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다노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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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枝野幸男. 일본의 정치인, 변호사. 1964년 5월 31일생. 현 입헌민주당 대표. 2017년 호헌을 기치로 민진당을 탈당해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에다농, 에닷치'''라는 별칭이 있다.
2. 활동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출신으로, 학창 시절엔 교내 웅변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을 했고, 합창부 활동도 해 NHK 음악 콩쿠르에 2년 연속 출전, 우승한 전력이 있다. 진로에 대해서는 와세다대학에 합격하면 기자를, 도호쿠대학에 합격하면 변호사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와세다 대학은 불합격하고 도호쿠대학을 합격해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이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도쿄의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하게 되었다.
1993년, 일본 신당이 총선 후보자를 공모하자 공모에 응해 연고지도 아니던 사이타마현 제5구에 일본신당 후보로 입후보해 신생당의 우에다 기요시에 이어 2위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총선 후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비자민, 비공산 연립정권을 수립하자 여기에 참여해 상공의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당내에서는 호소카와 1인 독재체제인 일본 신당의 당개혁을 추진하다가 당 사무국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1994년,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총리직을 사임한 후 하타 내각이 출범하게 되자 자민당 정권 복귀를 막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하타 쓰토무에게 국가수반 지명투표의 표를 던졌다. 그러나 하타 내각 하에서 일본 신당이 신당 사키가케와의 통일 원내교섭단체를 깨고 신생당과 새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자 여기에 반발해 일본 신당을 탈당했다. 함께 탈당한 측과 원내교섭단체 "민주의 바람"을 구성해 신당 사키가케와 함께 한다.
1995년, 자민-사민-신당 사키가케 연립정권인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이 출범하면서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해 정책조사회 부회장을 지냈다. 1996년에 국가수반 지명투표에 하시모토 류타로에게 표를 던질 것을 고민하다가 결국 하시모토에게 표를 던졌다고 한다.
에다노가 처음으로 국민적 주목을 받게된 것은 1995년으로 이 해에 일본 녹십자의 에이즈 혈우병 응고제 파문이 터지자 진상조사에 노력했고 이때 후생장관이던 간 나오토를 도와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섰다고 한다.
1996년 자민당 정권이 복귀하자 신당 사키가케와 간 나오토를 중심으로 한 사민당의 합동파와 통합하여 출범한 구 민주당으로 옮겨 사이타마현 제5구에 다시 출마했지만 자민당 현역의원에게 패배했고 비례대표 부활로 원내 진출은 할 수 있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입법활동(예를 들면 아동 포르노 금지법안)으로 의원 입법 붐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998년에는 현재의 일본 민주당 결성에 관여했다.
1999년 민주당 대표선거에서 마쓰자와 시게후미의 추천인에 이름을 올리는데 마쓰자와가 우정 민영화등을 언급한 것에서 정책적 코드가 맞다고 판단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해 9월에 열린 대표 선거에서는 간 나오토의 선대본부 사무국장을 맡았다. 이후 하토야마 대표 체제에서 정책 조사회장 대리가 되었고 쉐도우 캐비넷 내각에서 관방부장관에 내정되었다.
2000년대엔 민주당내 중도~중도우파 파벌 료운카이(凌雲会)의 멤버였다.[2]
2009년, 일본 민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해 내각 입성이 유력하다고 보였지만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장관직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오자와 이치로와의 불화설등이 돌았지만 확실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행정개혁 장관인 센고쿠 요시토에 의해 행정쇄신 회의의 사업구분팀 총괄역을 맡았고 이때 국가 예산 편성과정을 일반에 공개하여 하토야마 내각 지지율의 하락을 막는데 일정한 공헌을 했다고 한다.
이후 2010년 1월 센고쿠 행정개혁 장관이 국가전략 담당장관을 겸하면서 수상 보좌관에 내정되었지만 대신 센고쿠 장관의 업무를 나누는 차원에서 행정개혁 장관에 임명되었다. 하토아먀 유키오 총리가 물러나고 후임 민주당 총재선거에서는 마에하라 세이지와 함께 간 나오토를 지지했고 간 나오토 총리 체제에서 민주당의 간사장을 맡았지만 참의원선거에서 과반확보에 실패하자 간사장직에서 물러났고 후임 오카다 가츠야 간사장의 요청에 따라 간사장 대리로 취임했다.
2011년 간 나오토 내각의 부분 개각에 따라 관방장관에 임명되었다. 3월 초에는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장관이 외국인 정치헌금 문제로 사퇴하면서 외무장관 임시대리까지 맡았는데...
2.1. 관방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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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본 대지진 발생 전과 발생 후의 차이.
2011년 3월 11일, 일본을 충격에 빠뜨린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나고, 이 대지진의 여파로 일어난 거대 쓰나미로 인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나자 그야말로 격무를 했었다. 관방장관의 주 업무가 내각의 총괄 사무인 탓도 있으나 비상사태 시 총리를 대신한 기자회견과 브리핑도 담당하기에,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아예 3월 14일부터는 2시간마다 TV에 나와 브리핑을 했다. 당시 어떤 기사에 의하면 109시간이 넘도록 자지 못하고 후쿠시마 원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상황이라고. 이 때문인지 시간이 갈수록 초췌해져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 되려 일본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네티즌들이 에다노 장관의 건강을 우려할 정도이기도 했다. 트위터에서는 아예 "#edano_nero"(에다노_자라) 해쉬태그를 달고 제발 잠 좀 자라는 트윗이 많이 올라왔었고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가디언지에도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뉴로맨서로 유명한 SF작가 윌리엄 깁슨도 자신의 트위터에 "edano, sleep"이라고 적었을 정도다.
게다가 고향인 도치기현의 위치가 후쿠시마의 바로 아래라 최악의 사태가 고향이 피해를 볼 수도 있기에 과로로써 열의를 보였다는 말도 있다.[3]
그래도 언론에 하도 얼굴을 내비치는 덕에 인지도는 확실히 높아졌고, 에다노 장관에게 격려 메시지도 쇄도했다고 한다. 다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불신도 높아지고 에다노 본인도 일본 대중들에게 욕을 많이 먹게 된다. 2011년 9월 29일 일본 국회 참원예산위에선 아키라 마츠가 방사능 우유를 마실 것을 강요당하는 후쿠시마현 어린이들의 현실을 고발했는데, 이때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과 함께 웃고 있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혀 욕을 먹기도 했다. 2011년 12월에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주변 지역을 '죽음의 땅'이라고 다소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가 후쿠시마 주민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어쨌든 이후 경질당한 하치로 요시오의 후임으로 경제산업성 장관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자민당에 정권을 뺏기고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서 그 자린 모테기 도시미쓰로 교체된다.
2.2. 이후
제22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전 재무대신 아즈미 준과 함께 지휘를 맡았지만, 간 총리의 소비세 증세를 둘러싼 발언 의혹 등으로 민주당은 참패를 당했다. 중의원 해산 이후 2012년 12월 16일에 열린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이타마현 제5구에 출마했고, 지역구를 수성하는데 성공하였다.
2014년 12월 선거에서 또다시 연임에 성공했다. 2012년 총선과 2014년 총선 모두 민주당이 극도로 불리한 구도에서 치뤄진 선거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구 수성에 성공한걸 보면 지역구내 입지는 탄탄한듯 하다.
2017년 렌호의 대표 사임으로 인해 치뤄지는 민진당 대표 선거에서 대표 후보로 출마했다. 간 나오토, 오사카 세이지 등이 지지를 했으나, 결국 마에하라 세이지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2.3. 입헌민주당 대표
2017년 10월 총선거를 앞두고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가 독단으로 희망의 당과 합당을 추진하자 이에 반발하는 당내 리버럴 성향 의원들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한땐 에다노가 마에하라 파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아이러니. 그리고 희망의 당 고이케 유리코가 당내 리버럴 성향 의원들을 성향이 안맞는다며 대놓고 디스하면서 일명 '''배제''' 선언을 하자 이에 반발한 리버럴 성향 의원들을 대표하여 2017년 10월 2일 입헌민주당을 창당한다.'''에다노, 일어서다 (枝野、立つ)'''
입헌민주당을 만들기까지 그의 행보를 다룬 저서명#
사실 창당 초기만 해도 이 정당의 성공에 대해 언론은 반신반의했으나, 호헌파 리버럴 계열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면서 점점 주목을 받더니 '에다농'이라는 애칭까지 등장하는 등 호헌파 유권자들에게 상당한 응원을 받게 되었다.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정치적 위상이 올라갈 가능성도 엿보이는데, 실제 선거 유세 때 상당한 달변으로 군중을 몰고 다녔다. 10월 14일 도쿄에서 열린 본인의 선거 유세를 '도쿄대작전 1014'라고 정의했는데, 이 유세에서 상당한 인파를 긁어모았고, 일시적이나마 트위터 트렌드 1위를 차지하는 등 상당한 반향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실제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기존 15석이던 의석수를 총 55석으로 4배 가까이 확장하면서 사실상 이번 선거 최대의 수혜자 중 한명이 되었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 일본 야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정치인 중 한명이 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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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에다노가 젊은 여성 유권자들과 함께 찍어 화제가 된 사진, 우: 트위터에서 일반인이 만든 에다노 캐릭터.
이번 선거에서 특이한 점은 상기된 사진처럼 에다노 대표가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몰이를 했다는 점이다. 특히 일부 10대들이 에다노 대표를 '에다농', '에닷치'라고 애칭을 붙여서 부르기도 했는데, 예전 일본 정치판을 생각해보면 이런 친근한 별명은 SNS 사회가 만들어낸 현상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1월 20일 중의원 본회의에서 각 당 대표질문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에다노는 힘이 실린 연설로 상당한 호평을 받았다. 특히 개헌 문제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규정한 안보 법안은 평화헌법에 대한 위헌이며, 위헌 법률을 제정한 주제에 개헌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는 논지로 아베에게 맹공을 가했는데, 이 영상은 호헌파 유권자들에게 야당 당수의 패기 넘치는 공격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 야권 일각에서 요구하는 민진당과 희망의 당 + 입헌민주당 간의 통일회파 구성과 관련해서는 통일회파의 최우선적인 전제조건은 입헌민주당의 강령, 이념 및 정책에 찬성하는지 여부일 것인데,[4] 희망의 당과는 정체성이 달라 함께할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총선 전에는 희망의 당에서 리버럴계를 '''배제'''한다고 큰소리쳤는데, 총선이 끝난 이후엔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된 꼴이라 상당히 우스워진 모양새.
2018년 9월 30일에 창당 1주년 기념 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 아베를 이야기 하지만) 제1야당의 당수인 내가 포스트 아베다' 라는 연설로 주목을 끌었다. 즉, 에다노는 창당 이래로 꾸준히 집권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2018년 방미해선 버니 샌더스를 만나 외교 능력을 어필하기도 했다. 다만 그런 노력에도 지지율은 답보 상태. 에다노 개인의 인기는 괜찮은 편이지만 그게 입헌민주당의 지지율로는 눈에 띌 정도로 연결되고 있진 않다.
그래도 2019년 참의원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입헌민주당을 그럭저럭 이끌고 있으며, 고노 외무상을 교체해야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11월 29일, 전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사망하자 에다노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짧은 인사 정도로 밖에 이야기 드릴 기회가 없었으나, 다양한 장면에서 학식 ·통찰력이 넘치는 분이었기에 인상에 남아있었습니다. 정치적 견해에 차이가 있었지만, 본받을 점이 많은 선배였습니다. 명복을 기원합니다."라고 애도를 표했다.
2020년 신년 인사를 올렸다.
2020년 도쿄도지사 선거에 우쓰노미야 겐지 변호사가 출마하고, 일본 공산당, 사회민주당, 입헌민주당이 지지를 하자 현재 국민민주당에 있는 오자와 이치로 자유당 전 대표는 에다노 유키오 대표와 만나서 우쓰노미야를 지원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총선 전 야권 연대를 위해 다시 국민민주당 및 오카다 가쓰야, 노다 요시히코가 이끄는 무소속 그룹과의 합당이 결정되자 신당 대표 출마를 결심했다. 상대는 국민민주당의 이즈미 겐타 정조회장으로 양자간 1:1 대결로 압축되었다. 양당 규모 및 두 후보간 지명도 차이를 봤을 때 에다노 대표의 승리 가능성이 높지만 합류신당 대표로서의 통솔력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나 높은 득표율을 기록할지가 문제라고.
2020년 9월 10일 야권 연대 투표가 실시되었고, 투표 결과 신당의 당명은 '''입헌민주당''', 대표는 에다노 유키오 현 입헌민주당 대표로 결정되었다. 149표 중 107표를 득표하였고, 2위인 이즈미 겐타의 득표수는 42표에 그쳤다. 이로서 통합 신당 대표이자 야권 전체 대표의 자리를 공고히 하였다.# 통합 입헌민주당 창당 다음 날에 치뤄진 스가 요시히데 총리 지명 투표에서 중의원 134표, 참의원 78표를 얻었다.
하타 유이치로 사망 후 "대단한 충격을 받고있다. 아직 50세, 서거에 진심으로 애도의 뜻을 표하는 동시에 가족 여러분에게도 애도를 드린다"고 말했다.#
3. 한국 관련
한국 입장에선 그닥 달갑지만은 않은 발언을 한 인물이기도 한데, 2010년 3월에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건 역사의 필연이었다"라는 발언을 했다가 저의[5] 가 뭐냐는 질문에, 일본도 개혁이 늦으면 다른 나라의 식민지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하는 쪽이 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발언을 한 것을 솔직하게 사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 말 자체는 한국인이 "조선 시대에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해 결국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개혁을 미루지 말자."는 식으로 말했다면 별로 큰 논란이 될 말은 아니었겠지만, 식민지배의 당사자인 일본 측에서 한국을 언급하며 한 얘기라 적절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2월에는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말을 해 한국에서 어그로를 끌기도 했는데, 반대로 2011년 2월 22일엔 "독도를 한국이 점유하는 것을 불법점유라고 하는 것은 국익에 적합지 않다."고 하여 일본 우익들한테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2011년 3월 10일[6] 에는 당시 일본 민주당 의원이었던 도이 류이치 의원이 한일 관계 개선을 바란다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대하는 문서에 서명하고 오자, '그의 발언은 유감이다. 민주당의 입장과 다르다. (민주)당에서는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을 중심으로 적절히 대응하겠다. 간 나오토 수상이 간사장에게 그렇게 지시하고 있지 않을까?'란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분명 독도를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이긴 하지만, 사실 일본 정치인 중에 독도를 한국땅이라고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주장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에다노가 일본 정치인 중에서 특별히 혐한 성향이 짙은 정치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저 보통 일본 정치인 수준에서 독도는 일본땅 드립을 친거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사실 저 정도의 발언은 관방장관으로서 크게 무리한 발언은 아니다.
또 중국과 관련해서 '(중국이) 나쁜 이웃이라도 이웃은 이웃이므로 교류를 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을 미국이나 한국처럼 신뢰 관계를 갖고 일을 진행하기를 기대하는 건 이상하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으니 딱히 혐한은 아닌 듯 하다. 여담으로 에다노는 중국을 법치주의가 통하지 않는 나라라고 까기도 했다.#
2017년 일본 중의원 선거 이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 일본이 역지사지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8년에는 ‘관동대지진 한국인 희생자 추모식’에 같은 혁신 진영인 일본 공산당 시이 가즈오 의원과 함께 참석했다.
2018년 12월 발생한 한일 레이더 갈등에 대해서도 한국을 비판하지 않는 등 최대한 입장을 내지 않고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는데, 입헌민주당 창당 이후 이런 한국을 배려하는 행보에 대해 트위터 여론에 신경을 많이 쓰는 입헌민주당 관계자들의 스탠스가 반영되지 않았나 하는 반응도 있다. 트위터상의 목소리 큰 리버럴계 인사들이 친한 성향인 경우가 제법 많기 때문. 사실 애초부터 일본 정치판이 혁신 진영이 친한, 친중, 친북이라고 우익들에게 색깔론을 당하는 경향이 있다.
2019년 하반기에 시행된 일본 정부의 대한국 수출규제 및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에 대하여 "(아베 신조 총리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으며 강제노역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라고 간주해도 별 수 없다." 라며 아베 신조 총리를 비판하였다.
2019년 8월, 한국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선 "한국 정부의 결정은 명백하게 지나치다"라고 하면서도 "한국 얼굴에 먹칠을 했다"라고 하면서 고노 다로 외무상에게 사퇴하라고 비판했다.# 다만 한국 국회의원들의 독도 방문에 대해서는 "다케시마는 역사적으로, 법적으로도 일본의 영토가 분명하다"라고 말하며 비난했다.
위의 사례를 종합해볼때, 특별히 에다노 유키오가 친한파라거나 역사를 반성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기보단 '''일본 대중의 평균적인 대 한국 역사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정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만 입헌민주당의 당론으로는 친한적 메세지가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에다노 대표의 보수적인 대외관과 달리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거치며 당내에 진보적인 색채를 띄는 의원의 비중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기타
- 2010년대 초반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다음 일본 국민을 상대로 차기 총리로 누가 적합하다고 보느냐는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감 1위에 선정된 적이 있었다. 물론 20%가 안되는 수치이긴 했지만.
- 상당한 달변가로, 2015년 9월 18일 106분에 달하는 본회의 연설로 당일 표결 예정이던 안보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한 적도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난 날 안보법안을 추진하는 의도가 불순하다"라고 비꼬았을 정도.
- 아베 신조와는 정치입문시기, 의원 선수(중의원 9선), 의원 대수(40~48대, 2010년대 기준)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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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노래를 노래방에서 즐겨부르고 굿즈도 직접 사모으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소식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돌 덕후이다. 일과 후 코인노래방에 가서 이 노래를 혼자 부른다거나, 민주당 시절 AKB48의 이 노래의 가사가 민주당의 상황과 같다고 말한다거나 이 아이돌 그룹의 노래 가사를 연설에 인용하는 등의 기행(?)으로 아이돌 덕후로써의 명성이 자자한 편이다. 사실 아이돌 오타쿠로써의 역사는 오래되었는데 에다노가 10대 후반 무렵 야마구치 모모에에 빠졌던 것이 최초라고.. 2010년대에는 AKB48,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46 등 아키모토 야스시가 프로듀싱한 아이돌 그룹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AKB48의 전 멤버인 타케우치 미유의 팬이다. "타케우치씨 같은 높은 가창력을 가지는 사람이 지지 받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라고까지 말했던 그는 2018년 미유의 졸업감사 트윗에도 팬 인증을 하며 아티스트로서 더욱 도약하기를 바란다는 답을 달았다. 트윗.
- '양성'과 '음성'을 구분하지 못해 조롱 받았다. 2020년 2월 18일 열린 중의원 예산위원회(청문회)에서 가토 가쓰노부 후생노동대신에게 '3번째 사망자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었냐'는 질문을 하고, 이에 가쓰노부 대신이 '양성이었다'고 답하자 '양성이다란 건 신종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았다는 거군요'(...)라고 반응한 것. 정부의 정보 공개하지 않는 모습을 비난하며 후생성 대신에게 양성이 아닌 감염이란 말을 이끌어 내는 와중에 잘못 나온 말로, 가쓰노부가 후에 설명해주긴 했다. 대중들은 성인이 양성과 음성이란 단어를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건데 일반인도 아닌 제1야당 대표라는 사람이 저걸 모르냐는 반응.
- 한 언론사에서 정치학자, 평론가, 저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총리를 해서는 안 되는 정치가’라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자민당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대신과 더불어 공동 2위를 차지했다.#[11] 한 정치 저널리스트는 “야당을 이끌 능력이 없어보이는데, 정권 운영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평가했다.
6.1. 보컬로이드화
2010년대 초반 도호쿠 대지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문에 시도때도 없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TV에 자주 나온 고로 음성 소스가 많이 모여, 니코니코 동화의 잉여들이 UTAU를 이용해 보컬로이드화 해버리기에 이르렀다. 평소에는 인기도 없는 정치 카데고리의 동영상이 상위권에 올라가기도 하는 등 반짝 인기를 끌었다.
보컬로이드에 붙은 이름은 에다노 네로(枝野ネロ)[12] 이며 별칭으로 '원자로이드(原子炉イド)'라고도 불린다. 노래를 들으면 "즉시 복근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의 웃음수치에 피폭되는 모양.[13]
물론 통제된 환경에서 녹음된 라이브러리는 아닌지라 하츠네 미쿠나 카가미네 린 같은 다른 보컬로이드만큼의 곡 완성도는 기대하기 힘들다. 아직 오리지널 곡도 나오지 않았고.
에다노 관방장관에게 "노심융해"를 부르게 해 보았다유튜브 링크
에다노 관방장관이 커버곡을 불러주었다 「멜트」
에다노 관방장관에게 "마트료시카"를 부르게 해 보았다
에다노 관방장관에게 "only my railgun"을 부르게 해 보았다
그리고 진짜로 니코니코 초회의에 참석하여 일본 아이돌과 춤추고 노래까지 불렀다. 영상. 여담이지만, 중학생 시절 합창부 활동을 했고 NHK 주최의 전국합창콩쿠르(1979년경)에 나가 우승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도 이런 활동 덕분인지 에다노 유키오는 일본 젊은 층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라고 한다. 일본 라인 생방송을 한 적도 있다.
7. 둘러보기
[1] 석패율 비례대표.[2] 하지만 파벌의 리더였던 마에하라 세이지가 2017년 민진당 대표가 된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고이케 유리코의 희망의 당에 민진당을 거의 갖다바치는 모양새를 취했다. 그것을 통해 기고만장해진 고이케가 개헌 지지, 외국인 참정권 반대 같은 우익적 공약에 대한 설문을 민진당 의원들에게 받고 찬성한 사람만 선별 입당시키겠다고 일명 '''배제''' 드립을 쳤다. 이에 반발한 에다노 유키오가 입헌민주당을 창당해 이들간의 사이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 여담으로 이런 여파인지 그는 자신의 이념 정체성을 평화헌법을 수호하고 천황제(입헌군주제)를 찬성하는 보수(리버럴)라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현실적으론 일본에서 중도 또는 진보 인사라고 평가받기도 한다.[3] 여담으로 이 과로로 인해 성씨에서 파생된 ''''에다루''''(枝る, えだる)란 신조어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품사는 동사이며 뜻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계에 이르도록 잠을 자지 않는다. 이고, 나머지 하나는 상사를 잘못 만나 필요 이상으로 개고생하다.[4] 민진당이 애매모호한 슬로건으로 선거에서도 패배하고 많은 비판을 받아온 선례가 있어 입헌민주당에서는 총선 이후 지속적으로 야당으로서의 "명확성"을 최우선적인 기치로 내세워왔었다.[5] 底意(저의).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에 품은 생각.[6] 이 다음날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했다.[7] 민정당, 사회시민연합, 신당우애와 신설 합당[8] 국민민주당과 신설 합당[9]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0] 일본에서는 '헌정의 신' 또는 '의회 정치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유명한 리버럴계 정치가로, 1953년까지 60년 넘게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며 군국주의자들을 비판했다. 여담으로 자민당 고이즈미 전 총리가 존경했던 정치인이기도 하다. [11] 참고로 총리를 해서는 안 되는 정치가 1위를 차지한 인물은 혐한 성향으로 유명한 이나다 도모미 전 방위대신이며, 가장 적은표를 얻은 사람은 다름 아닌 고이즈미 신지로(...). [12] 해석하면 '에다노 자라'가 된다. 일본어로 '자다'를 뜻하는 寝る(ねる, 네루)의 명령형은 寝ろ(ねろ, 네로)이다. 이를 가타카나 표기인 ネロ로 옮기고 캐릭터 이름으로 삼았다.[13] 그가 회견에 나와 입버릇처럼 말하는 "즉시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의 방사선량은 아니다."를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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