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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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시밀리안 카를 에밀 베버(Maximilian Carl Emil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의 사회학자, 철학자, 정치학자, 법학자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냉전 이후 상당히 축소된 현대 정치학계나 사회학계에서 뛰어난 영향력을 끼친 학자로 평가받는다.
다만 '좌파의 마르크스, 우파의 막스 베버'라고 대립시키는 도식은 후대에 만들어진 해석일 뿐임을 명시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사망(1883년)할 당시 막스 베버는 일개 대학생이었으므로 직접 학자로서 두 사람이 충돌할 일이 없었다. 베버는 이후에도 마르크스의 연구를 어디까지나 학문상 연구하고 비판하는, 사회학자나 철학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다.[1]
마르크스를 맑스, 막스 등으로 줄여서 부르는 풍조에 의해 마르크스 그 자체로 오해받는 참사를 겪고 있다. 군대에 막스 베버의 저서를 반입했더니 간부가 '막스'만 보고 마르크스 저서를 갖고 온 줄 알고 빨갱이 취급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2. 생애
당시 프로이센의 영역이었던 독일 튀링겐의 에어푸르트시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친가와 외가 모두 신교 집안이었다. 부계 쪽은 루터파 집안으로 오스트리아에서 망명해온 일가였으며 모계 쪽은 프랑스 출신 위그노계로, 집안을 통해 베버에게 영향을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이 그의 저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주요 동기로 작용하였다고 여겨진다.
법률가인 아버지 막스 베버 1세가 베를린에서 정치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1869년 베를린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주요 정치가 및 학자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1882년 고등학교(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입학해 아버지를 따라 법학을 전공하였으나 그 외에도 경제학, 역사학, 철학, 신학 등등도 다 같이 공부한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은 맥주를 마시고 결투를 의례적으로 하곤 했는데 베버 역시 이에 어울려 병약 청년에서 꽤나 건장한 젊은이의 모습이 된다. 1883년엔 군복무도 했으니 더욱 그럴 것으로 보인다.
1889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박사 학위논문 "중세 상사회사 서설"을 심사한 사람이 바로 로마사로 유명한 테오도르 몸젠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려면 학위 신청자가 자신의 논문에 관해 제시한 논점 삼 개를 두고 여타 학자와 신청자가 토론해야 했다. 로마사 분야 최고 권위자인 몸젠은 베버가 '식민도시colonia'와 '도시municipium'에서 자신과 이견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베버의 의견에 질문했으나 얼마간 토론한 후 '베버의 논제가 옳다는 것에 승복하진 않지만 이 수험자의 앞날을 방해할 마음은 없다'고 말하면서 토론을 끝마쳤고 베버의 박사 학위논문 심사는 그렇게 통과되었다. 그 후 베버는 몸젠과 편지를 자주 교환하면서 로마사를 대상으로 한 의견을 호환했다.
정치인이자 법률가였던 베버의 부친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던 모친과 상반된 경향을 보였고 그 사이에서 베버는 혼란을 느꼈으며 특히 아버지와 갈등이 많았다. 베버의 부친은 아내에 대해 군림하는 성격이었는데 베버의 모친이 자녀들을 방문하여 몇 주씩 함께하곤 하던 여행을 통제하려 하자 1897년 베버는 이 일로 부친과 크게 싸우고 화해하지 않은 채 헤어졌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부친이 사망한다.''' 부친과의 싸움과 그 직후의 죽음 및 여러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장애를 겪은 베버는 심한 신경쇠약을 겪고 거의 6년 가까이를 휴식, 요양하며 보내게 된다.
1903년 이후 베버의 저작들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신경쇠약 이전의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역사경제학의 교수로, 역사경제학의 관점으로 저작들이 저술되었으나 이 시기 이후부터는 사회학으로 이행하게 된다.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객관성"이라는 중요한 방법론 논문을 집필한 후 역작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저술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1부는 1904년 발표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청교도와 자본주의의 관계 양상을 관찰한 뒤 1905년 2부를 발표한다.
이후부터는 학자로서 게오르그 짐멜, 칼 야스퍼스 등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1910년 독일 사회학회의 창립을 도우며 사회과학의 가치중립성과 객관성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전에 사변적 철학 경향을 띠었던 사회학 및 제반 학문들이 과학적인 사고방식과 연구 방법이 도입된 사회과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빈 대학과 뮌헨 대학에서 강의를 다시 잡기 시작하며 "소명으로서의 학문"과 "소명으로서의 정치"라는 두 유명 강연을 한다. 마지막으로 "경제와 사회"의 1부를 저출하고 1920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한다.
3. 사상
막스 베버는 사회를 체험하거나 지각할 수 있는 일정한 형태와 성질을 구비하지 않은 헛된 개념으로 보았다. 그는 사회(집단)의 현상이 아닌 구성원(개인)의 '''행위'''(Social action)를 중시했다.[2]
- 행위(Action)는 행동(Behavior)과 구분되는 용어로 쓰인다. 즉, 개인의 행동이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하고 특정한 의도와 의미를 가지게 될 때 그것은 행동이 아닌 행위라는 뜻이다.
- 결국 사회학적 분석이라는 것은, 바로 그 자기의 견해나 관점에 기초한 의미를 지닌 행위를 설명함으로써 성립된다고 믿었다.
- 당사자(사회 구성원)의 행위가 합리적(당시의 기준을 근거로)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고, 그것을 다시 '이념형(ideal type)'이라는 것으로 구분해 총 4가지의 행위 유형을 만들었다.
- 목적합리적 행위: 개인은 행위 자체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평가한다. 내가 시험을 잘 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부를 평소 열심히 하는 것도 있고, 벼락치기를 하는 것도 있고, 커닝을 하는 것도 있다. 개인은 이러한 여러 수단으로서의 행위 중에서 어떤 게 더 나은지 저울질을 하게 된다. 쉽게 말해 특정한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어떤 수단을 택해야 결과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지, 또 이러한 목적이 어떤 부차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 예측하고 계산하는 유형의 행위를 의미한다.
- 가치합리적 행위: 물리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수단 계산보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이념을 중시하므로써 나오는 행위.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종교적 지침이다. "기독교인은 (신이 명하는 바를) 올바르게 행하고, 결과는 하나님 뜻에 맡긴다"라는 말은 목적합리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에게는 비합리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가치관을 바탕으로 일관적인 행동을 취해 목적합리적 행위까지 결합해내는 유형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 행위가 유발하는 결과와 상관없이, 특정한 가치가 옳다 혹은 중요하다는 확신에만 입각하여 행위하는 유형이다.
- 정서적 행위: 행위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닌, 행위 자체를 위한 행위로서 동작한다. 이것은 가치합리적 행위와 유사하나, 이 경우 그 행동을 지배하는 명확한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무런 생산성 없는 놀이나 오락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 전통적 행위: 아무 생각 없이 평소 하는 짓 그대로 하는 걸 말한다.
베버는 이렇게 사람들의 행위 기저에 깔려있는 동기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때문에 마르크스의 이론 역시 그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가정은 사람은 이윤동기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인데, 베버는 사람은 이윤동기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동기가 사람의 행위를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한 베버는 사회현상들 간의 '선택적 친화력'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는데, 이는 요즘말로 하면 (인과관계가 아닌) 상관관계 정도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사회현상에서는 어떠한 보편적 법칙을 찾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에 개별현상들이 왜 일어나는지 유심히 살펴보고, 그 결과를 통해 현상들 간의 상관관계를 찾는 것이 (비현실적인 가정을 많이 필요로 하는)일반적, 보편적인 사회법칙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거다. 역사는 5단계로 진화하는 '필연'[6] 을 가진다고 주장한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완전 대비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베버를 각각 좌익과 우익의 대비로 보면 절대 안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사회문화 과목에서 베버를 기능론자, 마르크스를 갈등론자로 써놔서 베버 vs. 마르크스 구도가 좀 더 쉽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듯 하다.
베버는 현대사회에서 목적합리적 행위가 갈수록 더 중요시되어, 끝내 가치합리적 행위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굴러가는' 것을 경계했다. 쉽게 이야기해서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이들이 이윤추구(목적합리적 행위)를 하는 목적은 신의 구원(가치합리적 행위)을 확인하고자 했던 것인데, 현대사회에서는 이윤추구만 내세울 뿐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등의 질문들이 정작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가치합리적 행위 없이 목적합리적 행위만으로 합리성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통 stahlhartes Gehäuse, '쇠우리'라고 번역한다(Iron Cage, 탈콧 파슨스의 번역). 이 번역을 통한 해석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봤다는 것이 존재하나, 다른 한편으로 베버가 현대사회를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합리성이 '굴러가는' 데에 있어서 강철구의 겉은 목적합리적 행위지만, 가치합리적 행위인 그 강철구의 내용물이 비어있다는 것이다. 즉 파슨스의 번역에서 현대인은 '쇠우리'에 갇혀 절망에 빠진다는 뉘앙스를 갖지만, '강철외피', '강철 껍데기'라는 번역에서는 그 시대의 현대인들이 그 강철구의 가치합리적 행위의 내용물을 새롭게 채워나갈 수 있다는 뉘앙스를 갖게 된다는 점에서 베버가 현대사회를 그렇게 암울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도 베버는 미국 방문 당시, 발전하던 미국을 합리성의 첨단이라고 여기고 들떴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세계에 대한 베버의 시각이 잘 드러난 "소명으로서의 학문"이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말미, 그리고 특히 "세계종교와 경제윤리-중간고찰(Zwischenbetrachtung)"을 비롯한 종교사회학 논문을 읽어보면, 현대사회의 합리화 경향에 대한 베버의 전반적인 시각이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현대사회에 대한 베버의 절망 혹은 우려는 위에서 쓴 것처럼, 더 이상 궁극적 가치, 신념, 이상에 입각한 행위가 현대사회에 사라져가기 때문에 나오는 것만은 아니다. 베버가 바라본 현대사회는 고도로 전문화, 합리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가치, 신념, 이상의 객관성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고로 현대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합리화되고 기술적으로 발전된 것은 명백하지만, 이 합리성이나 기술성 자체가 의미있는지의 문제조차도 객관적으로 증명해낼 수 없다는 점이 베버가 절망하는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쇠우리의 번역에 대한 논쟁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로부터 '현대에 새로운 가치를 채워나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늬앙스를 읽어내는 해석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3.1.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
다만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해 의도하지 않은 친화력이 있었다는 설명은 오늘날에는 많은 반박이 쌓여있는 상태이다.
Davide Cantoni는 AD 1300~1900년 동안 독일 내부의 272개 도시들을 비교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베버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잘못 전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는 하지만, 19세기 후반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뱅주의자와 청교도의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을 고무했다는 영향력 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이 이론에 따르면 불안한 칼뱅파는 물질적 성공을 예정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의 표지로 해석했다. 17세기와 18세기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명백한 경제적 발전은 베버의 테제를 얼마간 뒷받침하지만, 근래 역사가들은 대체로 이 테제에 설득력이 없다고 보면서 거리를 둔다. 경건한 스코틀랜드의 경제가 낙후되었던 사실로 알 수 있듯이, 칼뱅주의 문화와 자본주의적 번영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성은 없었다. 자본주의적 번영은 오스만 제국이 팽창한 15세기 이래 경제적·정치적 우위가 지중해에서 (가톨릭권 프랑스를 포함하는) 대서양 세력들로 넘어간 더 장기적인 추세의 일부였다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어 보인다.
-Peter Marshall, 〈The Reformation〉
또한 비슷한 주제에 대하여 19세기 유럽 국가들을 비교한 연구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Many theories, most famously Max Weber’s essay on the “Protestant ethic,” have hypothesized that Protestantism should have favored economic development. With their considerable religious heterogeneity and stability of denominational affiliations until the 19th century, the German Lands of the Holy Roman Empire present an ideal testing ground for this hypothesis. Using population figures in a dataset comprising 272 cities in the years 1300–1900, I find no effects of Protestantism on economic growth. The finding is robust to the inclusion of a variety of controls, and does not appear to depend on data selection or small sample size. In addition, Protestantism has no effect when interacted with other likely determinants of economic development.
Overall, these results show that Protestant (Lutheran and Calvinist) and Catholic cities followed very similar growth trajectories in the period 1300–1900. These findings are robust, hold in a series of subsets of the data, and are unlikely to be due to selection into the dataset, or small sample size.
-Davide Cantoni, 〈The Economic Effects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Testing the Weber Hypothesis in the German Lands〉
즉, 개신교 윤리와 경제 성장의 필연적 상관 관계는 물론이고, 경제 성장에 개신교가 끼치는 영향들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반박이 상당히 쌓여있는 상태이다.We investigate the thesis widely credited to Max Weber that Protestantism contributed to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by estimating the associations between the percentage of Protestants and the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in European countries in the mid- to late nineteenth century. Development is measured using five sets of variables, including measures of wealth and savings, the founding date of the principal stock exchange, extension of the railroads network, distribution of the male labor force in agriculture and in industry, and infant mortality. On the basis of this evidence, there is little empirical support for what we call the "Common Interpretation" of Weber's The Protestant Ethic, namely the idea that the strength of Protestantism in a country was associated with the early development of industrial capitalism.
우리는 개신교가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기여했다는 막스 베버에게 크게 빚지고 있는 논지를 조사했다. 프로테스탄트 비율과 19세기 중후반 유럽 국가의 산업 자본주의 발달을 비교하면서. 발달은 5개의 변수를 이용하여 측정되었다. 이 변수는 부와 저축, 주요 주식 거래의 설립 데이터, 철도 네트워크의 확장, 농업과 산업에서의 남성 노동력 분포, 유아 사망률을 포함한다. 이 증거를 기반으로 할때,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한 "공통 해석"(곧 국가에서의 개신교 세력이 산업 자본주의의 초기 발달과 관련되었다는 아이디어)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에 대한 실증적 증거는 거의 없다.
-Jacques Delacroix and François Nielsen, 〈The Beloved Myth: Protestantism and the Rise of Industrial Capitalism in Nineteenth-Century Europe〉
결국 베버의 테제에 대한 위 비판들을 요약하자면, '''실증적 근거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아래의 반박에서도 이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베버가 19세기 중반의 사람이기에 '실증'에 대한 태도가 당연히 현대와는 다르고, 따라서 베버의 '인격'은 어느정도 변호받을 수 있지만, 베버의 '학설'에 대해서는 당연히 후학들이 비판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아래에서는 '통일 전 독일은 2류 국가들이었다'다는 이유로 반박을 하고 있는데, Cantoni의 연구가 독일에 주목한 것은 "독일이 1류 국가니까"가 아니라, 272개의 '비슷한 문화권' 도시를 비교할 수 있어서이다. 독일이 1류 지역이든 2류 지역이든 간에, 그 내부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에 따른 차이를 관찰했다면, 베버의 테제에 대한 반박이나 보완에 당연히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베버 테제의 실증적 근거가 관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Delacroix와 Nielsen의 연구에서도, 19세기 유럽 국가간 비교에서 실증적 근거가 관측되지 않았다.
3.2. 비판에 대한 반박
물론 이는 베버의 이론이 워낙 오래되어서 그만큼 반박이 많이 쌓였기에 비판을 듣는 것이지, 21세기 기준으로도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베버의 이론은 여전히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프로테스탄티즘을 '''칼뱅주의만'''으로, 또는 '''청교도''' 윤리를 프로테스탄티즘의 대표로 '''베버가''' 해석했다고 단순화 시켜버리는 것은 오독이다[7] . 극도로 좁혀서 설명하면 베버의 해석은 프로테스탄티즘 즉, 전체 개신교 교리 안에서도 ''''세속적 윤리''''[8] 가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부의 축적에 대한 '''의지''', '''노동윤리''', 자본주의적 '''선행'''과 친화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해석에 가깝다. 바꿔 말하면, 개신교의 신학적 윤리는 자본주의와는 크게 상관이 없을 수도 있고 베버가 해석하고자 한 부분도 아니었으며, 자본주의를 발달시키는 사상적 근거가 반드시 칼뱅주의'''만'''으로 해석된다는 것도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상기된 비판에 대한 반박이 가능하다. "낙후된 스코틀랜드"라는 표현부터 과연 일본을 제외한[9] '당대의' 동양과 비교했을 때 적절한 문구인가에서부터, 스코틀랜드 출신의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앤드루 카네기와 같은 산업혁명의 굵직굵직한 중요 '''인물'''[10] 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나폴레옹 휘하의 혁명 이후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지금의 미국 대학 수준의 당대 세계 최고 학문 및 유학 중심지로서의 스코틀랜드 소재 대학들만 열거해도 스코틀랜드의 결과론적 경제적 낙후성을 들먹이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스코틀랜드가 낙후되었다는 주장은 하이랜드 지방에만 국한된 것이며, 잉글랜드와 인접한 로우랜드 지방은 전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라 고도의 산업 발달을 이룬 곳이다. 글래스고가 대표적이다.
미국도 세속적 윤리에 있어서는 칼뱅주의의 영향이 없다고 볼 수 없고, 더 나아가서 건국의 아버지들의 개인 종교와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과 같은 세계적, 역사적 거물들의 종교와 생애가 어떠했는가를 살펴보면 사회학적 행위자 주의에 입각한 칼뱅주의 기반 교파들[11] 의 영향력은 명백하다. 각 개인 개신교 종파 내의 세속적 윤리를 자본주의적 '''욕망'''[12] 과 합의 및 일치시키는데 단순히 몇몇 개인이 성공했다고 해서 친화력이 있다는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의 생애가 나머지 인류에 미친 영향으로서 종교적 윤리 > 세속적 윤리의 구분 > 자본주의 '''노동''' 윤리와의 합의 > '''롤 모델''' > '''2차 세속화된 자본주의 노동윤리''' 의 역사적 변환을 따라 부의 축적에 대한 욕구가 산업화 사회의 거의 모든 개인의 노동윤리에 '''종교와 상관없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해석까지 언급한 뒤에야 세계사적 분석을 동원하는 것이 옳은 순서다.
예컨대 19세기 후반 독일은 그것을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 독일 제국 건국의 1870년 즈음으로 기준하더라도, 그 이전에는 산업화에 대한 종교-윤리 이외 환경적인 배경에서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발현시키지 못하고 있던 분열된 도시국가들이었다. 1차 대전 직전까지 독일의 산업화 과정은 일본이 그대로 답습했던 국가주의 형식에 가까웠다. 베버가 언급한 자본주의 정신이 프로테스탄티즘과 합의한 헤게모니적 케이스가 아니라, 국가의 권력에 의해 강요된 이데올로기적 케이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말하자면 반박 자체가 방향부터 틀렸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베버의 저작은 '''"개신교를 믿으면 경제가 성장합니다."'''와 같은 예수천국 불신지옥 수준의 교리 오해가 아니라, 거꾸로 산업혁명 당시의 역사적 이슈, 즉 주요 발명품과 명백히 성공한 산업화 지역[13] 및 인물들의 종교적 배경과 행태를 연결시키는 것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 단순화하면, '''"산업 경제[14] 가 발전해서 봤더니 다들 프로테스탄트적(칼뱅주의적) 생활윤리가 몸에 배어 있었더군요."'''라는 말이다. 애초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지도 못한 지역에서 당시로서는 '''신식''' 노동윤리와 종교윤리가 합의를 시도할 리도 만무하다.
4. 여담
- 카를 마르크스를 흔히 줄여 부르는 이름인 '막스(맑스)' 때문에, 마르크스와는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과 이론을 지녔음에도 이름에 '막스'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빨갱이 취급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유명한 야사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막스 베버의 저서를 읽다가 '너 맑스 책 가지고 있으니 빨갱이지?'라며 잡아가는 것. 도시전설로 치부하는 의견도 있긴 한데 도시전설이라 하기엔 실제 경험담이 너무 많다. 그리고 80년대 반공 군사독재정권은 물론이고 심지어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이다. #
- 막스 베버의 형제들이 독일 현대 학계ㆍ정계의 먼치킨이라 할 수 있다. 막스 베버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동생이 그 유명한 공업입지론의 저자 알프레드 베버이다. 막내 동생 칼 베버는 독일 근현대를 관통하는 유명한 사법행정관료였다. 막스 베버는 어머니의 경건한 삶을 그대로 따랐지만, 동생들은 달랐다. 알프레드 베버는 형과는 정반대로 세속적인 학풍을 따랐고, 카를 베버 역시 현실 법률과 관련된 일을 맡아 했다.
- 막스 베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박물관이 일요일에 휴관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미국을 프로테스탄스 정신의 모범으로 숭상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작 동시대 미국 작가 중 한 명은 당시 미국 사회를 "월요일이란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다음 날"이라 풍자한 바 있다.
- 1905년에 러시아에서 최초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러시아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