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 타다아키
小野忠明 / 小野 次郎右衛門 忠明(오노 지로우에몬 타다아키)
1569년 ~ 1628년
일본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검호로 이토 잇토사이의 일도류를 계승하여 오노파 일도류를 창시한다.[1]
실력만 놓고 본다면 동시대 가장 강하지 않았을까라고 여겨지는 인물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검술사범으로서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으로 벼슬을 살았으나, 권력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사고를 많이 쳐서 야규 무네노리가 1만 2천 500석의 다이묘가 될때, 600석의 석고만 찍고서 처벌과 폐문을 반복하다가 은퇴한 시대의 풍운아.
검선일치를 토대로 선(禪)을 강조하던 야규 무네노리와 야규신음류와는 정반대로, 검술은 생과 사의 수라장을 넘나드는 것이라는 자신의 모토를 가지고서 사람을 베는 실전 검술을 교육하였으며, 이후 나카니시 일도류, 치바슈사쿠의 북진일도류 등에도 큰 영향을 준다.
본명은 미코가미 텐젠 (神子上 典膳)으로 조부,아버지와 함께 관동의 이즈 반도에 위치한 사토미 가문의 가신으로 봉직하였다. 사토미 가문 기록 중에서 마사키 도키시게[2] 와 일기토를 벌였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사토미 가문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후 무사 수행을 떠난다.
무사 수행을 떠난 오노 타다아키는 자신을 천하의 최고 검술가로 자칭하며 원한다면 도전하라는 깃발을 세우고 다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3] 오노 타다아키는 이 이토 잇토사이(伊東 一刀斎)에게 도전하였다가 처절하게 깨지고서 감복하고 이토 잇토사이의 일도류(一刀流)에 입문한다. 이토 잇토사이 역시 오노 타다아키의 재능을 보고서 제자로 들일 것을 승낙하고 먼저 제자로 받아들인 뱃사공 출신의 오노 젠키와 함께 3명이서 천하.. 라고 해도 주로 검술의 중심인 관동..를 주유하는 무사수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토 잇토사이가 두 제자 중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정하는데, 그에 관련된 일화가 '''서로 죽여서 살아남는 검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 그리고서 내심으로는 인격이 고결하고(!?), 품성이 훌륭했던(!?) 오노 타다아키[4][5] 에게 자신의 오의를 전수하고, 타다아키는 오노 젠키를 이 오의로 죽였다! 라는 일화가 존재한다. 사실 일화나 구전전승이야 신빙성이 한참 낮으니 뭐 그렇다치는데, 역사적으로 오노 타다아키의 인격과 품성이 워낙 개차반이었던지라 사실 이 때 이토 잇토사이가 오의를 전수한 건 오노 젠키였는데 타다아키가 걍 실력으로 이겼다! 라는 썰도 있을 정도..
뭐 사실 이 일화 자체가 일도류 계열의 구전 전승이라 신빙성도 낮고, 현대의 일도류 분파들의 숫자만큼의 수 많은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오노 젠키가 도망치다가 죽었다는 말도 있고, 숨었다가 죽었다던가, 비전서를 훔쳐다가 도망치다가 베였다던가 등등. 오의를 전수했다는 말도 일도류의 태도와 상반되는 말이기도 하고, 이토 잇토사이에게는 호죠 가에서 봉직하던 고토다 토시나오라는 제자도 있었는데 왜 걔는 후계자 후보로 아예 빼버렸는지도, 오노 젠키의 실존 여부 자체도 심히 불투명하니 그냥 실제 역사를 따지기 보다는 실전 검술 = 살인검을 지향하는 일도류를 이어받으려면 자신의 사형 정도는 죽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라는 일도류라는 유파의 태도가 드러난 일화라고 여기면 될듯.
어쨌든 이렇듯이 오노 타다아키의 스승은 일도류의 이토 잇토사이였고, 현재에도 일도류 계열의 유파들은 이토 잇토사이와 오노 타다아키를 유파의 개조들로 놓고 있다. 오노 타다아키는 자신의 유파를 일도류로 자칭하였으나 후대에서 이토 잇토사이와 구별하기 위해 오노파일도류라고 부른다.
1593년, 즉 임진왜란 개전 극초기, 도쿠가와 가문에서 검호로 유명했던 이토 잇토사이를 몸소 초빙하였고, 이에 이토 잇토사이는 거절하고 대신 자신의 제자인 미코가미 텐젠을 추천. 미코가미 텐젠은 이 때[6]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 쪽 성인 오노 성씨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니 히데타다로부터 충(忠)자를 따와서 오노 타다아키(小野忠明)로 개명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검술 사범으로 사관하게 된다. 최초 영지는 200석. 여담 이지만 이토 잇토사이의 나이는 미상으로 KOEI사의 게임이나 베가본드 같은 데서는 오노 타다아키와 별 차이가 안나는 아즈치-모모야마 대의 검호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고, 도쿠가와의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제자를 보낸 것으로 봐서 출생 연도가 최소 야규 무네요시와 비교해야 하지 않나라는 설도 있는 모양. 어쨌든 필생의 라이벌, 심지어 사후의 라이벌인 야규 무네노리보다 1년 전에 먼저 도쿠가와 막부에 사관한것.
그리고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우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 검술 지도역이 되었다.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이 되었다는 정체불명의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야규 무네노리는 오노 타다아키가 첫 번째로 폐문당하고 나서 1601년에나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 된다. 즉 '''실력적으로는 그 야규 무네노리보다 더 빨리 인정받았고 출세했다는 말'''.. 다만 여기까지가 최전성기.. 타다아키의 문제와 기행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오노 타다아키가 히데타다에게 가르치는 검술 교육이라는게 실전을 모토로 한 엄청나게 힘든 교육이었던 듯하다. 특히나 야규 가문은 안전을 위해서 '''죽도'''를 쓰고, 검선일치와 천하치국의 검을 강조하며, 야규 무네노리가 후대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직접 말했던 것처럼 '''검술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갈고 닦는 게 먼저입니다.'''라며 통치자를 위한 맞춤 교육을 할 때[7] . 타다아키는 실전의 최전방에서도 무장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검술을 목표로 '''목도'''[8] 를 미친듯이 휘두르는게 연습이었다. 뭐 심지어 후대의 막말에도 일도류 계열 유파의 훈련 강도는, 훈련 강도가 가장 강한 실전의 검술 유파로 여겨지니 전국 시대 당시, 그것도 유파의 레전드 밑에서는 어지간했었을 듯.
이 동안의 오노 타다아키의 교육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로는, 일도류의 힘든 교육을 받던 히데타다가 어느 날에는 교육을 받다가 타다아키에게 '''우린 수련이랍시고 맨날 목도만 휘두르는데 우리는 다른 애들처럼 오의 같은 거 없음?'''이라고 궁금해하자, 타다아키는 히데타다에게 '''오의라고 해도, 우리는 다른 유파와는 다르게 실제로 사람을 죽여서 체득하는 전쟁터의 검이므로, 특별히 오의 같은 건 없습니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유인에 빠져서 우에다 성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사실 자칫 했으면 전국시대 최대의 판단미스로 여겨질 뻔한 전투였고 자세한 전투의 의의와 경과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참조. 어쨌든 오노 타다아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으로 직속 가신인지라 도쿠가와 히데타다 밑에서 이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우에다 칠본창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전승으로는 우에다 성에서 돌격해온 적장 요리타 효부를 베었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도 아군 무장 하나와 누가 요리타 효부를 먼저 베었는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아군 무장은 적장이 투구는 없이 붉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말했고, 오노 타다아키는 적장이 걍 투구만 썼다고 말해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 오노 타다아키가 먼저 베어서 피가 나서 마치 붉은 가면 처럼 보였구나! "하고 오노 타다아키가 포상을 받았다.'라는 전승이 전해진다. 뭐 여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공을 세우고서 군령을 위반하여 처벌당한다. 사실 평시에도 그렇지만 전쟁 도중 군령 위반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였기 때문에 이 군령위반으로 문책당하여 처벌로서 폐문(閉門)이 내려져 사나다 노부유키의 감시 하에 고즈케 국에서 유폐당한다. 이것이 오노 타다이키의 생전 첫 번째 폐문 처분.
그러나 정말로 뛰어난 검호는 설령 폐문 처분을 당해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 법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인 유키 히데야스가 유폐당한 오노 타다아키의 재능을 아쉬워하여 이에야스에게 간청하였고, 이에 오노타다아키도 용서받아 다시 무장 및 무네노리와 함께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으로 복귀하게 된다.. 사실 좀 대단한 것이 보통 폐문을 한 번 당할 경우 대다이묘 아니고서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아예 개역까지 당하고 영지를 몰수 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이렇게 유폐가 가벼운 처벌인 것처럼 끝난 건 오노 타다아키가 실력이 정말 뛰어났으며 그 명성이 이미 천하에 퍼진 수준이라 폐문 처분을 해도 자칫하면 다른 라이벌 가문에 빼앗긴다던가 해서 인재도 빼앗기고, 도쿠가와 가문의 체면까지 엉망으로 구겨질 수도 있으니 타다아키를 폐문 처분 상태로 두고서 안 쓸 수가 없었던 정도였다는 얘기.
그렇게 폐문에서 복귀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후계자로 명확히 낙점되며 지금까지 수고했던 오노 타다아키에 대한 포상 등의 의미로 400석이 가증되어 600석이 되지만, 반면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의 배후에서 야마토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서군을 위협하여 그 포상으로 2천 석이 내려졌고, 1601년에는 '''칩거 중인 오노 타다아키를 대신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 되어 1천 석이 가증된다.''' 즉 엇비슷했던 두 사람의 영지 격차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한 명은 공을 세우고, 한 명은 유폐당하면서 순식간에 5배가 된다.
그리고 1605년 에도 막부 성립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쇼군으로 정식으로 취임한다. 정식으로 쇼군이 된 히데타다 곁에서도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은 계속되는데.. 일화 중 하나로는 어느 날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근습들과 무장들에게 자신의 검술 이론, 아마도 타다아키의 라이벌인 야규 무네노리의 영향을 받은 걸로 추측되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오노 타다아키가 이를 옆에서 못마땅하게 듣고 있다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타다아키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묻자, 타다아키는 그대로 면전에서 '''검술은 전쟁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수라장을 겪으며 전장에서 수련하는 것이옵니다. 우에사마께서는 입으로만 검술을 하고 계시니 마치 다다미에서 수영을 하는 꼴이시옵니다.'''라며 쇼군과 근습, 제장들의 눈 앞에서 쇼군에게 디스를 한다. 히데타다는 뭐 분노했겠지만 이 일은 그냥 묻어두고 넘어간다.
그러나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은 다시 계속되는데, 전국시대 ~ 에도 시대의 검호들의 대우는 입신출세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넓은 길이 검호였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이에야스부터가 검술에 지극히 관심이 많았으며 야규 무네요시, 이토 잇토사이, 마츠오카 노리타카 등을 직접 초빙해서 검술을 배우고 심지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최대 몇 백 석의 영지까지 수여하고, 오노 타다아키와 야규 무네노리같은 실력있는 검호들을 무장으로서 등용하며 많은 보상을 해주는등.. 그러다보니 에도에는 전국의 실력있는 무예가들이 출세를 위해 모두 에도로 모여서[9] 각기 자신의 이름과 유파의 간판을 내걸고 승부를 벌이고, 도장을 차리는 등 그야말로 당대 일본 최고의 무예가들의 집합소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에도에서 운영을 하던 도장 중 자신을 '''천하제일의 검술가, 진검 승부만 받아들이며 목숨을 내건 각오가 있는자만 도전하라!'''고 자칭하며 실전 검술을 표방하며 명성을 얻던 도장 or 무예가[10] 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오노 타다아키가 이를 보고서 격분! 진짜 실전이라면 목숨걸고 나랑 붙어보자! 하면서 도장깨기를 들어간다.
상대방도 어지간히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검호니 에도까지 와서 저런 무례한 표어를 붙였을테고, 또 출세를 위해서 에도에 온 것인데 최대어인 오노 타다아키가 걸렸으니. 이기기만하면 막부에 등용은 물론이오 바로 천하에 오노 타다아키를 누른 검호로 명성이 퍼질테니까 당연히 승낙!. 상대와 오노 타다아키는 서로 목도를 들고 진검 승부를 벌인다.[11] 당대의 레전드의 대전에 에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집결하여 그 승부를 지켜보는 가운데, 승부는 간단하게 오노 타다아키가 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였..으나. 문제는 오노 타다아키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였으니까 목숨을 걸어야지? 하면서 상대방의 정수리를 목도로 두드려 까기 시작. 에도의 무사들과 시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저항할 수 없는 상대방의 머리를 신나게 두드려 팬 끝에 상대방 검호는 사망하고 오노 타다아키는 당연히도 이로서 다시 근신으로 폐문 처분.[12] 또 다시 유폐당한다. 이것으로 오노 타다아키의 2차 폐문.
그러나 이번에도 어찌저찌 다시 유폐에서 풀려나게 된다.
일화에 따르면 당시 에도 외곽에서 도적 떼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에도 외곽의 논과 밭을 서리하던 도적들이 있어서 농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농민들이 이를 에도의 치안관 or 오바타 카케노리[13] 에게 보고하자 토벌대가 결성되었고, 폐문 처분으로 반백수 상태에 있던 오노 타다아키도 칼 한자루를 들고서 직접 토벌에 참전 or 혹은 오바타 카게노리가 놀고 있던 오노 타다아키를 데리고 가서 토벌에 참전했다고 한다. 오노 타다아키는 토벌대의 선두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서 도적떼를 학살하러 뛰쳐나가는데, 이를 보고서 도적 떼들이 '''오노 타다아키다!'''하고서 혼비백산해서 도망치자, 오노 타다아키는 도망치는 도적 떼를 잡아 죽이려고 뛰어나가다가 도적들이 먹고버린 참외껍질을 밟고 미끄러졌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넘어지면서도 진검을 던져서 도적의 등에 꽂아서 죽이는 신기를 발휘했다고 하며. 이를 오바타 카게노리가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하자 아 그놈이 인물은 인물이구나. 하고서 폐문 처분에서 용서받고 무사로 다시 복귀했다고 한다.
다른 버젼으로는 좀 멋지게 도적과 1:1을 해서 팔을 날리고, 목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으나, 뭐 어쨌든 애초에 이번 폐문 처분은 사실 목숨을 내건 승부에서 목숨을 빼았았던 것에 대한 댓가로는 좀 과한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 전국시대를 종결하는 큰 대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실력있는 무사를 놀리기 아까웠던듯. 어쨌든 이번 폐문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복귀한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에서 도요토미를 아예 끝내려는 최종전. 전국시대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전투인 오사카의 전투가 벌어진다. 오노 타다아키는 쇼군인 히데타다의 스승으로서 당연히 곁에서 참전.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 역시 이 전투에 참전한다. 무네노리는 히데타다를 향해 쇄도하는 유키무라-카츠나가 측의 무사 7명을 베는 신기를 보이며 큰 공을 세웠고, 오노 타다아키 역시 도요토미 측의 이름있는 무사들을 베어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지나..
그러나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이 또 다시 계속되는데.... 오사카의 역에서 함께 종군하던 다른 동맹 가문의 한 무장과 또 시비가 붙어서 상대와 또 다시 목숨을 걸고서 진검승부를 하게되었고, 오노 타다아키는 역시 이번에도 목도를 들고 상대방 무장과 붙는다. 승부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오노 타다아키가 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였..으나. 문제는 오노 타다아키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였으니까 이건 감수해야지? 하면서 상대의 양 팔을 미친듯이 목도로 두드려까기 시작.. 상대의 양 팔을 못쓰는 불구로 만들어버린다.[14] 사실 팔만 불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번보다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천하의 향방을 가르는 전투에서 동맹의 맹주 군의 무장의 신분으로, 동맹군에게 그 짓을 했으니.. 쇼군 히데타다의 분노를 크게 사서 무려 쇼군에게서 직접 폐문사과(閉門思過)를 명받는다. 이것이 오노 타다아키의 3번째. 그리고 마지막 폐문처분.
특히나 이번 폐문은 상대가 다른 가문의 무사라 도쿠가와 가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점, 워낙 중요한 상황에서 저질러진점, 도쿠가와 막부의 적이었던 도요토미도 멸망하면서 이제 전쟁이 끝나 오노 타다아키와 같은 실력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졌다는 점에서 이번 폐문 처분을 취소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이것으로 오노 타다아키는 강제 은퇴하고 삼남인 타다츠네(忠常)가 쇼군의 검술사범 직을 잇게 된다.
뭐 그렇다고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들이 완전히 끝난건 아니고, 폐문 처벌의 내용들은 정확히 직위 해제, 다른 가문에서 벼슬을 살아도 안됨(방해할거임), 경우에 따라 사는 지역에서 벗어나면 안됨. 정도라 에도에서 도장을 운영하고 검술을 가르치면서 종종 히데타다나 이에미츠 등 쇼군에게도 불려간듯 하다.
특히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와의 관련된 이 시기의 일화들이 상당 수 남아 있는데. 첫 번째는 야규 무네노리가 장남 야규 미츠요시, 즉 야규 쥬베에의 교육을 걱정하자. 이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는게 최고라며 죄인들을 베게 시키라고 무네노리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게 조언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야규 무네노리를 상대로 진짜 신랄하게 고도의 디스를 한셈인데.
즉, 니네는 사람을 베어 본적도 없는 검술 아니냐[15] , 니네 실력은 실전을 하는 우리에 비해 엄청 떨어지니까 실전은 죽어도 무리고, 걍 무저항의 죄인이라도 묶어놓고서 망나니 질이라도 해서 실력을 기르지 그래? 라는 엄청난 디스를 한셈.
이에 야규 무네노리의 반응은 "음... 그거 좋군" 하고서 당연히 그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고 하며. 이게 일도류에서 전해지는 일화긴 한데, 오노 타다이키는 덕천실기 같은 에도 막부의 공식 역사 기록에 동료들과 자주 언쟁을 하고 다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라. 사실일 가능성도 높다.
두 번째 일화로는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아직 어릴 때, 오노 타다아키가 검술 조언을 한답시고 이에미츠에게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어야 합니다.''' 라며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츠지기리라도 하라고 조언. 이에미츠는 이 말을 듣고서 몰래 마을로 잠행하여 츠치기리를 하려고 하였으나[16] 이를 야규 무네노리가 무도토리로 막아내고서 이에미츠에게 쇼군이 익혀야할 검술과 천하치국의 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세 번째 일화는, 어느 날 오노 타다아키가 야규 무네노리의 도장에 쳐들어가서. 수제자를 박살내고, 이에 무네노리가 자기 아들인 야규 주베에를 보고서 타다아키와 승부하라고 하였으나, 쥬베에는 타다아키 공의 실력은 물에 뜬 달과 같습니다. 저로서는 잡을 수 없습니다. 라며 버로우하고, 이에 타다아키가 수제자들 보고 다 한번에 덤비라고 해서 이겼다! → 이에 야규 주베에가 감복하여 그날 밤 오노 타다아키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일화도 있으나, 다른 기록은 하나도 없이 일도류에서만 전해지는 일화고, 무네노리의 성격에도 전혀 맞지 않는데다가, 아니 그냥 상식적으로도 아예 말이 안되는 수준의 일화에. 무네노리의 장남인 야규 쥬베에의 나이가 16살이라고만 쳐도, 오노 타다아키는 55살에 사망하기 몇 해 전이니.. 그냥 일도류에서 만든 자기 미화의 일화인듯하며, 특히 저 물에 뜬 달과 같다는 수월이라는 표현역시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의 1장에서 등장하는 내용인데 병법가전서는 야규 무네노리가 사망하기 직전 제자인 다이묘 나베시마 모토시게에게 선사한 물건이다. 즉 병법가전서가 널리 퍼진 시기를 생각하면 에도 시대 중반 이후에 흥한 일도류 측에서 슬슬 몰락해가는 야규 류를 모욕하기 위해 만든 일화인듯.
그렇게 살다가 1628년 6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묘는 시모사노쿠미의 영흥사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위치는 치바의 나리타시. 나리타 고교의 뒷산에 안장되어 있다. 한글로 된 치바 관광 홍보 홈페이지에서 소개될 정도로 나름 관광 상품으로도 쓰이는듯.
가문의 최종 석고는 600석 +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 1천석 이하 배신들에게 일괄 200석 가증이 있었고 이를 후계자인 삼남 타다츠네가 받았기에 800석.
최종적으로 '''오만한 성격에 불손하고 예의가 없었다고 전해지며.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도 주변의 제장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다고 전해지나, 실력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전국시대를 실력 하나만 가지고서 자기 멋대로 살다간 시대의 풍운아.'''
일단 직계 제자로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그리고 아들인 타다사네가 가르쳤지만, 오노 타다아키도 묻지마 칼부림을 하라는 교훈을 남겨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그리고 장남은 일찌감치 먼저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타다나리(忠也)에게는 일도류(一刀流)를 전수하고 후사가 없었던 이토 잇토사이의 양자로 입적시켜 일도류의 종가로서 대를 잇게 하고 삼남 타다츠네(忠常)에겐 쇼군 가의 검술 사범역을 물려준다. 이로서 일도류는 분화되어 타다나리의 일도류는 이토파 일도류(伊藤派一刀流), 타다츠네의 일도류는 오노파 일도류(小野派一刀流)로 불린다.
일도류는 이후 강도 높은 훈련 + 실전 검술 지향 검술 덕분에 크게 융성하여 수 많은 분파를 탄생시켰고,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의 야규 류는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서 오히려 크게 쇠퇴하고 심지어 에도의 야규류는 아예 망했는데. 일도류는 오히려 엄청나게 흥하여 수 많은 분파를 만들어내며 전국 최대의 유파가 된다.
그 분파 중 하나가 나카니시파 일도류(中西波一刀流). 오노파 일도류 4대 당주 오노 타다이치(小野忠一)의 수제자였던 나카니시 츄타 사네사다(中西忠太子定)가 만들어낸 분파로. 본인은 나카니시파가 아닌 오노파를 자칭하였고 심지어 쇼와 시대까지도 그러하나, 현대에 구분을 위해 나카니시 파로 명명되었다. 어쨌든 당시 일도류에서 사용하던 목도는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었고, 실제로 오노 타다아키도 그걸 잘 증명했지만.. 나카니시 타네사다는 이러한 목도 대련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고민하다가 야규 류로부터 죽도와 호구 아이디어를 도입. 현대 검도에서 사용하는 죽도와 호구의 원형을 만들고, 위험한 목도 검술 대신 죽도 검술을 위주로 교육시킨다.
그리고 현대 검도의 원형을 만든 유파인 북진일도류 역시 개조(開祖) 치바 슈사쿠가 수련한 나카니시파 일도류와 치바가 가전무술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를 통합하여 창시한 유파이다.
즉 실력면에서도 당대 최강 수준이었고, 유파적인 측면에서는 현대 검도까지 이어지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검마.
아이러니하게도 오노 타다아키 이후의 일도류 계열은 두꺼운 보호용 장갑이나 현대적인 죽도와 호구 등을 개발하는 등 안전한 수련의 형성[17] 에 노력하였고, 나카니시 사네사다나 치바 슈사쿠는 신분에 무관하게 제자를 받는다거나 교수법에 대한 훈훈한 일화가 여러 개가 있는 등 오노 타다아키 특유의 성질과는 거리가 멀어진 행보를 보인다.
엄청난 개성과 기행의 소유자였지만, 주연이든 조연이든 2차 창작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보니 거의 나오지 않는다. 베가본드에서는 이름만 언급이 되었고, 시구루이에서는 무모증 제자에게 레이피어를 체득하라고 권하는 모습으로 나온 게 전부다. 같은 쇼군가 검술 사범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던 야규 무네노리가 타고난 정치적 능력과 영향력을 기반으로 여기저기서 얼굴 비추는 것과 매우 비교가 된다.
1569년 ~ 1628년
1. 소개
일본 전국시대 말기와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검호로 이토 잇토사이의 일도류를 계승하여 오노파 일도류를 창시한다.[1]
실력만 놓고 본다면 동시대 가장 강하지 않았을까라고 여겨지는 인물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검술사범으로서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으로 벼슬을 살았으나, 권력자에게 영합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사고를 많이 쳐서 야규 무네노리가 1만 2천 500석의 다이묘가 될때, 600석의 석고만 찍고서 처벌과 폐문을 반복하다가 은퇴한 시대의 풍운아.
검선일치를 토대로 선(禪)을 강조하던 야규 무네노리와 야규신음류와는 정반대로, 검술은 생과 사의 수라장을 넘나드는 것이라는 자신의 모토를 가지고서 사람을 베는 실전 검술을 교육하였으며, 이후 나카니시 일도류, 치바슈사쿠의 북진일도류 등에도 큰 영향을 준다.
2. 출신 및 스승
본명은 미코가미 텐젠 (神子上 典膳)으로 조부,아버지와 함께 관동의 이즈 반도에 위치한 사토미 가문의 가신으로 봉직하였다. 사토미 가문 기록 중에서 마사키 도키시게[2] 와 일기토를 벌였으나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는 사토미 가문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이후 무사 수행을 떠난다.
무사 수행을 떠난 오노 타다아키는 자신을 천하의 최고 검술가로 자칭하며 원한다면 도전하라는 깃발을 세우고 다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3] 오노 타다아키는 이 이토 잇토사이(伊東 一刀斎)에게 도전하였다가 처절하게 깨지고서 감복하고 이토 잇토사이의 일도류(一刀流)에 입문한다. 이토 잇토사이 역시 오노 타다아키의 재능을 보고서 제자로 들일 것을 승낙하고 먼저 제자로 받아들인 뱃사공 출신의 오노 젠키와 함께 3명이서 천하.. 라고 해도 주로 검술의 중심인 관동..를 주유하는 무사수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토 잇토사이가 두 제자 중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정하는데, 그에 관련된 일화가 '''서로 죽여서 살아남는 검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수하겠다.''' 그리고서 내심으로는 인격이 고결하고(!?), 품성이 훌륭했던(!?) 오노 타다아키[4][5] 에게 자신의 오의를 전수하고, 타다아키는 오노 젠키를 이 오의로 죽였다! 라는 일화가 존재한다. 사실 일화나 구전전승이야 신빙성이 한참 낮으니 뭐 그렇다치는데, 역사적으로 오노 타다아키의 인격과 품성이 워낙 개차반이었던지라 사실 이 때 이토 잇토사이가 오의를 전수한 건 오노 젠키였는데 타다아키가 걍 실력으로 이겼다! 라는 썰도 있을 정도..
뭐 사실 이 일화 자체가 일도류 계열의 구전 전승이라 신빙성도 낮고, 현대의 일도류 분파들의 숫자만큼의 수 많은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오노 젠키가 도망치다가 죽었다는 말도 있고, 숨었다가 죽었다던가, 비전서를 훔쳐다가 도망치다가 베였다던가 등등. 오의를 전수했다는 말도 일도류의 태도와 상반되는 말이기도 하고, 이토 잇토사이에게는 호죠 가에서 봉직하던 고토다 토시나오라는 제자도 있었는데 왜 걔는 후계자 후보로 아예 빼버렸는지도, 오노 젠키의 실존 여부 자체도 심히 불투명하니 그냥 실제 역사를 따지기 보다는 실전 검술 = 살인검을 지향하는 일도류를 이어받으려면 자신의 사형 정도는 죽일 각오가 되어 있어야한다. 라는 일도류라는 유파의 태도가 드러난 일화라고 여기면 될듯.
어쨌든 이렇듯이 오노 타다아키의 스승은 일도류의 이토 잇토사이였고, 현재에도 일도류 계열의 유파들은 이토 잇토사이와 오노 타다아키를 유파의 개조들로 놓고 있다. 오노 타다아키는 자신의 유파를 일도류로 자칭하였으나 후대에서 이토 잇토사이와 구별하기 위해 오노파일도류라고 부른다.
3. 생애와 일화
1593년, 즉 임진왜란 개전 극초기, 도쿠가와 가문에서 검호로 유명했던 이토 잇토사이를 몸소 초빙하였고, 이에 이토 잇토사이는 거절하고 대신 자신의 제자인 미코가미 텐젠을 추천. 미코가미 텐젠은 이 때[6] 자신의 이름을, 어머니 쪽 성인 오노 성씨와,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니 히데타다로부터 충(忠)자를 따와서 오노 타다아키(小野忠明)로 개명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검술 사범으로 사관하게 된다. 최초 영지는 200석. 여담 이지만 이토 잇토사이의 나이는 미상으로 KOEI사의 게임이나 베가본드 같은 데서는 오노 타다아키와 별 차이가 안나는 아즈치-모모야마 대의 검호로 묘사하고 있지만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고, 도쿠가와의 요청을 거절하고 대신 제자를 보낸 것으로 봐서 출생 연도가 최소 야규 무네요시와 비교해야 하지 않나라는 설도 있는 모양. 어쨌든 필생의 라이벌, 심지어 사후의 라이벌인 야규 무네노리보다 1년 전에 먼저 도쿠가와 막부에 사관한것.
그리고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우 빠르게 실력을 인정받아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 검술 지도역이 되었다. 야규 무네노리와 함께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이 되었다는 정체불명의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야규 무네노리는 오노 타다아키가 첫 번째로 폐문당하고 나서 1601년에나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 된다. 즉 '''실력적으로는 그 야규 무네노리보다 더 빨리 인정받았고 출세했다는 말'''.. 다만 여기까지가 최전성기.. 타다아키의 문제와 기행들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오노 타다아키가 히데타다에게 가르치는 검술 교육이라는게 실전을 모토로 한 엄청나게 힘든 교육이었던 듯하다. 특히나 야규 가문은 안전을 위해서 '''죽도'''를 쓰고, 검선일치와 천하치국의 검을 강조하며, 야규 무네노리가 후대의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직접 말했던 것처럼 '''검술 실력을 올리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갈고 닦는 게 먼저입니다.'''라며 통치자를 위한 맞춤 교육을 할 때[7] . 타다아키는 실전의 최전방에서도 무장으로서 활약할 수 있는 검술을 목표로 '''목도'''[8] 를 미친듯이 휘두르는게 연습이었다. 뭐 심지어 후대의 막말에도 일도류 계열 유파의 훈련 강도는, 훈련 강도가 가장 강한 실전의 검술 유파로 여겨지니 전국 시대 당시, 그것도 유파의 레전드 밑에서는 어지간했었을 듯.
이 동안의 오노 타다아키의 교육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로는, 일도류의 힘든 교육을 받던 히데타다가 어느 날에는 교육을 받다가 타다아키에게 '''우린 수련이랍시고 맨날 목도만 휘두르는데 우리는 다른 애들처럼 오의 같은 거 없음?'''이라고 궁금해하자, 타다아키는 히데타다에게 '''오의라고 해도, 우리는 다른 유파와는 다르게 실제로 사람을 죽여서 체득하는 전쟁터의 검이므로, 특별히 오의 같은 건 없습니다.'''라고 쏘아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사나다 마사유키의 유인에 빠져서 우에다 성 전투에 참전하게 된다. 사실 자칫 했으면 전국시대 최대의 판단미스로 여겨질 뻔한 전투였고 자세한 전투의 의의와 경과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참조. 어쨌든 오노 타다아키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으로 직속 가신인지라 도쿠가와 히데타다 밑에서 이 전투에 참전하였고 이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우에다 칠본창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전승으로는 우에다 성에서 돌격해온 적장 요리타 효부를 베었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도 아군 무장 하나와 누가 요리타 효부를 먼저 베었는지 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 아군 무장은 적장이 투구는 없이 붉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고 말했고, 오노 타다아키는 적장이 걍 투구만 썼다고 말해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아 오노 타다아키가 먼저 베어서 피가 나서 마치 붉은 가면 처럼 보였구나! "하고 오노 타다아키가 포상을 받았다.'라는 전승이 전해진다. 뭐 여기까진 좋은데, 문제는 공을 세우고서 군령을 위반하여 처벌당한다. 사실 평시에도 그렇지만 전쟁 도중 군령 위반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중죄였기 때문에 이 군령위반으로 문책당하여 처벌로서 폐문(閉門)이 내려져 사나다 노부유키의 감시 하에 고즈케 국에서 유폐당한다. 이것이 오노 타다이키의 생전 첫 번째 폐문 처분.
그러나 정말로 뛰어난 검호는 설령 폐문 처분을 당해도 그 실력을 인정받는 법
이에야스의 둘째 아들인 유키 히데야스가 유폐당한 오노 타다아키의 재능을 아쉬워하여 이에야스에게 간청하였고, 이에 오노타다아키도 용서받아 다시 무장 및 무네노리와 함께 히데타다의 검술사범으로 복귀하게 된다.. 사실 좀 대단한 것이 보통 폐문을 한 번 당할 경우 대다이묘 아니고서는 쉽게 용서받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아예 개역까지 당하고 영지를 몰수 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이렇게 유폐가 가벼운 처벌인 것처럼 끝난 건 오노 타다아키가 실력이 정말 뛰어났으며 그 명성이 이미 천하에 퍼진 수준이라 폐문 처분을 해도 자칫하면 다른 라이벌 가문에 빼앗긴다던가 해서 인재도 빼앗기고, 도쿠가와 가문의 체면까지 엉망으로 구겨질 수도 있으니 타다아키를 폐문 처분 상태로 두고서 안 쓸 수가 없었던 정도였다는 얘기.
그렇게 폐문에서 복귀한 이후에는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후계자로 명확히 낙점되며 지금까지 수고했던 오노 타다아키에 대한 포상 등의 의미로 400석이 가증되어 600석이 되지만, 반면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서군의 배후에서 야마토의 호족들을 포섭하여 서군을 위협하여 그 포상으로 2천 석이 내려졌고, 1601년에는 '''칩거 중인 오노 타다아키를 대신하여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 되어 1천 석이 가증된다.''' 즉 엇비슷했던 두 사람의 영지 격차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한 명은 공을 세우고, 한 명은 유폐당하면서 순식간에 5배가 된다.
그리고 1605년 에도 막부 성립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쇼군으로 정식으로 취임한다. 정식으로 쇼군이 된 히데타다 곁에서도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은 계속되는데.. 일화 중 하나로는 어느 날 쇼군이 된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근습들과 무장들에게 자신의 검술 이론, 아마도 타다아키의 라이벌인 야규 무네노리의 영향을 받은 걸로 추측되는 이론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오노 타다아키가 이를 옆에서 못마땅하게 듣고 있다가,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타다아키 공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묻자, 타다아키는 그대로 면전에서 '''검술은 전쟁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수라장을 겪으며 전장에서 수련하는 것이옵니다. 우에사마께서는 입으로만 검술을 하고 계시니 마치 다다미에서 수영을 하는 꼴이시옵니다.'''라며 쇼군과 근습, 제장들의 눈 앞에서 쇼군에게 디스를 한다. 히데타다는 뭐 분노했겠지만 이 일은 그냥 묻어두고 넘어간다.
그러나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은 다시 계속되는데, 전국시대 ~ 에도 시대의 검호들의 대우는 입신출세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넓은 길이 검호였다. 특히 도쿠가와 막부에서는 이에야스부터가 검술에 지극히 관심이 많았으며 야규 무네요시, 이토 잇토사이, 마츠오카 노리타카 등을 직접 초빙해서 검술을 배우고 심지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최대 몇 백 석의 영지까지 수여하고, 오노 타다아키와 야규 무네노리같은 실력있는 검호들을 무장으로서 등용하며 많은 보상을 해주는등.. 그러다보니 에도에는 전국의 실력있는 무예가들이 출세를 위해 모두 에도로 모여서[9] 각기 자신의 이름과 유파의 간판을 내걸고 승부를 벌이고, 도장을 차리는 등 그야말로 당대 일본 최고의 무예가들의 집합소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에도에서 운영을 하던 도장 중 자신을 '''천하제일의 검술가, 진검 승부만 받아들이며 목숨을 내건 각오가 있는자만 도전하라!'''고 자칭하며 실전 검술을 표방하며 명성을 얻던 도장 or 무예가[10] 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오노 타다아키가 이를 보고서 격분! 진짜 실전이라면 목숨걸고 나랑 붙어보자! 하면서 도장깨기를 들어간다.
상대방도 어지간히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검호니 에도까지 와서 저런 무례한 표어를 붙였을테고, 또 출세를 위해서 에도에 온 것인데 최대어인 오노 타다아키가 걸렸으니. 이기기만하면 막부에 등용은 물론이오 바로 천하에 오노 타다아키를 누른 검호로 명성이 퍼질테니까 당연히 승낙!. 상대와 오노 타다아키는 서로 목도를 들고 진검 승부를 벌인다.[11] 당대의 레전드의 대전에 에도의 수많은 사람들이 집결하여 그 승부를 지켜보는 가운데, 승부는 간단하게 오노 타다아키가 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였..으나. 문제는 오노 타다아키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였으니까 목숨을 걸어야지? 하면서 상대방의 정수리를 목도로 두드려 까기 시작. 에도의 무사들과 시민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저항할 수 없는 상대방의 머리를 신나게 두드려 팬 끝에 상대방 검호는 사망하고 오노 타다아키는 당연히도 이로서 다시 근신으로 폐문 처분.[12] 또 다시 유폐당한다. 이것으로 오노 타다아키의 2차 폐문.
그러나 이번에도 어찌저찌 다시 유폐에서 풀려나게 된다.
일화에 따르면 당시 에도 외곽에서 도적 떼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그 중 에도 외곽의 논과 밭을 서리하던 도적들이 있어서 농민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농민들이 이를 에도의 치안관 or 오바타 카케노리[13] 에게 보고하자 토벌대가 결성되었고, 폐문 처분으로 반백수 상태에 있던 오노 타다아키도 칼 한자루를 들고서 직접 토벌에 참전 or 혹은 오바타 카게노리가 놀고 있던 오노 타다아키를 데리고 가서 토벌에 참전했다고 한다. 오노 타다아키는 토벌대의 선두에서 자기 이름을 대면서 도적떼를 학살하러 뛰쳐나가는데, 이를 보고서 도적 떼들이 '''오노 타다아키다!'''하고서 혼비백산해서 도망치자, 오노 타다아키는 도망치는 도적 떼를 잡아 죽이려고 뛰어나가다가 도적들이 먹고버린 참외껍질을 밟고 미끄러졌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넘어지면서도 진검을 던져서 도적의 등에 꽂아서 죽이는 신기를 발휘했다고 하며. 이를 오바타 카게노리가 도쿠가와 막부에 보고하자 아 그놈이 인물은 인물이구나. 하고서 폐문 처분에서 용서받고 무사로 다시 복귀했다고 한다.
다른 버젼으로는 좀 멋지게 도적과 1:1을 해서 팔을 날리고, 목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으나, 뭐 어쨌든 애초에 이번 폐문 처분은 사실 목숨을 내건 승부에서 목숨을 빼았았던 것에 대한 댓가로는 좀 과한감이 있었고, 무엇보다 도쿠가와 막부 측에서 전국시대를 종결하는 큰 대전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실력있는 무사를 놀리기 아까웠던듯. 어쨌든 이번 폐문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복귀한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에서 도요토미를 아예 끝내려는 최종전. 전국시대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전투인 오사카의 전투가 벌어진다. 오노 타다아키는 쇼군인 히데타다의 스승으로서 당연히 곁에서 참전.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 역시 이 전투에 참전한다. 무네노리는 히데타다를 향해 쇄도하는 유키무라-카츠나가 측의 무사 7명을 베는 신기를 보이며 큰 공을 세웠고, 오노 타다아키 역시 도요토미 측의 이름있는 무사들을 베어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해지나..
그러나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이 또 다시 계속되는데.... 오사카의 역에서 함께 종군하던 다른 동맹 가문의 한 무장과 또 시비가 붙어서 상대와 또 다시 목숨을 걸고서 진검승부를 하게되었고, 오노 타다아키는 역시 이번에도 목도를 들고 상대방 무장과 붙는다. 승부는 이번에도 간단하게 오노 타다아키가 빠르게 상대방을 제압하였..으나. 문제는 오노 타다아키가 목숨을 걸고 승부를 하였으니까 이건 감수해야지? 하면서 상대의 양 팔을 미친듯이 목도로 두드려까기 시작.. 상대의 양 팔을 못쓰는 불구로 만들어버린다.[14] 사실 팔만 불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저번보다 많이 발전하긴 했지만.. 천하의 향방을 가르는 전투에서 동맹의 맹주 군의 무장의 신분으로, 동맹군에게 그 짓을 했으니.. 쇼군 히데타다의 분노를 크게 사서 무려 쇼군에게서 직접 폐문사과(閉門思過)를 명받는다. 이것이 오노 타다아키의 3번째. 그리고 마지막 폐문처분.
특히나 이번 폐문은 상대가 다른 가문의 무사라 도쿠가와 가문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는점, 워낙 중요한 상황에서 저질러진점, 도쿠가와 막부의 적이었던 도요토미도 멸망하면서 이제 전쟁이 끝나 오노 타다아키와 같은 실력자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아졌다는 점에서 이번 폐문 처분을 취소하거나, 용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이것으로 오노 타다아키는 강제 은퇴하고 삼남인 타다츠네(忠常)가 쇼군의 검술사범 직을 잇게 된다.
뭐 그렇다고 오노 타다아키의 기행들이 완전히 끝난건 아니고, 폐문 처벌의 내용들은 정확히 직위 해제, 다른 가문에서 벼슬을 살아도 안됨(방해할거임), 경우에 따라 사는 지역에서 벗어나면 안됨. 정도라 에도에서 도장을 운영하고 검술을 가르치면서 종종 히데타다나 이에미츠 등 쇼군에게도 불려간듯 하다.
특히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와의 관련된 이 시기의 일화들이 상당 수 남아 있는데. 첫 번째는 야규 무네노리가 장남 야규 미츠요시, 즉 야규 쥬베에의 교육을 걱정하자. 이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는게 최고라며 죄인들을 베게 시키라고 무네노리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게 조언처럼 보이지만 알고보면 야규 무네노리를 상대로 진짜 신랄하게 고도의 디스를 한셈인데.
즉, 니네는 사람을 베어 본적도 없는 검술 아니냐[15] , 니네 실력은 실전을 하는 우리에 비해 엄청 떨어지니까 실전은 죽어도 무리고, 걍 무저항의 죄인이라도 묶어놓고서 망나니 질이라도 해서 실력을 기르지 그래? 라는 엄청난 디스를 한셈.
이에 야규 무네노리의 반응은 "음... 그거 좋군" 하고서 당연히 그 말을 따르지는 않았다고 하며. 이게 일도류에서 전해지는 일화긴 한데, 오노 타다이키는 덕천실기 같은 에도 막부의 공식 역사 기록에 동료들과 자주 언쟁을 하고 다툼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라. 사실일 가능성도 높다.
두 번째 일화로는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아직 어릴 때, 오노 타다아키가 검술 조언을 한답시고 이에미츠에게 '''검술 실력을 늘리려면 진짜 사람을 베어야 합니다.''' 라며 실력을 늘리기 위해서는 츠지기리라도 하라고 조언. 이에미츠는 이 말을 듣고서 몰래 마을로 잠행하여 츠치기리를 하려고 하였으나[16] 이를 야규 무네노리가 무도토리로 막아내고서 이에미츠에게 쇼군이 익혀야할 검술과 천하치국의 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세 번째 일화는, 어느 날 오노 타다아키가 야규 무네노리의 도장에 쳐들어가서. 수제자를 박살내고, 이에 무네노리가 자기 아들인 야규 주베에를 보고서 타다아키와 승부하라고 하였으나, 쥬베에는 타다아키 공의 실력은 물에 뜬 달과 같습니다. 저로서는 잡을 수 없습니다. 라며 버로우하고, 이에 타다아키가 수제자들 보고 다 한번에 덤비라고 해서 이겼다! → 이에 야규 주베에가 감복하여 그날 밤 오노 타다아키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일화도 있으나, 다른 기록은 하나도 없이 일도류에서만 전해지는 일화고, 무네노리의 성격에도 전혀 맞지 않는데다가, 아니 그냥 상식적으로도 아예 말이 안되는 수준의 일화에. 무네노리의 장남인 야규 쥬베에의 나이가 16살이라고만 쳐도, 오노 타다아키는 55살에 사망하기 몇 해 전이니.. 그냥 일도류에서 만든 자기 미화의 일화인듯하며, 특히 저 물에 뜬 달과 같다는 수월이라는 표현역시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의 1장에서 등장하는 내용인데 병법가전서는 야규 무네노리가 사망하기 직전 제자인 다이묘 나베시마 모토시게에게 선사한 물건이다. 즉 병법가전서가 널리 퍼진 시기를 생각하면 에도 시대 중반 이후에 흥한 일도류 측에서 슬슬 몰락해가는 야규 류를 모욕하기 위해 만든 일화인듯.
그렇게 살다가 1628년 60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묘는 시모사노쿠미의 영흥사에 안장되었으며, 현재 위치는 치바의 나리타시. 나리타 고교의 뒷산에 안장되어 있다. 한글로 된 치바 관광 홍보 홈페이지에서 소개될 정도로 나름 관광 상품으로도 쓰이는듯.
가문의 최종 석고는 600석 +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 1천석 이하 배신들에게 일괄 200석 가증이 있었고 이를 후계자인 삼남 타다츠네가 받았기에 800석.
최종적으로 '''오만한 성격에 불손하고 예의가 없었다고 전해지며. 도쿠가와 막부 내에서도 주변의 제장들과 자주 다툼을 벌였다고 전해지나, 실력 하나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그야말로 전국시대를 실력 하나만 가지고서 자기 멋대로 살다간 시대의 풍운아.'''
4. 제자 및 유파
일단 직계 제자로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
그리고 아들인 타다사네가 가르쳤지만, 오노 타다아키도 묻지마 칼부림을 하라는 교훈을 남겨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
그리고 장남은 일찌감치 먼저 죽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타다나리(忠也)에게는 일도류(一刀流)를 전수하고 후사가 없었던 이토 잇토사이의 양자로 입적시켜 일도류의 종가로서 대를 잇게 하고 삼남 타다츠네(忠常)에겐 쇼군 가의 검술 사범역을 물려준다. 이로서 일도류는 분화되어 타다나리의 일도류는 이토파 일도류(伊藤派一刀流), 타다츠네의 일도류는 오노파 일도류(小野派一刀流)로 불린다.
일도류는 이후 강도 높은 훈련 + 실전 검술 지향 검술 덕분에 크게 융성하여 수 많은 분파를 탄생시켰고, 라이벌 야규 무네노리의 야규 류는 에도 시대 후기가 되면서 오히려 크게 쇠퇴하고 심지어 에도의 야규류는 아예 망했는데. 일도류는 오히려 엄청나게 흥하여 수 많은 분파를 만들어내며 전국 최대의 유파가 된다.
그 분파 중 하나가 나카니시파 일도류(中西波一刀流). 오노파 일도류 4대 당주 오노 타다이치(小野忠一)의 수제자였던 나카니시 츄타 사네사다(中西忠太子定)가 만들어낸 분파로. 본인은 나카니시파가 아닌 오노파를 자칭하였고 심지어 쇼와 시대까지도 그러하나, 현대에 구분을 위해 나카니시 파로 명명되었다. 어쨌든 당시 일도류에서 사용하던 목도는 굉장히 위험한 물건이었고, 실제로 오노 타다아키도 그걸 잘 증명했지만.. 나카니시 타네사다는 이러한 목도 대련이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고민하다가 야규 류로부터 죽도와 호구 아이디어를 도입. 현대 검도에서 사용하는 죽도와 호구의 원형을 만들고, 위험한 목도 검술 대신 죽도 검술을 위주로 교육시킨다.
그리고 현대 검도의 원형을 만든 유파인 북진일도류 역시 개조(開祖) 치바 슈사쿠가 수련한 나카니시파 일도류와 치바가 가전무술 북진몽상류(北辰夢想流)를 통합하여 창시한 유파이다.
즉 실력면에서도 당대 최강 수준이었고, 유파적인 측면에서는 현대 검도까지 이어지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검마.
아이러니하게도 오노 타다아키 이후의 일도류 계열은 두꺼운 보호용 장갑이나 현대적인 죽도와 호구 등을 개발하는 등 안전한 수련의 형성[17] 에 노력하였고, 나카니시 사네사다나 치바 슈사쿠는 신분에 무관하게 제자를 받는다거나 교수법에 대한 훈훈한 일화가 여러 개가 있는 등 오노 타다아키 특유의 성질과는 거리가 멀어진 행보를 보인다.
5. 기타
엄청난 개성과 기행의 소유자였지만, 주연이든 조연이든 2차 창작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보니 거의 나오지 않는다. 베가본드에서는 이름만 언급이 되었고, 시구루이에서는 무모증 제자에게 레이피어를 체득하라고 권하는 모습으로 나온 게 전부다. 같은 쇼군가 검술 사범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던 야규 무네노리가 타고난 정치적 능력과 영향력을 기반으로 여기저기서 얼굴 비추는 것과 매우 비교가 된다.
[1] 오노 타다아키 자신은 그저 일도류로 유파를 자칭하였고, 후대의 인물들이 오노파 일도류라고 이름 붙인 것이긴 하다[2] 正木時茂. 센고쿠시대 사토미가의 맹장 마사키 도키시게(正木時茂)의 외손으로 외조부와 성명이 같다. 사토미가 당주 사토미 요시요리(里見義頼)의 차남[3] 이토 잇토사이를 만났다는 말은 동일하나 세부 디테일은 설마다 다르다, 오노 타다아키가 이토 잇토사이를 만나서 무사수행을 떠났다는 말도 있는 등.[4] 이때는 이름이 아직 미코가미 텐젠이었다. 이후 오노 타다아키로 개명한다.[5] 이와 관련하여 에어기어, 천상천하의 작가인 Oh!Great는 천상천하 작중 오노 타다아키가 등장하는 화의 후기 페이지를 빌어 또다른 가설을 제기했다. 본디 고결하고 훌륭한 품성의 소유자로 알려진 미코카미 텐젠(오노 타다아키)이 도쿠가와 가에 사관한 뒤 개차반 품성을 가지게 된 이유가 텐젠 본인의 심경 변화가 아니라는 것. 무려 본성이 개차반이었지만 실전으로 단련된 살인검의 달인이었던 사형 오노 젠키가 결투에서 미코카미 텐젠과 스승 이토 잇토사이까지 모두 참살하고 오노 타다아키로 이름을 바꿔 살아가게 되었다는 설이다(...).[6] 개명 시기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며 이설들이 있다. 히데타다의 검술 사범이 되고나서 충자를 따온것이니 아마도 1593년에 바로 개명한것은 아니었을것이다.[7] 에도 시대 일도류 계열에서는 이러한 야규 가문의 교육을 보고 야규는 걍 권력자들 비위 맞추기나 하는거 아니냐고 비판했었다.[8] 이게 우습게 보이지만 진검을 대체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에 현대의 검도에서 사용하는 목도보다 더 무거운 물건이었고, 무엇보다 '''호구'''가 없던 전국 시대에는 목도에 의한 부상이 속출했다. 기록을 보면 뼈가 부러지고 손목이 나가는건 경부상이고, 머리가 깨지거나 눈알이 빠지는 부상도 종종 있었던 모양, 물론 사람을 죽이는것도 충분히 가능한 물건이었기에 사망자도 많았고 오노 타다아키도 다른 일화들로서 그것들을 입증한다.[9] 심지어 호죠인창술의 인가장까지 받았던 수제자 3명도 야마토의 보장원이 아닌 에도에서 도장을 차렸었다.[10] 전승에 따라 도장이라고도 하고 무예자라고도 한다[11] 사실 목도라도 당시의 목도는 맞으면 사람도 죽는 물건이었기에 목도 대전이라도 사전에 '''목숨을 걸고하면''' 진검 승부로 쳤다. 혹은 오노 타다아키는 부채를 들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이토 잇토사이의 일화와 겹친다.[12] 목숨을 걸었으니 당연히 죽일 수 있는거 아닌가 싶을 수 있는데, 승부 중에 상대를 죽인게 아니라 이미 제압되어 저항의지가 없는 상대를 기어이 죽인게 문제다. 쉽게 말해 관객들 입장에서 승부가 아닌 공개처형으로 받아들여진 것.[13] 도쿠가와의 하타모토, 병학자로 유명하다.[14] 사실 의료 기술이 발달 안한 옛날이라는걸 감안하면 뼈만 꺠져도 평생 불구 신세다.[15] 실제로도 훈련 때 위험하지 않은 죽도를 쓰기도 하고[16] 실제로도 이에미츠는 몰래 신분을 숨기고 잠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보는게 취미였다고 전해진다.[17] 목도와 진검만 휘두른다고 실전검술이라 하기는 어렵다. 잠재력이 높은 문하생이 불구가 되거나 사망하면 유파의 손실이고, 카타 같은 형태의 수련 외에도 수련자의 대련 감각을 키워주는 형태의 수련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