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image]
'''이름'''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Margaret of Austria)
'''출생'''
1480년 1월 10일
'''사망'''
1530년 12월 1일 (50세)
브라반트 공국 메헬렌
'''배우자'''
후안 왕세자 (1497년 결혼 / 1497년 사망)
사보이 공작 필리베르토 2세 (1501년 결혼 / 1504년 사망)
'''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
'''어머니'''
부르고뉴 공국 여공작 마리
'''형제'''
펠리페 1세
1. 개요
2. 유년 시절
3. 두 번의 결혼
4. 카를 5세의 후견인


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황녀이자,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세자비, 사보이 공작부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다.

2. 유년 시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국의 여공 마리 드 부르고뉴 사이의 1남 1녀 중 장녀(둘째)로 태어났다. 펠리페 1세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1482년,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낙마 사고로 죽고 새어머니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에게서 자랐다.

3. 두 번의 결혼


그녀는 평생 동안 한 명의 남자와 약혼하고 두 명의 남편과 결혼했으나 모두 비극으로 끝났으며 이후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원래 프랑스 왕세자 샤를 8세[1]와 약혼하였으나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샤를이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를 얻기 위해 브르타뉴의 안[2]과 결혼하면서 걷어차였다.[3]
이후 새언니인 후아나의 오빠이자 오빠 펠리페 1세의 처형이며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대공 후안과 결혼했으나 후안은 얼마 안 가 사망하였다. 후안의 누나이자 포르투갈의 왕비인 이사벨 왕비 또한 사망하여 이후 통합 스페인 왕국의 왕위는 이사벨라와 후안의 여동생인 후아나 공주(일명 광녀 후아나)에게 가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보이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결혼하였으나 사보이 공작 역시 결혼한 지 3년만에 사망하였다.

4. 카를 5세의 후견인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그녀의 새언니인 후아나 왕녀가 즉위하게 되면서 그녀의 오빠인 필리프 대공 또한 통합 스페인 왕국으로 떠난다. 이때 후아나 왕녀의 광증 때문에 세 자녀들인 엘레오노레, 카를, 이사벨라는 여동생인 마르가레테에게 맡긴다. 그동안 재혼하지 않고 있던 마르가레테는 세 조카들을 성심껏 키웠는데, 그 중에서도 훗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될 카를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였다. 카를에게 직접 읽기, 쓰기, 역사, 통치학, 종교, 언어를 가르쳤으며, 당대의 대석학인 에라스무스와 아드리안 주교 등을 가정교사로 들여 카를이 착실하게 제왕학 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녀의 오빠인 필리프가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 사망하면서 그의 장남인 카를이 작위를 승계해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이 된다. 그러나 당시 6세에 불과했기에 섭정이 필요했는데, 부르고뉴 의회에서는 어린 군주의 고모인 마르가레테를 섭정으로 선출한다.
카를이 15세가 되자 마르가레테는 섭정을 거두었지만, 2년 후 통합 스페인 왕국의 공동 국왕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면서 카를이 통합 스페인 왕국의 공동 국왕[4]이 되기 위해 떠나게 되자[5] 그녀가 부르고뉴 공국의 대리 통치자, 총독이 된다.
이후에도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데에 큰 공헌을 한다. 카를 5세가 타고난 다이아수저로 유럽의 이런저런 땅들을 모두 집어삼키자 선제후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수아 1세를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밀었는데, 이때 마르가레테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거래하던 거부 푸거 가와 벨저 가에게 85만 두카트를 빌려 선제후들에게 뇌물로 뿌림으로써(...) 그녀의 조카인 카를 5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다. 이후 푸거 가는 대가로 은광산 채굴권을 받았다고.
[1] 그의 아버지인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부르고뉴 공국을 꿀꺽하기 위해 마르가레테의 어머니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여공인 마리 드 부르고뉴를 협박해 그와 강제로 결혼시키려 했다. 실패했지만...[2] 막시밀리안 1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마르가레테의 새어머니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막시밀리안과 안의 결혼은 무효화되었다.[3] 정확히 말하면 섭정이었던 누나 안 드 프랑스의 의중이 반영되었을 것이다.[4] 명목상 어머니 후아나 여왕과 공동 국왕이었지만 후아나 여왕은 광증이 있어 사실상 카를이 통합 스페인 왕국의 유일한 국왕이었다.[5]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는 완전히 이방인인 카를보다 그의 남동생으로 통합 스페인 왕국에서 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왕자를 더 선호했지만, 마르가레테가 친정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빽을 십분 활용하여 기어이 카를을 국왕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장남인 카를에게 카스티야가 상속되고 차남인 페르디난트에게 아라곤이 상속될 경우 분할상속 염려가 있어 페르난도 2세가 왕위계승서열 1순위인 카를에게 몰아줬다는 얘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