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나(카스티야)
1. 개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차녀. 카를 5세(카를로스 1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어머니이며, 카탈리나의 둘째 언니이자 헨리 8세의 처형.
2. 외모
어머니인 이사벨 1세가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진 미인이었다고 하고, 초상화도 그렇게 묘사되어 있다. 딸들인 후아나[1] 나 막내 딸인 헨리 8세의 첫 번째 왕비 카타리나 역시 미인형이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2]
3. 생애
3.1. 어린 시절
원래는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차녀로 계승권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빠 후안이 일찍 죽고 언니 이사벨이 사망하면서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하자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매우 지적이고 잘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그리스와 라틴 고전, 법학, 신학, 역사학, 수학, 어학, 음악 등 폭넓은 학문을 익혔으며 그 외에 상류층으로서의 교양과 사교술, 승마술 등도 빠짐없이 배웠다. 그러나 유년기의 후아나는 매우 반항적인 소녀였기에 부모에게서 모진 체벌을 받기 일쑤였으며 어떤 날은 밧줄에 묶여 하루종일 서있던 적도 있었다. 또 가톨릭 부부왕 칭호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부모와 달리 종교적으로 회의주의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했다.
오빠와 언니가 죽고 후아나가 후계자가 되자 모후인 이사벨은 본인 사후 카스티야의 왕권은 후아나에게 귀속되며 아버지 페르난도는 이에 개입할 수 없다고 못박아 두었다. 그러나 후아나의 통치에 대해 무척이나 걱정한 이사벨은 자신의 유언장에 '''만약 후아나가 스스로 통치할 의지가 없을 경우 후아나의 아들(훗날의 카를 5세)이 성년이 되기 전까지 페르난도의 섭정을 허가한다'''는 조항을 남겨두었는데 이 조항이 훗날 후아나의 비극의 씨앗이 된다.
3.2. 결혼
1495년 16살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아들이자 '잘생긴'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외모가 뛰어났던 필리프와 결혼한다.[3] 이때 후아나의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4] 후안은 필리프의 여동생인 마르가리타와 결혼을 한다. 아라곤 쪽의 두 남매는 모두 서로의 배우자인 오스트리아의 남매에게 미친듯이 빠져들게 된다.[5] 하지만 남편인 필리프는 후아나의 애정을 부담스러워하며 이리저리 바람을 피우고 다니고, 후아나는 더더욱 그런 남편을 잡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6] 부부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고, 모후 이사벨이 사망할 당시에 그들은 별거 중이었다.[7] 필리프는 아내가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가 되자 후아나의 왕권을 탐낸다는 소문이 돌았고 저지대에서의 결혼생활 중에서도 후아나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그녀를 감금했다거나 학대했다는 소문이 도는 둥 스페인에서도 평판이 극히 좋지 않았다. 후아나가 25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 이사벨 여왕이 사망했고 위의 다른 형제가 모두 사망하여 후아나가 카스티야의 왕위를 계승한다. 나중에는 남편인 필리프 역시 공동으로 카스티야의 왕이 된다.
3.3. 남편의 죽음
하지만 남편 필리프가 1506년 장티푸스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고 후아나는 너무 슬퍼서 정신줄을 놓아버리게 되었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아이인 카타리나를 임신 중이었는데, 이 딸은 이후 후아나가 유폐될 때 함께 유폐되어 어린 시절을 갇혀서 보내게 된다. 유폐된 이후 막내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시누이이자 새언니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마르게리타에게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마르게리타는 그동안 2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살아남은 자녀 없이 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끝나게 되는데 본인은 더이상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홀로 네덜란드를 통치하며 지냈다.[8]
이런 일이 일어난 건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왕이 부부 사이였던 것일 뿐, 통치권도 각각 갖고 있었기에 레콩키스타의 완수와 별개로 두 나라는 하나가 아니라서 각각 다른 법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카스티야 왕국과 달리, 아라곤 왕국은 원칙적으로 여성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9] 이사벨 1세가 페르난도 2세의 아내로서 일단 공동 통치자 명분으로 아라곤의 여왕 지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사벨의 후계자인 후아나도 일단은 아라곤의 여왕이란 직책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딸인 후아나가 결혼한 이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명분으로 카스티야의 섭정이 되는 한편, 재혼해서 후계자가 될 아들을 생산해 그로 하여금 아라곤의 왕통을 유지하려 했다. 즉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흡수하는 형식으로 통일을 이룰 속셈이었다.
[image]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로, 부르고뉴의 필리프 공작. 후아나 여왕의 남편으로서는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이에 후아나의 남편인 필리프는 분개하여 반발했고, 여왕의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원래 자신의 영지인 저지대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던 중 배가 표류하여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볼모로 잡히는 등 소란을 빚는다. 이렇게 국내 상황이 내전 직전으로 돌아가자 카스티야 의회인 코르테스는 논의 끝에 후아나를 합법적인 카스티야와 레온의 여왕으로, 그 남편 필리프를 카스티야의 왕[10] 펠리페 1세로 인정하며 카스티야의 실권을 후아나와 펠리페 1세에게 양도했다. 필리프나 페르난도나 카스티야에서 인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필리프는 정당한 여왕의 남편이었고 카스티야 의회에서는 아라곤이 카스티야를 압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필리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와 별개로 아라곤의 코르테스도 후아나를 적법한 아라곤의 후계자로 선언하면서 자신들의 군주 페르난도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지 단 두 달 만에 병으로 급사해버리고 말았다.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이 유력하지만 일설엔 장인인 페르난도가 독살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는 '미남공'이라 불릴 정도로 워낙 훤칠하게 생긴 데다 바람기까지 있는 탓에 후아나가 즉위하고도 부부는 오래 붙어있지 못했지만, 후아나는 그런 남편을 끝까지 사랑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큰 상심에 잠겨 더욱 정신적으로 불안해졌으며, 남은 40년 여생을 홀몸으로 살았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기행 때문에 그녀는 미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 Juana la Loca)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기행으로는 남편이 죽은 후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잠시간 지연시킨 일이 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남편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죽은 남편의 시체를 담은 관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거나, 매장을 지연시켜 놓고 매일 관 뚜껑을 열고 시신에 입을 맞춘다는 등의 루머가 돌았다. 이때 후아나는 막내딸 카탈리나를 임신한 터라, 이를 우려한 신하들과 주변 사람들이 시신에 접근하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3.4. 유폐된 여왕
페르난도 2세는 사위 펠리페 1세가 죽자 딸 후아나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스페인 1인 통치에 들어가 더욱 의욕적으로 대외 팽창에 나선다. 그는 이미 1504년 프랑스와 각축을 벌여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했고, 1512년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남을 차지했다. 신대륙 정복에도 한창 가속도가 붙어 쿠바를 비롯한 중아메리카 동부 해안이 스페인 수중에 떨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통치를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나폴리에서 귀국 직후 딸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그러니까 카를의 여동생이자 페르난도의 외손녀-과 같이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고 카스티야 섭정직에 올랐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권력을 분점하지 못하게 유폐했다는 설과 그녀를 노리는 정적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설이 있다.
그 와중에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후 후아나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비록 후아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긴 했어도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가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었던만큼 그녀와 결혼하면 카스티야의 영토를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 어마어마한 양의 지참금은 덤. 그러나 이 결혼을 추진하려고 한 지 채 1년도 안되어 헨리 7세 역시 세상을 떠나버리고, 오로지 자기 남편 펠리페 1세 바라기이기만 한 후아나가 이 결혼을 받아들였을 확률도 거의 0%였을 듯. 게다가 헨리 7세는 후아나의 아버지 페르난도 2세와 아라곤의 캐서린의 지참금 문제로 알력다툼을 벌였던 전력이 있고, 자신의 사위와 카스티야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안달이 났던 페르난도 2세가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난도 2세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 1세가 사망한 이후 거의 바로 자식보다도 어린 프랑스 왕실 혈통의 저메인(Germaine)을 왕비로 들였는데[11]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이 없자, 후아나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아라곤 왕위에 대한 건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그는 사위인 펠리페 1세를 정말로 싫어했고, 그 싫어하는 사위의 영지인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맏손자 카를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었지만 이럴 경우 아라곤은 페르디난트에게, 카스티야는 카를에게 분할상속될뿐더러 또 다른 내전을 부를 여지가 있었기에 카를 5세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페르난도 2세 사후, 결국 카를은 어머니 후아나와 공통 통치자 형태로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이었고, 그 아들인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에 이르러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 연합왕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는 어머니를 유폐당한 상태 그대로 놔둬서, 그녀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공식 직함 대부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에, 카를 5세는 그녀 생전엔 어머니의 공통 통치자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카를로스 1세는 통치 초기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는 바람에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1520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후아나가 유폐되어 있는 장소, 토르데시야스를 점령하고 후아나에게 완전한 통치권을 넘긴다는 문서를 들이밀고 실권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아나는 국정을 이끌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아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12] 특히 후아나의 자식들은 막내 카탈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기에 정이 없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찾지도 않아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그나마 죽었을 때 카를 5세가 장례를 치뤄주었으니 다행.
3.5. 의문
그녀가 정말 미쳤는지 아니만 단순히 주변 사람들의 권력 싸움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인지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 어머니인 이사벨의 외가 쪽 가계에 정신이 미약한 사람이 많았는데 유전적인 영향을 뺄 수는 없고 그렇다고 광적인 미침보다는 우울증 쪽에 가까운 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현역 역사학자 중 후아나에 대해 가장 권위자라 할수 있는 Bethany Aram의 저서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우울증으로 보이는 증상이 있었던건 맞지만, 원래 '미쳤다' 운운할만큼 정신병이 심했던 건 아닌데 오히려 정치적으로 기나긴 유폐생활을 겪으면서 진짜 그만큼 정신건강이 악화되버린 게(...) 유력하다고 한다. 실제로 후아나는 자신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후계자가 되자 저지대에서 스페인으로 귀국하여 충성 맹세를 받는 정치적 행동을 보여주었고, 1506년에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도 남편에게 전권을 일임하지 않고 함께 통치권을 행사했다. 또 남편인 펠리페가 죽은 이후에도 약 1년 간 스스로 국정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에 심한 기근과 역병이 돌아 여왕이 민심을 잃었고, 이에 재빠르게 페르난도가 개입하여 강제로 카스티야의 통치권을 빼앗은데다 2년 뒤에는 아예 회담을 갖자며 토르데시야스 궁전에 유인한 뒤에 유폐한 것인데 후아나가 미쳤다는 언급은 유폐된 지 수 년이 지난 이후부터 나온다. 이를 보면 후아나가 미쳤다는 것은 정황상 지극히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에 가까워 보인다. 상술한 코뮤네로 반란군이 권력을 '돌려드리는' 퍼포먼스를 할때 이를 거부한것도 관련 1차 사료를 읽어보면 '제대로 하려면' 공식 교회와 관료단을 대표하는 공증인과 주교급 성직자가 증인으로 참석해야 한다느니, '그대들의 노고는 치하하지만 짐은 이럴 권한이 없다'느니[13] 하는 기본적인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이상자가 아니라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스럽게 대답을 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후아나는 후안의 여성형 이름으로 오빠인 후안이 있지만, 유아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에 후안이라는 이름을 어떻게든 후세로 남기려고 후아나의 이름을 후아나로 지었다. 그리고 진짜로 후아나가 후계자가 된다.[2]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아라곤의 캐서린은 흑발과 흑안을 지닌 음울한 여성으로 그리곤 한다. 하지만 그녀의 남아있는 초상화를 보면 당시 미인으로 치던 얼굴이다.[3] 바람둥이였던 필리프는 공식적인 결혼식 하루 전날 부인이 될 후아나의 방에 가서 벌써 동침을 했다.[4] 후계자에게 내려지던 작위로 영국의 웨일스 공 같은 것이다.[5] 오빠인 후안은 부인 마르가리타에게 매우 빠져들어서 몸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성관계를 너무 열심히 하다 기력이 소진되어 사망했다고 할 정도.[6] 아예 남편의 정부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하여 그거 보고 분노한 남편한테 빰을 얻어맞기도 했다.[7] 다만 그렇다고 후계자 생산에 대해 등한시한 것은 아니라서 부부관계는 가져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필리프는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2남 4녀를 가졌다.[8] 당시 유럽의 여성은 남편이나 아버지 등 남성이 없이는 권리를 내세울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군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 프랑크계의 국가에선 이를 확대해석하여 살리카 법을 통해 여성의 승계 자체를 막아버렸다. 이러한 시대에 마르게리타가 더이상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겠다고 선언한 것은 요즘 시기의 "나 결혼 안 해"와는 다른 의미이다.[9] 다만 이는 나중에 페르난도 2세가 자신의 사후 후아나가 아라곤의 여왕으로 즉위할 수 있도록 법을 고쳐놓는다.[10] 보다시피 작위에 레온이 빠져있는데, 아내 덕에 왕으로는 인정하되 약간 격이 떨어지는 칭호를 준 것이다.[11]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외조카로, 페르난도 2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지만 이 아들은 태어난 지 몇시간 만에 사망해버린다. 이후 자녀는 없다. 그런데 이 아들의 이름도 후안.[12] 유폐당했다기보다는 후아나 본인이 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다는 말도 있다. 유폐 과정 자체는 그녀의 의사와 무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탑에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후아나에게 거부당한 코뮤네로 반란군은 결국 자신들 마음대로 그냥 후아나에게 실질 통치권을 '반환'했으며, 이를 집행하는 건 본인들이 만든 아빌라 임시 혁명정부라고 선언했다.[13] Archivo General de Simancas, Patronato Real, leg.3,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