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도슈 쥐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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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Andoche Junot
장 앙도슈 쥐노
1771.9.24 ~ 1813.7.29
1. 일생
2. 여담

'''붉은 폭풍'''[1]
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시기의 프랑스 장군으로, 초대 다브랑테 공작. 나폴레옹의 숭배자로서, 나폴레옹의 어머니 마리아 레티치아로부터는 '''"누가보면 내 여섯번째 친자식"'''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아예 '''"나폴레옹과 친형제처럼 지냈다는 소리."''' 실제로도 그랬다.

1. 일생


코테도르의 뷔시르그랑에서 유복한 농민이었던 미셸 쥐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에는 샤티용에서 공부를 했지만 나중에는 변호사가 되려는 꿈을 가지고 수도 파리로 상경, 그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자, '''그런거 다 내던지고''' 곧바로 자원해서 지원병 대대[2]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번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하사로 진급했다.[3] 1793년의 툴롱 공방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났으며, 곧 그의 부관이 되었다.[4]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그를 따라 종군했고, 거기서 큰 활약을 했지만 로나토 전투에서 심각한 머리부상을 당하면서 실려가게 되었다. 그 후 나폴레옹이 획책한 이집트 원정여단장으로 승진하여 나폴레옹을 따라가게 되지만, '''하필''' 거기서 결투를 벌여 그 때문에 큰 부상을 당하게 되었다. 그 결과 책임을 묻게 되고 프랑스에 부상병으로서 돌아가게 되었다.
한참을 요양하고 있다가 1799년에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가 일어나게 되자 다시 나폴레옹을 받들어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이듬해에 로레 마르탱 드페르몽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었지만 포르투갈 대사로 파견되었지만 1805년에 나폴레옹이 다시 전역을 준비하자 그를 모시기 위해 급히 귀환했다.
이후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지휘를 맡았다. 1807년 포르투갈 침공을 감행, 살라망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1월 30일에는 리스본을 점령하여 나폴레옹의 치하를 받았다. 그 해 아브랑테 공작의 작위를 받고 포르투갈의 군정관이 되었다.
하지만 1808년에 웰링턴 공이 이끄는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8월 21일 비메이로에서 쥐노는 퇴로가 막혀 자신과 함께 군단이 괴멸당할 위기를 겪게 되었다. 8월 30일 신트라 조약을 맺어 그와 그의 군대가 무사히 돌아가는 대신 모든 무기를 압수당하고 모든 짐들까지 압수당했다. 안습.
그 해 10월, 프랑스에 비참한 모습으로 그의 군대와 함께 돌아온 쥐노는 곧바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곧 풀려났고, 1810년에 다시 돌아와서 마세나 원수가 이끄는 군대에 합류하여 전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해도 역시 운이 좋지 않아서(...), 심한 부상을 당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포르투갈 전선에는 겨울이 온 탓에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휴전 상태에 빠진 협곡 하나가 있었다. 이곳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초소는 서로 머스킷 사거리 안에 있을 정도로 가까웠는데, 여기에 시찰을 나왔다가 영국군 보초가 총을 쏴서 코를 맞고 말았다. 웰링턴은 사과의 뜻으로 사절을 보내 필요한건 뭐든 구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쥐노는 보급품 부족이 드러날까봐 거절했다고. 이 일화는 영국군 95 라이플 연대의 장교 J. Kincaid가 쓴 회고록에서 언급된다.
1812년 나폴레옹이 말 안듣는 러시아를 혼내주러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을 때, 쥐노도 그와 함께 갔다. 그러나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러시아 군대를 도망가게 놔 뒀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5] 나폴레옹의 큰 질책을 받았다. 하지만 보로디노 전투에서 8군단을 지휘, 그의 유능한 지휘를 보여주었다.
1813년 쥐노는 일리리아의 행정관으로 취임했으나 그의 정신상태는 극도로 불안해져 있었다. 자신이 주최한 연회에서 모자와 신발만 신은 알몸에 훈장과 칼을 차고 참석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 29일, 몽바르에서 자살했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그는 2명의 딸과 2명의 아들을 슬하에 두고 있었다. 완전히 안습스러운 인생은 아니었지만 그의 인생 굴곡은 나름 심했다.

2. 여담


혹자가 그의 인생을 요약하여 표현했는데,
툴롱에서 나폴레옹을 만났다.
친구가 되었다.
친구를 따라다녔다.
친구가 황제가 됐다.
황제가 되면서 18명의 장군을 원수로 만들었지만 난 되지 못했다.[6]
친구가 날 스페인으로 보냈다. 근데 털렸다.
러시아로 따라갔다. 털렸다.
강등당하고 추방당했다.
삶의 의미가 없다(...).
...이렇게만 본다면 정말 안습이다.
[1] 긍정적인 별명의 칭호인 폭풍이 아니다(...). 부상으로 정신이 오락가락했던 쥐노는 감정기복이 매우 심했고 이런 쥐노가 한 번 폭발하여 깽판치면 광란의 폭풍으로 간호하는 사람들이나 주변인들의 눈살을 찌부릴 정도로 개난장판이 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폭풍이다. 그저 지못미...[2] 척탄병 대대라는 말도 있다.[3] 항상 전투에 앞장서서 적진으로 쳐들어가 적의 피로 흥건한 그를 보면서, 그의 별명은 붉은 폭풍이 되었다.[4] 이 때 나폴레옹의 비서로서 일했던 당시의 일화가 참 대단하다. 어느날 나폴레옹이 불러줄 것이 있어 그가 받아적게 되었는데, 어디선가 포탄이 날아와 쥐노의 근처에 떨어져 폭발했고, 쥐노는 흙투성이가 되었다. 그 때, 쥐노는 대담하게 '''"흙은 이렇게나 많이 필요 없는데"'''(당시의 잉크는 그렇게 빨리 마르지 않아서 항상 문서 작성 후에는 고운 모래나 흙을 뿌려 한번 흡착해줘야 했다)라고 말했고, 나폴레옹은 그의 대담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5] 쥐노는 스몰렌스크를 탈출하는 바클라이 드톨리 휘하의 러시아군을 요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나폴레옹은 당연히 힘 잘 채우고 있다가 정신없이 탈출하는 러시아군을 쥐노 군단이 포위해서 박살내줄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쥐노는 어쩐 일인지 이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고 당시 쥐노 휘하의 장병들은 쥐노를 독촉하며 당장 본대를 도와 러시아군을 박살내자 하였으나 쥐노는 요지부동, 결국 러시아군은 탈출에 성공하고 말았다. 이때 쥐노 휘하의 군은 프랑스 군단도 아닌 독일인 군단이었는데, 이들은 적을 눈앞에 두고도 겁쟁이처럼 아무것도 못했다는 수치심에 장병들이 이를 박박 갈았다고 한다. 가끔 쥐노가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때는 아직 멀쩡한 상태였기에 왜 쥐노가 머뭇거렸는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으나 그 중 가장 유력한 설은 바로 야간전이어서 쥐노가 조심스러웠다는 설이다. 4안 야투경까지 나온 오늘 날에도 야간전은 어려운데 이 당시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쥐노도 쥐노지만 별다른 변수의 고려 없이 구멍투성이 포위작전을 세운 나폴레옹의 실책도 컸다.[6] 물론 쥐노의 행적을 보면 알겠지만 원수감은 아니다. 아무리 나폴레옹이 논공행상을 하며 친구를 챙긴다 해도 제국 원수씩이나 되는 책임 막중한 자리를 특출난 장기가 없는 쥐노에게 맡기긴 어려웠다. 하다못해 쥐노의 연적은 싸움실력만이라도 끝장나게 좋아서 기병만 쥐어주면 싹쓸이를 시전해서 그 용도로 원수가 되었지만 쥐노한테 그런 가공할 무예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