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벨 1세
1. 개요
1451년 4월 22일 ~ 1504년 11월 26일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여왕이자 스페인 왕국의 공동 통치자. 페르난도 2세와 결혼하여 통일된 스페인 왕국을 만들었다.
참고로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카스티야-레온 왕국, 아라곤 왕국, 나바라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그라나다 왕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2. 생애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공주로 태어났다. 정국이 불안한 상황에서 이복 오빠인 엔리케 4세가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으며, 즉위 후 엔리케 4세가 새어머니 집안인 이사벨 집안을 의심하였고 이 때문에 이들은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포르투갈 왕족 출신인 이사벨 공주의 어머니 이사벨 태후[1] 는 갑자기 평민 같은 삶을 살게 된 데다가 엔리케 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사벨은 공주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어린 동생을 돌보며 직접 빨래를 고며 밥도 짓는 강인한 생명력을 보였다. 우울함과 절망을 꿋꿋이 이겨낼 수 있었으며 원동력은 가톨릭 신앙이었다고 한다. 후에 정국이 다소 안정된 후 왕은 이사벨 모녀를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로 다시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이사벨은 처세에 능해서 엔리케 4세의 여러 가지 의심에서 벗어나 신임을 얻어 마침내 왕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이웃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와의 결혼 과정에서 큰 마찰이 있었으나 엔리케 4세의 마음에 반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녀는 남편 페르난도와 함께 남쪽에 남아있는 마지막 이슬람왕국 그라나다를 정복하여 레콘키스타를 완성하였다. 여담으로 남편 페르난도는 전장에서 보내는 기간이 많았으므로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그때까지는 연합왕국일 뿐 통합된 국가는 아니었으므로 두 사람은 부부이면서도 서로 견제하는 사이였다.
한편 이사벨은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보물들까지 팔며 콜럼버스를 후원하였고 마침내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다. 왜 여왕이 이토록 콜럼버스를 후원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야사가 있다. 가장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남편 페르난도와 떨어져있는 기간이 길어서 남자답고 언변이 뛰어난 콜럼버스에게 매력을 느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수적이고 남존여비적인 당시의 유럽 가톨릭 사회에서 가톨릭 여왕을 자처하던 여왕에게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당시 유럽의 왕실 혼인 정치에 현대적 연애관을 투영시키는 건 골룸하지만, 요즘의 관점에서도 둘은 남편이 전쟁 때문에 같이 보내는 시간이 적었던 것치고 서로 애정이 깊은 편이었다. 본인이 직접 들으면 당장 종교재판 불러 '''넌 화형'''했을 법한 야사이다(...).
그리고 페르난도와의 결혼에도 한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가 자신을 20살 가까이 많은 포르투갈 왕 아폰수 5세와 결혼시키려고 들자, 엔리케의 실정과 재상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던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야반도주한 것이다.
이사벨 1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에 스페인에 남은 아랍인들에게 개종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고 하여 많은 아랍인들이 강제개종하거나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추방령까지 내려 쫓아내기도 하였는데 추방된 이들은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에게 무시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들 일부는 오스만 투르크로 무사히 도망쳤고 그라나다의 고급 정보를 오스만 측에 전해주었다.
한편 신대륙에서 온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웃음이 많고 순수하다며 그들을 가족과 같이 잘 대해주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그녀 사후 아메리카에서의 살육과 고문을 보면 이사벨 1세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다만 이러한 행위의 주체들은 주로 콩키스타도르들이었다. 스페인 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은 1512년 원주민은 노예가 아니라 유럽인과 동등한 인간이며, 지배하되 동시에 가톨릭 신앙을 전하고 보호해줘야 한다고 명시한 부르고스 칙령에서부터 아예 엔꼬미엔다 제도를 갈아 엎고, 스페인 정착민들과 분리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누리는 '이중 공화국 repúblicas de los españoles y de los indios' 원칙을 성문화한 1542년 신 법령까지 상당히 일관적으로 원주민을 일정한 법적 권리와 민권을 지닌 스페인 신민으로 대우하려고 했다.
그러나 흔히 세간에서 오해하는 것이, 16세기의 콩키스타도르 정복 사업은 스페인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중앙의 '군대'를 파견한 적은 한 번도 없고 100% 개인 사업자들이 사병 집단 꾸려서 쳐들어 간다음 "이 땅과 주민들을 하느님과 스페인 왕께 바친다 (그러니깐 땅과 돈과 명성과 연줄을 주세요)"고 '''헌상'''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니 이미 사업 차원에서 투자로 후원금을 받고 들어 온 인생막장(...) 정복자들의 입장에선 돈 되는 건 뭐든지 해야 해서 고의적으로 분란을 일으킨 것이 크다. 그나마 정치적 감각이 꽤 있고 학식도 비교적 있는 편에 속했던 코르테스가 쳐들어가 정복한 멕시코 일대가 예외지, 페루에서 과테말라까지 스페인의 정복지 대부분은 이름만 빌렸지, 실제로 해준 것도 없는 스페인에 맞서 콩키스타도르들이 다 해처먹겠다고 들고 일어나 '''오히려 그 콩키스타도르를 상대로 다시 정복해야 하는''' 상황이 더 많았다. 물론 이러한 말 안 듣는 콩키스타도르들을 토벌할 군대도 스페인 본토에서 보낸 테르시오 정규군이 아니라 누에바에스파냐, 페루 현지 부왕령 식민 정부의 총독들이 알아서 어찌 모은, 콩키스타도르들보다 질적, 양적으로 하등 나을 게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 국가 차원에서는 몇 차례나 원주민 학대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실제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2.1. 여왕이 되기까지
이사벨은 후안 2세의 두 번째 부인[2] 포르투갈의 이사벨의 딸로, 위로는 이복오빠 엔리케 4세가 있었고 아래로는 동복 남동생 알폰소 왕자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왕위 계승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공주가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 포르투갈의 후아나 왕비와 신하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불륜으로 태어났다는 소문이 돌면서 카스티야 왕국의 후계자 문제가 발생한다.[3]
엔리케 4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일부 귀족들이 후아나 공주가 정말 엔리케의 딸이 맞는지 문제 삼고서, 1464년 알폰소 왕자를 국왕으로 옹립해 카스티야 왕국은 분열될 위기에 놓인다. 1467년에 알폰소 왕자가 사망하자 알폰소 왕자의 지지자들은 1468년에 엔리케 4세를 몰아내고 이사벨을 옹립하려고 했다. 이때 그녀는 엔리케 4세가 있는 한 절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이 일에 감명받은 엔리케 4세는 내심 이사벨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어 두었다. 그러나 1년 뒤 이사벨의 결혼 문제로 둘의 사이는 상당히 악화된다.
2.2. 결혼
유력한 왕위계승 후보자가 된 이사벨에게 유럽의 유력한 여러 국가에서 청혼이 쇄도했다. 그 가운데서 그녀는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와의 결혼을 희망했다. 아라곤은 카스티아의 이웃나라로, 같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 언어와 민족이 비슷했다. 이사벨은 17살의 나이에 두 나라가 합병하면 유럽의 정치무대가 넓어질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복오빠인 엔리케 4세는 그녀를 포르투갈 왕 알폰소 5세와 결혼시키려 했다. 이사벨은 결혼을 신청하러 온 포르투갈 왕의 대리인을 쫓아버리고[4] 아라곤 왕자의 신청을 독단으로 승낙해 승인했다. 격분한 엔리케 4세는 그녀를 궁에 감금했으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서 부하들을 데리고 도망쳤다. 그리고 바야돌리드로 가서 그곳의 귀족에게 보호받았다. 그리고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자에게 급사를 파견해 결혼을 하러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아라곤 측은 매우 당황했다. 그리고 긴급회의가 열렸다. 이때 페르난도 왕자는 큰 결심을 하고, 대담하게도 몇 사람의 부하만 데리고 대상인으로 변장해 바야돌리드까지 350km나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돌파해서 몰래 이사벨을 만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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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도 2세-이사벨 1세 부부의 초상화.
당시 초상화들은 이상화된 얼굴을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맨 위의 초상화나 부부 초상화나 실제 얼굴과는 차이가 상당히 있을 수 있다는 것이고, 부부가 닮은 이유가 화가가 자기 주관대로 적절히 포토샵(?)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1469년 10월 두 사람은 바야돌리드 시에서 엔리케 4세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결혼했다. 너무 서둘렀기 때문에 로마 교황의 허가를 받을 겨를도 없어서 위기를 맞은 적도 있으나, 다행히도 페르난도 왕자가 허가장을 위조해 고비를 넘겼다.[5]
억지로 모양새를 겨우 취한 혼인이었지만, 이사벨에게 있어 이 때의 일은 인생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5년 뒤에 엔리케 4세가 사망하고 이사벨이 즉위하지만, 포르투갈의 알폰소 5세와의 전쟁,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공주와의 내전이 발생한다. 이 분쟁이 마무리되었을 때, 페르난도의 아버지인 아라곤과 나바르의 국왕 후안 2세가 사망해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 또한 아라곤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때 만약 이사벨이 알폰소 5세와 결혼해서 아라곤 대신 카스티야-포르투갈이 동군연합으로 엮였다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하는 것도 은근히 통용되는 if 떡밥이다. [6]
2.3. 부부왕의 치세
이사벨 여왕은 남편인 페르난도에게 '스페인 왕국은 남편과 공동 통치하지만, 카스티야 정권에 대해서는 아라곤의 국왕이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래서 이사벨은 아라곤에,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에 대해 배우자로서 관여할 수는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공동통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실상 통일 스페인 왕국의 기반이 만들어진 것이 이사벨 1세의 통치기였기에 사실상 두 나라가 통일되어 스페인 왕국이 만들어진 게 이 때라고 보기도 한다. 1492년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이베리아의 반도의 남부,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를 정복했다. 그라나다는 스페인 통일에 있어 마지막 거점이었다. 이건 역대 국왕들이 꿈꾸던 스페인 통일을 그녀가 페르난도와 힘을 합쳐 해냈다는 것, 즉 레콩키스타를 완성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사벨 1세는 세제의 개혁, 군의 정비, 종교 재판 도입 등의 일을 하며 스페인을 다스렸다.
또한 이사벨 1세는 1492년부터 시작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탐험을 지원해준다[7] . 이때 즈음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설치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그리나다와 전쟁 중이어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신하들이 맹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그녀는 산타페 양해각서까지 체결하면서 지원해주었다. 이사벨 1세가 당시에 지향하고 있던 것은 국외로 영토를 개척하는 일이었다. 이미 우수한 항해사를 바다로 보내 마데이라 제도, 아조레스 제도, 아프리카 서해안을 가진 포르투갈에게 뒤져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콜럼버스는 의도치 않게 아메리카의 존재를 알리게 되어 스페인에 상당한 도움을 가져오게 된다.
가톨릭 부부왕의 경우 두 사람 사이에는 평생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는 정치적인 측면에서 기인했는데, 카스티야의 국력이 아라곤보다 더 강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결합에 있어서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에 대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없었고,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분할해서 상속받을 수 없다는 조항에 서명해야 했다. 또한 당시의 남성우월주의 사상에도 불구하고, 이사벨과 페르난도를 그리거나 조각할 때는 반드시 두 사람이 완벽히 같은 크기로 묘사해야 했다.[8]
이렇게 아내에게 어느 정도 눌려 지낸 페르난도였기에 이사벨의 사망 이후 그는 카스티야를 아라곤에 합병시키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페르난도는 재혼한 부인에게서 남성 상속자를 생산하지 못했고, 이사벨 생전의 조약에 의해 두 사람의 차녀 후아나가 카스티야와 아라곤을 모두 상속받아 그 아들 카를로스 1세의 대에 이르러 통합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게 된다.
2.4. 후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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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1504년 11월 25일에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그라나다에 있는 왕실 대성당에 있는데, 남편 페르난도와 딸 후아나, 사위 펠리페까지 몽땅 같이 묻혀 있다.
그녀와 페르난도 사이엔 1남 4녀가 있었지만, 아들 후안은 어릴 때 사망했고 포르투갈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은 미겔 왕자를 낳다가 사망했기에 이사벨 여왕 사후에는 차녀인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후아나 여왕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9] 페르난도 2세와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 1세가 섭정 자리를 놓고 다퉜고, 이후 펠리페가 섭정하는 걸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단 두 달 만에 펠리페가 사망하면서 페르난도 2세가 섭정한다. 겉으로는 간단히 정리된 거 같지만, 페르난도 2세가 아들을 갖기 위해 재혼을 한 것 등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상당히 복잡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페르난도 2세가 새로운 부인 제르멘 드 푸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갖지 못한 채 사망하고, 후아나 여왕의 아들 카를 5세가 어머니와 공동통치하는 형태로 즉위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때 실권은 전적으로 손자 카를에게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서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은 카를 5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세한 내용은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참고로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난도 2세의 4번째 딸이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메리 1세의 어머니인 카탈리나이다.
그녀의 치세에서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은 개종하지 않은 이슬람 교도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하고 1492년 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도 추방한 일이다. 이는 이슬람 및 유대인들, 그리고 개념있던 기독교 인사들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그라나다 왕조를 멸망시킬 당시 마지막 이슬람 왕인 보아브딜이 항복하며 물러날 때 조건으로 약속한 이슬람인과 유태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반드시 허용해 줄 것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북아프리카 및 이슬람권 지역 기독교인들은 그 분풀이로 똑같이 추방당했기에 이들이 스페인으로 와서 늬들 땜에 우리 이 꼴이 되었으니 받아달라고 분노했다. 물론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받아주긴 했으나, 오랫동안 비기독교 지역에 살던 이들 기독교인들과 스페인에서 공존이 잘되진 못했다.
2.5. 기타
- 목욕을 평생 두 번(태어날 때 한 번, 결혼할 때 한 번)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근거없는 낭설로 보여지며 오히려 목욕을 하루 평균 네 번씩 하는 깔끔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10]
- 남편과 함께 로마 제국의 마지막 제위 요구자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로부터 로마 황제 칭호를 사들였다. 그러나 이미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한 상태에서, 그의 황제 칭호는 허울뿐인 자리였기에,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는 그 칭호를 구입만 하고 사용하진 않았다. 또한 안드레아스는 당시 매우 궁핍한 말년을 보내고 있었기에, 말이 구입이지 사실상 기부한 거나 다름 없었다.
3. 자녀
4. 대중매체에서
문명 4와 문명 5에서 스페인의 지도자로 그녀가 등장한다. 카를로스 1세나 펠리페 2세 쪽이 더 적격이 아닐까 싶다는 의견도 있지만, 문명 시리즈 특유의 양성평등 기조도 있거니와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이기 때문에 무리가 많다. 실제로 문명 3에서는, 정식 문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시스템상으로는 오스트리아의 군주로서 카를 5세가 존재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펠리페 2세에 비해 이쪽이 지명도나 능력이 딸린다고는 좀...
그리고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비잔티움의 테오도라와 함께 문명5에서 가장 예쁜 여군주로 평가받는다. 예카테리나가 거대한 , 테오도라가 섹시함이라면 이사벨은 단아하고 조신한 면이 있다. 이 셋을 보려고 게임 설정할 때 러시아와 비잔티움, 스페인을 넣는 유저들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선 스페인 지도자로 나오는데 엄청난 미인이다. 그에 비해 옆나라 엘리자베스 1세는 그냥 아줌마(...).
콜럼버스를 후원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다룬 영화에 자주 나온다. 톰 셀렉이 주연한 영화에서의 배우 레이철 워드의 연기는 사실 너무 나약한 편이고... 《1492 Conquest of Paradise》에 나온 시고니 위버가 강인한 군주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
또한 유비소프트가 만든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남편 페르난도 2세와 함께 성전기사단의 꼭두각시로 움직이면서 암살단과 충돌해 결국 암살단에 의해 독살되고 만다.
스페인에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이사벨 1세를 주인공으로 한 대작 사극 '이사벨(ISABEL)'을 방영했다.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서는 카스티야 왕국의 이벤트로 등장을 하게 되는데 선택지 1번을 누를 경우 능력치 5/6/3 의 유능한 여왕으로 집권을 하게 되고 선택지 2번을 누를 경우 여왕으로 등극되지 않고 일반 조언가로 등장하게 된다. 다만 아라곤과의 연합을 필수로 하는 카스티야의 입장에서는 웬만하면 1번 선택지를 선호하는 입장이다.
[1] 이 집안은 모계로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7대에 걸쳐 대물림했다고 한다(..)[2] 첫번째 부인은 아라곤의 마리아[3] 별칭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4] 아무리 정략 결혼이라지만, 당시 알폰소 5세는 40세가 넘었기에 이사벨에겐 거의 아버지뻘이다.[5] 두 사람은 부계로 6촌남매 관계였기 때문에 근친혼이어서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다. 뭐 나중에는 바티칸에서 가톨릭 부부왕의 칭호를 주었지만.[6] 일시적으로나마 펠리페 2세 시기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된 적은 있다. 이베리아 연합 항목을 참고 바람.[7] 참고로 페르난도 2세의 아라곤 왕국은 콜럼버스의 탐험에 대해 이사벨 1세보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전적으로 콜럼버스를 후원한 건 카스티야 왕국이었다.[8] 당시 유럽에서는 예술 작품에서 남편을 아내보다 크게 그리는 것이 전통이었다.[9]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Juana la loca(광녀 후아나)가 됐다. 하지만 후아나가 주술이나 마법에 심취하는 등의 이상행동을 보인 원인은 남편의 바람기였다. 문제는 후아나의 광기가 남편이 죽고 나서도 나아지지가 않았던 것이다.[10]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참고[11]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등[12] 메리 1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