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키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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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근대 일본 제국의 정치인. 일본에서 "헌정의 신"(憲政の神様), "의회 정치의 아버지"(議会政治の父)로 불린다. 언론인 출신으로 선거는 30대 초반인 1890년 열린 제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처음 출마,[1] 당선되어 이후 1953년 90대 중반에 낙선하기까지 총 25번 연속 당선, 63년 의원근속이란 대기록을 수립하였다. 원래는 청일전쟁 같은 주전론도 불사하던 강경파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주의로 신념을 바꿔 1920년대부터 무소속으로 정부를 비판하고 군국주의에 저항했다.
2. 여담
1912년 3월 27일, 도쿄 시장 재임 중 '미일우호(美日友好)'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 왕벚나무 3000그루를 기증한 바 있다. 이후 워싱턴 D.C에서는 1935년부터 해마다 3월 말~4월 초가 되면 화려한 벚꽃 축제(Cherry blossom Festival Washington DC)를 개최하고 있는데, 매년 1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다녀간다고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는 일본어 대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자는 <영어공용어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딸 소마 유키카는 덕혜옹주와 가쿠슈인의 동급생이었다. 그리고 유키카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유키오는 "조선에 대해서는 일본이 아주 몹쓸 짓을 했으니까 언젠가는 보상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일본 정치인 에다노 유키오나 야구선수 오자키 유키오는 그의 이름을 따온 것이라고 한다. 또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존경하는 정치인이라고 한다.
[1] 그는 고향인 가나가와현이 아닌 미에현에서 출마하였다. 참고로 이때 선거는 지금의 보통선거는 아니었다. '1년 이상 일본 본토에 거주하고 15엔 이상의 직접 국세를 내는 25세 이상의 남성'만이 선거권을 가졌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전체 인구의 1.13%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