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 마라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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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호크스 No.44'''
'''유타 재즈 No.7 '''
'''뉴올리언스 펠리컨스 No.7'''
'''이름'''
피터 프레스 마라비치
(Peter Press Maravich)
'''생물년도'''
1947년 6월 22일 ~ 1988년 1월 5일
'''국적'''
미국
'''출신지'''
펜실베이니아 주 앨리퀴파
'''출신학교'''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신장'''
196cm (6 ft 5 in)
'''체중'''
89kg (197 Ib)
'''포지션'''
슈팅 가드
'''드래프트'''
1970년 1라운드 3순위
애틀랜타 호크스 지명
'''역대 소속팀'''
애틀랜타 호크스 (1970-1974)
뉴올리언스/유타 재즈 (1974-1980)
보스턴 셀틱스 (1980)
'''역대 등번호'''
44번, 7번
'''수상내역'''
NBA All-Star 5회 (1973, 1974, 1977-1979)
All-NBA First Team 2회 (1976, 1977)
All-NBA Second Team 2회 (1973, 1978)
NBA All-Rookie First Team (1971)
NBA scoring champion (1977)
College national player of the year (1969, 1970)
Consensus first-team All-American 3회 (1968-1970)
NCAA Division I scoring leader 3회 (1968-1970)
SEC Player of the Year 3회 (1968-1970)
'''1977년 NBA 올해의 득점왕'''
밥 맥카두

'''피트 마라비치'''

조지 거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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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틀랜타 호크스 영구결번'''
No.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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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타 재즈 영구결번'''
No.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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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 펠리컨스 영구결번'''
No. 7[1]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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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트 마라비치'''
헌액 연도
1987년
1. 소개
2. 농구선수 입성전
3. 농구선수 입성후
3.1. 애틀랜타 호크스
3.3. 보스턴 셀틱스
3.4. 은퇴 후
4. 플레이 스타일


1. 소개


'''THE PISTOL'''
前 NBA 농구선수. '''The Pistol'''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어서 팬들 사이에서는 피스톨 피트라고도 불리웠었다. 그러나 심장발작으로 40세의 나이로 요절한 비운의 천재 선수.

2. 농구선수 입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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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러비치의 아버지인 피타 "프레스" 배러비치는 대학 감독으로서 피트를 매우 엄격하게 지도했고, 매러비치는 7살 때부터 그로부터 기본기를 배워왔다. 이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매러비치는 하루에 몇 시간동안 온갖 묘기와 화려한 패스, 장거리 슈팅[2] 등 당시 기준으로선 묘기에 가까운 기술들을 연마했다고 한다.
매러비치가 별명 "피스톨(권총)"을 얻었던 건 고등학교 때였는데, 그가 볼을 옆구리에 갖고 있다가 바로 슛을 올라가는 게 마치 권총을 뽑아드는 것 같다는 뜻에서 얻은 별명이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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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비치는 원래 웨스트 버지니아 대학교로 진학하여 산악인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으나, 아버지가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농구부에서 감독을 맡은 영향도 있어, 같은 대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당시 NCAA 규칙에서는 1학년생 선수가 공식 경기에 나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1학년 팀에서 활동하면서 17에 출전해 평균 43.6득점(!), 7.3어시스트, 10.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참고로 그는 첫 경기에서 50점 14리바운드 11어시스트라는 미친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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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학년으로 올라가자 아버지가 지휘봉을 잡은 같은 대학교 농구부의 공식 경기에 출전이 가능하여 평균 43.8득점, 어시스트 4.0개, 리바운드 7.5개를 기록하였고, 이후에는 3학년과 4학년때는 평균 44득점 이상을 넘어 1군에서 뛴 3년동안 44.2득점을 기록하여 네이스미스상을 받게 되었다.
현재 이 평균득점과 총득점 모두 NCAA 기록으로 남아있는 상태. NBA 선수 연봉이 신인부터 보장액수가 수백만달러에 달하는 현재 대학을 4년 채워서 다닐 특급 유망주는 사실상 없기 때문에 이 기록은 사실상 영원히 깨지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무시무시한 것은 매러비치가 통산 평균 44.2점인데 2위인 오스카 로버트슨이 통산 33.8점으로 10점 차이가 넘는다. 그만큼 독보적인 득점원이었다.
더욱 무서운 것은 NCAA는 80년대 들어서야 3점라인을 도입했기 때문에 매러비치의 모든 업적은 3점 슛이 없고 심지어 샷클락조차 도입되기 전이었기 때문에[4] 장거리 슈팅력이 뛰어났던 매러비치가 3점라인과 샷클락이 있는 상태에서 뛰었다면 더더욱 괴물같은 기록을 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매러비치의 대학은 최고 성적이 20승 8패에 불과했고, 한 번도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한 것 때문에 "본인만 잘할 뿐 팀을 강하게 만들 능력이 없는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받았다. 사실 마이클 조던이 NBA를 지배하기 전까지 득점왕들은 우승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이[5] 짙었고, 이에 일조한 선수 중 하나가 매러비치였다. 다만 매러비치가 합류하기 전 루이지애나 대학이 3승 20패에 불과한 초약체였단 걸 생각하면 저런 형편없는 팀을 어쨌거나 이기는 팀으로 바꿔놓은 매러비치 입장에선 약간 억울한 비판이다.

3. 농구선수 입성후



3.1. 애틀랜타 호크스


1970년 3순위 드래프트로 애틀란타 호크스에 입단하며, 본격적인 프로 무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애틀란타 호크스는 중위권이긴 했으나, 에이스로 루 허드슨(Lou Hudson)[6] 장신 센터 월트 벨라미 등을 보유한 뛰어난 팀이었다.
희망찬 미래를 보며 시작한 마라비치의 첫 시즌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우선 팀 선배들로부터 엄청난 멸시를 받았었다. 당시 애틀란타가 속해 있던 조지아 주는 인종차별이 심한 동네였으며, 대부분의 애틀란타 선수들이 흑인들이었는데, 마라비치는 첫 입단 연봉을 2백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을 받고 들어왔던 터였고, 그로 인해 애틀란타의 당시 최고 인기 선수 였던 조 콜드웰 선수를 트레이드 보내기 까지 하자, 항상 플레이 할때마다 일부러 그의 패스를 놓치는 등 '''집단으로 따돌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마라비치는 첫 시즌은 평균 득점 23득점에 All-Rookie에도 선정되는 등 개인적으로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나, 팀 성적은 전년도에 비해 확 나빠졌고, 이는 마라비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 보란듯이 실력을 보여주면서, 평균득점 26득점에 평균 어시스트 6.9개로 같은 팀 동료였던 압둘-라흐만[7] 선수를 제치고 어시스트 1위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같은 팀 동료였던 루 허드슨과의 화려한 개인 득점 릴레이(마라비치는 평균 득점 27득점, 루 허드슨은 25득점)에도 불구하고, 플레이 스타일이 전혀 달랐었고, 팀으로서 융화가 되질 못했던 터라 팀 성적은 점점 더 떨어지게 되었고, 그 해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신생팀이었던 뉴올리언스 재즈로 트레이드 되었다.

3.2. 뉴올리언스 재즈


'''선수 인생 최고의 황금기'''
'''뉴올리언스 재즈의 The Pistol'''
'''신생팀의 한계를 혼자의 힘으로 맞선 사나이'''
1974년 뉴올리언스 연고의 신생팀으로 창단된 재즈는 루이지애나 대학의 전설을 만튼 스타 피트 마라비치를 주목하게 되었고, 피트 마라비치 포함 2명[8]과 1라운드, 2라운드 지명권 총 4장과 맞바꾼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하여 피트 마라비치를 영입한다.
사실, 마라비치는 애틀란타 호크스 시절에도 겉멋이 든 패스를 하는 등의 상대를 신경쓰지 않는 오만한 플레이로 빈축을 산 바 있었으나, 친어머니의 사망이라는 비극적인 사건[9]을 계기로 점차 팀에 융화되는 팀워크 플레이를 신경쓰고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 개인 득점에만 신경 쓰던 그는 점차 리바운드와 수비 등을 통해 팀워크 플레이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러한 노력은 그 이듬해 신생팀 뉴올리언스가 디비전에서 탈꼴찌를 하게 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참고로, 그 해 꼴찌가 자신을 버린 팀인 애틀란타 호크스였다는 것은 짠한 사실 중 하나였다.
그리고 '''1976-77년 시즌'''은 그의 농구 인생에 손 꼽히는 레전드 시즌이었다. 시즌 13경기만에 통산 득점 40득점 이상을 기록하더니, 뉴욕 닉스의 경기에서 '''한 경기 득점 68점'''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당시 뉴욕 닉스에는 얼 먼로, 월트 프레이저라는 최강의 수비 가드 두명이 있는 난공 불락의 팀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기록은 놀라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생팀에서 유일한 피스톨 멤버로 활동했던 그의 경기는 그의 몸에 무리를 주기 시작했고, 1977년 버팔로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 무릎을 크게 다치고 말았고, 이 무릎 부상은 그의 남은 NBA 경력을 크게 단축시키고 말았다. 결국 1980년 시즌부터 뉴올리언스가 연고지를 유타로 옮기면서 차츰 그의 활약을 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웨이버 공시로 팀을 떠나고 만다.

3.3. 보스턴 셀틱스


1976-77시즌에 정점을 찍은 피스톨 피트의 기량은 점점 하락하고 있었고, 1978-79시즌에 그는 22.6점을 기록하지만 49경기 출전에 그쳤고 팀은 NBA전체 꼴찌를 하고 만다. 유타로 팀이 연고지를 이전한 1979-80시즌에도 그는 평균 30.7분을 뛰며 17.1점을 기록하지만 팀은 10연패를 포함해 2승 15패에 그친다. [10] 재즈는 더 이상 팀의 주축으로 뛰기 힘든 마라비치를 웨이버 공시하면서 자칫하면 무적상태로 은퇴할 뻔했지만, 2월 초에 보스턴 셀틱스의 부름을 받고 팀에 합류하게 된다.
셀틱스는 78-79시즌 꼴찌에서 2등을 할 정도로 완전히 몰락했지만, NBA 역사상 최고의 백인 선수를 신인선수로 영입한 후 마라비치 영입 전까지 54경기동안 41승 13패(승률 75.9%, 시즌 최종승률은 61승 21패로 74.4%) 그야말로 '''동부 최강의 면모'''를 뽐내고 있었다. 이를 이끄는 '''스몰포워드''' 버드는 신인 주제에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위용을 떨쳤다.
마라비치는 이 팀에서 식스맨으로 경기당 17분을 뛰며 11.5점으로 공헌을 한다. [11]
1980 시즌 보스턴 셀틱스는 정규 시즌 61승을 달성하며,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이루었다. 비록,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당시 최고의 선수 줄리어스 어빙이 이끌던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게 탈락을 맛보긴 했으나, 피트 마라비치 개인에게는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에 진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고, 그는 32세라는 농구 선수로서는 너무 이른 나이에 은퇴를 결심한다.
여담이지만, 피트 마라비치가 마지막을 불태우던 시절에, 차세대 NBA를 이끌 초대형 스타 두명이 탄생하니, 한 명은 위에서 언급한 팀 동료 백인선수이고, 또 다른 한 명은 LA 레이커스 그 자체가 되어버린 슈퍼 스타였다.

3.4. 은퇴 후


피트는 은퇴 후 어머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건지 신앙생활에 전념하게 된다[12]. 요가와 힌두교 사상 등을 배우기도 하였고, UFO연구나 채식주의 등을 연구하는 등으로 비교적 정적인 활동을 주로 이어나가곤 하였다. 오죽하면 그는 사망하기 얼마 전까지 '''나는 위대한 농구선수보다는 한 명의 크리스찬으로 기억되고 싶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8년 1월 5일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 있는 나사렛 교회 체육관에서 친구들과 3:3 픽업 농구 시합을 뛰던 도중 갑자기 심장 발작으로 쓰러져서 40세라는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요절하고 말았다. 루이지애나의 주도인 배턴루지에 마라비치의 묘가 있다.
후에 NBA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수 50명을 선정했는데 당시 유일하게 세상을 떠났던 선수가 피트 마라비치였다.
유타로 연고이전한 재즈, 선수생활을 시작한 호크스, 뉴올리언스에 새로 창단된 펠리컨스가 모두 마라비치를 영구결번하면서 3팀에서 영구결번된 드문 선수가 되었다. [13]

4. 플레이 스타일


'''농구계의 호나우지뉴'''
당시 존재했던, 그리고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방법으로 득점이 가능했던 선수이다. 온갖 화려한 드리블과 페이크, 트릭 패스에 능했던 그의 플레이는 지금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멋져보이는데, 단순한 크로스오버조차 화려한 개인기로 받아들여지던 1970년대 당시 그는 정말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오죽하면 그가 도입한 개인기 중에 "Pistol"이란 이름이 붙은 동작이 있는데, 이는 현재도 길거리 농구선수들이 하는 개인기 중 하나이다. 백인 선수들은 기본기에 기초한 정석적인 플레이, 흑인 선수들은 화려한 개인기라는 공식에 익숙해져 있던 당시 농구팬들에게 피스톨은 편견을 때려부수는 괴물같은 선수였다.
매러비치가 대단한 점은 그가 단순히 개인기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상술한대로 그는 탄탄한 드리블 실력과 정확한 슈팅력 등 기본기가 잘 다져져있는 선수였는데, 이는 농구선수 출신이자 현역 대학농구 지도자였던 아버지 덕이 크다.
매러비치는 재빠르긴 했지만 점프력이나 힘은 평이한 수준이었는데, 이러한 화려한 기술을 바탕으로 NBA에서도 정상급 득점력을 자랑했다. 10년이라는 짧은 커리어동안 그는 대부분 득점 상위권에 들었으며 76-77시즌에는 31.1점으로 득점왕까지 올랐다.
단순히 득점만 잘하는게 아니라 패스도 뛰어난 수준이어서, 당시 슈팅가드로서는 상당히 높은 편인 통산 5.4개, 가장 높은 시즌이 평균 6.7개였다.
여러 모로 시대를 지나치게 앞선 선수였는데, 현시대에 더욱 빛날 그의 또다른 장점은 넓은 슈팅 레인지였다. 3점 슛이 도입되기 전의 선수였음에도 중장거리 슈팅에 능했다. 실제로 마라비치의 은퇴 시즌 NBA에 3점 슛이 도입되는데, 이 시즌 마라비치는 시도는 많지 않았지만 3점 슛 성공률 66.7%를 찍었다. 해당 시즌 자신의 야투율을 20%p나 웃도는 수치였다.
문제는 그의 농구는 지나치게 개인플레이에 의존하는 성향이 있었고, 이 때문에 팀플레이에 녹아들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야투성공률은 70년대 당시 기준으로 보면 낮은 편이 결코 아니었고 자유투 성공률도 좋은 편이었지만 실책이 '''엄청나게''' 많은 선수였다. NBA는 그가 8년차이던 77-78시즌에야 턴오버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는 평균 27점 6.7어시스트와 함께 평균 5개에 달하는 턴오버를 남겼다.[14]보통 매러비치처럼 볼을 많이 만지는 가드들의 턴오버가 3개대고[15], 실책이 많기로 유명한 매직 존슨이 커리어 평균 3.9에 가장 많을때 한 시즌 평균 4.6개를 저질렀다는 걸 생각하면 피스톨의 저 수치는 거의 시즌내내 턴오버쇼를 저지른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매직의 경우 팀이 워낙에 빠른 페이스로 속공을 많이 하다보니 정신없는 상황에서 패스를 뻥뻥 날려야될 경우가 많아 어쩔수 없이 많이 저지른 경우가 대부분이라면[16], 매러비치는 혼자 화려한 개인플레이를 하다가 혼자 저지른 실수나, 쓸데없는 트릭패스를 날리려다가 동료까지 속여버리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매러비치의 화려함은 시대를 앞서갔다.[17] 문제는 너무 앞서가다보니 동료들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쓸데없는 실책으로 찬물을 끼얹는 경우가 많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개인 기량이나 능력은 나름대로 우월했지만, 팀플레이를 익히지 못하고 지나치게 개인플레이에만 의존하는 관계로 팀 성적을 크게 끌어올리지 못하며 낭비된 천재적인 재능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렇게 된 데는 아버지의 잘못된 지도 탓이 컸다. 마라비치의 대학팀 감독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모든 전술을 마라비치 한 명을 살리는데에만 집중했고, 결국 마라비치는 팀동료들을 이끄는 플레이스타일을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프로에 오게 된다. 추가로 신생팀에 유일하게 홀로 뛰는 외로운 사나이로서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기도 했다. 결국 시대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뛰어난 재능을 갖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팀플레이를 등한시하는 아버지의 잘못된 지도로 지나치게 개인플레이에만 의존하는 바람에 재능을 완전히 만개하지 못한 비운의 천재라고 볼 수 있다.
매러비치가 압도적인 개인기량에도 불구하고 팀의 에이스였을 때 승률이 5할을 넘겼을 때가 단 한 번인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심지어 위에 나온 대로 그의 선수생활 최고의 황금기였던 뉴올리언즈 시절에는 단 한번도 플레이오프에도 못 올랐고, 5할도 못 넘겼다. 74-75시즌엔 '''전체 꼴찌''', 그 다음 시즌엔 탈꼴찌를 했다곤 하지만 동부 꼴찌에서 두번째(다만 서부가 워낙 이때 상태가 안 좋아 재즈보다 못한 팀이 네팀이나 있었다) 76-77시즌엔 35승으로 서부 8위를 했지만 당시엔 6팀이 플레이오프 진출하는 시기라 역시 플레이오프 탈락, 그 다음 시즌엔 39승으로 탈락, 78-79시즌엔 아예 또 '''전체 꼴찌'''를 하고 만다.
새크라멘토 킹스, 마이애미 히트, 멤피스 그리즐리스에서 뛴 제이슨 윌리엄스가 그의 플레이 스타일과 흡사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창의적인 패스면에서 비견되는 것이지 클래스는 다르다는것이 중요하다.
[1] 뛴 적은 없으나 그의 공헌을 기려 영구결번하게 되었다. 매러비치는 뉴올리언즈 주립대의 레전드이자 뉴올리언즈에 연고를 둔 최초의 구단인 뉴올리언즈 재즈(현 유타 재즈)의 첫 슈퍼스타였다.[2] 당시는 3점라인이 없는 시기라 무조건 골대 가까운 데서 쏘는 게 철칙이었고, 장거리 슛을 쏘는 건 쓸데없는 묘기라고 여겨졌다. 실제로 장거리 슈팅력이 뛰어났던 제리 웨스트만 해도 수비의 허를 찌르는 장거리슛을 가끔 쐈을 뿐 대부분의 슛이 중거리 위치에서 이뤄졌다. 기본적으로 '''모든 슛이 2점인데''' 장거리에서 쏴봤자 실리가 없기 때문인데, 오늘날의 스테판 커리가 하프코트에서 슛을 쏘는 걸 보는 시각에 가까울 것이다.[3] 고교시절 그의 일화를 다룬 영화의 제목이 The Pistol이다.[4] 매우 보수적인 NCAA 관계자들은 샷클락을 도입하면 약체들이 강팀들과 경기하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3년에 테네시 대학교템플 대학교를 11-6으로 이기는 등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1985년에 45초 샷클락을 도입하고, 1993년부터는 35초, 2015년부터는 30초로 줄이게 된다.[5] 정확히는 "센터가 아닌 득점왕"들이다. 센터인 카림 압둘자바와 조지 마이칸은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차지했다. 다만 현재까지 득점왕과 우승을 차지한 선수들은 마이클 조던을 제외하면 모두 센터란 점을 생각하면(여기에 샤킬 오닐이 추가되므로) 이 편견이 틀린게 아니라 조던이 특이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드는게 사실.[6] 1967년 애틀란타 호크스의 전신인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에 입단하여 10여년간을 뛰어온 애틀란타 호크스의 슈팅가드로 1969년부터 5년 연속으로 평균 득점 25득점을 꾸준히 해오던 에이스였다. 2014년 뇌졸중으로 인해 69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7] 특히 이 선수는 피트 마라비치 집단 따돌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선수였다. 포지션이 겹치다보니,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가 작용했던 셈이다.[8] 나머지 한 명은 서서히 노쇠화가 진행되었던 센터 월트 벨라미로, 그는 여기서 단 한 시즌만 뛰고 은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뉴올리언스 재즈는 피트 마라비치 단 한 명을 위해 엄청난 대가(지명권 총 4장과 선수 2명)를 지불한 셈이다.[9] 4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사인은 알코올 중독이었다.[10] 아이러니하게 피스톨을 보낸 후 재즈는 22승 43패로 승률이 오히려 올랐다. 11.8%-> 33.8%[11] 기존 버젼에는 파라비치가 버드에게 주전 자리를 양보했다고 나와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다. 1. 당시 MVP투표 4위에 오른 퍼스트팀 선수 버드가 은퇴 직전 완전 말년이었던 마라비치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였고, 2. 마라비치가 2월 초에 합류하기 전에 버드는 이미 54경기에서 팀의 확고부동한 에이스이자 주전으로 양보하고 말게 당연히 없었으며, 3. 애초에 마라비치는 '''슈팅가드''', 버드는 '''스몰포워드'''로 포지션도 다르다. 버드는 이 시즌 전 경기를 주전으로 나섰으며, 마라비치 대신 주전으로 뛰었던 당시 가드진은 포인트 가드에 타이니 아치볼드, 슈팅가드에 크리스 포드였다. 마라비치가 스스로의 몸상태를 자각하여 식스맨을 자청하였다는 사실이 왜곡된 듯하다.[12] 아버지의 영향으로 농구선수의 꿈을 품기 시작한 유년기의 그의 일화를 다룬 영화가 있는데, 제목은 The Pistol이며, 1989년작이다. 영화 속 마라비치는 꿈 많고 순수한 소년처럼 등장하며, 행복한 가정에서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정작 그의 부모님의 말로는 아주 비참했다. 그의 어머니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아버지도 이후 그리 오래 생존하진 않았다. 그가 요절했던 시점에는 그의 부모님은 모두 사망해 있었다. 그리고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그의 신앙 간증(Testimony)에 따르면 유년기도 그리 행복하게 보낸 것 같진 않다.[13] 3팀에서 영구결번된 다른 선수들은 놀란 라이언, 프랭크 로빈슨, 윌트 체임벌린 그리고 전구단 영구결번인 재키 로빈슨, 웨인 그레츠키가 있다. [14] 상술했다시피 이는 마라비치가 베테랑이 되고, 동료들이 그의 화려한 플레이에 어느 정도 적응한 이후였기 때문에 턴오버 문제가 더 심하고 볼을 더 많이 만지던 이전에는 턴오버가 더 많았을 확률이 높다.[15] 편차치가 적어서 대부분 2개대 후반~3개대 중후반 사이다. 2개면 매우 적은 수준이고, 1개인 pg는 먹시 보그스같은 특이한 경우 말곤 거의 없으며 3.5개를 넘어가면 좀 많은 편이다. 물론 절대치 뿐 아니라 후술하는 매직 존슨처럼 팀 상황 등을 봐야한다.[16] 사실 레이커스는 공격권을 많이 쓰는 팀이다보니 전체 공격권 대비하면 매직의 실책비율이 그렇게 큰 건 아니었다. 간단히 말해 90 공격하는 팀에서 3번 실수하는 것과 120번 공격하는 팀에서 4번 실수하는 차이. 그리고 매직은 실책은 좀 많아도 이를 만회하고도 남을 정도로 효율적으로 뛰는 선수였다. 이 때문에 보통 단순히 실책수만 보지 않고 어시스트대비 턴오버를 보는데, 매직은 어시스트 대 턴오버 비율이 3대1에 가까웠지만 매러비치는 1대1에 가까웠다.[17] 실제로 최정상급 길거리 농구선수들의 개인기량이 NBA 스타들급인 경우에도 이들이 진출 못하는 가장 이유가 팀플레이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길거리에서야 묘기를 위해 가끔 실수하는게 용납되지만 상술됐듯 NBA에서는 비효율성과 효율성의 경계를 가르는게 평균 턴오버 3~4개 사이이다. 실제로 길거리농구의 전설이었던 Skip to my Lou 래퍼 알스톤은 NBA에서 뛰기 위해 그 유명한 기술시전을 사실상 전부 봉인했고, NBA에선 그냥 평범한 리딩력에 외곽득점지원해주는 후보 PG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물론 단순히 개인기만 안 쓴다고 되는게 아니고 팀플레이를 죽어라 익힌 결과. 가끔 농구초보자은 개인기에 현혹되어 길거리농구선수들이 NBA선수들보다 뛰어나다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이들이 팀플레이와 전술 이행, 수비와 박스아웃 등 필수적인 능력 배양을 포기하고 개인기에만 몰빵해서 그렇지 종합적인 농구능력은 현저히 떨어져서 안 가는게 아니라 못 가는 것이다. 당장 길거리농구와 NBA의 수입 차이는 넘사벽인데 실력이 되면 왜 안 가겠는가. 역대 최고의 스트릿볼러 중 하나였던 알스톤이 후보가드 역할을 기꺼이 맡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