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거
1. 키르기즈 고원에 위치했던 국가
康居 Kangha, Ka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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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아시아의 인도유럽어족 유목민족들이 세운 시르다리야 강 중류 지역에 건설한 나라. 시르다리야 강 유역에서 발견된 말 뼈에 새겨진 그림을 보면 이들이 사르마트인처럼 중무장하고 싸웠으며, 대게 장두형에 턱이 발달하고 매부리코였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이들은 서진한 튀르크계 민족과 통혼하면서 캉글리, 페체네그족의 기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강거는 페르가나에서 북서쪽으로 2천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이는 유목 국가로 그 풍습이 월지의 풍습과 같다. 병사는 9만 명이며, 나라의 힘이 약해 남쪽의 월지와 동쪽의 흉노에 복속되어 있다. 엄채는 강거에서 북서쪽으로 2천 리 되는 곳에 있다. 이는 유목 국가로 그 풍속이 강거의 풍속과 같으며, 병사의 수가 10만을 넘는다. 근처에 큰 호수가 있으며 호안의 높이는 높지 않다.
페체네그는 ‘캉가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모든 페체네그인을 이렇게 칭하지는 않는다. 세 지역, 즉 야브디이르티, 쿠아르치추르, 하북신길라 출신의 누구보다도 용맹스럽고 고결한 페체네그인만을 이렇게 부른다. 이것이 바로 캉가르라는 별칭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 콘스탄티노스 7세의 기록
2. 후한 말기의 남흉노 선우
후한 말기 남흉노의 제18대 선우. 어부라, 호주천의 아버지이자 거비의 형으로 후한서집해에 따르면 원굉의 한기에는 강심(羌深)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성은 난제(欒提).
178년에 호징 선우가 즉위할 때 우현왕이 되었으며, 179년에 호징 선우가 사흉노중랑장 장수와 반목했다가 장수에게 살해되자 선우가 되었다. 184년에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아들인 우현왕 어부라에게 군사를 이끌게 하여 황건적 진압을 도왔다.
187년에 중산태수였던 장순이 선비족을 이끌면서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여러 군을 공격했는데, 영제가 군사를 일으켜 유주목 유우에게 배속해 토벌하게 하자 좌현왕을 보내 유주로 나가도록 했다.
188년에 흉노에서 끊임없이 한나라를 위해 군사를 동원할 것을 두려워 해 우부의 혜락에서 휴저각호, 백마동 등의 세력과 합세해 10만여 명으로 이뤄진 반란이 일어나 공격을 당해 죽임을 당했다.
3. 후한 말의 인물
康巨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승려.
강거 사람으로 강신(康臣)으로 쓰기도 하지만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며, 고승전이나 출삼장기집 등에서 수록된 지루가참의 열전에 지요, 강맹상 등과 함께 짧게 수록되어 있다.
영제 때부터 헌제 때까지 활동한 인물로 지요, 강맹상 등과 함께 슬기로운 배움이 있다고 이름이 나 낙양까지 알려졌다고 하며,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것에 마음을 두거나 법을 널리 펴는데 뜻을 두었다.
187년에 낙양에 와서 문지옥사경을 번역했는데, 말이 올바르고 이치가 있으면서 꾸미지 않았다고 한다. 번역한 문지옥사경은 현재는 남아있지 않으며, 이 문지옥사경은 주사행이 저술한 한록과 고승전에 잠깐 언급되기 때문에 한 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과 궐본이라는 것 이외에는 책 속에 어떠한 내용을 다루었는지 알 수 없다.
3.1. 관련 사료
- 고승전
- 한글대장경 목록부 개원석교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