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니 제도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
1. 요약
2. 고대 유적
3. 1차 대전의 유산
4. 2차 대전의 유산
5. 대중 매체


1. 요약


영국 스코틀랜드 그레이트 브리튼 섬 북쪽에 있는 군도로 면적은 990km2, 인구는 21,349명(2011년 기준), 인구 밀도는 20명/km2이다. 7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장 큰 섬은 메인랜드이다. 영국의 행정 구역 중에서 16번째로 큰 면적이며, 오크니 제도의 중심 도시는 메인랜드에 있는 커크월(Kirkwall)이다.
중세 후기까지 여기는 로우랜드의 게르만계 왕실과 하이랜드-서부 제도의 게일어권 클랜사회가 주류였던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노르웨이 왕국의 땅이었던걸 왕실 혼인 지참금으로 스코틀랜드 왕국이 먹고 나른 동네라 문화적으론 스코틀랜드 본토와 구별된다. 언어도 사멸되기 전까진 노른어라는 독자적인 북게르만, 스칸디나비아 언어들에 더 가까운 언어를 썼고, 정서적으로도 크게 스코틀랜드 인문지리를 양분하는 게일어권 하이랜드와 스코트어 로우랜드와 또다른 정체성을 가지고있다.

2. 고대 유적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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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오크니 제도 신석기 유적
영어
Heart of Neolithic Orkney
프랑스어
Coeur néolithique des Orcades
국가·위치
영국 스코틀랜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9년[1]
등재기준
(i)[2], (ii)[3], (iii)[4], (iv)[5]
지정번호
514
오크니 섬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태고적에 만들어진 유적이 몇 개 있다. 우선 해변가 정착지인 스카라 브레(Skara Brae)와 스톤 오브 스테니스(Stones of Stenness)라는 환상열석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5,000년 전의 선사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카라 브레 유적은 영국인들이 정착한 후에도 존재 자체를 몰랐지만, 1800년대 중반에 폭풍으로 인한 강한 파도가 해변을 덮쳐 바다모래를 한꺼번에 휩쓸고 가버려 발견되었다. 원시인들이 살던 유적지 위에 해풍이 실어 온 모래가 차곡차곡 쌓여서 묻혀버린 유적이 다시 폭풍과 파도 때문에 드러난 것인데 오크니 특유의 거친 기후가 실감나는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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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차 대전의 유산


또한 이 섬에는 1차 대전 발발 100주년을 기념해 런던탑 성벽과 바닥에 설치되어 4개월간 400만 명이 관람한 바 있는 888,246송이의 붉은 장미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전시되고 있다. 비록 런던 전시의 1/10 규모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창문에서 흘러내리는 듯한 피처럼 붉은 장미는 눈물 흘리는 창문(Weeping Window)이라고 불리는데, 마치 피를 흘리는 창문처럼 보인다. 커크월을 모항으로 하던 영국 해군빌헬름스하펜을 모항으로 둔 독일 해군은 1916년에 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 근해에서 전함끼리 포격전을 주고 받는 유틀란트 해전으로 자웅을 겨루었다. 이 역사적인 해전에서 전사한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 장병 8,648명을 기리기 위해 같은 숫자의 장미가 자리를 옮겨와서 전시되고 있다.

4. 2차 대전의 유산


2차 대전이탈리아에서 생포된 이탈리아군 포로들은 섬과 섬 사이에 강한 해류가 흐르는 스캐퍼 플로우를 막기 위한 방파제 건설에 동원되었다. 워낙 해류가 거칠어 침투가 불가능할 것이라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잠입한 독일 해군의 귄터 프린 함장이 지휘하는 유보트 U-47에 의해 영국 해군의 전함 로열 오크가 격침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자, 같은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방파제 건설을 하게 되는데 550명의 이탈리아 포로들이 1942년부터 동원되었다.
이탈리아 포로들은 미사를 드리기 위해 1943년부터 공사 현장에 버려진 자재를 모아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는데, 누가 시킨 일이 아니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나고도 건축을 책임졌던 도미니코 치오체티는 남아서 마무리를 맺었다. 결국 포로수용소도 폐쇄가 되고 이탈리아인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자 이탈리안 예배당도 문을 닫았고, 아무도 돌보지 않자 10여년 만에 오크니 특유의 거친 비바람에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이를 보다 아깝게 여긴 오크니 주민들이 1958년에 보존위원회를 만들어 보수하면서 관리를 시작했다. 1960년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치오체티는 다시 돌아와서 보수를 도왔다. 이후 이 예배당은 오크니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고 연간 10만명이 다녀 가는 섬의 명소가 되었다. 1964년에 치오체티는 다시 부인과 같이 돌아와서 예배당을 둘러보았다.
1992년에는 그 당시 예배당을 지었던 이탈리아 포로들이 자신들이 이 섬에 처음 온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문했다. 이때 치오체티는 노쇠해서 오지 못하고 아들과 부인만 대신 왔다. 2014년에는 전쟁 당시 만들어진 예수 수난 14처 목각상이 도난 당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결국 찾지 못하고 아들이 원래와 똑같은 작품을 다시 만들어서 기증해 안치되었다.

5. 대중 매체


심슨 가족의 등장인물 학교 관리인 윌리가 이곳의 도시 커크웰 출신이다.

[1] 2015년 수정[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