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틴 카
1. 개요
前 NBA 선수. 별명은 Mr.Cavalier. 현재는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중계진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
2. 커리어
2.1. 유년시절과 농구 입성전
국방성 자재부 직원인 아버지와 간호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엄격한 가톨릭 방식으로 사람들의 배려를 잊지 않는 착한 아이였다.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키가 작은데도 불구하고 민첩한 몸놀림과 정교한 슈팅으로 고등학교 농구계를 주름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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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 후, 노트르담 대학교로 진학한 카는 NCAA를 대표하는 선수로 활약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는 3년동안 대학농구계에서는 2560점을 기록하여 역대 통산 5위를 기록하였고, 그 중 2년 동안에는 시즌 통산 1000득점 이상을 달성[2] 하여 2번째 선수가 되었다. 또 1경기 동안 60득점, 1경기당 야투 골 성공률은 25개, 시투수 41개라는 NCCA토너먼트 기록도 보유하고있다. 1970년에 열린 토너먼트에서는 3경기 만에 158개의 득점을 넣어, 토너먼트에서의 평균득점을 52.7득점이 되어 토너먼트 기록이 되었다. 1971년에도 평균 41.7득점을 기록하고 있어,[3] 토너먼트 통산 평균 득점 41.3개는 역대 1위가 되었다. 또 토너먼트에서 사상 6번 달성이 된 1경기 50득점 이상 가운데, 3회가 카로, 토너먼트 1경기 득점 역대 12개 수위 가운데 5회도 랭킹에 들어갔다.
2.2. 농구 입성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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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한 그는, 1971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게 지명되어 프로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프리 시즌 때 다리를 다쳐 후유증에 시달렸다가, 한달뒤 부상에서 돌아온 뒤 정식으로 NBA 데뷔전을 치르지만 또다시 도중에 반대쪽 다리를 다쳐 7주동안 결장을 하고 말았다. 그가 복귀 한 뒤에는 항상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내게 만들어 처음으로 NBA All-Rookie Team에 선출되었다. 그를 지명한 다음 해인 1972-73시즌에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에서 레니 윌킨스가 입단하여 강력한 백 코트 듀오가 결성되었고, 1973년에는 빙고 스미스도 입단하여 형태가 조금씩 갖추어지기 시작하여 팀에서 평균최고 기록인 21.9개의 득점을 넣었다. 윌킨스가 1974-75시즌 끝으로 떠난 뒤에는 딕 스나이더, 짐 카메론, 캠피 러셀 등이 빈 자리를 메우고 순조로운 시즌을 보내고 창설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로 가는 고지가 눈 앞에 보였으나, 2월에 발 뒤꿈치 부상의 영향으로 이후에는 모두를 면치 못하고, 시즌 종반에 연패를 당해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1975-76시즌에는 평균 10.1득점으로 끝났으나, 센트럴 디비젼에서 우승하여 창설 이후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하여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전에서 워싱턴 불리츠를 누르고 리치필드의 기적을 만들었지만, 결승전에서 보스턴 셀틱스에게 패하여 NBA 파이널 진출에는 실패하였다.
그 후 댈러스 매버릭스와 워싱턴 불리츠에서 뛴 후 현역생활을 마감했다. 34번은 클리블랜드 영구결번에 지정됐으며 은퇴한 뒤에는 친정팀인 캐벌리어스의 구단 홍보 담당자와 중계해설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3. 어록
'''Throw the Hammer Down!'''[4]
'''Get that weak stuff outta here!'''[5]
'''Deep In The Q'''[6]
[1] 1971-72년시즌에만 착용했다가, 은퇴할 때 까지는 34번을 착용했다.[2] 피트 마라비치에 이어 2번째 선수.[3] NCAA토너먼트에서 사상 처음으로 평균 36득점 이상을 넣은 선수는 오스틴 카가 유일하다.[4] 캐벌리어스 선수가 덩크를 꽂아 넣었을 때 쓴다. 물론 앨리웁도 마찬가지다.[5] 상대 팀 선수가 골을 넣으려고 할때 캐벌리어스 선수가 블록한 뒤에 공이 캐벌리어스로 왔을 때, 또는 공격권에 상관 없이 라인에 닿았을 때 쓴다. 다만 공이 상대팀이 왔을 경우에는 제외.[6] 캐벌리어스 선수가 3점슛을 적중했을 때 쓰는 멘트. 참고로 Q는 퀵큰 론즈 아레나의 별칭. 다만 원정에서 넣었을 경우에는 경기장 이름의 별칭을 쓰지 않는다. (예: 시카고 불스, Deep in the UNITED 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