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2세

 



[image]
라이히슈타트 공작(Der Herzog von Reichstadt)
(Leopold Bucher 작)
'''이름'''
나폴레옹 프랑수아 샤를 조제프 보나파르트 (프랑스 제1제국)
(Napoléon François Charles Joseph Bonaparte)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 / 요제프 카를 프란츠 (오스트리아 제국)
(Napoleon Franz Bonaparte / Joseph Karl Franz)
'''작위'''
로마왕 (Roi de Rome, 1811 ~ 1814, 프랑스 제1제국)
라이히슈타트 공작 (Der Herzog von Reichstadt, 1818 ~ 1832, 오스트리아 제국)
'''출생'''
1811년 3월 20일
프랑스 제1제국 파리 튈르리 궁전
'''사망'''
1832년 7월 22일 (21세)
오스트리아 제국 쇤브룬 궁전
'''아버지'''
나폴레옹 1세
'''어머니'''
파르마 여공작 마리 루이즈 여대공
'''Napoléon François Charles Joseph Bonaparte / Napoleon II, Roi de Rome''' (King of Rome)
'''Napoleon Franz Joseph Karl Bonaparte / Joseph Karl Franz, der Herzog von Reichstadt''' (Duke of Reichstadt)
1. 소개
2. 황제 즉위?
3. 출생과 어린시절
4. 소년 시절과 청년기
5. 친구 프로케쉬, 그리고 죽음
6. 기타


1. 소개


프랑스 제1제국황태자 (Prince Imperial of France), 로마왕 (King of Rome)[1], 이탈리아 왕국의 왕세자 (Prince Royal of Italy), 오스트리아 제국의 라이히슈타트 공작, 군인.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적자이다. 나폴레옹과 그의 두번째 황후인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프랑스 제1제국의 황태자(로마왕)로 봉해졌다. 그러나 그의 나이 세살 때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여 엘베섬에 유배됐고, 혼란한 정국 속에 어머니인 마리 루이즈와 함께 프랑스 별궁에서 고립되어 위험에 처했으나, 외할아버지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로 진주하여 나폴레옹 2세 모자를 구출하여 오스트리아 에 있는 황궁으로 데려온다. 이후 빈 황궁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지만 당시 오스트리아의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그를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보고 견제했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을 받으면서 자랐다.
17세인 1828년 티롤 연대 대위가 되어 아버지처럼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 생활은 어려서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고 결국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에 결핵과 폐렴으로 요절했다.
본명은 Napoléon François Charles Joseph Bonaparte(또는 Napoléon François Joseph Charles Bonaparte)이며, 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는 이것을 줄여 '나폴레옹 샤를 보나파르트'를 아들의 이름으로 사용했다. 이후 네살 때 프란츠 2세가 데려다가 키우면서 본인과 같은 프란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보통 민감한 이름인 나폴레옹과 보나파르트를 제외하고 나머지 미들 네임들을 독일식으로 하면서 동시에 순서까지 바꾼 요제프 카를 프란츠(Joseph Karl Franz) 공작이라고 불렀다. Joseph Karl Franz는 공교롭게도 프란츠 2세(풀네임: Franz Joseph Karl von Habsburg-Lothringen)의 이름과 같다. 나폴레옹 1세의 아들이자 프란츠 2세의 외손자인 그의 정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Napoleon Franz Bonaparte)'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물론 워낙 출신이 고명했기 때문에 당대에는 그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고, 작위로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세 살 때까지는 로마왕(Roi de Rome)으로, 이후 오스트리아 황궁으로 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공으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기간 동안은 제국왕자로[2], 7살 이후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Herzog von Reichstadt)으로 불렸다. 로마왕 (King of Rome), 라이히슈타트 공작 두 작위 모두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부여되지 않은 작위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대신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되었다.

2. 황제 즉위?


부친 나폴레옹 1세는 1815년 6월 22일 퇴위를 선언함과 동시에 제위를 아들인 황태자에게 양위한다고 선언하고 도피했다. 나폴레옹이 퇴위를 선언하고 도피한 당일 프랑스 상원에서 긴급 회의가 열렸다. 나폴레옹이 퇴위 칙령에서 발표한 '''나폴레옹 2세의 황제 즉위안은 상원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부결되었다.''' 상원은 조제프 푸셰(Joseph Fouché)를 위시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어 정권을 인수하도록 결정했다. 프랑스 정부 위원회는 '''프랑스 제1제정 2기(백일천하)의 종식''' 및 입헌군주제 실시와 부르봉 왕조의 부활 및 루이 18세의 복위를 결의했다. 루이 18세는 진작부터 자신이 복위할 경우 입헌군주제를 전격 실시할 것이라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2세의 즉위를 비롯한 나폴레옹 1세의 마지막 칙령은 당연히 모두 효력을 잃었다.
정부 위원회는 루이 18세에게 귀국하여 복위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망명해 있던 루이 18세가 귀국하여 7월 8일 다시 정식으로 복위했다. 정부 위원회는 빈의 쇤브룬 궁전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공작(나폴레옹 2세)에게는 어떠한 연락도 취하지 않았다. 애초에 프란츠 공작이 제위를 잇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여론은 제정의 종식과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으며, 오스트리아 황족인 네 살짜리 아이의 즉위를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루이 18세는 개인적인 인기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부르봉 왕조의 적법한 계승자였으며,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약속했기 때문에 여러 계층으로부터 고루 지지를 받고 있었다. 루이 18세는 실제로 복위 직후 입헌군주제 실시 약속을 지켰다.
일각에서는 나폴레옹 2세를 프랑스 제1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나폴레옹 2세의 제위 기간은 6월 22일부터 7월 7일까지라고 한다. 하지만 프란츠 공작(나폴레옹 2세)은 결코 황제가 된 적이 없다. 나폴레옹 1세가 퇴위를 선언하고 도피하면서 프랑스 제1제정은 무너졌고, 정권은 나폴레옹이 퇴위한 당일 프랑스 정부 위원회로 넘어갔다. 당연히 나폴레옹 1세가 마지막으로 남긴 칙령들(황태자의 제위 계승 포함)은 완전히 무효화되었다. 일각에서 나폴레옹 제위기간이라 주장하는 6월 22일부터 7월 7일은 프랑스 정부 위원회가 정권을 인수해 있던 기간이다. 하지만 위원회는 프랑스 제1제정의 종식을 선언하고 부르봉 왕조의 복고 및 루이 18세의 복위 그리고 입헌군주제의 실시를 결의했다.
루이 18세가 귀국하여 복위할 때까지 2주간 프랑스를 통치했던 정부 위원회는 나폴레옹의 아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2세는 즉위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7월 7일 퇴위 혹은 양위했다는 사실 또한 실존하지 않은 사건이다. 7월 7일은 루이 18세가 복위한 날이지만 프란츠 공작과 관련해서는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네 살짜리 프란츠 공작은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프랑스, 오스트리아 양쪽 모두 프란츠 공이 프랑스에서 제위를 물려받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샤를/프란츠 보나파르트(나폴레옹 2세)는 살아있던 당대에 그는 프랑스 제1제정 시절에는 황태자 및 로마왕으로, 이후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로 불렸을 뿐 생전에 '나폴레옹 2세'로 언급된 적은 전혀 없었다.
황제로 즉위한 적조차 없는 샤를/프란츠가 나폴레옹 2세로 불리게 된 것은 순전히 나폴레옹 3세 때문이다. 루이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면서 자신을 나폴레옹 3세라고 칭했기 때문다.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이 황제가 되려고 하는 정당성을 나폴레옹 1세로부터 찾았다. 나폴레옹 3세는 나폴레옹 1세의 정통성이 그의 아들 샤를 나폴레옹(나폴레옹 2세)에게 계승되었으나, 샤를이 후사 없이 사망했으므로, 나폴레옹의 조카인 자신이 그 정통성을 잇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실제로는 제위에 오른 적이 없는 샤를 나폴레옹을 나폴레옹 2세로 추존하고 자신을 나폴레옹 3세로 칭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로마왕 샤를 보나파르트, 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라 불리던 인물이 1852년 나폴레옹 3세 즉위 이후 나폴레옹 2세라고 불려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제위에 오른 적이 없기 때문에 여전히 그를 나폴레옹 2세라 칭하지 않고, 프랑스 황태자 시절이나 오스트리아 시절의 작위와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황실을 오가면서 복잡한 이름과 작위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복잡함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황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나폴레옹 2세라 부르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게다가 나폴레옹 2세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 공화당 출신의 정치인[3]이 미국 해군 장관이 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때문에 이후 영미권을 중심으로 미국 정치인과 구별하기 위해 로마왕 및 라이히슈타트 공작이었던 이 인물을 나폴레옹 2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크게 증가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2세라 부르는 경우에도 황제가 아닌 "'''로마왕'''(황태자) 나폴레옹 2세"라 부른다. 현재 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파리 앵발리드에도 "'''NAPOLEON II, ROI DE ROME'''(로마왕 나폴레옹 2세)"이라고 각인되어 있다.

3. 출생과 어린시절


파리의 튈르리 궁전에서 1811년 나폴레옹 1세와 황후 마리 루이즈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아버지로부터 로마왕의 작위를 받았는데, 이는 나폴레옹 2세가 자신의 적자이기 때문에 황위계승의 정당성을 갖게 하려는 목적에서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나폴레옹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황제가 될 수 없게 되었다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의 양육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모성애가 부족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당시 왕족들은 어머니와 떨어져서 유모가 키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긴 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연패하면서 점차 파리로 포위망이 좁혀 오던 시기에 신하들도 점차 나폴레옹을 배신하는 와중에 흔들리는 프랑스 궁정에서 홀로 중심을 바로 잡으려고 고군분투했던 것은 마리 루이즈였다. 심지어 그녀는 파리 포위를 대비하여 피신하라는 나폴레옹의 명과 신하들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피신을 거부하고 파리를 사수하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파리를 비우는 일은 부르봉 왕조의 부활에 절호의 기회를 주는 일입니다. 나는 이대로 파리에 머무르는 것이 황제 부재시의 섭정을 맡은 프랑스 황후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급박한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렇게 당차게 행동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들 나폴레옹 2세가 제위에 오를 수 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친정인 오스트리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이것이 실현 가능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결국 제국은 붕괴했고, 마리 루이즈는 어린 아들 나폴레옹 2세를 데리고 랑부예 성으로 이동했지만 랑부예가 이미 위험했기에 블루아 성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image] 1814년 4월 8일,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퐁텐블로 조약으로 퇴위당하고 엘바 섬 유배행이 결정되었다.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눈물어린 호소'''로 아버지에게 요청했지만 프란츠 2세는 딸의 요청을 거절했다.[4]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을 따라 엘바 섬에 가겠다고 했으나,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에 애정이 없었던 것인지 오스트리아 황녀인 그녀를 의심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초라해진 처지를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인지 끝내 거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루이즈는 나폴레옹에게 가려고 했으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나폴레옹은 마리 루이즈의 진심을 알고 자신에게 돌아와달라고 했으나 이미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4월 13일에 랑부예 성에 갇혀있던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 모자를 구하기 위해 프란츠 2세가 직접 찾아왔다. 프란츠 2세의 결정으로 모자는 오스트리아 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로 송환된 이후로도 마리 루이즈는 오스트리아를 탈출하여 엘바섬으로 가서 나폴레옹을 만날 궁리만 하고 있었고, 이를 우려한 메테르니히는 잘생긴 나이페르크 백작으로 하여금 그녀를 호위하게 했다. 메테르니히는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으라고 명령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마리 루이즈는 곧 나이페르크 백작에게 빠져 나폴레옹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었다.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엘바 섬에서 탈출한 후 백일천하가 시작되었고, 나폴레옹은 아들이 보고 싶어 '''"이제 그만 돌아와 주오."'''라는 애절한 편지를 마리 루이즈에게 썼지만 그녀는 이미 나이페르크 백작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대패하고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나폴레옹은 아들이라도 어떻게든 제위에 앉혀보자는 심정으로 6월 22일 퇴위를 선언하고 나폴레옹 2세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린 후 도피했다. 나폴레옹의 퇴위 선언 직후 프랑스 정부 위원회가 구성되어 정권을 인수했다. 위원회는 루이 18세가 복위할 때까지 2주간 프랑스를 임시로 통치했다. 위원회는 곧바로 피신해 있던 루이 18세에게 연락하여 복귀를 요청했고 루이 18세는 곧바로 나폴레옹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프랑스 여론 또한 오스트리아 황실의 어린아이가 새로 황제가 되기를 바라지 않고 있었다. 위원회는 나폴레옹 2세를 인정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2세가 머물고 있는 오스트리아 황실 측에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 2세의 보호자였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 또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루이 18세의 복위를 천명하고 있는 연합국의 입장에 동의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궁에 머물고 있던 4살의 나폴레옹 2세는 이러한 사태를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연합군은 계속해서 파리를 향해 진격했고 마침내 7월 7일 파리에 입성했다. 7월 8일 마침내 연합국의 추대를 받아 루이 18세가 정식으로 복위했다.
1815년에 외조부 프란츠 2세는 어린 외손주 나폴레옹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프란츠'''라는 세컨드 네임을 붙여주었다. 이후로 그는 평생 프란츠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외가인 합스부르크 가문 측과 독일, 오스트리아 쪽에서는 그의 이름을 '나폴레온 프란츠 보나파르테'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1816년 3월 7일 마리 루이즈가 파르마 공국의 통치권을 일임받게 되었다. 이로서 마리 루이즈와 나폴레옹 2세는 완전히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세.
1818년 프란츠 2세는 7세가 된 외손자 나폴레옹 '''프란츠'''에게 '라이히슈타트 공작' 작위를 내렸다. 이후 그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으로 불리게 된다.
1821년 그의 나이 10세 때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나폴레옹 2세는 비록 얼굴도 기억할 수 없는 아버지였지만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5]

4. 소년 시절과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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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아버지인 나폴레옹 1세는 물론이고[6] 외가인 합스부르크쪽에서도 출중한 외모를 자랑했던 프란츠 2세와 마리 루이즈의 피를 이어받은 나폴레옹 2세는 매우 잘생겼고 총명했다고 한다.
그가 세살 때인 1814년 봄 나폴레옹 1세가 엘바섬에 유배될 당시 외할아버지인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궁정에 데려와 키우면서 이후 쭉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자랐다. 특히 외조부 프란츠 2세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프란츠 2세는 마리 루이즈와 떨어져 외롭게 방치된 외손자를 불쌍히 여겨서 잘 대해 주었다. 프란츠 2세는 외할아버지이긴 하지만 아버지 나폴레옹 1세와는 불과 1살 차이였다. 나폴레옹 1세가 22세 연하인 마리 루이즈와 결혼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그가 훗날 프랑스 제국 부흥의 단초를 제공할 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을 궁정으로 제한하려 했고, 그 생활은 어린 시절 내내 계속되었다. 또한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2세가 프랑스어를 말하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는 것을 금지시키고 독일어로 말하고 독일어 책을 읽는 것을 강조했다. 메테르니히의 이런 조치로 나폴레옹 2세는 우울증에 걸렸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했던 상황이 그의 우울증을 심화시켰다. 1817년에 마리 루이즈가 나폴레옹 2세를 만나러 오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나이페르크 백작의 아이인 알베르티나를 출산하게 되면서 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당시 6살이던 나폴레옹 2세는 그 말을 듣자 매우 심하게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18년 7월에 어머니가 파르마에서 다시 빈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폴레옹 2세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리고 그때 만난 후에 그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는 다음에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러나 1819년 8월 9일에 나이페르크 백작의 둘째 아이 굴리엘모를 출산하게 되면서 모자의 만남은 연기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메테르니히의 프랑스어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와 아버지 나폴레옹 1세에 대해 더욱 더 깊은 애정을 품고 탐구했다. 프랑스어를 밤낮으로 공부했던 그는 궁정 도서관에서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라스 카즈가 쓴 "세인트 헬레나의 기록"과 몽트랑 백작이 썼던 "회상록"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를 통해 자기 아버지가 어떠한 인물인지 다시 확인했다.
이 무렵 결핵에 걸렸다. 게다가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욕심에 아버지처럼 되겠다고 한 여러 군사 훈련들이 오히려 그의 몸을 망치는데 더욱 기여했다(…).
1828년에는 아버지처럼 티롤 연대의 대위로 입대했다. 그리고 이듬해 나이페르크 백작이 죽은 후 그의 유서를 통해 까발려진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7] 그것을 알게 된 후 그는 가장 친한 오스트리아인 친구 프로케쉬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만약 조제핀 황후가 내 어머니셨으면, 우리 아버지는 세인트 헬레나에서 묻힐 일도 없었을 테고, 나도 이곳 빈에 있지 않았을거야. 우리 어머니는 매우 상냥하신 분이시지만, 너무 주변 인물들에게 휘둘려.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해. 그 여자는 내 아버지의 아내가 될 자격이 없어.'''"

그만큼 그는 자신의 어머니 마리 루이즈에 대해, 특히 그녀의 경솔한 행동에 커다란 증오를 품게 되었고, 위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써서 남겼다고 한다.

5. 친구 프로케쉬, 그리고 죽음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터진 후 일부에서 샤를 10세를 몰아내고 나폴레옹 2세를 옹립하자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프랑스 국민들 다수는 그를 오스트리아의 공작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에서,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프로케쉬는 언제인가 "워털루 전기"라는 책에서 나폴레옹을 옹호해 주었던 적이 있었고, 이에 감동한 나폴레옹 2세는 그와 친구가 되었다. 프로케쉬는 1832년 7월 21일에 로마에 살고 있는 나폴레옹 2세의 친할머니 마리아 레티치아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나폴레옹은 매우 훌륭한 청년이고, 아버지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 아이라면 아버지처럼 훌륭한 지도자가 되겠지요. 머지 않아 그 아이의 시대가 오고, 다시 프랑스의 왕좌에 오르게 될 것이라 전해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로케쉬가 레티치아를 만난 그 날, 나폴레옹 2세는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다음날인 1832년 7월 22일, 나폴레옹 2세는 21세의 나이로 빈 쇤브룬 궁전에서 요절했다. 그의 석관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용 묘지인 카푸친 교회에 안장되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에 따라 심장을 비롯한 장기들은 분리되어 안치되었다.[8] 그래서 그의 시신이 훗날 프랑스 파리로 옮겨진 후에도 그의 심장과 창자는 빈에 안치되어 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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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가 사망한지 108년의 시간이 흐른 1940년 12월 15일, 아돌프 히틀러[9][10]의 지시로 아버지 나폴레옹이 매장된 파리의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저 묘소에서 보면 NAPOLEON II ROI DE ROME이라고 쓰여진 바닥이 보이는데 그게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안장하고 석판을 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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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앵발리드에서 나폴레옹 1세의 관을 바라보는 히틀러. 히틀러가 총통 취임 이후 파리를 방문한 것은 평생 단 한 번, 그것도 3시간에 불과했는데 이 때의 필수코스에 앵발리드가 포함되었다. 다만 히틀러는 젊은 시절에는 파리에 산 적이 있다.
  • 세 살때부터 오스트리아 쇤브룬 궁전에서 성장했으며, 그가 사용했던 유물들이 빈 황실보물관(Imperial Treasury Vienna)에 전시되어 있다.
  • 바이에른공주였던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의 아내 조피와 염문이 있었다고 한다. 조피는 원래 매우 총명하고 당찬 성격이었는데, 옛날부터 정신박약아로 소문이 다 나있던 프란츠 카를과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모자란 남편과의 애정없는 결혼으로 불행했던 그녀는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불행하게 살던 나폴레옹 2세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염문이 사실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두 사람이 저러한 사유로 가까웠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2세가 죽을 때 그녀는 둘째 아들을 임신중이었고 그 와중에도 나폴레옹 2세의 병간호를 했지만 결국 그는 죽었고 이후 그녀는 냉정한 성격이 되었는데 이것이 훗날 고부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때 조피에게 고통받은 며느리가 바로 미인 황후로 유명한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 둘째 아들인 막시밀리아노 1세를 편애한 것도 나폴레옹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소문이 도는데 일조. 여담으로 조피의 형부가 바로 나폴레옹 2세의 의붓형제인 외젠 드 보아르네이다. 외젠의 아내인 아우구스테 폰 바이에른이 조피의 언니이다.
  • 나폴레옹 3세로 알려진 샤를루이나폴레옹은 이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동생이자 나폴레옹 2세의 숙부인 루이 보나파르트와 의붓딸인 오르탕스(외젠 드 보아르네의 친누이)의 아들로, 즉 나폴레옹 2세의 사촌형이다.[11] 나폴레옹 2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들도 없었다.
[1] 프랑스 제1제국의 황태자와 로마왕은 사실상 동일시되고 있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는 별개로 존재하는 작위이다. 여담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차기 황제를 의미하는 로마왕은 King of the Romans라고 했다.[2] 로마왕 직위는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갈 때 함께 포기되었으며, 백일천하 기간에도 로마왕 지위는 회복되지 못했다. 다만 제국왕자 직위만이 회복되었을 뿐이다.[3] 찰스 조셉 보나파르트(Charles Joseph Bonaparte). 나폴레옹 1세의 막내동생 제롬 보나파르트의 손자다.[4] 물론 촌놈인 나폴레옹에게 패하고 딸을 빼앗긴 프란츠 1세 입장에서 나폴레옹을 구해줄 리가 만무했다. 나폴레옹 역시 프란츠 1세를 싫어하긴 마찬가지라서 마리 루이즈에게 '당신 아버지는 가나쉬(프랑스어로 쓸모없는 늙은이)요'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프랑스어를 모르는 마리 루이즈는 시종에게 그 뜻을 물어보았는데, 당황한 시종은 "멋지고 영리한 어르신"이라는 뜻이라고 왜곡했다. 마리 루이즈는 나중에 나폴레옹이 없는 자리에서 프랑스인 재상에게 가나쉬라고 칭찬하면서 분위기를 얼려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5] 워낙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에 대한 나폴레옹의 애정이 지극했기 때문인지, 나폴레옹 2세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좋았던 것 같다. 나폴레옹의 비서였던 멘느발과 만났을 때 그에게 '''"멘느발 아저씨, 아빠한테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줘."'''라고 속삭였다고 한다.[6] 나폴레옹을 좋지 않게 보는 인물들조차 나폴레옹의 외모만큼은 잘생겼다고 말했을 정도의 미남이였다. 다만 황제가 된 이후에는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했고 탈모도 오는 바람에 말년에는 펭귄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7] 심지어 마리 루이즈의 아버지인 프란츠 2세도 자기딸이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에 경악했다고 한다. 그래도 끝내 "신 앞에서 저지르면 안될 죄를 저지르고 슬퍼하고 있지만, 나는 너의 아버지다. 부모로서의 애정을 가지고 용서하겠다."라는 말을 남기며 딸을 용서했다.[8] 레오폴트 1세의 형인 페르디난트 4세 이래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통.[9] 파리 빠돌이나폴레옹의 숭배자였다고 한다. 오, 마이 갓! [10] 흥미롭게도 바로 며칠 후에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할 것을 명령한다. 12월 18일에 내려진 총통의 '명령 21호'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바르바로사 작전.[11] 나폴레옹 3세가 3살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