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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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및 가족 관계
에도 막부의 제3대 쇼군. 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오에요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2] 센히메는 그의 큰누이가 되고 스겐인의 어머니인 오이치는 외조모(外祖母), 아자이 나가마사는 외조부, 스겐인의 둘째언니 죠코인은 백모(伯母), 스겐인의 첫째 언니 요도도노에게는 이모다. 이부 누이[3] 는 사다코이며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사다코는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장녀이지만 도요토미 멸망 이후 스겐인의 부탁을 받아 히데타다의 양녀가 되었다. 사다코는 공가(公家)인 쿠죠 가문에 시집 가므로 이에미츠는 쿠죠, 니죠, 천황 가문에는 외숙이 된다.
에도 막부의 쇼군 15명 중에서 아버지의 '적자(첩이 아닌 정실 소생)'인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이에미츠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세 명인데 그나마 '쇼군의 적자'로서 쇼군직을 계승한 유일한 인물이다. 나중에 제도를 정비, 완성하고 이에미츠가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 이에 반발하는 자는 ~" 자신감이 넘친 말이 나온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2. 쇼군이 되기까지
히테타다의 적자이자 장남으로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자가 반드시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룰은 없어 센고쿠 시대에는 다이묘에게 여러 아들이 있으면 그 가운데 우수한 인물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래서 이에미츠는 쇼군이 되기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했다. 어린 시절에는 병약하고 얼굴도 못생긴 데다가 말까지 더듬었다고 하는데 유모(乳母)인 카스가노 츠보네에게 젖먹이일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았다.
기록에는 어머니인 오에요가 차남인 쿠니마츠(도쿠가와 타다나가)를 더 총애해[4]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고 후계자 자리마저 쿠니마츠가 될 뻔했지만, 후계 자리에서 탈락해 폐적될 것을 우려한 카스가노 츠보네가 목숨을 걸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직접 이를 호소한 덕에 이에야스가 '장유유서'의 원칙을 명확히 해 후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도 전한다. 일개 유모가 천하의 오고쇼 이에야스와 독대해서 직소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실은 이에미츠가 이에야스와 카스가노 츠보네사이의 자식이라고 보는 설도 있긴 하다.[5]
이에야스는 이즈음 스루가의 슨푸 성에 거처하며 유학자들에게서 유학을 배우고 있었고, 손자간의 후계자 다툼은 나중에 도쿠가와 집안의 분란과 후환이 될 것을 염려해서 유학의 장유유서의 서열을 정착시키고자 장자인 이에미츠를 후계자로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쇼군에서 물러나 오고쇼가 되어 아들 히데타다와는 2원정치를 하고 있었지만, 큰 정책은 이에야스가 결정하고 있었다.[6]
당시 에도 막부의 가신들은 장남인 타케치요파와 차남인 쿠니마츠파로 갈라져서 후대의 쇼군이 누가되느냐로 분열 상태였다. 카스가노 츠보네와 면담을 가진 뒤, 1611년 10월 24일, 할아버지 이에야스는 에도 성으로 찾아와서 아들인 히데타다가 지켜보는 앞에서 두 손자를 불러 이에미츠가 후계자라는 것을 확실시했다.
기록에 의하면, 타케치요(이에미츠의 아명)에게 이리로 이리로 오라고 상석으로 불러 앞으로 나와 앉으라고 했는데, 쿠니마츠(타다나가의 아명)가 따라 앉으려고 하자 이에야스는 "쿠니는 거기 있거라."라며 하석에 앉게 했다. 또 두 아이에게 과자를 대접하면서, "먼저 타케치요가 먹어라, 쿠니마츠는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이로소 도쿠가와 가문의 후계자는 이에미츠이며 둘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되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에야스는 두 아이의 어머니인 오에요에게 편지를 보내 쿠니마츠만을 편애하는 것을 질책하기도 했다.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에미츠가 후계자로 선택된 것은 아버지 히데타다보다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의중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7]
3. 쇼군으로서
어쨌든 여러 곡절 끝에 1623년 쇼군이 되었지만 아버지 히데타다는 오고쇼(大御所)가 되어 물러앉아 실권을 휘둘렀다. 그러다 1632년 아버지가 죽자 실권을 되찾아 친정을 실시한다. 쇼군으로서의 업적은 주로 막부의 중앙집권을 강화하여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았는데 다이묘의 처자를 에도에 살게 함으로써 다이묘가 1년마다 에도와 영지를 왕래하도록 하는 제도인 산킨코타이(參勤交代,참근교대제)를 실시한 것도 이에미츠의 시대였으며, '무가제법도'를 개정하여 쇼군의 허락 없이는 다이묘 가문끼리의 결혼을 금하는 조항을 만들었다. 또한 천황의 권한과 자유를 대폭 축소하여[8] 막번 체제에 위협이 되는 요소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노력했다.[9] 결국 막부와 쇼군의 위세는 절정에 달해서 말년에 이에미츠는 다이묘들을 불러다 놓고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라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대외적으로는 다이묘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제한하기 위해 쇄국정책을 실시했으며 기독교 탄압을 더 강화했는데 이 때문에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겪기도 했다. 다만 이 시기에 청나라와 조선, 네덜란드와는 교역을 계속 했으며, 특히 조선 통신사를 가장 많이 맞이한 쇼군이 되기도 했다[10] .
이렇듯 에도 시대의 정치체제인 '막번 체제'를 완성하고 정권을 공고히 다진 후 1651년 에도에서 사망했다. 향년 48세. 그의 치세에 도쿠가와 막부의 일본 지배는 굳건히 다져졌기에 일반적으로는 막부의 지배를 안정시킨 명군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지만, 다른 평가로는 '이에미츠 휘하의 유능한 가신들이 다한 일이고 이에미츠는 한 게 없다'는 비판도 있다. 실제로 이에미츠 수하에는 유능한 행정관료들이 많아서 이들이 막부의 안정에 크게 공헌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에미츠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호시나 마사유키다. 하지만 유능한 가신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도 당주의 역량 중 하나이니만큼 쇼군으로서의 능력은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치세는 조선의 인조(1623~1649), 효종(1649~1659) 재위기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가광(源家光: 미나모토노 이에미츠)'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며[11] , 인조 때 조선 통신사를 통해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낸 기록이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그를 '성격이 날카롭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해서 많은 이들이 원망하며 괴로워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가 죽은 후에는 장남 도쿠가와 이에츠나(재임 1651~1680)와 4남 도쿠가와 츠나요시가(재임 1680~1709) 각각 4, 5대 쇼군을 역임했다.
4. 인물됨과 일화
조선의 성종이나 숙종처럼 밤에 몰래 시장통에 나오는 미행을 좋아해서 이와 관련된 일화도 많이 남겼으며 무예와 풍류를 좋아했다고 전해진다.[12] 특히 당대의 유명한 검호인 야규 쥬베이와는 그럭저럭 친밀한 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태로웠던 후계자 자리를 지켜줘서인지 몰라도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대단히 존경하여 때마다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발언을 자주 하고, 유언도 "나는 죽어서도 할아버님을 모시고 싶으니, 닛코(이에야스의 무덤인 '도쇼구'가 있던 곳)에 나를 묻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이에미츠의 무덤은 이에야스의 무덤 근처에 있다. 오죽하면 이에미츠가 쇼군이 된 후 '간밤에 할아버님을 꿈에서 뵈었다'면서 그리게 한 영몽(霊夢)도가 현재에도 여러 점 남아있다.
몸은 대체적으로 병약해서 몸이 아플 때마다 '''이불을 5, 6겹이나 껴 입고 잤다'''고까지 했을 정도. 거기다가 입도 짧아서 카스가노 츠보네가 식사 때 일곱가지 밥을 준비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기가 센 어머니에게 질린 나머지 여성들, 그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여성들을 싫어하게 되어 버려서 미다이도코로였던 정실 타카츠카사 타카코와는 신혼 초부터 거의 별거하다시피 했다. 거기다 남색가여서 유모 카스가노 츠보네와 이모 죠코인이 후계자를 얻기 위해 여성을 소개시켜 이에미츠의 관심을 끌려 했다. 그러다 카스가노 츠보네가 조카인 오후리노카타(お振の方)를 남장시켜 소개해주고, 이게 통했는지 이에미츠는 오후리가 어른이 되자[13] 측실로 들인다. 오후리 사이에서 딸을 낳은 뒤 그렇게 자식들도 보고 여성혐오증도 가라앉게 된다. 정실인 다카코와 다르게 측실들에게 잘해줬고 특히 오만노카타를 가장 총애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들인 직계는 증손에서 전부 요절해서 권력에서 허무하게 끝났다. 매체에서 이에미츠의 딸이 존재하지 않는 거 마냥 묘사되는 것과 다르게 이에미츠의 방계인 오와리 도쿠가와는 현재까지 남아있다.
전국시대에 살아남은 인물인 다테 마사무네, 도도 다카토라, 타치바나 무네시게 등을 존경했으며 그 당시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마사무네에게 당시 지나치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대우를 해줬으며 "나는 날 때부터 쇼군이다!"이라는 말도 마사무네의 조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미츠의 성인 이름을 골라준게 마사무네라고 한다.
5. 대중 매체에서
막부를 번영시킨 명군이라는 위치에 있는 데다가 출생에 얽힌 비화나 쇼군직에 있을 때 남긴 많은 일화들과 맞몰려 지금까지도 일본의 시대극이나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만화나 게임 등 2차 창작물에도 자주 등장한다.
5.1. 드라마
2000년 NHK 드라마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배우: 오노에 쇼로쿠
2004년 후지TV 드라마 《오오쿠 제1장》 배우:니시지마 히데토시
2005년 후지TV 드라마 《오오쿠 제1장 스페셜 부제:桜散る》 배우:니시지마 히데토시
5.2. 만화
요시나가 후미의 대체역사만화 오오쿠에서는 유모 치마폭에 싸인 한심한 어리광쟁이 정도로 묘사된다. 이에미츠가 '''젊은''' 남자만 걸리는 전염병에 걸려 죽자, 카스가노 츠보네는 이에미츠의 사생아 치에를 이에미츠의 손자를 낳는 씨받이로 만든다. 그러나 치에가 낳은 아이는 전부 딸이였고 치에가 쇼군 대리로써 너무 온건하고(...)[14] 유능했기에 가스가노 츠보네가 죽자 치에는 다이묘들에게 진실을 밝히고 정식적으로 여소군 '이에미츠'로서 정책[15] 을 펼친다. 그런데 그뒤로도 아이들[16] 을 낳으며 살지만 요절한다. 진짜 이에미츠 딱히 한 일도 없는 걸로 보이는데 마사카츠는 치에 앞에서 진짜 이에미츠가 쇼군으로 훌륭했다며 닮았다고 말 같지도 않은 칭찬을 하지만, 이에미츠의 실제 업적은 여기서 치에가 다 했다. 진짜 이에미츠의 정실과 친누나들을 포함한 도쿠가와 사람들과 지인들은 치에가 진실을 알렸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시구루이는 시대적으로 이에미츠의 치세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작품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스루가 성 어전시합의 주최자이자 제1화에서 미리 보여준 바와 같이 이후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스루가의 암군 '도쿠가와 타다나가'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이에미츠의 동생 쿠니마츠다. 이에미츠는 타다나가와는 그간에 악연이 있었던 탓인지 할복이라는 형식으로 제거해 버렸지만, 이복동생인 호시나 마사유키를 매우 총애하였고, 그를 중신이면서도 아이즈 번의 다이묘로 발탁하였다.
스마일 프리큐어! 16화에서 문제집과 융합한 아칸베와 큐어 마치와의 퀴즈 대결에서 역사문제로 등장. 그러나 역사에 약한 큐어 마치는 답으로 '''도쿠가와 이에난토카'''[17] 로 대답해 아칸베에게 처절한 응징을 당했다. 뒤늦게 도착한 큐어 뷰티는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같은 문제가 나오자마자 바로 맞춰 역으로 아칸베를 털었다. 한국판에서는 태조 이성계[18] , 북미판에서는 13대 대통령인 밀러드 필모어로 로컬라이징 되었다.
아이돌 마스터 신데렐라 걸즈/애니메이션 9화에서도 미무라 카나코가 맞춘 퀴즈의 정답으로도 나왔다. 프로그램 녹화 전에 카나코가 퀴즈 프로그램 예상문제의 답으로 에도시대 역대 쇼군들의 이름을 외웠는데(한국으로 치면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운 격), 우연히 퀴즈에서 "도쿠가와 막부 3대 쇼군은 누구?"라는 문제가 나왔던 것.
가정교사 히트맨 REBORN!의 등장인물 사와다 이에미츠 이름이 이 인물에게 따왔다.
5.3.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혁신 기준으로 지력 73, 정치 84만 좀 괜찮고 통솔과 무용은 5,60대를 찍는 그저 그런 인남캐. 능력치가 자기 아버지 판박이다. 어차피 군웅집결 아니면 최후반대에 등장하니 볼 일도 얼마 없다.
Fate/Grand Order의 도쿠가와 이에미츠(Fate 시리즈)는 해당 문서 참고.
[1] 풍채를 보면 아버지 히데타다보다는 할아버지 이에야스를 더 닮았다.[2] 사실 이에미츠 이전에 히데타다와 시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나가마루)이 하나 있었는데 2살때 요절했다.[3] 이복 누이라면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다른 여자에게서 얻은 딸이라는 뜻이 되므로 옳지 않은 표현이고, 오고우가 전 남편에게서 얻은 딸이므로 이부 누이라고 해야 바른 표현이다.[4] 오에요가 차남을 편애한 것은 남편인 히데타다와 오후쿠(카스가노 츠보네) 사이를 의심해서, 그 질투로 오후쿠가 기르다시피한 장남 이에미츠까지 싫어했다는 썰이 있다.[5] 이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에요가 이에미츠를 미워한 것 역시 이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기에는 너무 편애가 심했기 때문.[6] 사실 이에야스는 쇼군직을 단 2년만 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거머쥔 천하를, 단 2년만 해먹고 은퇴하려겠는가.[7] 물론 히데타다 또한 이에야스 사후에도 후계자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소극적으로라도 찬성했던 것으로 보인다.[8] 이를 규정한 성문법이 금중병공가제법도인데 내용이 참 걸작이다. 대표적으로 "천자(천황)는 여러 업무 중에서도 학문이 제일이라(즉 정치는 꿈꾸지 말고 학문이나 하란 뜻)." "섭관(섭정 및 관백)가 출신이라 하더라도 무능한 자는 섭관에 임명되어선 안 된다. 하물며 그 외의 자야 오죽하랴."[9] 실상은 오고쇼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천황 권한이나 무가제법도 제정도 로쥬와 상의하여 처리한 것이다. 반포만 쇼군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10] 보통 통신사는 쇼군이 새로 취임할 때 파견되지만 그것은 6차 통신사인 1655년부터의 일이고, 그 이전까지는 쇼군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한다거나 태평성대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것을 축하한다는 등 갖가지 명목으로 보내졌다. 이에 이에미츠는 1624년(3차), 1636년(4차), 1643년(5차) 통신사를 맞았으며, 1636년에는 '통신사를 두 번 맞이하다니 이건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못 하셨던 일이다' 라며 기뻐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1] 도쿠가와 씨는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칭했는데 그 영향으로 보인다. 현대 일본에서는 '성씨'라고 하면 묘지(名字)밖에 없지만, 전근대에는 이미 고대부터 시행된 우지카바네(氏姓) 제도에 의해서 우지(氏)와 묘지, 두 가지의 성씨가 따로 있었다. 즉 도쿠가와(마츠다이라) 가문의 경우, 우지는 미나모토(源), 묘지는 도쿠가와(마츠다이라)였던 것. 다만 천황에게라던지 하는 공식적인 자료나 장소에서는 우지를 쓴다. 애초에 우지카바네 제도가 시행될 때 우지는 천황이 내려주는 것이었기 때문. 즉 에도 시대 쇼군들은 바쿠후에서는 도쿠가와라는 성을 가진 다이묘들의 우두머리, 조정에서는 미나모토라는 성을 가지며 천황에게서 임명받은 쇼군 직을 맡고 있는 신하가 되는 것이다. 도쿠가와가 미나모토 씨를 자칭했던 것은, (실은 거짓이지만) 관례상 미나모토 씨만이 쇼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12] 인물상은 조선의 성종과 닮은 점이 많다. 자신의 치세가 자기가 다스린 나라의 안정기였다는 것도 그렇고, 많은 일화를 남긴 것도 그렇고, 주변에 유능한 신하들이 보좌를 했다는 점 등... 특히 '여자'들과 얽힌 이야기가 많다는 것. 기가 센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과 뒷바라지 해 준 여인(성종-정희왕후 윤씨, 이에미츠-카스가노 츠보네)의 덕을 봤다는 것도 공통점. 중국의 황제 중에서는 북송의 인종과도 비슷한 면이 많다[13] 현대 성인인 이십대가 아닌 그 당시 어른으로 대우 받는 십대 초반.[14] 치에가 사형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에츠나(치에 딸) 때 유배 보낸 사람이 있다고 나온다. 나쁜 짓은 전부 카스가노 츠보네나 가신들이 다 하는 걸로 나오는데 정황상 둘한데 보고도 하지 않고 묻히는 걸로 보인다.[15] 남자만 죽는 적면창포도 다이묘 가도 피해갈 수가 없어서 여식을 남장해 쇼군에게 인사드리는 판에 가문의 대와 영지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남/녀 가리지 않는 상황이 받아들이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16] 꽤 다산했지만 무사히 성인이 된 아이는 세 명 밖에 되지 않았다[17] 직역하면 도쿠가와 이에뭐시기(...).[18] 사실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도쿠가와 막부 3대째 장군이라는 걸 생각하면 조선 3대째 왕인 태종 이방원이 더 알맞았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