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손

 




烏孫[1]
기원전 3세기~서기 5세기에 걸쳐 존속한 서역의 유목민족. 이들은 고대 인도어로 기마 전사를 뜻하는 Asvin에서 비롯되었다 추정된다.
오손은 본래 스키타이계의 샤카족으로 추정된다. 한서에 나오는 기록에 따르면 외형상 백인종이었다. 후대에 튀르크계 민족과 계속 혼혈되었으며, 오늘날 키르기스인들은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여긴다. 오손의 왕은 이른바 "곤막(昆莫)" 혹은 "곤미(昆彌)"라 불렸다.
본래 톈산 산맥(天山)의 북쪽 기슭을 거점으로 삼았으나 월지의 서진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어 한 차례 멸망당하였다. 그 과정이 명확하지 않은데, 《사기》에서는 오손을 공격해 멸망시킨 주체를 흉노라 기록하였으나, 《한서》에서는 월지였다고 기록하였다.
오손은 멸망 당시에 그 왕이 살해당하고 종족이 뿔뿔이 흩어졌을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오손 왕의 어린 아들이었던 엽교미는 간신히 살아남아 흉노 선우에게 거두어졌다. 장성한 엽교미는 흉노의 지원을 받아 흩어진 종족들을 규합하고 곤막을 칭함으로써 오손 왕국을 부흥시켰다.[2] 부활한 오손은 월지를 다시 한번 서천시켰을 뿐 아니라 흉노로부터 독립하여 그들의 침공을 수차례 무찔렀다.
그 후 기원전 177년경에는 흉노의 압박으로 인하여 동부 톈산에서 서북부 톈산으로 이동하고 산간부의 시르다리야 강의 상류 하곡(河谷)의 이리하로 이주하여 활약하였다. 그 왕이 도읍한 곳은 적곡성(赤谷城)이었다고 하는데 후일 국가가 셋으로 분열되었으나 그 둘은 곤막[3]에게 통솔되었다.
기원전 116∼BC 115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 때 장건(張騫)이 이 나라에 사행(使行)한 이래, 한나라 조정과 흉노와의 관계에 개입하면서 양자간의 이득을 취하면서 흉노를 약탈하고 강거를 견제하는 등 10만의 기병을 통솔하는 서역 최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왕위분쟁에 한이 개입하면서 대오손, 소오손으로 국가가 분열되었고 이 과정에서 왕족 비원치는 강거의 지원을 받아 한의 영향을 배재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오손 관련 기록은 사실상 끊어지고 전한 말기에 한이 서역에서 철수하면서 기록이 단절되었다.[4] 그 후 5세기경 다시 기록에 등장했으나 그 세력은 이미 심각하게 쇠약해져 서역의 평범한 국가로 추락했고 다시 200년후 (唐)이 서역에 진출했을 때는 오손민족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극소수의 후예만이 오늘날 천산 일대에 있다고 한다.

[1] 고대 중국어로는 Asvin(아스윈)이라고 발음됨[2] 전설에 따르면 흉노가 오손을 멸망시켰을 당시에 갓난아기였던 엽교미만이 살아남았다. 흉노족들은 엽교미를 들판에 버렸는데, 주변의 까마귀들이 엽교미에게 고기를 물어다 주었고 늑대들은 젖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에 흉노족의 선우가 엽교미를 신령한 존재라고 여기고 그를 거두어 아들처럼 키웠다고 한다.[3] 2대부터는 곤미로 변경[4] 후한때에는 서역에 진출하였으나 오손이 사는 곳까지는 교통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