하는 연호)'을 사용했다.[44] 의친왕의 9남, 즉 덕혜옹주의 조카. 호적명은 해룡이며, 도미하여 미국에서 거주. 국내에 몇 번 귀국하여 남긴 인터뷰, 방송 출연 등이 있다. 2014년 별세.[45] 실제로 그는 이방자 여사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질 신세나 다름없는 자신을 한탄한 적이 있다고 한다.[46] 비슷한 시기에 이방자 여사의 유일한 동생인 노리코 여왕은 다케히코 왕의 후처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케히코 왕의 정신병으로 인해 약혼이 취소되었다. 황족 남자들도 정신병으로 파혼될 명분이 되는데, 남존여비가 심하던 시대니 하물며 여자들은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47] 유교가 근본이다 보니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이었던 조선 왕실에서는, 특히나 눈에 띌 만큼 인상적인 여성 인물을 찾는 것이 어렵다. 그러다 보니 간혹 가다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지분이 높게 묘사되는 여성이 각종 매체에서는 현실과 다르게 각색되거나,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게 능동적인 성격과 각색된 업적을 추가하여 미화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이 분야의 끝판왕이 바로 명성황후 민씨. 그러나 명성황후는 실제로 실정에 책임이 있는 인물인 반면, 덕혜옹주는 그냥 공도 과도 없는, 옹주 신분만 제외하면 정신도 온전치 못한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비판 여론이 과하다는 것이다.[48] 하지만, 상기했듯 영친왕 역시 이복 여동생 덕혜옹주처럼 일제가 시키는 대로 인질 신세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49] 해당 드라마에서는 영왕이라고 한다.[50]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선 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1916년에 일본 총리가 되었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51] 조선총독부의 명령하에 조선 왕조 이씨 왕가를 감독하는 관직.[52] 연도로 따지자면 1924년으로 추정.[53] 어린 시절 역할은 불명이다.[54] 어린 시절은 아역배우 신린아, 청소년 시절은 김소현이 각각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