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프린
'''귄터 프린 (Günther Prien : 1908년 1월 16일~1941년 5월 7일)'''
독일 해군에 근무한 유보트 함장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특히 영국)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전과를 올리며 잠수함의 가능성을 알려주어 유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 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귄터 프린은 독일 제국 시대인 1908년 1월 16일에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의 오스터펠트(Osterfeld)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귄터 소년은 15세가 되던 1923년 여름에 독일 상선단인 한델스플로테(Handelsflotte)에 견습 선원으로 참가해 함부르크의 피켄베르더(Finkenwerder)에 있는 선원 양성소에서 3개월 교육 과정을 밟은 후 10,532톤급 수송선 SS 함부르크(SS Hamburg)호에 회계과 선원으로 타게 된다. 함부르크 항과 뉴욕 항을 오가는 이 수송선에 타게 된 소년 프린은 선장이 될 꿈에 부풀었지만, 1925년 10월에 그가 탄 배가 조난을 당해 더블린 근처에서 좌초되었을 때, 프린은 영국 당국에 의해 구조되어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선원 실무를 열심히 공부하고 익힌 프린은 1932년 1월에 선장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무렵 온 세계를 휩쓸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선박, 해운 업계도 타격을 받아 선장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고향이나 진배없던 라이프치히로 돌아간 프린은 그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필사적으로 취직 자리를 알아보던 그에게 마침 제국 노동봉사단의 전신인 FAD(Freiwilliger Arbeitsdienst)에 들어오라는 징용장이 떨어졌다. 선원 일 대신 갑자기 삽을 손에 쥐게 된 그였지만, 이곳에서 그는 군대의 제식 훈련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군대의 분위기를 맛보게 된다. 1932년 3월에 프린은 그 무렵 불경기에 지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그가 나치에 합류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일 제1야당이 된 나치는 여러 분야에서 실무 경력이 있는 인재를 뽑고 있었고, 마침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탄 프린이 당직자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은 정치색이 짙은 나치 당원은 입대와 복무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상선단에 선원이 너무 부족해지자 이를 보충하는 형식으로 프린은 독일 해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그는 일개 수병으로 입대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장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프린은 이에 항해 훈련을 지원하여 당시 최신예 함정인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KMS 쾨니히스베르크(KMS Königsberg)에 배치된 후 원양 항해 과정을 마치고 다시 킬 군항에 있는 해군사관학교(Marineschule Mürwik)에 들어가 연안잠수함인 2형 유보트 U-3을 타면서 잠수함 훈련 과정을 밟았고, 브레멘에서 U-26의 제1당직사관으로 임명되었다. 프린은 이후 순조롭게 승진해 25살이 되던 1933년에 늦깎이로 해군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935년에는 상급사관 후보생이 되어 소위로 진급했다가 2년 후인 1937년에 중위로 승진했다. 1939년 2월 1일에 그는 독일 해군이 새로 배치한 신형 잠수함인 7형 유보트 U-47의 함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위로 승진했다. 또한 이 해는 그가 결혼한 해이기도 했다. 귄터 프린은 잉게보르크 프린(Ingeborg Prien)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낳았다.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그가 지휘하는 U-47은 제1차 초계 임무에 나갔다. 출동 후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5일에 2400톤급 영국 상선 보스니아호를 격침시켰는데, 이것은 프린 대위가 세운 첫 무공이자 전쟁을 통틀어 독일 해군이 두 번째로 격침시킨 배였다. 다음 날인 9월 6일에는 4,000톤급 상선 리오 클래로(Rio Claro)를 가라앉혔고, 7일에는 1,800톤급 상선 가타본(Gartavon)을 차례로 수장시킨 프린과 부하들은 이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게 된다. 9월 15일에 1차 초계를 마치고 킬 항구에 돌아오는 U-47의 전망탑에는 무려 8,270톤에 해당하는 페넌트가 걸려 있었다.
10월 1일에는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카를 되니츠 제독이 새로 부임해왔다. 그는 취임식 첫날 부하들에게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며칠 후, 귄터 프린 대위는 되니츠 제독에게 소환을 받고 잠수함대 사령부로 갔다. 그 자리에서 프린 함장은 "아주 특별하고 막중한 극비 임무"를 명령받고 항구로 돌아가 부하들에게 출항 준비를 재촉시켰다.
그것은 과거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의 무대이자 현재 영국해군 기지인 스캐퍼 플로를 기습하라는 것이었다.
10월 14일, 프린 함장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빠른데다 적군의 감시가 엄중했던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 스캐퍼 플로우로 침투했다. 마침 영국의 본국함대 대부분은 먼 바다로 나가있었는데 프린은 정박중이던 영국 해군의 배수량 32,000톤급 리벤지급 전함 로얄 오크(HMS Royal Oak)를 격침시킨 후 무사히 돌아와 일약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면서 저명인사가 되었다.
이 공적으로 독일 해군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게 된 프린은 '''스캐퍼 플로우의 황소(Der Stier von Scapa Flow)'''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지휘하는 U-47의 함교에는 콧김을 내뿜는 황소의 엠블렘이 그려졌는데 이것은 결국 제7잠수함대의 상징이 되었다. 프린 대위는 1940년 가을에는 자신의 경험을 되짚은 "스캐퍼 플로우로 가는 길(Mein Weg Nach Scapa Flow)"을 써냈는데, 이 회고록으로도 적지 않은 인세 수입을 받을 수 있었다.
독일 해군은 당시 프린이 발사한 7발의 최신예 G7e 전지 어뢰 중 5발이 불발이었다는 것은 비밀에 붙였는데 그 무렵 초기 결함에 시달리고 있던 어뢰와 허술했던 잠수함 관제 시스템을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거듭된 수송선단의 초계 및 기습에 대한 무공으로 1940년 말에 프린은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
소령으로 승진한 프린은 1941년 5월 7일, U-47을 타고 열 번째 초계 임무를 나가 연합군의 OB-293 수송선단을 공격하던 중 소식이 두절되었다.
U-47은 영국 해군의 구축함 울버린(HMS Wolverine)과 베리티(HMS Verity)가 5시간 이상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공격을 가한 끝에 아일랜드 서쪽 해역에서 격침당했다고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영국 구축함은 U 보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투일지에 남겼지만, 지금까지 U-47의 선체나 부유물 및 45명의 승조원에 대한 공식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기뢰에 부딛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기관이 고장나 침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발사한 음향 유도 어뢰가 되돌아와 신무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설 등, 온갖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어느 것도 확인된 증거는 없다.
프린이 해상에서 근무한 기간은 2년을 조금 넘긴 시간이지만 그의 격침 기록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활약을 펼친 U 보트 에이스들 가운데서 최상위권에 드는 높은 격침 기록을 남겼다. 총 238일간 바닷 속을 머물면서 적선 30척을 격파한 그는 합계 193,808톤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 자신도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 개요
독일 해군에 근무한 유보트 함장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특히 영국)을 상대로 무시무시한 전과를 올리며 잠수함의 가능성을 알려주어 유보트를 좋아하는 사람들 에게는 전설적인 인물이다.
2. 유년 시절
귄터 프린은 독일 제국 시대인 1908년 1월 16일에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의 오스터펠트(Osterfeld)에서 태어나 라이프치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귄터 소년은 15세가 되던 1923년 여름에 독일 상선단인 한델스플로테(Handelsflotte)에 견습 선원으로 참가해 함부르크의 피켄베르더(Finkenwerder)에 있는 선원 양성소에서 3개월 교육 과정을 밟은 후 10,532톤급 수송선 SS 함부르크(SS Hamburg)호에 회계과 선원으로 타게 된다. 함부르크 항과 뉴욕 항을 오가는 이 수송선에 타게 된 소년 프린은 선장이 될 꿈에 부풀었지만, 1925년 10월에 그가 탄 배가 조난을 당해 더블린 근처에서 좌초되었을 때, 프린은 영국 당국에 의해 구조되어 함부르크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선원 실무를 열심히 공부하고 익힌 프린은 1932년 1월에 선장 시험에 합격했지만 그 무렵 온 세계를 휩쓸던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선박, 해운 업계도 타격을 받아 선장 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고향이나 진배없던 라이프치히로 돌아간 프린은 그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고, 결국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3. 나치당에 합류
필사적으로 취직 자리를 알아보던 그에게 마침 제국 노동봉사단의 전신인 FAD(Freiwilliger Arbeitsdienst)에 들어오라는 징용장이 떨어졌다. 선원 일 대신 갑자기 삽을 손에 쥐게 된 그였지만, 이곳에서 그는 군대의 제식 훈련 교육을 받으면서 처음 군대의 분위기를 맛보게 된다. 1932년 3월에 프린은 그 무렵 불경기에 지친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입당했다. 그가 나치에 합류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독일 제1야당이 된 나치는 여러 분야에서 실무 경력이 있는 인재를 뽑고 있었고, 마침 거기에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탄 프린이 당직자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은 정치색이 짙은 나치 당원은 입대와 복무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상선단에 선원이 너무 부족해지자 이를 보충하는 형식으로 프린은 독일 해군에 입대할 수 있었다. 그는 일개 수병으로 입대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장교가 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4. 늦깎이 사관후보생
프린은 이에 항해 훈련을 지원하여 당시 최신예 함정인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KMS 쾨니히스베르크(KMS Königsberg)에 배치된 후 원양 항해 과정을 마치고 다시 킬 군항에 있는 해군사관학교(Marineschule Mürwik)에 들어가 연안잠수함인 2형 유보트 U-3을 타면서 잠수함 훈련 과정을 밟았고, 브레멘에서 U-26의 제1당직사관으로 임명되었다. 프린은 이후 순조롭게 승진해 25살이 되던 1933년에 늦깎이로 해군사관 후보생이 되었다. 1935년에는 상급사관 후보생이 되어 소위로 진급했다가 2년 후인 1937년에 중위로 승진했다. 1939년 2월 1일에 그는 독일 해군이 새로 배치한 신형 잠수함인 7형 유보트 U-47의 함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위로 승진했다. 또한 이 해는 그가 결혼한 해이기도 했다. 귄터 프린은 잉게보르크 프린(Ingeborg Prien)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낳았다.
5. 2차 대전 참전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부터 그가 지휘하는 U-47은 제1차 초계 임무에 나갔다. 출동 후 며칠 지나지 않은 9월 5일에 2400톤급 영국 상선 보스니아호를 격침시켰는데, 이것은 프린 대위가 세운 첫 무공이자 전쟁을 통틀어 독일 해군이 두 번째로 격침시킨 배였다. 다음 날인 9월 6일에는 4,000톤급 상선 리오 클래로(Rio Claro)를 가라앉혔고, 7일에는 1,800톤급 상선 가타본(Gartavon)을 차례로 수장시킨 프린과 부하들은 이제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지게 된다. 9월 15일에 1차 초계를 마치고 킬 항구에 돌아오는 U-47의 전망탑에는 무려 8,270톤에 해당하는 페넌트가 걸려 있었다.
10월 1일에는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카를 되니츠 제독이 새로 부임해왔다. 그는 취임식 첫날 부하들에게 연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항간에 귀관들 사이에 영국 해군이 우리 U 보트의 위협을 제거할 신병기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풍문은 일선의 함장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뜬소문은 절대 사실이 아니다. 적들은 잠항 중인 우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항공기가 잠수함을 잡는다는 이야기는 까마귀가 고래를 잡는다는 헛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나는 총통 각하께 잠수함대의 대폭 충원을 약속받았다[1]
. 100척의 잠수함과 용맹무쌍한 귀관들이 있으면 우리의 힘만으로 영국을 무릎 꿇릴 수 있다!"'''
6. 영국 해군의 모항 기습
며칠 후, 귄터 프린 대위는 되니츠 제독에게 소환을 받고 잠수함대 사령부로 갔다. 그 자리에서 프린 함장은 "아주 특별하고 막중한 극비 임무"를 명령받고 항구로 돌아가 부하들에게 출항 준비를 재촉시켰다.
그것은 과거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의 무대이자 현재 영국해군 기지인 스캐퍼 플로를 기습하라는 것이었다.
10월 14일, 프린 함장은 수심이 얕고 물살이 빠른데다 적군의 감시가 엄중했던 영국 해군의 주요 기지 스캐퍼 플로우로 침투했다. 마침 영국의 본국함대 대부분은 먼 바다로 나가있었는데 프린은 정박중이던 영국 해군의 배수량 32,000톤급 리벤지급 전함 로얄 오크(HMS Royal Oak)를 격침시킨 후 무사히 돌아와 일약 독일 국민의 영웅이 되면서 저명인사가 되었다.
이 공적으로 독일 해군 군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게 된 프린은 '''스캐퍼 플로우의 황소(Der Stier von Scapa Flow)'''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지휘하는 U-47의 함교에는 콧김을 내뿜는 황소의 엠블렘이 그려졌는데 이것은 결국 제7잠수함대의 상징이 되었다. 프린 대위는 1940년 가을에는 자신의 경험을 되짚은 "스캐퍼 플로우로 가는 길(Mein Weg Nach Scapa Flow)"을 써냈는데, 이 회고록으로도 적지 않은 인세 수입을 받을 수 있었다.
독일 해군은 당시 프린이 발사한 7발의 최신예 G7e 전지 어뢰 중 5발이 불발이었다는 것은 비밀에 붙였는데 그 무렵 초기 결함에 시달리고 있던 어뢰와 허술했던 잠수함 관제 시스템을 은폐하기 위함이었다. 그 후 거듭된 수송선단의 초계 및 기습에 대한 무공으로 1940년 말에 프린은 백엽검 기사철십자훈장을 받았다.
소령으로 승진한 프린은 1941년 5월 7일, U-47을 타고 열 번째 초계 임무를 나가 연합군의 OB-293 수송선단을 공격하던 중 소식이 두절되었다.
'''"프린은 어디에 있나? - 윈스턴 처칠 수상"'''
7. 알려지지 않은 최후
U-47은 영국 해군의 구축함 울버린(HMS Wolverine)과 베리티(HMS Verity)가 5시간 이상 끈질기게 추적하면서 공격을 가한 끝에 아일랜드 서쪽 해역에서 격침당했다고 추측된다. 실제로 당시 영국 구축함은 U 보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전투일지에 남겼지만, 지금까지 U-47의 선체나 부유물 및 45명의 승조원에 대한 공식 기록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기뢰에 부딛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기관이 고장나 침몰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고, 발사한 음향 유도 어뢰가 되돌아와 신무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설 등, 온갖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하지만 어느 것도 확인된 증거는 없다.
프린이 해상에서 근무한 기간은 2년을 조금 넘긴 시간이지만 그의 격침 기록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활약을 펼친 U 보트 에이스들 가운데서 최상위권에 드는 높은 격침 기록을 남겼다. 총 238일간 바닷 속을 머물면서 적선 30척을 격파한 그는 합계 193,808톤의 선박을 침몰시키는 엄청난 무공을 세우고 자신도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1] 약속 받긴 했긴 했는데 한번에 많이 만들어 준다는 하지 않았으니,매우매우 천천히 만들어줬고 결국 늦을때로 늦어버려 이제 좀 해볼까하니 나치독일은 패망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바다는 대잠 무기들로 가득했다